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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가 김조순(金祖淳)에게 내린 시(詩)
오세육전대(五世六專對) 다섯 세대 동안 여섯 번 사신을 갔으니,
충근인막경(忠勤人莫京) 충성스럽고 근면하기 다른 누가 비기리오.
후승지궐미(後繩趾厥美) 후손이 또 그 아름다움을 이어받아,
김세응자행(今歲膺玆行) 금년에 이 사명(使命) 수행을 맡았구나.
설적 증찬고(雪積曾餐苦) 눈이 쌓여 일찍이 고초를 겪었고,
비영구음청(冰餘舊飮淸) 걱정되어 그 옛날에 얼음을 마셨지.
왕재능점국(往哉能覘國) 가거든 그 나라 정세를 잘 정탐하여,
무부사화명(毋負使華名) 사신의 명성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손수 쓴 글을 모아둔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사신으로 떠나는 김조순(金祖淳)에게 쓴 시(詩)이다.
출생: 1765년 10월 7일(음력:영조(英祖) 41년 8월 23일)
사망: 1832년 5월 2일(향년 66세) (음력:순조(純祖) 32년 4월 3일)
묘소: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봉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시호: 충문(忠文)
본관: 안동 김 씨(安東金氏)
붕당: 노론(老論) (탕평당, 싶아)
부모: 부친-김이중(金履中) 모친-평산 신 씨
부인: 청양부부인 청송 심 씨(靑陽府夫人靑陽府夫人 靑松 沈氏,1766 ~ 1828)
자녀: 슬하 3남 4녀
장남 -김유근(金逌根,1785 ~ 1840)
차남-김원근(金元根,1786 ~ 1832)
장녀-순원왕후(純元王后,1789 ~ 1857)
3남 -김좌근(金左根,1797 ~ 1869)
차녀-의령 남 씨 남구순(南久淳)의 처
3녀 -한산 이 씨 이겸재(李謙在)의 처
4녀 -연안 이 씨 이긍우(李肯愚)의 처
김조순(金祖淳, 1765년 ~ 18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종묘의 정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생애
그의 고조부는 영의정까지 오른 김창집(노론 4 대신 중 1명)이고, 김창집의 아우들로는 낙학파의 종장이자 시문의 대가였던 김창협, 김창흡, 그리고 연행일기를 남긴 김창업과 훈고학과 강학으로 이름났던 김창즙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육창의 후손은 뻗쳐나가 후대의 낙학파의 산실인 석실서원을 이끌었던 재야의 김원행을 포함하여, 정계의 최상위에 올랐던 문신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김창집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부친 김수항은 송시열의 정치적 파트너로 노론의 초대 영수이며,김수항의 조부는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로 최명길과 대립했던 김상헌이다.한마디로 엄청난 명문가 출신으로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집권 여당
집안의 자손으로, 직계 조상 중에 이름 높은 국무총리 여럿,김구 수준의 독립운동가,대학자들이 있다는 것.또 정조와는 사돈이기 전에 외가 쪽으로 6촌 형제간이다. [9]1765년(영조 41년) 8월 23일에 태어나 1785년(정조 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대교를 지냈고 이조참의, 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 순탄한 관직살이를 했다.본인의 개인적인 능력도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인 노론 싶아였기 때문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서인과 남인 양쪽에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죽화도 잘 그렸다. 말년에 정조가 건강이 나빠지자 왕세자 책봉을 하면서 동시에 간택을 추진했는데 이때를 전후해서 정조가 직접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면서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감으로 추천해 간택되게 하고 이를 마음대로 바꾸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강요할 정도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결국 김조순의 딸이 간택되었고 그래서 그의 딸이 순조비가 되었으며 그는 국구가 되어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조순의 아내 청송 심씨 심건지(沈健之)의 딸도 그와 동시에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에 봉해졌다.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어 정치적 역량이 떨어져 신하들에게 휘둘릴지도 모를 순조의 후원자로 김조순을 염두에 둔 듯한데 정작 정조 본인도 홍국영의 세도 정치로 골머리를 앓았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영조의 계비로 순조가 즉위할 당시 왕실의 큰 어른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김 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에는 낮은 처신으로 좋은 평가를 벽파로부터 받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한때 장용영의 대장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안 돼서 장용영 자체가 폐쇄되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사망한 후 벽파가 몰락하자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특이하게도 전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선점한 안동김씨김 씨의 수장인데 정작 본인은 판서급 자리 이상의 벼슬에 오른 적이 없었던 것.김조순이 순조의 친정 이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 한 일은 바로 신유박해를 저지른 노론 벽파에 대한 치죄였다. 심환지, 김종수 등을 정조의 유지를 거스른 역적으로 정하여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는 등 정순왕후 김 씨의 세력을 대거 정리했는데 김조순이 전면에 나섰다기보다는 측근들이 대신 수행하였다.사실 일반적인 세도정치에 대한 서술을 생각하면 세도정치의 전반 30년을 담당한 김조순이 이렇게 명신에 가까운 평을 받는 것이 아이러니해 보이며 이 때문에 "김조순 이후로 진짜 막장 세도정치가 열렸다"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안동 김 씨는 척화파의 상징 김상헌,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김수흥, 김수항, 김수항의 아들이자 역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두 동생 김창협, 김창흡 등 쟁쟁한 후손들로 인해 조선 후반기 최고 명문가였다. 