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아흐래째 날(9월 1일)
(26)
서남동길 외출 1막 1장 : 연화도 불교성지 순례
대전-통영의 고속국도와 거가대교의 개통 이후 통영과 거제가 내륙에 바싹 붙어있지만
예전에는 해상교통 의존도가 절대적인 지역이었다.
1970년대 초부터 여수~부산 간의 여객선(특히 엔젤,비너스호)을 이용할 때 충무(당시)
에 들렀고 육로가 여전히 열악했던 80년대에도 종종 방문했던 지역이다.
정권의 정략으로 궁벽한 어항에 중앙 굴지 은행의 지점을 개설했는데 연전에 고인이 된
내 친구 M이 그 일을 맡은 점포장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통영별로 때 비교적 많이 살펴보고 다녔으나 섬은 거의 미답상태다.
한산도, 비진도, 사량도 외에는.
통영산(産) 산지기님은 통영별로 때도 마음을 썼으나 여의치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만사제치고 왔을 것이다.
새벽 6시보다 빨리 약속장소(여객선터미널)에 갔는데 이미 와있는 그.
심야버스에서 하차해 직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함께 할 통영의 첫 코스 연화도 행 첫배를 기다리는 시간에 아침식사를 했다.
그도 나와 비슷한 소식체질이지만 섬길에 대비해서 그랬을 것이다.
드디어 서남동길 외도가 시작되었다.
연화도의 들머리는 통영여객선터미널, 연화도 산행의 들머리는 연화도 선착장.
각 들머리를 떠난 시각은 아침 6시 30분과 8시 30분이다.
통영발 연화도 뱃길 24km.
네줄기 파문을 남기며 정남으로 시원스레 바다를 가르는 여객선.
지겹도록 바닷바람을 안고 등지고 걷고 있지만 바다 가운데서 맞는 바람은 별미로웠다.
통영시 관내 유인도 중에서 제일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한 섬이라는 연화도.
연산군(1494~1506)의 억불정책으로 이 섬으로 피신한 도인이 제자들과 산봉우리 밑에
토굴을 파고 부처님 대신으로 전래석에 예불을 드리며 수행하다가 세상을 떴다.
도인의 유언대로 수장하였는데 그의 몸이 한송이 연꽃으로 승화했다.
그래서 도인과 섬이 연화(蓮花)로 불리게 되었단다.
부둣가 가게에 배낭을 맡기고 홀가분한 몸으로 출발했다.
초입은 등산로라기 보다 산책로에 다름 아니다.
정상부에서는 아미타대불과 바다를 바라보라는 정자가 기다리고 있다.
바다를 응시하는 아미타와 망해정(望海亭)의 중생은 같은 마음일 것이다.
화평을 바라는 마음.
해불사수(海不辭水)!
어떤 물도 물리치지 않는 바다의 너그러움이여!
연화봉 정상을 내려서면 도인의 토굴과 사명대사의 토굴이 격상되어 있다.
사명대사는 훗날(임진왜란때) 스승인 서산대사와 함께 승군을 모집해 혁혁한 공을 세운
승장 사명당 유정(泗溟堂惟政)이다.
바닷가 사면의 보덕암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5층석탑과 석가여래진신사리오층탑건립
대공덕비(釋迦如來眞身舍利五層塔建立大功德碑)가 있다.
외호천추덕(巍乎千秋德/오래오래 길이 빛날 높고 큰 덕)
유심자기망(有心者豈忘/뜻있는 자는 결코 잊지 않으리)
소연만고휘(昭然萬古輝/오랜 세월에 걸쳐 길이 빛날)
사공야불멸(斯功也不滅/그 공적 없어지지 않으리)
연화사와(1998년) 보덕암(2004년)을 창건한 쌍계사의 고산(杲山) 조실(祖室)이 동남아
여행중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직접 모셔왔는데 그 공을 치하하는 비다.
한데, 석가여래님의 사리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남한)에서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은 사찰은 통도사(양산), 정암사
(정선), 법흥사(영월), 상원사(평창), 봉정암(인제) 5곳이다.(순서는 남에서 북으로)
진신사리(적멸보궁)를 모시고 있다는 뜻인데 이즈음 진신사리 모시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 날로 늘어나고 있다.
