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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한 바탕 경을 치르는 사이, 어느 덧 동녘이 환히 밝아오고 있었다. 조영이 사방을 휘둘러보니, 이쪽에서 난리가 났는데도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여관 안에서는 이 일을 까마득히 모르는 것 같았다.
조영은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이 묵고 있는 집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도, 아무런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다시 처음의 봉창문 밖으로 돌아와 보니, 쓰러져 있던 사나이들은 그 사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가 감쪽같이 치웠음이 분명했다.
조영은 한바탕 긴 휘파람을 불어 호연지기를 날렸다.
“휘이이이이익!”
그의 휘파람 소리가 여명 중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탉의 울음소리와 뒤섞여 허공을 갈랐으나 장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고요했다.
조영은 여관의 사환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알렸다. 사환들은 깜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사환들은 그들의 방을 말끔히 정리하며 이루하에게 말했다.
“아가씨, 옷을 벗어주시면 저희들이 깨끗이 빨아 다리미질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저희들에게 고려 여성복이 있습니다. 그걸 임시로 빌려드릴 터이니, 옷을 갈아입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니에요.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루하 일행이 난리를 치르는 동안 여관이 쥐죽은 듯 고요했으므로, 이루하는 여관 측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옷을 내어주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어, 그녀는 한사코 그들의 제의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 복마전 같은 도산검림刀山劍林을 어서 속히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세 사람은 성문이 열릴 시각에 맞춰 즉시 고려여관을 나섰다.
“아가씨, 옷에 피가 묻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영이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아요. 우리가 머무는 숙소로 속히 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돼요.”
“고려여관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를 잡아갔던 그 일당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소.”
조영이 말머리를 돌렸다. 두 여인도 머리를 끄덕였다.
“이젠 낙양성 밖으로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이루하의 말이다.
세 사람은 두 필의 말을 타고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낙양성 남쪽의 장하문長夏門은 이미 열려 있었다. 문 밖에 도착하자 뜻 밖에도 황궁의 수비대인 우림군羽林軍이 그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림군에는 특별히 여러 이민족 장수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훗날 한 때 태평공주가 이 우림군을 장악해 당 현종과 싸우기도 한다. 우림군이 거기에 출동했다는 것은, 조영이 보기에도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조영과 두 여인이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우림군 군사들이 제지했다.
“멈추시오!”
그들이 발길을 멈추자, 장수인 듯한 자가 다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마하시오!”
조영이 그를 보니, 낯이 매우 익은 사람이었다.
“아, 장군은 지난 번 비무대회에서 저와 무예를 겨루었던 이기원 장군이 아니십니까?”
조영이 말에서 내리며 반갑게 물었다.
“그렇소.”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웬일이오?”
“윗분께서 그대를 데려오라 했소이다.”
그 때 성문을 향해 성 안쪽에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조영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뜻밖에도 태평공주가 우림군 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그녀는 예의 그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형형한 눈빛으로 조영과 이루하, 여미아를 쏘아보더니 말에서 내려와 조영에게 다가갔다. 조영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공주마마께 문안드립니다.”
태평공주 이영월은 조영과 두 여인의 행색을 살펴보다가 노한 눈빛으로 느닷없이 조영의 뺨을 갈겼다.
조영은 깜짝 놀라 미처 방비하지도 못하고 불시에 뺨을 얻어맞고 말았다. 지난번에는 태평공주 이영월 앞에서 이루하에게 보기 좋게 볼을 한 대 가격 당했는데, 이번에는 이루하 앞에서 이영월에게 뺨을 맞으니, 기분이 매우 얼떨떨하고 한편으로 몹시 불쾌했다.
조영은 눈을 치켜뜨고 이영월에게 당당히 물었다.
“공주마마, 무슨 일이온지요? 자초지종을 말씀해주소서. 제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응분의 형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흥! 나를 따돌리고, 두 여자하고 잘들 놀고 다녔구먼.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네? 아시다시피 간밤에 공주마마와 헤어진 후 죽을 고생을 하며 간신히 낙양성을 찾아왔습니다.”
