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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양광장 (밀양문화예술,남부권 신국제공항, 밀양지리, 역사) 원문보기 글쓴이: 만광
복수초(미나리아재비과,꽃말 : 영원한 행복) 복수초를 찿은 꿀벌들의 모습을 담아 봅니다.
(사진 : 송산서원 - 3월 9일 촬영)
(사진 : 재울밀양향우회)
재구밀양향우회 2013 정기총회에 초대합니다 !
1. 일시 : 2013. 3. 27(수)오후 7시 10분 2.. 장소 : 그랜드호텔 다이너스티홀(2층) (지하철 2호선 범어역 3번출구) 꼭 참석하시어 좋은 음식과 좋은 사람 만나시고 좋은 선물 받아가세요!- 재구밀양향우회 회장-
(사진 : 밀양사람- 토우 김종삼 도예전 3.22~28 밀양시립도서관)
1.제사고개는 밀양시 교동의 밀양대공원 뒷쪽에 나 있는 길로부터 공동묘지가 있는 왼편의 야트막한 고갯길에 있다. 그 노폭은 5내지 6미터 정도이고 비교적 평탄하다. 산마루 길옆에는 행인들이 돌을 던져 쌓았던 돌무더기가 있다. 아마도 옛적 행로의 무사 안전을 빌며 그랬을 것이다.
현재는 통행이 없는 관계로 군데군데 고목이 쓰러져 있어 통행이 어렵고 내리막 마지막 부분에는 대추나무를 심어 놓아 세월이 지나면 아예 길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길은 완전하게 남아 있는 영남대로 구간중의 하나이고 많은 애환과 역사를 간직한 곳이며 제사고개의 설화도 간직하고 있다.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복원할 수 있으므로 얼마 남지 않은 영남대로 구간을 복원했으면 한다.
이 제사고개의 초입과 끝에는 일제가 박아 놓은 無裝荷 케이블을 묻어 두었다는 표시인 세멘트 말뚝이 박혀 있다. 無裝荷란 전신. 전화용 케이블에 인덕턴스(저항)따위를 가지는 회로소자를 넣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장거리용 케이블에는 裝荷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제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에 걸쳐 일본에서 만주까지의 무장하케이블을 鋪設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조선은 물론 만주, 중국까지를 장악하기 위한 통신시설을 설치한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제의 치밀하고도 계획된 침략과 착취를 위한 하나의 명백한 증거로서 보존의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나름대로 대책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이런 시멘트 말뚝은 시립박물관 뒷쪽으로부터 화장장으로 내려 가는 산길을 따라 4 개나 더 있다. 그 중 하나는 말뚝이 뽑힌 채 뒹굴고 있다. 하루빨리 방책을 마련해야 하리라 본다.
화장막으로부터 추화산 등산로로 가는 길 중간에는 매우 오래되고 큰 모과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매우 오래된 것은 맞지만 국제신문의 기사처럼 800년 된 것같지는 않다. 물론 장소에 따라서 성장속도가 다르지만 400년 되었다는 무안면 대법사에 있는 모과나무보다 굵지 않아 보인다. 대략 짐작으로 약 300년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래도 오래된 나무이므로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했으면 한다. 특히 이 나무는 영남대로상은 아니지만 평민, 상인들이 양반이나 관리를 피하여 다니던 이면도로 변에 있으므로 그들의 애환을 함께했다고도 보여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역시 보호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글: 밀양사람 -12년 4월 7일)
<제사고개 이야기>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무거운 소금짐을 지고 고개(지금의 교동 공동묘지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던 소금장수는 고개마루에서 등에 지고 있던 소금짐을 내려 놓았다. 등에 땀이 날만큼 무거운 짐이었다.
날씨가 쌀쌀하긴 했지만 다음날 소금을 팔 욕심으로 밤길을 걸은 탓에 피곤하여 잠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잠깐만 쉬었다 가야지" 소금장수는 밤중이긴 해도 한걸음이라도 더 걸어가야 다음날 청도장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곧 떠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피곤하여 소금짐에 기대어 쉬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소금장수는 곧 일어나야 한다고 마음을 다져 먹고 있을 때 맞은편 고개 아래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헐레벌떡 이 쪽으로 올라 오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고개 마루를 향해 이 쪽으로 올라 오고 있는 노인을 소금장수는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금장수앞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노인은 닭 우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마루에서 밀양쪽을 내려다 보며 길게 숨을 들이키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곁에 있던 소금장수가 이를 이상히 여겨 "노인장, 왜 그러십니까? 갈 길이 아주 바쁜 모양인데요?"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노인은 한숨만 내쉴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큰 걱정이라도 있는 듯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는지요?" 하고 물었다. 소금장수는 어떻게 하든 노인을 도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소금장수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돌리며 " 금년에도 틀렸구먼. 오늘이 내 제삿날인데 만주서 여기까지 밤새워 왔지만 금년에도 이 고개까지 오니 닭이 우는구려. 어쩔 수 없이 또 돌아 가야겠구려" 하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니 제삿날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오. 생전에 먹고 살기 위해 처자를 데리고 만주땅에 갔었는데 거기서 몇년 되지도 않아 나는 병이 나서 죽고 말았소. 처자식은 만리 이역에 나를 묻어 놓고 도로 밀양으로 내려 가 버렸지요.