김조순 개인이 어떤 인물이었든 간에 안동 김 씨 일문이 세도가가 되는 것은 결국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조순이 섭정이 된 이후 안동 김 씨의 세력이 크게 확대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세도정치로서 조선 후반기 막장 상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세도 정치의 효시인 김조순은 그 개인이야 착하건 나쁘건 어쨌건 후대의 막장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비록 김조순이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과 노론 벽파를 정리했다지만 사실 공격한 것은 소론 시파인 이시수, 그의 일족이자 노론 시파인 김이영과 김희순 등이 벽파의 주축이자 경주김씨김 씨인 김귀주와 김관주 등을 팔자흉언을 이용해 역적의 낙인을 찍어 숙청한 것이다.한마디로 반대파 세력을 자신의 손으로 더럽히지 않고 차도살인을 한 것,정작 이들의 빈자리를 채운 인물들은 안동 김 씨에 노론 싶아들이었다.정약용의 복귀는 없었다.실제로 김조순이 제수받거나 역임했던 관직들을 살펴보면 부제학(副提學),행호 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 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훈련대장, 호위대장, 장용영 사령관 같은 하나같이 핵심 요직들로 문무관의 인사권, 국가 재정,군 최고 통수권자, 최고위 언관 같은 실세 중에 실세 자리들이다. 김조순이 역임했던 직책 중 흔히 주목하지 않는 것이 비변사 주교사 당상이다. 주교사 당상 직은 한강의 배다리(주교) 설치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배다리 설치를 위해 당대의 한성 근교의 모든 배에 대해 징발 권한을 지니는 등 배의 현황을 파악하고 배의 이동과 한강 수운 등을 감독하는 자리였다. 주교사의 명목상 업무는 배다리의 건설이었으나 실상은 배를 통해 이루어졌던 당시 상업, 특히 한성 근교 대상인을 관리하고 감독할 수 있는 자리였고 이는 상권의 장악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선혜청제조도 주목할 만 한데 대동법으로 거두어들인 대동미의 출납을 담당하는 부서가 선혜청이다. 3대 세금인 전정, 공납, 군포 중 하나를 통째로 담당하는 부서니 호조 못지않은 재정 부서다.이렇게 김조순은 너무 튀어 보이는 정승직을 맡지 않고도 알짜 요직을 챙겨 정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에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정치 기구는 의정부가 아니라 비변사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되며 특히 김조순이 죽을 때까지 유지하던 직위가 바로 비변사 제조라는 점은 의미가 크다. 제조는 명목상 도제조에 이은 비변사의 이인자 자리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비변사의 최고위직인 도제조는 전현직 삼정승들이 겸직하는 자리였다. 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전직이니 사실상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현직에서 물러나면 전직이 되어 실권이 사라진다. 따라서 겸직인 도제조보다 명목상 이인자이기는 하지만 상시직인 제조가 실권은 더 강했던 경우도 있다. 실제로 김조순 이후의 세도 정권들은 비변사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고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따라서 '김조순이 어떤 벼슬에 입문하여 어떤 활약했다더라'는 식의 표면적 기록들은 큰 의미가 없다. 김조순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평가(졸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명목상 높은 벼슬은 하지 않았더라도 비변사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여 막후에서 정국을 운영했다는 것이다.김조순이 죽고 나서 생긴 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되었다. 신도비는 처음 묘가 생겼을 때에는 없었고 나중에 철종이 지어줬으며 정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평가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명경왕비(明敬王妃)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 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현 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 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대정치가의 현손자이자 젊어서 과거 급제를 했고 외모나 능력도 출중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고 시작하고 있다. 재간택을 받기 직전이 조금 순탄치 못했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 국구가 된 시점부터 사위이자 왕인 순조뿐 아니라 조정과 재야에서 존경을 받았다고 졸기는 기록한다. 외적인 존경뿐 아니라 실제로 국가 중대사를 총찰해 모두 주물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권신 중의 권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격이 지나치게 좋다면서 인간관계가 얕고 넓었다는 기록은 그에게 줄을 대는 자가 많았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적을 만드는 스타일도 아니었던 모양으로 외척으로서의 선을 지켰을 수도 있고 애초에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소극적인 태도의 소유자로 순상(우유부단)했다는 평이다. 겉으로는 우유부단함이라고 가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자신의 딸 순원왕후에 대한 평가처럼 무사안일한 유형의 국정을 선호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일에 먼저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호박씨 까듯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명예욕이라던지 하는 부문에 욕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종합적으로 정중동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평인데 같은 기사에서 순조는 스승과 같은 장인이라고 평한다.
