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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신동아|기사입력 2007-09-27 12:12 |최종수정2007-10-25 15:36
월간 ‘자유’를 창간해 국사 찾기 운동을 벌인 고(故) 박창암 장군.
[신동아]
월간 ‘자유’를 창간해 국사 찾기 운동을 벌인 고(故) 박창암 장군.
김동환 연구원에게서 가지마 노보루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취재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밝혀보려던 목적은 잠시 접고,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먼저 번역 출간한 이유부터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란 인물이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유립이 이를 세상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연수와 이유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연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또 다른 일부는 “이유립이 우회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극할 요량으로 가지마에게 먼저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유립도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허위로 이유립이라는 인물을 내세웠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 시급했다.
계연수는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911년대의 사람으로 이미 고인이 됐을 것이니 이유립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립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기자는 환단고기를 펴낸 출판사를 상대로 이 질문을 던졌는데, 1996년 환단고기를 출간한 바 있는 한뿌리출판사의 권태흥 대표가 “이유립을 알고 싶으면 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을 만나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전형배 사장을 만나면서 이유립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전형배(全炯培·48) 사장은 보성고, 고려대 정외과 79학번 출신의 출판인이다. 전 사장은 1998년 창해출판사의 자회사로 ‘코리언북스’를 만들어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한 ‘역주본(譯注本)·장구본(章句本)’이라는 부제를 단 세 권짜리 ‘환단고기’를 내놓은 바 있다(장구본은 환단고기를 장과 구로 나눠 정리했다는 뜻).
5·16 반혁명 사건 연루자 박창암
그는 “환단고기와 이유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교 시절 그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지금은 간도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엔 간도가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사시간에 그는 선생님에게 “간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가 “시험을 앞둔 놈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쥐어박혔다고 한다. 국사 선생도 간도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국사 찾기운동을 펼치는 박창암(朴蒼巖·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가 펴내는 월간지 ‘자유’를 접하게 됐다. 박씨는 아호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對)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년 3월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립과 박창암의 만남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씨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그가 생각해온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박창암씨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주제어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1차적인 계기는 그가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 계기는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이유립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이유립씨는 ‘자유’지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
이를 계기로 이유립씨는 주요 언론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해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만주 지역 역사와 고토(故土) 회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전형배씨는 1979년 여름 어느날 박창암씨를 찾아갔고 그의 소개로 의정부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자일동에 있는 이유립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전씨는 경주법주를 사들고 갔는데, 그를 맞은 이유립씨는 대뜸 “술 사올 돈 있으면 책을 사보거나 책을 사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지 몰라도 전씨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모시는 시봉 노릇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이유립씨를 지원하는 일을 많이 했다.
전형배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유립이 실존인물임을 확인한 기자는 취재 폭을 확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먼저 취재에서 확인된 이유립이란 사람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유립 집안은 환단고기와 깊이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 그와 환단고기, 그리고 계연수, 가지마 노보루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이유립(李裕?·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은 5남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유·불·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李·#53078;·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반혁명사건으로 법정에 선 박창암씨와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 >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이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의 나라인지라 우리 고유의 사상을 공부해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불교식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서경(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묘청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암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의 지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불교와 선도를 공부한 것은 고려 말의 사상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세조·예종·성종 때의 고대 사서 수거령
이러한 사상적 유연성은 성리학만을 숭상한 조선시대로 들어가면서 꽉 막히게 된다. 조선은 세조와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아주 강력한 ‘고대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고대 사서’란 성리학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기록해놓은 책으로 추정된다.
1469년의 일을 기록한 예종실록에는 ‘서울에서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10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갖다 바치고, 지방에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의 관가에 바쳐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맥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과 중종 때 암행어사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고조부인 이암의 예로 볼 때 이맥의 집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사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맥은 지금은 실전(失傳)된 발해사 기록물인 ‘조대기’ 등 많은 책을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다. 그는 고대 사서를 관가에 바쳐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이러한 사서를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을 수도 있다.
조선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을 이었다고 자칭한 나라인지라, 평양에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기자 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 것은 그 후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는 한반도였다’는 ‘반도(半島)사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도사관을 형성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대륙)에 저항하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게 된다.