나 혼자 타향땅에 묻혀 있는데 제사때마다 이렇게 달려 오지만 이 고개만 오면 닭이 울어 버려 돌아 가곤 했지요. 그래서 저승처사에게 하루 먼저 보내 달라고 졸랐지만 저승의 법으로는 제사 당일날 출발 해야 한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소이다. 고개마루에서라도 제사를 지내면 내가 음복할 수 있는데...." 노인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만 쩝쩝 다셨다. "그럼 노인장의 성함은 무엇이며 처자식은 어디에 있는지요?" 소금장수의 물음에 노인은 자신의 이름과 처자식의 주소를 일러 주고는 왔던 길을 도로 가 버렸다.
찬바람이 휙 몰아치자 소금장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 보았다. 금방까지 곁에 있었던 노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잠든 사이에 꿈을 꾼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금장수는 날이 밝자마자 꿈 속에서 노인이 일러 준대로 그 집을 찾아 가 보았다. 주인을 만난 소금장수는 지난 밤의 꿈 이야기를 모두 들려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집에서는 간밤에 만주에서 돌아 가신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그 후부터 그 자식들은 부친의 제삿날이 되면 집안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고 제수를 차려 이 고개마루에서 제사를 모시고 돌아 가곤 했다. 그 후 사람들이 이 고개를 제사고개라고 불렀다. - 밀양시 내일동 孫正穆 진술 - 이상은 밀양시가 1983년에 발간한 "미리벌의 얼"에 실려 있다.
2.제사고개 길이 정비중이다. 예전의 잡목과 쓰러진 나무를 제거하여 비교적 넓은 길을 닦아 놓았다. 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無裝荷線 매설표지석 2개도 그대로 남아 있다. 혹 그 중요성을 모르고 옮겼는가 걱정했는데.... 다만 고개 정상부의 적석을 흩어 주변을 메우는데 사용한 것이 아쉽다. 이것은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여행의 안녕을 빌며 한 개씩 두 개씩 던져 쌓아 놓은 것이다. 즉 이 길이 옛적 길로 사용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표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잘 모르고 흩어 버렸으니.... 다만 이 길을 정비함에 시멘트 포장만은 말아 주었으면 한다. (글 : 밀양사람 - 13년 3월 25일) (사진 : 영남대로 밀양 옛길-제사고개)
[밀양 향토사학자, 울산향토사연구회장의 탐방기] 2013. 3. 23(토) 임진왜란(壬辰倭亂) 창의(倡義) 여주이씨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진사(進士) 이경승(李慶弘)의 노모(老母)피난지 석골(石洞) “억산(億山) 병풍바위 형제굴(兄弟굴)”을 찾아서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수많은 왜적을 이끌고 한성(漢城)을 향해 북침하면서 관방의 요새인 작원관을 지나갔습니다. 박진 밀양부사의 관군 300여 명은 이 작원관에서 물밀듯 몰려오는 왜적과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였습니다. 박진 부사가 이끄는 관군은 밀양강의 종병탄을 건너 급박하게 후퇴하면서 강물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아군은 종병탄(밀양강 삼랑진읍 미전리와 상남면 평촌리를 잇는 옛 나루터)을 건너면서 군사의 태반이 수장되었으며, 밀양성(밀양읍성)으로 후퇴한 관군은 방어적 태세로 왜적과 대적했으나 또 중과부적으로 밀양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진 밀양부사는 밀양성을 철수하면서 성내에 비축된 곡식창고를 왜적에게 군량미로 내 줄 수 없어, 비분함을 참으면서 식량창고에 불을 질렀고, 그 불은 일 년을 넘게 탔다고 향토지인 밀양지(密陽誌)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은 왜적이 낙동강변이 작원관으로 통하는 길로만 밀양으로 북상하면서 침략해 왔다고 믿고 있으나, 사실은 단장면 고레로 백마산과 그 산록의 계곡(단장천)과 작원관을 통하는 두 개의 방면으로 밀양을 침략해 왔습니다.