가족관계
증조부 : 김제겸(金濟謙) -김창집(金昌集)의 장남
조부 : 증 의정부좌찬성 김달행(金達行)
조모 : 한산이씨이 씨(韓山 李氏) - 이 집(李潗)의 딸, 언니가 혜경궁 홍씨홍 씨의 모친
부 : 서흥부사 김이중(瑞興府使 金履中)
모 : 평산신씨신 씨(平山 申氏) - 부사 신사적(申思迪)의 딸
아내 : 청양부부인 청송심씨심 씨(靑陽府夫人 靑松沈氏)-호조정랑 심건지(沈健之)의 딸,예조판서 심풍지(沈豊之)의 조카
장남 : 돈령부판사 김유근(敦寧府判事 金逌根, )
양손자 : 효문공 깁병주(孝文公 金炳㴤) - 생부 김홍근(金弘根)의 아들
차남 : 증 이조판서 김원근(贈 吏曹判書 金元根)
친손자 : 효정공 김병지(孝貞公 金炳地)
장녀 : 순원왕후(純元王后)
3남 : 돈령부영사 김좌근(敦寧府領事 金左根)
양손자 : 문헌공 김병기(文獻公 金炳冀) - 생부 김영근(金泳根)의 아들
차녀 : 남구순(南久淳)에게 출가
외손자 : 문정공 남병철(文貞公 南秉哲)
3녀 : 이겸재(李謙在)에게 출가
외손자 : 궁내부특진관 이승순(李承純)
4녀 :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
김조순 본인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요직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말년에는 왕의 장인인 국구에게는 당연직이었던 영돈녕부사(정1품)와 제조직 외에 다른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물론 비변사 제조 자체가 정권 운영의 핵심 요직이었다. 그밖에 개인적인 품성 면에서도 부정축재 등으로 지탄을 받는 기록도 없다. 오히려 왕이 높은 관직을 제수하거나 상을 내릴 때도 극구 사양해서 받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제의 문란으로 출세길이 막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현시창적인 상황에 처한 민생을 왕에게 알리는 것에도 힘을 썼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나 당시의 역사서에서도 후한 평가를 받았으며, 당장 다른 전문인들의 언급을 참고해도 '그의 혈족과 측근이 권력을 독점하는 안동 김 씨 세도 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정도의 언급만 나오고 간신이라는 묘사는 없다.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반남박씨
박종경과 세도 정치를 했다는 비판받은 사실이 있어 이미 당대에도 권신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려진 듯하다.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냥 이름 높은 세도가들은 닥치고 거론된 감도 있는 게 민란들이라 당장에 박종경은 뭘 제대로 한 게 없다. 덧붙이자면 세도 정치기의 각종 문제는 정조 시기에도 그 단초가 예고됐다(대표적으로 수령권의 강화와 그로 인한 환곡 폐해와 탐학의 발생). 세도 정치의 기반 또한 규장각, 주교사 등 정조가 설치한 각종 기관들에서 나왔다. 소수 가문들에 의한 과거의 독점 또한 18세기 후반(영조 말)부터 이미 널리 확산된 경향이었으며 서울 양반과 지방 양반의 분화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아울러 18세기말부터 대외 교역이나 농경지의 확대 등도 정체 혹은 침체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의 쇠퇴를 단순히 세도정치, 나아가 김조순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러한 쇠퇴 경향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당시의 집권층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요약하자면 단순히 '명신'과 '간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기에는 참 난감한 인물. 개인의 입장으로는 뛰어난 능력, 인품을 갖춰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정국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세도정치가 대폭발,결국 안동 김 씨라는 혈연적 측면과 비변사를 통한 소수 인물들의 정권 독식이라는 정국 운영 방식 측면의 2가지 측면에서 세도 정치를 낳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여러모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정조 사후 생기를 잃고 회색으로 빛을 잃어가던 조선 말기를 상징하는 인물. 어찌 보면 당나라 현종 대의 이림보보다도 무서운 인물. 딸인 순원왕후와 보면 더욱 흥미롭다.평소 소설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직접 <오대검협 전>이라는 무협소설을 쓴 적이 있다. 오대검협 전의 집필 시점은 불확실한데 김조순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 게 아니라 김려라는 문인이 본인 및 주위 문인들의 글을 모은 유고인 담정총서(藫庭叢書)에 수록된 김조순의 고향옥소사(古香屋小史) 중에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이처럼 소설광이었던 탓에 실제로 젊은 시절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 후배와 연애소설을 나눠보다 하필이면 정조에게 걸렸고 정조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그런데
그 반성문을 기가 막히게 잘 써서 정조가 극찬을 내렸다.남들은 반성문을 쓰라 하면 자기변명에 급급한 글만 써댄 것에 반해 김조순은 잘못한 것은 확실히 잘못했다 인정하는 글을 썼다고.어느 야사에는 김조순의 정적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술 취한 이를 들여보내 행패를 부리라 사주했는데 그는 다 죽어가는 환자여서 매를 치면 죽는 몸이었다. 그러나 김조순은 오히려 그를 거두고 잘 먹여 보냈다.