공급처가 궁금하다.
보덕암(普德庵)은 산에서는 단층이나 바다쪽에서는 위치에 따라서 2~5층으로 보이는
거대한 요술 건물이다.
해수관음보살이 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며 주차장도 있다.
(본촌 선착장에서 연화사를 지나 보덕암으로 넘어오는 차도가 있다)
주차시설이 없는 암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차가 올 수 없다는 뜻이니까.
여기까지는 급부상한, 이른바 신흥 불교성지의 일부를 순례한 것이라 할까.
1막 2장 : 용머리 산행
용이 대양을 항해서 헤엄쳐 나가는 형상이라는 용머리.
통영의 제8경 용머리 등산을 바야흐로 시작했다.
만물상을 방불케 하는 괴암들이 딴지를 걸기라도 할 듯 인상쓰고 있으나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편하게 진행할 수 있다.
목전의 용머리로 가는 협곡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있다.
다리 옆 깎아지른 협곡 아래 바닷가가 지저분하다.
강태공들 외에는 접근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각성이 요망되는 현장이다.
일명 돼지목이라는 협곡에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총 길이 46m인 현수식 다리의 생일(준공일)이 세(3) 11이다.
(20)11년 11월 11일.
준공식을 11시에 했으면 네(4) 11이 되겠다.
우연일까 의도적으로 맞췄을까.
시(時)를 잘 타고 태어나야 한다지만 이즘에는 인위적 조정이 가능하므로 의미 없다.
내 아들은 10월 2일 자정이 임박해서 날뻔 했는데 개천절에 맞추겠다며 의사가 태업(?)
함으로서 10월 3일생이 되었다.
며칠, 몇시간 조정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동두(東頭), 마을 이름이기도 한 동 머리 또는 바위 4개가 점찍듯이 배열되어 있다 해서
네바위섬에 접근하기 까지 산지기님은 주변의 섬 안내를 열성적으로 했다.
동쪽 끝으로 소매물도, 서쪽의 큰 섬 욕지도, 10시방향의 비진도 등.
그러나 늙은이의 기억력은 몸으로 부딪쳐 본 일 외에는 거의 간직하지 못한다.
비진도의 검은 돌들이 부딪쳐서 내는 멜로디 외에는 모두 까먹었다.
크고 작은 물체가 유영하고 있는 듯이 보이며 유난히 온순한 망망한 쪽빛 바다.
이 바다 위를 곡예하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의 시간.
동일 현상의 반복으로 인한 권태에서 해방되는 것은 역동적 재충전을 의미한다.
산지기님께 심심한 사의를 드리며 동두마을 도로에 내려선 시각은 11시 29분.
거의 정확한 3시간의 산행을 마쳤다.
동두마을의 농사(생업)는 양식.
가두리양식장이 즐비한 마을 앞 U자 형 바다.
무관심과 무식은 사촌쯤 될 것이다.
나는 이때껏 '가두리'를 몰랐으니까.
설명하는 산지기님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선착장 귀로에 연화사에 들렀다.
15년 미만의 짧은 역사에 대형사찰로 안착했으며 거대 암자를 거느린다면 고산 스님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의아스러운 점이 있다.
사찰 이름이 洛迦山蓮華寺(낙가산연화사)다.
연화도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서도 '蓮花'島(연화도)와 '蓮華'寺(연화사)가 왜 다른가.
해명이 없다.
2막 1장 : 통영을 살려야 한다(미륵산유감)
산지기님이 연출하는 2막의 무대는 미륵산.
용화산(龍華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는 우리나라의 100대 명산 중 하나,
높지 않으면서도 위엄을 보이는 통영의 진산.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 바위굴이 있고
고찰과 약수, 봄 진달래와 가을 단풍이 빼어나 명산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
산정에 오르면 한려해상의 다도해 조망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며, 청명한 날
에는 일본 대마도가 보인다>는 통영시의 자부심인 산.
통영 여객선터미널로 귀환해 곧바로 미륵산 케이블카역으로 갔다.
동두마을에서 가두리를 알았다면 미륵산에서는 국내의 첫 케이블카 탑승 체험을 했다.
