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조선 9월호에 장장 12쪽에 걸친 인터뷰 기사입니다.
이 글을 읽어보신 어떤 선배님은 김영도고문님에대해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이었다. 인격의 훌륭함에대해 소개를 소홀히 했다라고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인터뷰할때 당연히 김영도고문님이 이런 훌륭한 분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여기서 김영도 고문님을 단순 번역가라고 언급한게 신경쓰이기도 했지만 이 인터뷰 대상은 저이고 산악계 인물로서 인터뷰가 아니라 장서가라는데 주안점을 둔 인터뷰이기때문에 이 글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문장표현과 어투도 저의 어투가 아니고 제가 사전 원고를 검수한것도 아닙니다. 또 인터뷰 글의 특성상 "제가 잘났다" 라고 표현하게되어 있음도 양해바랍니다. 추석연휴 끝나고 선배님께 안부전화드렸다가 저의 뜻과 다르게 이런 이유로 혼좀 났습니다. ㅎㅎㅎ
이 사람의 書架 ⑥ 산악 서적 장서가 邊起兌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山에 미친 사람, 山 책에 미친 사람
글 : 河周希 月刊朝鮮 기자 사진 : 徐炅利 月刊朝鮮 기자
⊙ 산악 서적만 5000권 이상 보유, 책 구입에 5억원 이상 쓴 산악 서적 장서가 ⊙ “연간 수십 명 사망사고 일어나는 일본 알프스에서도 취사·흡연 가능, 규제만 하지 말고 “ 개인에게 책임 돌려줘야” ⊙ “우리 선조들 유람 문화, 서양의 알피니즘(Alpinism)과 맞닿아 있는 고귀한 탐험 정신
”邊起兌⊙ 57세. 동국대 경영학과 졸업. 한양대 경영대학원 석사.⊙ 前 한국애서가클럽 회장, 現 (사)대한산악연맹 부회장,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교장.⊙ 도서출판 하루재클럽 대표, 경안건업 대표.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도심 속을 헤맨다. 주소를 들고 더듬대다 도착한 곳은 압구정의 한 건물. 전화에서 알려준 대로 6층으로 올라가니 그렇고 그런 사무실 풍경이 펼쳐진다. 장서는 어디에 있을까 둘러보다 변기태 대한산악연맹 부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손짓을 따라 들어가니 사무실 한쪽에 그만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별천지였다. 창문이 있는 쪽을 제외한 삼면이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도 그냥 평범한 단행본들이 아니었다. 누렇게 변색되기도 한 고서들이 빼곡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옆방에는 책장도 모자라 바닥에 놓인 상자에도 책이 가득했다. 그저 책을 좋아해 산에 관한 책을 모으는 사람이라고만 듣고 갔는데 잠깐 훑어봐도 그 수준이 아니었다.
산악 관련 서적 규장각보다 많이 보유
변 부회장은 30여 년간 산에 관한 서적과 원주 변씨에 관한 고서적을 수집했다. ―이게 다 무슨 책입니까? “저는 두 종류의 책을 수집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산을 둘러보고 쓴 ‘유산기’와 족보에 관한 책입니다. 제 姓氏인 邊씨에 대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는 제가 제일 많이 갖고 있습니다. 족보를 공부하다 보니 역사와 문명사에도 관심이 생겨 그 분야도 보고 있습니다.”
―전부 몇 권 정도 되는 겁니까. 산에 관한 책은 그렇다 쳐도 족보 책을 수집한 계기가 있습니까? “10년 전에 대략 세어보니 산에 관한 책만 약 5000권이었습니다. 그 후로 늘었겠지만 요즘에도 누가 물어보면 5000권이라고 대답하지요. 족보에 대한 관심은 책을 수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한국애서가클럽’이라고,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일종의 수집가 모임인데 고서 전문가들, 고서 판매상들, 학자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오래된 모임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모으는 사람들이 회원입니다. 예를 들면 정년퇴직 후에 기생에 관한 책을 모아 연구를 하는 분이 있기도 합니다. 회원 거개가 책이 많으니 고충이 많아요. 임대료 싼 사무실을 겨우 찾아서 입주했는데, 책 나르는 거 보고 건물주가 그 자리에서 계약을 파기한 일도 있어요. 수집을 하다 보면 병이 점점 깊어지는 거예요. 고서로 눈을 돌립니다. 그러다 보니 고서에 대한 정보 교환이 활발해요. 제가 변씨잖아요. 변씨에 대한 고서만 나오면 저한테 가지고 오는 거예요. 변씨에 대한 자료는 제가 제일 많을 겁니다. 고전번역원의 학자들에게 번역을 부탁해 어떤 내용인지 공부를 했어요. 제가 오래전부터 문중 일도 많이 해왔거든요. 문중 어른들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저는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좀 다르지요. 족보 공부가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나라 성씨 500개 중에 250여 개가 중국 기원 성씨예요. 중국에 있는 성씨를 사칭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아니라는 학자도 있어요.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성씨의 절반가량이 자신들의 시조가 농서에서 왔다고 설명해요. 중국 우루무치 쪽에 보면 황허강가에 농서라는 지명이 있거든요.”