즉, 왜적은 밀양부를 2갈래의 길을 통해 침략해 왔습니다. 한 길은 낙동강변 삼랑진의 작원관을 격파하고, 밀양강을 거슬러 올라 상남들을 질러 밀양성으로 침략해 왔고, 또 한 길은 낙동강에서 양산시 원동면의 배내골을 따라 지금의 밀양댐 수몰지의 계곡을 따라 침략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난하면서 백마산성(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바드리 뒷산)을 지키던 의병(당시 의병장은 밀양박씨)은 왜적과 싸웠으나 또 중과부적으로 무참히 패배했습니다.
밀양성을 점령한 왜적 무리와 백마산성을 점령한 왜적은 합세하여 밀양도호부를 수중에 넣고, 밀양도호부 경역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놈들은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민가와 모든 건물을 불사르고, 부녀자를 닥치는대로 겁탈하여 인륜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진(朴晉) 밀양부사가 이끄는 밀양도호부 관군과 밀양 각지에서 창의한 백성들은 왜적과 대적하다가 결국에는 밀양 동북쪽 경북 청도와의 변경인 산내면 원서리 운문산과 억산, 가지산 산속까지 밀리게 되었습니다.
왜적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던 일부 백성들은 운문지맥의 가지산, 재악산, 백운산, 운문산, 오두산, 구만산, 정승봉 등의 깊고 깊은 계곡으로 피난을 하였으며, 그 중 의병을 이끌었던 여주이씨 이경홍.이경승 형제와 밀양손씨 오한 손기양 등은 그들의 노모를 이 깊은 산중으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 진사(進士) 이경승(李慶弘) 형제는 억산 7부능선의 깊은 암굴인 형제굴에 노모를 피신시켰고,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은 노모를 운문산 7부능선상의 상운암 계곡의 정구지바위 상부 산 능선의 손가굴에 노부모를 피신시켰습니다.
밀양문화원에서는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 : 이경승 李慶弘의 백형 伯兄), 진사(進士) 이경승(李慶弘)과 손기양의 이러한 임진왜란 창의(倡義)와 노부모를 피신시킨 형제굴과 손가굴을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해, 수년 전에 밀양시의 예산을 지원 받아 창의비를 세우고, 이런 역사적 내력을 알리는 홍보 간판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원서마을 뒤편의 천년고찰인 석골사 입구의 창의비 옆에 세웠습니다.
형제굴(兄弟굴)은 임진왜란 때 밀양의 이름있는 문중인 여주이씨(麗州李氏) 입(入) 밀양파 (密陽派) 입향조(入鄕祖)인 충순위교위(忠順衛校尉) 이사필(李師弼)의 후손인 이경홍((李慶弘), 이경승((李慶弘)이 노모(老母)를 피신시킨 거대한 "병풍바위"의 암벽 속의 굴입니다. 임진왜란 창의비 옆에 세운 창의비 건립 취지문에 기록된 2개의 석굴 현장을 안내하는 내용을 살펴보니, 그 내용이 불비(不備)하여 이 2개의 계곡(운문사 상운암 계곡과 억산 병풍바위계곡)에 위치하는 2개의 역사적 유적지를 찾아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동 속에 특히 여주이씨 이경승.이경홍 형제의 노모가 피신했던 형제굴을 찾아가는 길과 그 위치를 몰라 밀양 향토사학자 저 도OO과 손OO 선생, 울산향토사연구회 김O 회장이 수년간 그 위치를 찾고자 노력했으나, 못찾고 안타까워 하고 있었습니다.
2013. 3. 23(토) 우리 3인은 꼭 찾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오전 10시 경에 석골사 입구 창의비 앞에서 서로 만나, 석골사 뒤편을 경유하여 올라 갔습니다. 산꾼들은 이 등산로가 험해서 잘 다니지 않습니다. 또 이 “억산 병풍바위계곡”(운문산 상운암 정구바위계곡 손가굴과 구분하기 위해, 이하 “억산 병풍바위계곡”이라 기록합니다)을 오르내리면서 극히 일부의 산꾼들이 이 형제굴의 사진만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찾아가는 구체적인 등산로를 기록하거나 설명하지 않아 형제굴의 존재만 이야기 할 뿐 그 위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와 반면에 손가굴은 운문산 정상과 상운암을 오르는 계곡의 주 등산로에 위치한 명소인 선녀폭포와 정구지바위 바로 위에 손가굴이 있고, 또 정구지바위 바로 옆에 손가굴을 찾아가는 안내간판을 설치하여 등산인들이 잘 볼 수 있고, 잘 찾아갈 수 있습니다.