오후 3시에 임박해서 국내 최장(1975m)이라는 케이블카로 상부 터미널까지 올라간 후
산지기님의 배려로 배낭을 바꿔메고 해발 461m 미륵산(彌勒山) 정상에 올랐다.
장애인과 노약자에게 케이블카는 산에 오를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미륵산 정상부까지 좀더 지혜로운 배려가 필요한 것 같다.
환경단체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는 케이블카 설치에 대해 늘 긍정적이다.
자연은 신체적 건강자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병약자였고 장애인이었을 때 한이 맺혔던 것이 사실이지만 건강을 빼앗거나 장애
인을 만드는 불행이라는 포악자는 사람을 고르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약자 편에서 사고하고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지혜롭게 관리하면 자연을 해치기 보다 보호가 되고 오히려 오염을 줄일 수 있다.
자기 힘으로 오른 건강인들과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정상부에 올라온 약자들이 자연과
더불어 의기상통한다면 이런 분위기야 말로 역동적인 사회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훼손으로 인한 손해보다 화합, 공생을 통한 이익이 더 많을 것이다.
속말로 결코 밑지지 않으며 많이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니까.
잠시 살펴본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되지만 미륵산 너른 정상에 모인 남녀노소의 해맑은
표정에서 그 가능성이 읽혀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미륵산에서 내려다보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은 참으로 아름답다.
산양읍의 산과 산 사이에 올망졸망 들어선 마을들.
한산섬을 비롯해 바다에 둥실 떠있는 보석같은 섬과 섬들.
피비린내 진동한 전쟁을 치룬 적도 더러 있지만 정감이 넘치는 풍경이다.
통영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을 정서적으로 살찌운 정경일 것이다.
그러나 실망도 컸다.
전에 나는, 남들이 통영을 말할 때 동양의 나폴리 운운하는 것이 몹씨 못마땅했다.
심지어, 나폴리를 이탈리아의 통영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라고 할 정도로 내게 통영은
아름답고 여유로운 항구였다.
그랬던 통영이 어느 때부턴가 좁아지는 느낌이 들면서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미륵산에서 내려다보는 통영은 숨통을 죄는 것 같고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어제 실망했던, 통영 6경 남망산도 괴물이 숨쉬지 못하도록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항구라기 보다 임해공단 같고 좀 심하게 말하면 막장같은 느낌이다.
통영을 이대로 둘 것인가.
통영을 살려야 한다.
2막 2장 : 종교는 공모, 공범 관계다
산지기님에게 내려가기를 청했다.
우리는 용화사(龍華寺)로 내려왔다.
미륵산을 용화산이라고도 부르는 근거가 되는 절이란다.
미륵불은 먼 훗날 출현해 중생을 제도할 미래세의 부처다.
백두대간(부봉-포함산)에는 하늘재 양쪽에 관음리(문경)와 미륵리(충주)가 있다.
관음세계는 현세를 말하는데 반해 미륵세계는 내세를 뜻한다.
하늘재에서 일박할 때는 여차하면 관음리에서 미륵리로 이사가면 되겠다고 농담한다.
천막을 몇발자국만 옮기면 되니까.
용화회상(龍華會上)이란 아직 부처가 아니므로 보살의 신분인 미륵이 성불, 출현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갖는 법회를 말하는데 용화사가 바로 그 곳이란다.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야 오신다는 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니.
현실이 얼마나 지옥같으면 그럴까.
같은 처지인데 동정할 수도 없고.
무릇 모든 종교에서 종말사상이 없으면 팥소 없는 찐빵에 다름 아니다.
종말이라는 방망이로 두들겨야 겁을 먹고 몸도 재물도 열성적으로 바치게 된다.
기독교에서도 예수 사후에 곧 종말론(eschatology)으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2천여년에
걸쳐서 걸핏하면 나타나 세상을 휘젓는 것이 바로 그 종말론이다.
용화 겁박(?)이 잘 먹혀 재물이 쌓이는지 절을 키우느라 바쁘지만 용화사, 미륵사, 미륵
산이 팔도에 무수한데 여기 용화사도 긴장하고 있어야 하겠다.
사찰과 교회 가릴 것 없이 돈이 넘치는지 집짓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과부의 엽전 두푼은 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온갖 악행과 비리로 축재해 쥐꼬리만큼 바치면 사탄 내치듯 물리치기는 커녕 감지덕지
받으며 축복이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발행하는 종교지도자들.