대중매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처음부터 김조순이 고도의 처세술을 꾸몄다고 보고 있다. 김조순 자신은 명신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실질적인
권력욕을 보이지 않는 척하면서 가문 전체의 세도 확대를 꾀했다는 것.이후 김조순의 자식들이 주요 벼슬자리에 제수된 것으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김조순이 풍양조씨, 반남박씨 등과도 연합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최고 가문의 지위를 지켰다고 보고 있다.그러니까 박시백 작가의 김조순에 대한 평가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위선자.사극에서 순조~헌종 연간이 워낙에 불모지대이다 보니 주도적인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없고 정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극에서도 잘리거나 단역 수준으로 잠깐 얼굴 보일 정도로 비중 없이 나온다. 이는 아들 김좌근이 흥선대원군과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것과 대조된다.2016년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배우 천호진이 연기한 김헌 역할의 모티브이다.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주인공들을 후원해 준다.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서는 기득권이자 자신의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 조선의 부패한 지도층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치적 능력은 유능하게 나온다. 역사의 변화로 조선이 엉망이 되는 와중에도 무능한 왕들이 자신을 견제하는 것을 보고 왕이 굳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품는다. 여담으로 원래 역사에서 무협소설 작가다 보니 툭하면 무협 소설 관련 서술이 나온다.
五臺劒俠傳(오대검협전)
五臺劒俠傳(오대검협전) : 오대산의 검협 이야기 金祖淳(김조순, 1765~1832)
五臺劒俠, 不知何人也.
오대검협, 불지하인야
오대산의 검협이란 사람은 누구인지 잘 모른다.
英宗時, 京師有徐生者, 癖堪輿術. 嘗游五臺山, 登絶頂. 望龍脉之重疊, 意欲窮其奇.跨澗度嶺, 不知幾何里. 至一林,
영종시, 경사유서생자, 벽감여술. 상유오대산 ,등절정, 망용맥지중첩, 의욕궁기기,과간도령, 부지기하리, 지일림
영조 때 서울에 서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풍수와 방술을 아주 좋아하였다.
어느 날 오대산에 가서 놀게 되었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산줄기가 거듭하며 흘러감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맥의 기이함을 다 보고 싶어졌다.
서생은 물을 건너고 고개를 지나, 몇 리를 지났는지 알지 못한 채 한 숲에 이르 렀다.
日已暮,四望不見人烟處.心甚慌,披荊覓路,天漸黑,不辨東西,政惶急無措.忽有燈光,星星從葉間漏.生乃匍匐趁光而前.林竟茅廬在焉.
일이모 사망불견인연처 심심황 피형멱로 천점흑 불변동서 정황급무조 홀유등광 성성종엽간루 생내포복진광이전 임경모려재언.
하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고, 사방을 살펴봐도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몹시 당황하여 가시나무를 헤치며 길을 찾았지만,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동서를 분간할 수 없었기에, 황급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홀연히 등불 빛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고 있었다. 서생은 엉금엉금 기어 빛을 따라 앞으로 나갔다.
숲이 다하는 곳에 오두막집 하나가 있었다.
生叩之,一少年出,而驚曰 : “此虎豹藪也, 客何人也?”
생고지,일소년출,이경왈 : “차호표수야, 객하인야?
서생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나오더니 깜짝 놀라며,
“여기는 호랑이와 표범이 득실거리는 곳이온데, 손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다.
語之故, 喜曰 : “山中多猛獸, 人居止敝舍, 客幸至此.” 卽延坐堂上. 語屋內人 : “急辦飯, 與客充飢!”
어지고, 희왈 : “산중다맹수, 인거지폐사, 객행지차.” 즉연좌당상, 어옥내인 :“급판반, 여객충기! ”
서생은 이곳으로 오게 된 연유를 말하였다. 젊은이는 다행한 듯이, “이 산중에는 사나운 짐승이 많고,
사람들이 거처할 곳이라고는 다만 이곳뿐이지 요. 여기에 이르렀으니 다행이옵니다.” 라고 하며,
곧 서생을 맞아 방 안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는 집안사람에게 “급히 밥을 지어, 손님의 허기짐을 채우게 하오.” 라고 말하였다.