만주 대륙은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니라는 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맥은 일찍이 반도사관을 거부하며 대륙사관을 수용한 인물이다. 태백일사를 남긴 이맥의 손자가 조선 인종·명종 때 활동한 이방(李滂)이다. 이방은 인종 1년인 1545년 국경지방인 평안도 삭주도호부의 부사로 발령받았다. 고성 이씨 종중의 이영규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방이 삭주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것을 좌천성 인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의 문인이었던 계연수
이방은 삭주에 눌러 살며 자손을 잇게 됐는데, 그로부터 20세손이 바로 계연수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아 세상에 내놓는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데는 조선말에 활동한 또 한 명의 고성 이씨인 이기(李沂·1848~1909)가 큰 역할을 했다.
이기도 단군세기를 남긴 고려말 이암의 후손인데, 그의 선조가 전북지방으로 이주해 그는 김제에서 태어났다. 이기는 ‘호남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기는 민씨 정부를 쳐부숴야 한다며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을 만났으나 김개남과 의견이 갈려 떨어져 나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농민군이 양반을 욕보이고 민가를 약탈하자 그는 거꾸로 농민군 토벌에 앞장서 공을 세운다. 1902년부터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국가를 바로잡으려면 민족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 5적을 죽이자는 선언문과 ‘악인(惡人)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적은 ‘참간장(斬姦狀)’을 만들어 돌리다 체포돼 1년간 진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1909년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와 단학회를 세우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러한 이기의 문인이 바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이맥이 쓴 태백일사는 이기에게서 얻었다’라고 밝혔다. 계연수는, 자신의 집안에 안함로가 쓴 ‘삼성기’가 있는데 이것과 평안도 태천에 사는 백관묵 진사에게서 구한 ‘삼성기’를 합쳐 ‘삼성기전(三聖紀全)’을 만들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또한 계연수는 이암이 쓴 ‘단군세기’는 태천의 백관묵 진사와 삭주 뱃골에 사는 이형식 진사에게서 얻었는데, 두 책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고 기록해놓았다. ‘북부여기’는 범장이 지은 것인데 단군세기를 전해준 태천의 백관묵 진사에게서 얻었다고 밝혀놓았다. 이어 계연수는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자신이 환단고기로 옮겨 적었고, 홍범도와 오동진이 자금을 마련해 환단고기를 인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계연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전형배 사장은 계연수가 실존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데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란 책을 보여줬다 이 책의 ‘곤(坤)’권에 계연수가 등재돼 있는데 이를 옮기면 이렇다(사진 참조).
‘계연수(桂延壽)의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다.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년)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년)에 만주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 군데가 틀렸다. 첫째는 무술년에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간행했다는 부분인데,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묶어 환단고기를 낸 1911년은 신해년이다. 둘째, 계연수가 태백유사 등을 간행했다고 했으나 계연수는 태백유사가 아닌 태백일사를 환단고기 안에 집어넣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월5일) 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 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환단고기는 신해년(1911)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해동인물지에서 계연수가 몸을 의탁한 것으로 돼 있는 이상룡은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는 독립운동가인데, 그 또한 고성 이씨였다. 환단고기는 고성 이씨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
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이유립씨가 쓴 고대사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1970년대의 월간 ‘자유’지. >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여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남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세,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 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년)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유립씨는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데다 단단학회 대표를 자칭한 조병윤씨에 대해 파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병윤씨는 승려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단을 겪었지만 조병윤씨가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는 1948년(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이유립씨는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한자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오자가 있는데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로 이러한 오자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원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이유립 선생이 오자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선우휘 주필이 국사 문제를 놓고 이유립씨와 대담한 기사를 실은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구한 환단고기의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이 사본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한국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그러나 거기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가지마의 환단고기에서는 원문이 실려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 실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형기씨 본(本)을 구한 가지마는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풀어준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일까. 이 의문도 전형배씨가 해답을 주었다.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유립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이 원고를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환단고기에는 誤字가 있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시중에는 한때 이유립씨에게서 환단고기를 배운 사람이 이씨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주해한 것과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해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주해본이 나와 있다. 전형배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분명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 선생 필사본의 오자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이유립 선생도 알지 못한 오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씨는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군인 출신과 5공화국의 실세들이 있었다. 이유립이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년, 서점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단(丹)’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년 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80년까지 이유립은 의정부 자일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편을 안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그를 서울 상계동으로 모셨다. 의정부 시절의 이유립씨에 대해 전형배씨는 “한겨울 끼니가 없어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집이 워낙 추워서 점심때가 되면 삶은 라면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 선생은 이 얼음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으로 드시며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셨다. 어렵게 사는 것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외풍이 센 방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개천절 때 이유립은 배달문화상을 받고 제자들 덕분에 김포를 거쳐 서울 화곡동에 살게 되었다. 화곡동 시절 이유립은 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자주 강의했는데 그로 인해 군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전형배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씨의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전형배씨가 김낙천(金洛天) 고려가 사장을 만나 부탁을 하자, 김 사장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득실을 따지지 말자”며 즉석에서 이유립 문집을 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환단고기는 물론이고 ‘자유’지 등 여러 곳에 쓴 이유립의 글을 모아 5권짜리 ‘대배달민족사’ 출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에 강의를 하던 이유립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타계했다(1986년 4월18일). 그의 타계는 ‘독립유공자 이유립옹 별세’라는 제목으로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이석영씨 도움으로 강화도에 단단학회 건물 마련
생전의 이유립 선생과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개천민족회’를 이끄는 송호수 박사다. 경신년은 서기로 1980년이다.