악행은 더욱 탄력을 받아 더 많이 축재하고 더 많이 바치게 된다.
의도적이 아니라 해도 종교는 공모, 공범관계다.
피날레 : 고맙기 그지없는 산지기님
산지기님의 마지막 무대는 동피랑.
동호동과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라는데 어제와 통영별로때 각각 들렀던
남망산과 세병관의 중간쯤 되어선지 낯설지 않은 입구다.
시가지 동쪽의 높은 벼랑을 뜻하는 토박이 지명이라는 동피랑.
벼랑의 이 지방사투리 비랑이 피랑으로 변음되어 동피랑이 되었다는 것인데 옛 통영성
동포루(東砲樓가 여기 산정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단다.
유래는 차치하고 우리나라의 환경에서는 이색적인 구역임에 틀림 없다.
백지공간을 찾아볼 수 없도록 그림으로 도배하는 스페인이라면 전혀 이상할 것 없지만.
'한국의 몽마르트'라는 표현도 있으나 적절치 않다.
몽마르트 거리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파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를 그대로 옮겨놓아도 통영땅이 파리로 바뀌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문화란 환경에 민감한 나무와 같은 것이라.
주인공들이 낙서족(落書族)과 다른 격조에 안도되나 미래는 밝지 않다.
(낙서족의 침투를 막지는 못했지만)
호응도가 높다 해서 안주를 고집하지 말고 과감한 변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호기심과 호감은 다르다.
호기심을 호감으로 바꾸고 나아가 팬(fan)으로 끌어올리려면 그래야 한다.
팬이 없으면 호흡을 할 수 없는 것이 대중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국의 미대생들이 집결, 개발을 저지했다는 것은 미시적 판단의 실력행사다.
통영시 당국자들의 고민도 깊을 것이다.
천재지변은 고사하고 사소한 인재에도 대책이 없는 무방비, 위험지역을 마냥 방치할 수
없으며 자칫 계륵(鷄肋)으로 인해 무능 무력하다는 덤터기를 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동포루의 복원 예정 안내판이 서있다.
복원을 계획하는 시 당국과 공존, 상생의 길을 모색해 합리적인 결실을 맺게 되기 빌며
동피랑 지역을 벗어났다.
고백하건대, 더러는 헤비급의 출입이 절로 제한될 듯한 골목인 미로가 겁이났다.
산지기님이 잡은 피날레(finale) 장소는 남망산공원 입구 지근인 통영밥상 갯벌.
옥호 부제가 뜻하는 대로 통영땅의 품위와 전통을 담은 식탁인 듯.
새벽 식당의 메뉴가 근로계층을 비롯해 새벽 일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통영밥상은 통영의 식탁문화를 모르면 주문 자체가 어렵겠다.
산지기님 덕에 통영식탁의 진수를 체험하며 포식했다.
통영을 드나들기 꽤 오랜 세월이지만 늘 나그네 끼리였기 때문에 식탁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새벽부터, 특히 심야버스로 왔기 때문에 수면이 절대 부족한 그를 앞세워 온 종일 바삐
움직인 우리는 마침내 헤어져야 하는 시간에 임했다.
통영산이지만 통영에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바로 귀경하는 그와 통영에서 갖는 마지막
동행은 원문고개를 넘어 죽림지구의 통영종합버스터미널.
그는, 내가 통영별로 때 이용한 적이 있는(고성에 찜질방이 없어서 되돌아왔다) 터미널
인근의 찜질방(통영워터피아) 앞에 나를 내려놓고 갔다.
고맙기 그지없는 그.
한데, 돌아가는 그의 뒷 모습이 왜 쓸쓸해 보였을까.
가족의 품으로 가는 그를 두고 외톨이가 된 늙은이가 어이없는 감상(感傷/sentiment)에
빠져가고 있다니. <계 속>
첫댓글 통영 소개를 저 보다 더 잘해주신 것 같습니다.
벌써 1년전의 여행인데도 자세히 소개해 주셔서 저도 뒤돌아 보게 됩니다.
여건이 허락하는데로 또다른 섬여행을 한번 할 기회를 갖었으면 합니다.
기대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