生視少年, 年可三十餘, 貌秀氣溫, 無村秀才態,室中惟滿架書, 四壁無點塵. 問其姓氏, 曰: “徐當告之.”
생시소년, 연가삼십여, 모수기온, 무촌수재태,실중유만가서, 사벽무점진, 문기성씨, 왈:“서당고지, ”
서생이 젊은이를 보니, 나이는 서른 정도인데 용모는 빼어났고, 기운은 온화하여 시골 서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방 안의 서가에는 책들이 가득했고, 네 벽에는 한 점 의 티끌도 없었다.
서생이 젊은이에게 성명을 묻자,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만 하였다.
小間飯畢,少年與客語,問山中所見及國內山川風水,甚亹亹恭怡.可二更,謂生曰:“客勞止,請早臥.主人有所業,次當就睡.”
소간반필,소년여객어,문산중소견급국내산천풍수,심미미공이,가이경,위생왈:“객로지,청조와 주인유소업,차당취수. ”
조금 후에 식사를 마치자, 젊은이는 서생에게 그동안 산속에서 보았던 우리나라 안의 산천과 풍수에 대해.
상세하고도 공손하며 온화하게 물었다. 이경이 되자 젊은이가 서생에게 이르기를, “손님께서는 피곤하실 터이니,
청하오니 일찍 누우시지요. 나는 따로 할 일이 있 기에 일을 마치고 자려 합니다.” 하였다.
臥客於己席, 己則背客而坐. 懸燈讀書, 琅然可聽. 生熟寐良久, 偶欠伸而寤. 臥睨少年背, 猶端坐不動.
와객어기석, 기칙배객이좌, 현등독서, 낭연가청, 생숙매양구, 우흠신이오, 와예소년배, 유단좌부동,
젊은이는 서생을 자기 자리에 눕게 하고는, 그를 등지고 앉았다. 등불을 달고, 글 을 읽는데, 그 소리가 낭랑하여 들을 만했다.
서생은 깊게 잠든 지 오래되었을 때, 우연히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잠이 깨 었다.
누운 채로 젊은이를 엿보니, 여전히 꼿꼿이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忽聞戶外有聲, 颯然如墜葉. 內忽低問曰 : “來否?” 戶外應曰 : “我來也.” 啓戶欲入, 躇曰 : “臥者爲誰?”
홀문호외유성, 삽연여추엽, 내홀저문왈 : “내부?”호외응왈 : “아래야, ”계호욕입, 저왈 : “와자위수?”
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바람에 이파리가 날려 떨어 지는 소리 같았다.
안에 있던 젊은이가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왔나?” 하고 물었더니, 문밖에서 “내가 왔네.” 라고 답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하다가 주저하며, “누워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물었다.
少年曰:“無傷.山行失路者耳.”仍微搖生, 連呼曰:“睡未? 睡未?”生訝之,佯不應,轉齁齁若醉.少年曰:“睡深矣.”其人卽入.
소년왈:“무상.산행실로자이.”잉미요생, 연호왈:“수미? 수미?”생아지,양부응,전후후약취.소년왈:“수심의.”기인즉입.
괜찮다네. 산을 헤매다가 길을 잃은 사람이네.”하고는,서생을 약간 흔들고는,이어서 말하기를,“주무십니까? 주무십니까?”하였다.
서생은 의아하게 여겼지만, 응대하지 않으려 거짓으로 뒤척이며 잠에 취 한 듯이 코를 골았다.
젊은이가 “잠이 깊이 들었군.” 하며, 그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生從睫間,窃瞰之.又一少年,長身偉幹.側立燈影下,謂少年曰:“可去也.”少年卽起,入閨藏,出一小籠抖之,有二匕首, 一帕裹.
생종첩간,절감지.우일소년,장신위간.측립등영하,위소년왈:“가거야.”소년즉기,입규장,출일소롱두지,유이비수, 일말과.
於是二人脫其故服,取帕中物着之,一靑一黃.生大怖駭,愈縮如死者.
어시이인탈기고복,취말중물착지,일청일황.생대포해,유축여사자.
서생이 눈썹 사이로 엿보았더니, 들어온 이도 젊었는데 키가 크고 몸이 우람했다.
그는 등불 아래에다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섰다가 젊은이에게, “이제 가야지!” 라고 하니,
젊은이는 곧 몸을 일으켜 내실로 들어가더니,작은 대그릇을 가지고 나와 열고는,그 안에서 비수 두 자루와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두 사람은 옷을 벗 어 던지고 보자기를 끌려, 그 속에 든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하나는 청색이요, 하나는 황색이었다.
서생은 이들의 거동에 더욱 몸이 오싹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 았다.