일각에서는 조병윤씨도 이 말을 들었기에 1979년 환단고기를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형배씨는 “계연수 선생이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고 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어도, 이유립 선생으로부터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생전에 이유립은 5·16 군사정변을 예언한 명리학자이자 ‘사주첩경’ 저자로 유명한 같은 고성 이씨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씨와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유립은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이 산을 ‘마리산’으로 불렀다. 그는 이석영씨의 도움으로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 간판을 내걸었다.
이기와 이유립의 스승인 계연수는 단학회를 이끌었다.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는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후 대종교로 나가지 못한 세력이 유지한 단군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일제에 의해 폐교 위기에 몰린 단군교를 단학회에 다시 합친다는 뜻으로 광복 후 이유립이 만든 것이 바로 단단학회(檀檀學會)다. 마리산에 허름하긴 하지만 단단학회 건물을 만든 이유립 선생은 열정을 갖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지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우리말로 개천각을 묘사한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을 인류를 만든 하느님으로, 환웅을 우리 민족의 계조로, 단군은 우리 민족을 토대로 국가를 만든 시조로 그렸다. 이 때문에 이유립은 우리 민족은 환웅부터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이유립은 개천각 중앙에 환웅을 놓고 그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단군을 놓았다.
금나라 시조 모신 커발한 개천각
커발한 개천각에 모신 인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다. 중국 정사(正史) 모음인 25사(史) 가운데 하나인 ‘금사(金史)’ 등은 아골타를 고려 사람 또는 신라 사람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원(元)나라에 패망했다.
이러한 금나라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조선 중기 때 만주에서 ‘후금’을 세웠고 뒤를 이은 아들(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중국과 조선을 지배해 들어갔다. 최근 재야사학계에서는 금과 후금-청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유립은 일찌감치 금 태조를 커발한 개천각에 모심으로써 금과 후금-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아골타가 대금제국 태조인 ‘대성무원(大聖武元) 황제’라는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유·불·선에 능통했고 ‘단군세기’를 지은 고려말의 이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초상화다.>
그러나 지금 커발한 개천각과 단단학회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마니산은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고 싶어하나,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기도처를 지을 수 없다. 이러한 무속인들의 사정과 심각한 생활고에 직면한 86세의 신매녀 할머니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단단학회와 커발한 개천각은 무속인들이 거처하며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생전의 이유립 선생은 단군이 무속인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중국의 동북·탐원·단대공정과 일본의 만선사관
이유립을 추적하면서 기자의 머리에서 맴돈 의문은 ‘왜 우리 사회에서 이유립은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 재야사학계에서 거론되는 주장은 대부분 환단고기와 맥을 같이한다.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무대가 반도와 대륙이었다는 ‘대륙 사관’으로 씌어졌다. 반면 일제 때 시작된 과학적인 강단(講壇)사학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한 ‘반도사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제작된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4~20세기에 청동기 문명이 꽃핀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요하 상류에서는 기원전 25~20세기에 만들어진 청동기문명과 그 이전에 꽃핀 신석기 후기문명 유적이 발굴되었다.
