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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큰 흔들림 새벽강을 깨우다
-줄무덤 위에 피어오른 신앙의 꽃밭 내포를 찾아-
주기영시몬
내포의 사도 이존창
내포(內浦)란? 안내(內), 또는 들일 내(內)와 개포(浦)(개:seacoast)의 두 글자로 된 단어이다. ‘개’라는 것은 해안가를 뜻하는 우리말이니 내포의 의미는 ‘안개’ 또는 ‘들일 개’이다. 바닷물이나 강물이 내륙으로 깊숙이 휘어들어온 포구와 그 주변을 말한다.
바닷물에 밀린 강물은 산악보다는 평야지대로 흘러든다. 평야지대에는 대체로 크고 작은 수로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맞닿는 곳에서는 두 물이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밀물 때가 되면 거꾸로 바닷물이 강물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 바닷물을 갯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바닷물 따라 내포는 해외의 사조에 일찍부터 민감했다.
내포지방은 충남 서북부 가야산(678m)의 앞과 뒤 그리고 오서산(791m)의 북쪽에 이르는 기름진 평야지대로 거기를 흐르는 삽교천이 기준이 되는데 삽교천은 홍성군 예산군 당진군 아산시를 북류하여 서해의 아산만으로 흘러들어간다(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참고).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내포신도시를 비롯하여 홍성군 예산군 서산시 당진시 보령시일부 아산시일부를 아우르는 지역이고 그 중심에 가야산이 우뚝 서있다.
삽교천은 오서산에서 발원하여 홍성읍 삽교읍을 지난다. 청양군 화성면의 백월산에서 발원한 무한천은 도중 예당저수지를 이룬 뒤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에서 삽교천과 합류한다. 한편 천안시 광덕면 국사봉의 갈재고개에서 발원한 곡교천(굽은다리내)도 삽교천이 바다로 빠지기 직전 아산시 지경에서 삽교천과 만나개 된다.
총 길이 약 60 km의 삽교천은 내포의 젓줄로 근래에는 삽교천 유역(홍성과 예산의 중간)으로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이 옮겨와 내포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신도시를 열게 되었다.
큰 평야가 있으면 어딘가에 큰 산이 있게 마련으로 그 산이 바로 가야산이다. 가야산은 예산군과 서산시를 가르는 내포지역의 진산이니 이 산을 중심으로 볼 때는 내포지역은 삽교천으로부터 가야산을 넘어 서북쪽으로 좀 더 확장이 되며 서산 태안과 당진까지를 아우른다.
가야산은 구월산 마니산 오서산 유달산과 더불어 서해오악이라고 불리는 명산으로 같은 이름의 해인사가 있는 합천 가야산에 비하면 높이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서해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석가봉 석문봉 옥양봉 등이 병풍처럼 버티어 서있고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천하명당 남연군묘가 있고, 그 산자락에는 예술미학적으로 경주 석굴암을 능가하는, 일명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 삼존석불이 있어 합천의 가야산에 견주어 전혀 꿇릴 것이 없는 명산이다.
삽교천 유역은 예당평야라는 드넓은 충적평야가 전개되는데 이곳은 충남은 물론 수도 서울의 아침저녁 식탁에 먹거리를 공급할뿐 아니라 주변에 수덕사 임존성 추사고택 현충사 등의 사적지와 덕산온천 도고온천 예당저수지 삽교호 등의 관광명소가 있다.
내포의 바깥은 아산만으로 단군 이래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최종적으로 결판난 역사의 현장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나당연합군이 이곳으로 들어왔고 구한말 풍운의 먹구름이 일 때는 청일전쟁이 터진 곳이다.
그러나 내포가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천주신앙이 가장 먼저 뿌리내리고 그 못자리 역할을 한 데 있다. 신앙의 요람으로 발돋움하도록 그 첫 삽을 뜬 분이 바로 이존창(루도비꼬곤자가)(아호: 단원)(1752-1801)이다. 농가 출생이었지만 ‘내포의 사도’라는 존경스런 칭호를 받는 그는 경주이씨 집안으로 일찍이 초기교회 창설자의 한 분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김범우로부터 천주신앙을 전수받고 가성직단(假聖職團)(1786년부터 약 2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정식 사제는 아니었어도 임시로 미사를 집전함)의 일원이 되어 내포지방 전교의 사명을 다 하였다.