二人裝畢出門, 不知所之. 生乃潛起, 抽架上編, 多劒書. 知其爲劒俠也. 復就寢, 轉輾不能寐,
이인장필출문, 불지소지. 생내잠기, 추가상편, 다검서. 지기위검협야. 복취침, 전전불능매,
두 사람은 채비를 갖추고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서생은 그제야 슬며시 일어나 서가의 책을 뽑아 보았는데 검서가 많았다. 그래서 젊은이가 검협임을 알았다.
서생은 다시 자려고 했지만 뒤척거렸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向鷄鳴, 戶外有颯然聲, 二人已入坐. 生窃瞰之, 二人擲匕首於地, 改衣冠. 執手相笑, 喜動顔色. 旣而慘然泣數行下, 良久無語.
향계명, 호외유삽연성, 이인이입좌. 생절감지, 이인척비수어지, 개의관. 집수상소, 희동안색. 기이참연읍수행하, 양구무어.
이윽고 새벽닭이 울 무렵, 집 밖에서 다시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은 벌써 방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서생은 가만히 엿보았다. 두 사람은 비수를 비수에 바닥에 던지고 다시 옷과 관 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서로 손을 맞잡고 웃었는데, 대단히 기쁜 안색이었다.
하지만 슬프고 처량한 눈물이 몇 줄기 아래로 흘리면서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其人曰:“我去也.”倏然而出.少年乃整其裝藏之.呼生曰:“起! 起! 旣無足怪,亦無足畏,何庸假睡爲?”生始敢起,請循其本.
기인왈:“아거야.”숙연이출.소년내정기장장지.호생왈:“기! 기! 기무족괴,역무족외,하용가수위?”생시감기,청순기본.
다른 젊은이가,“난 가겠네.”하며, 홀연히 집 밖으로 나가자,젊은이는 그제서야 행장을 꾸려서 본디 있던 자 리에다 간직했다.
그리고는 서생을 부르며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괴상하게 여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나이다.
거짓으로 잠든 체하지 마시오.” 서생은 비로소 일어나, 그들의 내력을 물었다.
少年曰 : “其人居關北, 三甲界, 卽吾友也. 始吾與其人及他一人, 同師而學, 一人以非辜, 爲人所殺. 吾兩人常欲報之, 積十數年,
소년왈 : “기인거관북, 삼갑계, 즉오우야. 시오여기인급타일인, 동사이학, 일인이비고, 위인소살. 오양인상욕보지, 적십수년,
不得其便, 今始往殺之.”
불득기편, 금시왕살지.”
젊은이는, “저이는 함경도 삼수와 갑산의 경계에 있는 자로 저의 벗입니다.
처음에 저와 벗 은 다른 한 벗과 함께 한 스승에게 배웠는데, 다른 한 벗이 아무런 죄 없이 살해되 었지요.
우리 두 사람은 늘 그 원수를 갚으려 했지만,
십여 년이 되도록 기회를 얻 지 못하였는데 이제 비로소 가서 원수를 죽인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生又問曰 : “然則以子之才, 何待十數年?” 曰: “否! 術不能勝天. 故雖神者, 必假天, 天命未盡之前, 吾何以加彼哉? 今夜某時,
생우문왈 : “연칙이자지재, 하대십수년?” 왈: “부! 술부능승천. 고수신자, 필가천, 천명미진지전, 오하이가피재? 금야모시,
卽彼大厄之辰, 是以待之良苦.”
즉피대액지신, 시이대지양고.”
서생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그대들의 재주로 어찌하여 십 년이나 기다렸습니까?” 하니 젊은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방술은 하늘의 뜻을 이길 수 없소이다. 그렇기에 비록 신인(神 人)이라도 반드시 하늘의 뜻을 빌려야 하기에,
천명이 다하기 전에는 저라도 어찌 원수에게 손을 댈 수가 있겠소이까?
오늘 밤 그 시간은 바로 그가 큰 액운을 당하는 때였습니다.그렇지만 지금까지 기다리는 동안 실로 괴로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曰 : “然則殺之, 截腰斷領乎?” 曰 : “否! 是, 術之疎者. 工者殺人, 必化而爲風, 從其九竅而入. 自脊至踵, 細剸其骨骸,
왈 : “연칙살지, 절요단령호?” 왈 : “부! 시, 술지소자. 공자살인, 필화이위풍, 종기구규이입. 자척지종, 세전기골해,
縷切其臟腑, 使外軆不損皮毛, 內爲肉泥然後爲快.”
루절기장부, 사외체부손피모, 내위육니연후위쾌.”
그러자 서생이, “그럼 죽인 방법은 허리나 목을 자르는 것이었습니까?” 라고 물으니,
젊은이는, “아니지요. 그런 것은 검술로는 서투른 방법이지요. 능한 자가 사람을 죽일 때는 반드시 바람으로 변한 뒤에,
그 사람의 아홉 구멍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는 등마루 부터 발꿈치까지 그 뼈를 가늘게 베고 창자를 실처럼 끊되,
바깥의 몸은 피부나 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고, 그 속을 고기처럼 저민 후에야 끝나는 것이지요.” 라고 답하였다.