“글쎄, 낙양성을 찾아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느냐는 거예요!”
그녀가 역정을 냈다.
“저, 음, 성문이 열리기까지 고려여관이라는 곳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이 두 여인하고 한 방에서요?”
조영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영월이 이루하의 옷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흥! 옷에 묻은 그 피는?”
태평공주 이영월은, 듣기에 따라 매우 거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우림군 장수와 병사들이 듣는 마당에서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이루하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이루하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이영월을 쏘아보고 있다.
조영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들을 지금 당장 체포해 형옥을 맡은 내준신 대인에게로 데리고 가세요!”
이영월이 우림군 장수에게 언성을 높여 말했다.
“공주마마, 저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밝히 일러 주소서!”
조영이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항변했다.
“그대들은 새벽에 고려여관에서 살인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죄악을 감추려하는 건가요?”
이영월이 서슬 퍼런 얼굴에 비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이 여자가 과연 어제 밤, 구슬프고 애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다니던 그녀가 맞단 말인가?’
조영은 속으로 몸서리를 치며 대꾸했다.
“청천백일 하에 살인이라뇨? 우릴 어떤 사람으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고려여관에서 괴한들이 우리를 죽이려 방안에 독연毒煙을 흘리고, 맹독을 지닌 독사를 세 마리나 들여보냈을 뿐만 아니라, 또 두건을 쓴 여러 괴한들이 칼로 저희를 해치려 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구한 변명은 필요 없어요.”
이영월이 조영의 말을 끊었다.
“형부에 가서 조사를 받으면 명명백백하게 진상이 밝혀질 거예요.”
태평공주는 우림군 장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이 사람들을 체포해 가서, 내준신에게 넘기세요.”
황궁수비대 우림군을 대동한 공주의 기세는 적장을 사로잡는 장수처럼 사나워보였다.
조영과 이루하, 여미아는 꼼짝없이 결박을 당해 내준신의 심문실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심문실 안에 들어서자, 세 사람의 발에는 나무 족쇄까지 채워졌다.
내준신의 첫 인상은 예상외로 아주 젊고 비교적 잘 생긴 얼굴이었으나 매우 음험해보였다. 그가 음침한 심문실로 끌려 들어오는 세 사람을 무서운 눈초리로 훑어보는데, 그의 눈길이 전광석화처럼 먼저 도달한 표적은 여인들이었다.
내준신은 이루하와 여미아를 번갈아 살펴보면서 몹시도 놀라는 듯한 눈치였다. 그의 눈빛이 마치 뭔가를 잡아먹을 듯, 묘하게 빛나며 이글거렸다.
그를 데려온 우림군 군사들은 이미 자리를 떴으나 태평공주만은 떠나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주마마,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내준신의 말에 공주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좀 구경하고 싶습니다. 죄인들의 자백을 받아내는 대인의 귀신같은 솜씨를.”
“어허! 보시기 어려울 텐데요.”
내준신이 헛웃음을 날렸다. 내준신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벽에 걸린 몇 가지 형구들을 설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큰 대大 자 모양의 커다란 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형구의 사용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으흠, 그 이름을 봉황새가 날개를 펼친다는 뜻으로 봉황전시鳳凰展翅라 하는데 이것의 쓰임새가 아주 묘하고 재미있지.”
그는 마치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듯 아주 자세하고 소상하게 고문방법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듣고 조영과 이루하, 여미아 뿐만 아니라 태평공주 이영월까지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기구는 가히 천하에서 가장 악랄한 고문 도구라 할 만했다.
“이것은 여인들을 심문할 때 쓰는 도구인데,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지. 양팔과 양발을 여기에 이렇게 묶어 놓은 다음······.”
여인들뿐만 아니라, 그의 설명을 듣던 조영도 치를 떨었다. 남자로서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순진한 묘령의 여인들 앞에서 역겹게 꾸역꾸역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찌 이다지도 사악하고 흉악하게 변해, 짐승만도 못한가! 조영은 가슴이 너무 아프고 분노가 치밀어 눈물이 나오려 했다.