이존창의 인간적 매력과 독특한 전교방식은 이 지역에 열심한 신자들을 많이 나오게 했고 예산군 신암면 일대와 당진군 합덕면을 중심으로 교세가 불꽃같이 일어나 박해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안드레아)의 집안(당진군 합덕)도 이존창으로 인해 전교가 되었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었고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에게 공작금을 주어 중국 북경에 가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영입해 오도록 한 것도 오로지 그분의 공적이었다.
이존창은 1791 신해박해 때 붙잡혀 갖은 고문과 문초를 이기지 못하고 천주교는 요술이라 하며 외형상 배교를 하게 되는데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부여군 홍산이라는 데로 가서 숨어살면서 더욱 뜨겁게 포교를 하다가 1795년 관리들에게 다시 체포되어 천안에 연금되었다가 1801년 서울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충청관찰사가 있는 공주로 압송되어 황새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희광이(막난이)가 휘두르는 칼에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희광이의 여섯 번째 칼날에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8개 본당 중 5개 본당이 충남에 있었다고 하니 그 교세를 짐작할 수 있으며, 내포일대는 어느 곳보다도 신앙심이 강하여 순교자도 많았다. 이존창의 조카딸은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邦人)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이고 또한 이존창의 생질(甥姪)의 손자가 바로 최양업 신부이니 피의 순교자 김대건과 땀의 순교자 최양업이 모두 이존창 루도비꼬곤자가의 후예이다.
이존창의 생가는 신례원 삼거리에서 합덕 쪽으로 가기를 10리 쯤 되는 곳에 있고 좀더 가다보면 내포의 모(母)성당이며 두개의 첨탑이 이채로운 합덕성당이 있고 그 어간에 신리 교우촌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제5대 대목구장(代牧區長)(敎皇代理監 牧區長) 다블뤼 주교가 주석하던 곳으로 복원된 당시의 주교관이 있고 인근에는 순교당한 손씨 일가들의 줄 무덤을 찾아볼 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공세리성당
아산만의 갯물이 깊숙이 밀려들어온 곳, 그곳을 남북으로 연결한 아산만방조제, 그 남단 낮은 언덕에 남쪽을 향해 한 장 또 한 장 붉은 벽돌을 쌓아 조적식으로 건축한 고딕식건물의 성당이 마치 있기 힘든 기적이라도 일어난 양 우뚝 서 있다. 한국관광공사(KOTRA)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지정했다.
아산만의 푸른 물이 하늘 위로 비쳤음인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하늘색이 참 좋고 주변의 너른 농경지도 우리를 먹여 살릴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겠으니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옛날 이곳은 충남 일대의 조세공물(租稅貢物)을 한양으로 가져가기 위해 집적해 놓던 곳이었단다. 지금부터 약 120년 전 이곳 1만여 평의 공세창고(貢稅倉庫)터에 프랑스에서 온 에밀 드비즈 신부가 주관하여 이런 아름다운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크고 웅장한 것은 아니지만 완벽한 균형미에 건축재가 주는 아름다움을 더하였고 이를 에워싼 3백년이 넘은 수목과 울창한 수림들에 뒤덮여 성스러움과 신비감을 최대한 자아내고 있다.
꽃의 싼타 마리아 대성당(피렌체)이나 싸크라쾨르(빠리) 성당에 비해서도 그 아름다움이 더하게 느껴지니 그 어려운 박해의 시기에 어찌 이런 주님의 집을 이 땅에, 그것도 서울에서조차 멀리 떨어진 내포의 초입에 지어놓았을까 그저 고맙고 감탄스럽기만 할뿐이다.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4번지에 있고 도지정문화재로 되어 있다.