曰 : “讐在何處, 而姓名爲誰?” 曰:“嶺南某地之某富人也.”生黙記其姓名,計其程,往返踰千餘里. 又問 :“何爲先笑而後泣也?”
왈 : “수재하처, 이성명위수?” 왈:“영남모지지모부인야.”생묵기기성명,계기정,왕반유천여리. 우문 :“하위선소이후읍야?”
曰 : “快除深讐, 自不得不歡. 追念亡友, 自不得不感耳.”
왈 : “쾌제심수, 자부득부환. 추념망우, 자부득부감이.”
“원수가 사는 곳은 어디이고, 이름은 무엇이라 하오?”하니, 답하기를“영남의 아무 곳에 사는 갑부로서 아무개지요.”하였다.
서생은 그 사람의 이름을 마음속에 기억하고, 두 사람이 다녀온 길을 헤 아려 보니, 오고 가는데 천여 리가 넘었다.
서생이 다시 묻기를,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웃었는데, 나중에는 눈물을 흘렸소?” 하니, 답하기를,
“즐거이 깊은 원수를 갚으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그러나 죽은 벗을 생각 하니 감회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生仍竦身言 : “某嘗聞世有擊劒之術, 然視之無緣. 今幸逢子, 苟許一眄, 足慰平生.” 少年笑曰 : “倉卒薄技, 無可娛客者.”
생잉송신언 : “모상문세유격검지술, 연시지무연. 금행봉자, 구허일면, 족위평생.” 소년소왈 : “창졸박기, 무가오객자.”
沈吟而起, 復至閨藏中, 取一籠抖之, 滿籠皆鷄翎也.
침음이기, 복지규장중, 취일농두지, 만롱개계령야.
서생은 움츠렸던 몸을 바로 펴며 말하기를, “내 일찍이, 세상에 칼을 특별하게 쓰는 방술이 있다고 들었으나,
인연이 없어 구 경을 하지 못하였소.다행히 오늘 그대를 만났으니,진정 그것을 보여 주시어 내 필 생의 갈망을 풀어주시오.”하니,
젊은이가 웃으면서, “급작스레 말씀하시고, 더구나 시원치 않은 기예라, 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까 걱정이외다.” 하고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켜 다시 내실로 들어갔다,
보자기를 하 나 들고 나와 털어 내는데, 그 속에 가득한 것은 모두 닭털이었다.
少年乃運劒匝翎堆邊, 已而不見, 只一道白氣, 圍亘室中. 鷄翎皆肅肅自舞, 亂飄壁上. 燈穗靑熒, 隨而上下, 寒光冽氣, 毛髮爲竪.
소년내운검잡령퇴변, 이이불견, 지일도백기, 위긍실중. 계령개숙숙자무, 난표벽상. 등수청형, 수이상하, 한광렬기, 모발위수.
生惝怳戰栗, 不敢正坐.
생창황전율, 부감정좌.
이윽고 젊은이는 칼을 뽑아 휘두르기 시작하니, 주위에는 깃털이 쌓이고,
얼마 지 나지 않아 그는 보이지 않았고 다만 한 줄기 흰 기운이 집을 에워쌌다.
닭털은 제 스스로 춤을 추듯 펄펄 날면서 벽 위를 어지럽게 날았다. 등불은 이삭처럼 푸르게 빛났고 위아래로 움직였는데,
차가운 기운 때문에 머리 카락이 곤두섰다. 서생은 당황하고 떨려서 감히 바로 앉지 못했다.
俄而錚然一響.少年投劒而笑曰 :“薄技畢矣. 客觀之否?”生瞠然如愚, 噤不能語.良久始定神, 視地上數千翎,皆中斷.亟前抱之.
아이쟁연일향.소년투검이소왈 :“박기필의. 객관지부?”생당연여우, 금불능어.양구시정신, 시지상수천령,개중단.극전포지.
이윽고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더니, 젊은이는 칼을 던지고 웃으며,
“제 천한 기예가 끝났나이다. 손님께서는 잘 보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서생은 눈이 휘둥그레한 채, 어리석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했다.
오랜 후에 정신을 차린 후 땅바닥을 내려다보니 수천 개의 닭털이 모두 중간이 끊어져 있었다.
서생은 급히 앞으로 나와 청년을 안았다.
少年曰 : “戱耳.” 盡收藏之. 與生復就寢而宿.
소년왈 : “희이.” 진수장지. 여생복취침이숙.
젊은이는 “이는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거두어 제자리에 간직하였다. 그리고는 서생과 함께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生欲棄其所學而學少年. 曰 : “非人人可學, 且客之骨相無此, 學亦不能成也.”