곁에 있던 태평공주조차 미간을 몹시 찡그리고 혀를 내둘렀다.
내준신은 태연자약하게 얼굴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어때? 순순히 죄를 자백하고 인정하겠는가, 아니면 이 형벌도구들 맛을 차례로 좀 보겠는가?”
조영이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대인, 이런 무시무시한 악형 도구들을 늘어놓고 겁을 준 후 무조건 죄를 인정하라고 하면, 고문이 무서워서라도 거짓으로 죄를 자백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흠! 배짱 하나 두둑한 놈이군. 지금까지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 죄수는 단 한 놈도 없었네.”
내준신이 뱀눈 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 조영을 노려보았다.
“그럼 증인들부터 들이대야 하겠구먼.”
내준신은 곁에 있던 부하에게 일렀다.
“증인들을 속히 데려오게.”
잠시 후 그가 두 사람을 대동하고 실내로 들어왔다.
증인으로 나선 두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조영은 깜짝 놀랐다. 그 중 한 사람은 오늘 새벽 고려여관에 들어설 때 그들을 맞이했던 사환 중 하나고, 다른 한 증인은 고려여관을 떠나기 전 방을 정리하러 온 사환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당신들은?”
“알아보겠는가, 이 사람들의 얼굴을?”
내준신이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고 증인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 사람이 무슨 일을 왜 저질렀는지, 육하六何원칙에 입각해 명확하게 진술하렷다!”
“네, 나리!”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그 중 하나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이 세 사람은, 오늘 새벽, 어, 오늘 새벽······.”
“쾅!”
듣다 못한 내준신이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다.
“어째서 말투가 그 모양, 그 꼴인가?!”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늘 새벽 어느 시쯤인가?”
“새벽닭이 울기 전, 그러니까, 축시丑時(새벽 2시 전후 두 시간)가 지나고 인시寅時(새벽 4시 전후 두 시간) 무렵이옵니다.”
증인이 부들거리며 간신히 대꾸했다.
“장소는 어디인가?”
내준신이 하나씩 물었다.
“고려여관 바깥마당과 이 사람들이 투숙한 객실의 앞 마당에서였습니다.”
“어떻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손과 발, 검으로 이 세 사람이 우리 사환들 여러 명을 마구 두들겨 패고 찔러 죽였습니다.”
“이 젊은 남녀들의 무공이 그토록 높은가?”
“예. 나리, 제가 숨어서 지켜보았는데, 하늘을 빙빙 날았사옵니다.”
“깜깜한 밤중인데, 어떻게 그리 자세히 보았는가?”
“제 눈이 어둠에 익숙해 있었고 하늘도 맑았을 뿐만 아니라 막 동이 터오는 무렵이어서, 그 정도는 식별할 수 있었사옵니다.”
내준신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왜, 이 사람들이 고려여관의 사환들을 두들겨 패고 죽였단 말인가?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본래부터 우리 사환들을 죽일 요량이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하오나 우리 사환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새벽에 관내를 순찰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더러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며 다짜고짜 우리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사옵니다.”
“거참 희한하군. 어째서 그대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무튼 이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를 몹시 증오하고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사옵니다.”
“그대는 어떻게 해서 그 광경을 그토록 자세히 볼 수 있었는가?”
“저도 함께 순찰을 돌다가 이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동료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모퉁이에 숨어서 지켜보았사옵니다.”
“이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고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그 때 우리 여관에는 손님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우리들은 모두 무서워서 감히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손에 흉기를 지니고 있는데다 무공이 몹시 특출해서 만용을 부려 나섰다가 맞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옵니다.”
내준신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물을 내놓으라.”
다른 증인이 손에 들고 있던 장검 한 자루를 공손히 바쳤다.
“죄다 이 칼로 죽였는가?”
“아닙니다. 처음에 몇 사람은 손과 발을 써서 죽였고, 나중에 심하게 항거하는 동료는 이 칼로 죽였사옵니다.”