중국 문명은 황하문명을 뿌리로 한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은 모두 황하나 황하 중하류의 중원(中原)을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 황하문명보다 500여 년 이상 오래된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역사학계는 요하문명도 중국 문명의 일부이고 황하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요하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치우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국의 조상이라며 ‘중화 3조당’을 지었다.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발굴되는 청동기는 황하가 아닌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다. 고인돌의 분포 역시 그곳에서 시작돼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음을 보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모는 매우 비슷하지만 언어는 전혀 다른 것을 쓰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따진다면 한국과 가까운 것은 일본이다. 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인종인데도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갖게 됐을까. 그 이유는 문명의 뿌리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인은 황하를 중심으로 무대를 넓혀갔고 한민족은 요하에서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한민족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족은 만주를 지배했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중원을 넘어 전 중국을 점령하고 티베트(서장)와 위구르(신장)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족과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중국사로 편입될 이유를 만들고 말았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책인데, 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이유립과 계연수를 실존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려 하는 것일까.
압록강은 고속도로였다
만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중국 문명에 고개를 숙이는 문명을 만들었기에 이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환단고기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계연수와 이유립은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평북)에 살았다. 계연수가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줬다고 한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줬다고 한 이형식’도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인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 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전해진 것일까.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의 이영규씨는 “조선시대 서울 경기·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평양과 전라 경상 충청까지 한양의 권력이 철저히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리면 그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북 지방은 다르다. 그곳은 국경지역인지라 한양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평북은 귀양도 보내지 않던 곳이니 관가의 영향력이 작아 환단고기 류의 사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유립이 태어난 삭주엔 압록강이 흐른다. 지금은 수풍댐이 있어 압록강이 넓어졌지만 댐이 있기 전엔 그리 넓지 않았다. 댐이 건설되기 전 삭주 지역의 압록강 폭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하구 폭과 비슷했다. 삭주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길림성의 집안(集安) 지역을 만날 수 있다.
철도나 도로 같은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배를 만들 수 있게 된 신석기 시대 이래 ‘고속도로’ 기능을 해왔다. 평북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배를 저으며 수시로 고구려 유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것을 본 조선인들은 만주를 무대로 한 대륙사관을 갖게 됐을 터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을 심적으로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 문서
중국은 25사를 비롯한 방대한 역사서와 사서오경을 필두로 한 유교 경전, 그리고 음부경을 비롯한 도교의 경전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 ‘풍토기(風土記)’ 같은 수많은 책이 신도의 경전이자 일본 고대사를 적은 역사서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잦은 병란으로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서와 경전이 멸실된 상태다.
교토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로 꼽는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뒤편의 정창원(正倉院)은 고대 일본의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잖은 학자는 정창원에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우리 민족이 만든 자료들도 보관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을까. 문서를 공개하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일본은 100여 년 전 만주와 조선을 그들의 역사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만·선(滿鮮) 사관’을 만들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만주국을 세웠다. 만선사관으로 압축된 일본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꺾이긴 했지만 일본 우익들은 이를 다시 내세우려고 한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없는 시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펼쳤다. 그리하여 하나라와 은나라는 물론이고 3황5제 시절까지도 역사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고구려가 있던 만주를 중국의 역사 공간으로 끌고 오는 (세칭)서남공정과 동북공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비롯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탐원(探源)공정도 펼치고 있다.
소중화 사상이 판치던 시절 환단고기 류의 사서는 인쇄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필사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위서 시비를 받는다면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에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기자는 이유립은 실존인물이고 그가 남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는 것, 오형기씨 필사본에는 오자가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학자들의 임무
그렇다면 이젠 학자들이 보다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한다. 환단고기 실증 작업은 북한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북한에는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환검(1대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묘향산에는 단군사라는 사당이 있다.
과거 북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요하에 있었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최근에는 평양의 단군릉 건립을 계기로 고조선은 대동강에 있었다는 쪽으로 역사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황하문명이나 요하문명과 구분되는 대동강문명을 만들어, 김일성-김정일 체제 구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의 연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위축된 북한 사학을 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강단(講壇)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환단고기 연구를 피해간다면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만선사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소중화 류의 반도사관이 환단고기 류의 대륙사관을 억누르고 있다.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