생욕기기소학이학소년. 왈 : “비인인가학, 차객지골상무차, 학역부능성야.”
서생은 그때까지 자신이 배운 것을 버리고 젊은이에게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젊은이는,
“사람이라고 하여 다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외다.
또 손님의 골상(骨相)을 보니 배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비록 배우더라도 능히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明日供飯, 指路而送之, 戒曰 : “愼無以夜來事相泄! 苟有泄, 雖千里之遙, 吾卽知之.”
명일공반, 지로이송지, 계왈 : “신무이야래사상설! 구유설, 수천리지요, 오즉지지.”
이튿날 젊은이가 밥을 지어 먹이고 길을 가리키며, “어젯밤 일을 세상에 알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만일 알린다면 비록 천리가 떨 어져 있다 해도 저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라며 경계했다.
生應諾而行, 不歸其家. 直至嶺南某邑, 問某姓富人, 果居某里. 卽入其里. 潛探之, 其里人皆云 : “某人, 於某月某夜, 無疾暴卒.
생응낙이행, 불귀기가. 직지영남모읍, 문모성부인, 과거모리. 즉입기리. 잠탐지, 기리인개운 : “모인, 어모월모야, 무질폭졸.
及殯殮, 屍軟縮如糠袋. 若素無筋骨然, 遠近駭異, 不知其病祟.”
급빈렴, 시연축여강대. 약소무근골연, 원근해이, 불지기병수.”
서생은 그러자고 약속을 하고 산을 내려왔지만,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곧바로 영남 지방의 한 고을에 이르러, 아무개 성씨의 갑부를 물어, 아무개 마을 에 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시 그 마을로 찾아 들어갔다. 은밀히 탐지하니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아무 달 어느 밤에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지요. 그런데, 시신을 빈소 에 옮기고 염(殮)을 해 보았지만,
그 시체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흡사 겨를 넣은 주 머니 같았다오.
평소에 뼈나 근육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서 모두 괴이쩍게 여겼으 나, 결국 그가 무슨 병으로 그렇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生推其日, 定自家宿五臺山中夜也. 愈加驚歎而歸, 不敢以所見語人, 及老始語其親戚云.
서생은 속으로 그가 죽었다는 날을 헤아려 보았더니, 바로 자기가 오대산 산중의 초막에서 자던 날 밤이었다.
그는 더욱 경탄하며 돌아왔지만,감히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하다가 나이가 늙어 죽을 때가 되자 비로소
친척들에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閏人曰: “余童子時, 愛太史公 「刺客傳」, 讀之往往忘食 以爲 ‘天下之奇, 無過於是.’ 及讀唐傳奇 「韋十一娘」,
윤인왈: “여동자시, 애태사공 「자객전」, 독지왕왕망식 이위 ‘천하지기, 무과어시.’ 급독당전기 「위십일낭」,
「紅線」 諸傳, 又茫然自失.
「홍선」 제전, 우망연자실.
윤인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태사공2)의 3)을 즐겨 읽었는데,
때때로 식사를 잊었 고 ‘천하의 기이한 일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가 당 나라 때의 전기소설(傳奇小說) 중 4)과 5) 등을 읽고서는 망 연자실하곤 했다.
譬之, 荊聶 諸公, 如猛虎下山, 終始具塗人耳目, 見之悍然增氣而已. 若韋娘ˎ 紅線之類, 如神龍入雲, 時露鱗爪, 其神變殆不可測.
비지, 형섭 제공, 여맹호하산, 종시구도인이목, 견지한연증기이이. 약위낭ˎ 홍선지류, 여신룡입운, 시로인조, 기신변태불가측.
似乎勝之, 所處異而所用殊也.
사호승지, 소처이이소용수야.
비유하자면 형가와 섭정6)은 같은 사람은 사나운 범이 산을 내려오는 것같이 사람 들의 귀와 눈에 크게 드러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사나운 기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위랑과 홍선과 같은 부류는 마치 신룡(神龍)이 구름 속에 숨어 있다가
때 때로 비늘과 발톱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신비로운 변화는 거의 측량할 수가 없다. 형가와 섭정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나,
이는 각기 처한 바가 다를 뿐이다. 1) 작자 김조순의 호. 2)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3) 사마천의
『사기(史記)』열전 중의 하나인 「자격열전(刺客列傳)」. 4) 명나라의 호여가(胡汝嘉)가 창작한 소설로
여협객인 위십일낭(韋十一娘)을 주인공을 하였음. 5) 당나라의 원교(袁郊)가 창작한 소설로 여협객인 홍선(紅線)을
주인공으로 하였음. 6) 중국 전국시대의 유명한 협객인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으로, 두 인물 사마천의 「자객열전」 에 등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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