방인 최초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고향 솔뫼성지
솔뫼는 합덕성당과 멀지 않은 거리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고향이며 탄생지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계는 김진후-김택현-김제준-김대건으로 이어지며 증조부(김진후) 종조부(김한현) 부친 (김제준)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 바로 솔뫼이다. 이 집안 전체로는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김대건 신부는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최초의 가톨릭 유학생이었으며 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고 조선의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만민평등과 아시아의 화폐개혁까지 연구한 선각자였다.
좀 더 남으로 가면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月內里)에 최양업(토마스)신부와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성인의 생가지(새터=新垈)와 무명 순교자 37기(원래는 40기)의 줄무덤이 있다. 경주최씨인 최경환의 가계도는 최상진-최인주-최경환-최양업으로 이어진다. 최경환 성인의 부친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최양업의 할머니)를 모시고 박해를 피해 당시 홍주(홍성) 땅이었던 다락골에 들어와 땅을 개간하며 살았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촌수를 따지자면 이존창 집안을 고리로 연결된 진외육촌간이다. 다락골은 원래부터 경주최씨 집안의 세거지였는데 서울에 살던 최경환이 수난을 피하려고 찾아들어온 곳이다. 다락골 줄무덤의 주인공들은 인근 홍주감영이나 공주감영에서 순교한 신자들 또는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신자들이라 추측될 뿐이다. 당시 행정관청으로는 공주(인근에 유명한 황새바위가 있다)와 홍주(홍성 고암리가 대표적))가 컸고 대흥 덕산 등도 관아가 있어서 그런 곳에서 주로 고문과 순교가 일어났다. 해미는 일반 행정관청이 아니고 서해바다를 지키는 군영이 있었기 때문에 잡혀온 신자들을 군률에 의해 더욱 가혹하게 다루었다.
최경환의 부인이 바로 신심 높기로 유명한 이성례(마리아)이다. 이성례는 홍주 출생으로 다락골의 최경환에게 시집와 장남인 최양업을 낳았다. 그 후 이리저리 쫓기다가 경기도 안양의 수리산 병목안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으나 포졸들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풀려났다가 결국은 다시 잡혀 치명 순교하고 말았다.
최경환 유해는 수리산에 묻히었으나 현재는 절두산 양화진 성당에 보존되어 있고 수리산에는 그의 유해 일부로 가묘를 조성해 놓았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은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유학생이기도 하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의 순서로 유학생이 선발되었다. 그의 묘는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를 열었던 배론에 있다.
한 그루 회화나무가 증거하는 순교성지 해미읍성
해미읍성 한 가운데에는 연륜이 300 살이나 된 회화나무(호야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별로 볼품은 없지만 그러나 이 나무는 18세기 말 서산 일대에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철사줄에 묶인 채 순교당한 매달음목이다. 원래 회화나무는 선비들이 즐겨 심는 선비의 나무인데 봄이 와도 아주 늦게서나 잎을 틔운다.
500년 역사의 읍성, 성안의 넓이는 6만평, 둘레가 1.8 km이다. 우리나라의 성은 대개 강이나 산을 끼고 축조되었지만 해미읍성은 평지의 성이다. 서해에 왜구가 창궐할 때 해안을 방어하던 해군기지(naval base) 즉 군영이었다. 조선 초의 이방원(태종)도, 그 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서해바다를 지키던 때가 있었다. 읍성에서 제일 높은 청허정에 오르면 뒷산 10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천수만의 바람을 맞아 시원하게 흔들리며 쏴하고 시원한 솔바람소리를 낸다.
읍성에서 걸어 15분 쯤 되는 곳에 해미성지가 있는데 132위의 순교자 명단이 새겨 있다. 죽임의 방식에는 교수 참수 자리개질 생매장 등이 있어 지금도 그때의 참혹한 정경 그대로 자리개돌 진둠벙(죄인둠벙)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여숫골은 신자들이 외치는 ‘예수 마리아’를 ‘여수머리’로 들은 탓에 생긴 이름이다. 바닷가 가까이 끌려와 죽임을 당한 신자들, 그 1.5 km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을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다. 해미성당이 부근에 있고 여기서 한참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천항(광천 아래)의 갈매못 성지가 있다.
(2014. 05.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