조영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가만히 살펴보니, 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내준신은 조영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때? 이 증인들의 말을 인정하는가?”
“아니오.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은 죄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진실을 말해 보라!”
조영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 새벽에 겪은 일을 자초지종 상세히 설명하며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 여인, 이루하 아가씨의 옷에 보이는 혈흔은, 뛰어오르며 공격하는 뱀들의 머리와 몸통을 단도로 자를 때 뱀의 몸통들이 옷자락에 스치면서 묻은 것입니다.”
내준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뜨고 증인에게 물었다.
“이 혈흔은 사람을 죽일 때 생긴 것이 확실한가?”
“그렇사옵니다. 이 여인만이 옷에 피가 묻은 것은, 그녀만이 검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내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피와 뱀의 피는 맛이 다르지. 두 사람의 진술이 엇갈리니 내 직접 피를 맛보아야 하겠네.”
내준신은 의자에서 성큼 일어서더니 꿇어 앉아있는 이루하에게 다가갔다. 그는 킁킁거리며 이루하의 냄새를 맡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곳저곳 냄새를 맡는 꼴이 조영의 눈에 아주 불쾌하게 느껴졌다.
“흠! 냄새 좋군. 아주 향긋해. 하지만, 역겨운 피비린내도 함께 나는군.”
내준신은 코를 킁킁거리다가 다음 순간 혀로 옷자락의 혈흔을 핥았다. 그러자 이루하는 마치 뱀이 자신의 몸을 핥는 듯 몸서리를 쳤다. 내준신은 이리 저리 피가 묻은 자국을 핥다가 이루하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흠! 얼굴에도 피가 있군.”
그는 느닷없이 이루하의 얼굴로 혀를 들이밀어 이루하의 볼을 핥으려 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루하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상체를 피했다.
“어머나!”
여미아가 놀라는 사이, 내준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흥! 놀라긴. 피가 아주 맛있어! 뱀의 피가 아니고 분명한 사람의 피야.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내준신이 거친 숨을 한 차례 내 뱉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자, 이제 물증과 아울러 사람의 증언까지 있었으니 어쩔 셈인가? 죄를 자백하겠는가, 아니면 이 형벌도구의 맛을 보겠는가?”
“대인,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증인들은 위증자들이고 물증은 죄다 가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형벌도구의 맛을 보는 수밖에.”
“먼저 검으로 사람을 죽인, 얼굴은 꽃같이 아름다우나 마음씨는 사갈처럼 악독한 이 여인부터 심문해야 하겠군.”
내준신은 이영월을 돌아보며 물었다.
“공주마마, 마마께서는 이 여인의 심문 광경을 지켜보실 작정이십니까?”
“그러고 싶지만 차마 보지 못하겠어요. 이 두 여인에 대한 심문이 끝나면 날 불러주세요.”
이영월이 문 밖으로 나갔다. 증인들이 그 뒤를 따른다.
내준신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형벌 도구 하나를 벽에서 내렸다.
“자, 방금 전에 설명한 고문을 한 번 받아보시지.”
이루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여미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다.
‘오, 어진님, 이것이 웬 날벼락이옵니까? 이리와 승냥이 떼를 피하고 나니 무서운 독사떼가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오, 하나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내준신은 태연하게 형틀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형틀을 움직이지 않도록 한쪽 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부하의 도움을 받아 이루하의 양팔과 양 다리에서 수갑과 족쇄를 푼 다음, 손발을 큰 대大 자로 벌려 형틀에 묶었다.
이루하는 발버둥 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여미아는 아예 눈을 감고 입술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영은 어젯밤 두 여인이 복면괴한에게 끌려 갈 때보다 몇 십 배 더 큰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 악독하고 음란하기 짝이 없는 패륜아가 청천백일 하에 국가의 법을 빌려,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일생 치유될 수 없는 상처, 하늘에 사무치는 처절한 원한을 심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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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12. 30.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