밀양의 마을별로 지명을 소개하는 밀양지명고(밀양문화원 발행) 산내면 원서리 “서편마을”조(條)의 손가굴과 형제굴을 소개하는 내용에는 “손가굴에는 3개의 굴이 있고, 그 중에서 한 굴은 손기양이 노모를 피신시킨 굴이며, 그 왼쪽의 굴은 이경승.이경홍이 노모를 피신시킨 형제굴 이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형제굴과 손가굴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 사람들은 밀양지명고의 이 내용과 창의비 옆의 안내간판에 기록된 형제굴과 손가굴의 위치를 안내하는 내용에는 이 두 개의 굴이 바로 인접해 붙어 있는 것 같은 혼동을 줍니다.
사실 “형제굴”은 억산 7부능선의 병풍바위의 암벽 속에 있고, “손가굴”은 운문산 상운암계곡 정구지바위 윗편에 위치하고 있어, 거리적으로도 2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향도사학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실제 형제굴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였으니 일부 잘못 기록된 밀양지명고와 석골사 입구에 세워진 임진왜란 창의비 안내 간판의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밀양지와 밀양지명고를 재발행할 때는 험한 산을 오르는 노력으로 찾아낸 정확한 위치를 바탕으로 수정하기를 희망합니다. (글: 밀양광장)
밀양 영남대로복원범시민추진위원회 영남대로 옛길 걷기 1차 : 황산잔도(3.17) - 임경대
(사진 : 영남대로 밀양 옛길)
△ 제사고개로 이어지는 곳의 충혼탑 △ 밀양 대공원
(사진 : 달리는 만고강산)
밀양시산악연합회 정기산행 상주 성주봉~남산 3월31일 (일요일) 시청 앞 7시 출발산행로 : 성주봉 휴양림 주차장-암벽-성주봉-바위샘물-남산-고인돌-노송지대-주차장. 9km / 4시간~5시간 / 회비: 25.000원(하산주) (자료 : 밀양시산악연합회)
로보캅(RoboCop)
최용현(수필가)
매월 8만부가량 발행되는 협회지 ‘전력기술인’과 종합문예지 ‘한국문학예술’에 몇 년째 영화에세이를 연재하게 되면서부터 자주 듣는 질문이 생겼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뭐예요?” “재미있는 영화 좀 추천해주세요.” 처음엔, 그때그때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명화들을 추천하곤 했는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다보니 답변에도 노하우가 생겼다. 인터넷 카페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혹은 학교 친구나 후배들에게는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영화들을 일러준다. ‘빠삐용’ ‘죠스’ ‘블루벨벳’ ‘영웅본색’ ‘쥬라기 공원’ ‘타이타닉’ ‘글래디에이터’…. 그러나 묻는 사람이 지역 문인협회나 문학단체에서 만난 작가인 경우에는 아무래도 작품성이 뛰어나고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들을 추천하게 된다. ‘금지된 장난’ ‘젊은이의 양지’ ‘기적’ ‘초원의 빛’ ‘남과 여’ ‘라이안의 처녀’ ‘붉은 수수밭’ ‘시네마 천국’…. 오늘은 이들 중에서 전자에 속하는,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1987년 크리스마스이브 심야에, 당시 국내에서 최고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던 충무로 대한극장 70mm 스크린에서 영화 ‘로보캅(RoboCop)’이 개봉되었다. 겨우내 극장 앞에는 표를 사는 줄이 이어져 이듬해 2월말까지 서울에서만 46만 명이 입장하는 엄청난 흥행몰이를 했다. 아울러 비디오 게임, 만화, 장난감, 티셔츠 등 부가상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가히 ‘로보캅 신드롬’이 일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갱들에게 살해당한 한 경찰관이 로보캅으로 부활하여 복수를 하는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이다. 그런데 ‘로보캅’의 시나리오를 훑어본 감독 후보자들은 한결같이 ‘제목과 스토리가 너무 유치하다.’며 연출을 맡지 않으려 했다. 할 수 없이 네덜란드의 폴 버호벤 감독을 할리우드로 불러들여 연출을 맡겼다. 주인공인 로보캅 역을 맡을 배우로는 처음엔 ‘터미네이터’의 영웅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검토했으나, 거구인 그에게 로봇 의상을 입히면 괴물이 될 것 같아 제외되었다. 결국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니고 있으면서, 로봇 의상 밖으로 드러나는 유일한 부분인 턱이 잘생긴 ‘피터 웰러’가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다. 머지않은 미래인 2010년, 공업도시 디트로이트는 연일 흉악한 범죄가 기승을 부렸고, 시에서는 다국적 기업 OCP에 치안을 맡기기로 하였다. OCP에서는 중역 딕 존스의 주도로 강력한 로봇경찰 ED-209를 개발했으나, 시연회 때 기관총이 오작동을 일으켜 간부 한 사람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하자, OCP 회장은 ‘로보캅 프로젝트’로 눈을 돌리게 된다. 어느 날, 경찰관 머피(피터 웰러 扮)는 여경 루이스(낸시 앨런 扮)와 함께 악명 높은 클라렌스(커트우드 스미스 扮) 일당을 추격, 그들의 아지트에 혼자 잠입했다가 악당들에게 처참하게 난사(亂射) 당한다. OCP 연구원들은 숨이 멎은 머피의 몸에 티타늄을 씌워 로봇으로 만들고, 기억장치에 경찰 프로그램을 집어넣어 첨단 사이보그로 탄생시킨다. 로보캅이다. 범죄 소탕에 눈부신 활약을 펼치던 로보캅은 자신이 살해당하던 순간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내고 자신의 옛집을 찾아간다. 집은 텅 비어있고 모니터에서는 집을 팔기 위해 가족들이 만든 광고가 나오자, 로보캅은 모니터를 박살내며 마치 인간처럼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로보캅은 클라렌스 일당의 뒤를 봐주는 딕 존스를 체포하기 위해 중역실에 올라가지만, OCP 간부는 체포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기 때문에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결국 ED-209에게 무참히 얻어맞고 지하로 쫓겨나는데, 거기서도 딕 존스의 사주를 받은 경찰들의 무자비한 총탄세례로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동료 루이스에 의해 구출된다. 루이스의 도움으로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한 로보캅은 강력한 화력의 기관포를 입수한 클라렌스 일당의 습격을 받게 되지만, 이들을 차례차례 처치하고 OCP 본사로 돌아온다.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ED-209를 단숨에 요절낸 로보캅은 곧바로 중역회의장으로 올라가 딕 존스가 획책한 음모를 담은 영상을 보여주고, 그를 사살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폴 버호벤 감독은 사이보그 경찰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박진감 넘치는 역동적인 화면에 담아냈다. 그리고 잔혹한 폭력 사이사이에 허를 찌르는 위트를 삽입하는 등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이 영화 한 편으로 당당히 특급상업영화 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어 ‘토탈 리콜’과 ‘원초적 본능’을 히트시켰고…. 이 영화는 무더운 여름에 촬영됐는데, 로보캅 의상이 두꺼운 철판이어서 의상 속의 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피터 웰러가 땀을 너무 많이 흘리는 바람에 결국 의상 안에 냉각장치를 설치했다고 한다. 또 로보캅 의상을 다 입고는 운전석에 앉을 수가 없어서 운전 장면은 상반신만 로봇 의상을 걸친 미디엄 쇼트(medium shot)로 찍었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로보캅에 맞서는 범죄조직의 두목 클라렌스 역을 맡은 커트우드 스미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가 이 영화의 성공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자칫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로보캅의 싱거운 원맨쇼로 끝날 수도 있는 이 영화의 긴장감을 살려내고 끝까지 균형을 유지하게 한 일등공신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머피가 악당들에게 살해된 것은 유태인들에게 희롱당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떠오르게 하고, 로보캅으로의 탄생은 예수의 부활을 연상시킨다. 동료 여경 루이스는 막달라 마리아를, 클라렌스와의 최후의 결전에서 로보캅이 공사장의 물웅덩이를 걷는 것도 보기에 따라서는 물 위를 걷는 예수를 생각나게 한다. 우연일까? 마지막에, 자신을 잡고 인질극을 벌이던 딕 존스를 OCP 회장이 해고하자마자 로보캅이 사살한다. 이때 회장이 ‘총 솜씨 좋군. 자네 이름이 뭔가?’하고 묻는데, 로보캅이 ‘머피’라고 대답하며 씩- 웃는다. 순간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던 것을 보고 덩달아 박수를 치던, 20여 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글 : 밀양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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