―변씨도 농서에서 왔습니까? “변씨의 시조는 변안렬이라는 분입니다. 고려 말 때 인물입니다. 원과 고려는 특이한 관계였지요. 원에서 고려를 복속시키려고 군대를 보내면 백전백패하는데, 원나라에 조공을 보내라고 하면 또 열심히 보내곤 했지요. 또 부마국 정책을 폈잖아요. 고려 왕자를 어릴 때 원나라로 데려가서 거기서 자란 후에 원나라 공주랑 결혼해 고려를 다스리도록 했지요. 이때 왕자 부부와 함께 수많은 인력풀을 딸려 보내요. 학자와 무장, 이들의 식솔 수백 명이 대거 이동을 한 거예요. 이 과정에서 성씨들이 많이 옮겨왔다고 봅니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황해도 황주 사람이에요. 원래는 황주 변씨였던 거죠. 고려 때 사신이 왔다갔다할 때 원나라 심양으로 가서 천오후라는 벼슬을 했어요. 그때 원나라는 지방자치를 했는데 심양 지역에 고려인이 너무 많으니까, 고려인들이 스스로 통치를 하도록 했어요. 만오후가 시장이고 천오후는 구청장 정도 되는 벼슬이었지요. 벼슬은 세습제였어요. 그런데 둘째 아들인 변안렬이 원나라 무과에서 장원급제를 한 거예요. 1351년에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결혼해서 고려로 돌아왔거든요. 장원급제한 이 둘째 아들이 공민왕 부부의 수행대장을 한 거예요. 고려에 온 후 공민왕이 자신의 외사촌 여동생을 소개해 결혼을 시켰어요. 시조 할머니가 원주 원씨였어요. 왕실의 외척이니 대단한 집안이었겠지요. 그래서 시조께서는 처가의 본관을 따라서 본관을 원주로 바꿨습니다. 저희 시조는 왕실의 외척으로 살면서 왕실의 군대를 최초로 만들고 정비했다고 해요. 10년 동안 왕실 군대를 정비한 후 왜군과 싸웠는데, 딱 한 번 패하고 전승했습니다. 이성계가 개국을 하면서 모든 사람을 없앴는데 우리 시조만 건드리지 못했어요.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기 전에 개성에 있는 우리 시조의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어요.
”‘금강산 박사’로 이름 알려 미리 산에 관한 책에 대해 이러저러한 걸 묻겠다 예고하고 찾아간 자리였다. 예상치도 못한 족보 이야기로 대화가 초반부터 흘러가버렸다.
700여 년 전 이야기를 하는데 설명이 청산유수다. 시조 변안렬과 함께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는 것처럼 변 부회장의 눈이 반짝거렸다. 책장 옆 바닥에 쌓여 있는 물건 중에 변 부회장의 얼굴 사진이 인쇄된 대형 패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스쳐가듯 그의 이름을 잠깐 주목한 적이 있다. 지난해 파주출판단지에서 열린 고서적 전시회에서였다. ‘7인 7색 고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장서전에는, 김종규 삼성박물관 관장, 김언호 한길사 대표, 김병준 지경사 대표,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 윤형두 범우사 회장, 이기웅 열화당 대표 등 장서가들의 애장서가 전시됐다. 거개가 내로라하는 출판사의 대표들이었던 7인 중 나머지 1명이 바로 변 부회장이었다.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이라는 직함이 이채롭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변 부회장은 소위 ‘선수’들이 인정하는 장서가였던 것이다.
―산에 관한 책은 왜 수집하기 시작했습니까.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등반을 하는데, 코스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걸 알려고 책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잡지에 ‘개척보고서’가 부록으로 나왔거든요. 그걸 사려고 과월호를 뒤졌지요. 당구에 빠지면 천장을 봐도 당구대로 보인다고 하잖아요. 산 생각만 하니까 지나가다 ‘산’자만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산이라는 글자만 들어가 있으면 책을 사다 보니까 책이 많아졌어요. 심지어는 제목이 영어로 되어 있는데, ‘summit’라는 단어가 들어 있기에 산에 관한 책인 줄 알고 무조건 샀는데 경영학 책이었던 적도 있어요. ‘CEO 자리에 올랐다’는 의미로 summit를 쓴 건데 산 책인 줄 알았던 거죠. 그러다가 결국 유산기로 넘어오고 족보까지 파편이 튄 거예요.
산에 안 다녔다면 이럴 일이 없었겠지요. 산에 관한 책은 그 발행 숫자가 적어요. 그래서 예전에 나온 책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1985년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후, 경제적 여유가 생겼는데 그 무렵 고서가 경매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문도 잘 모르면서 유산기가 경매로 나오면 가서 샀지요. 고서점 사장들이 ‘변기태라는 애가 있는데 산에 관한 책만 나오면 무조건 산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나중에는 산을 다룬 고서가 나오면 경매에 내놓기 전에 저한테 가져오더군요.
제가 산 책을 모은다는 사실이 주변에 더 많이 알려진 건 1998년에 열린 한 전시회가 그 계기였어요.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처음 시작됐어요. 이때 일민재단에서 ‘몽유금강전’이라는 제목으로 금강산 관광 기념 전시회를 기획했어요. 미술사학자인 명지대 이태호 교수가 자료 수집을 맡으셨어요. 방학 때에 맞춰 여름에 전시회를 여는 걸로 기획했는데 몇 달 앞두고도 관광사진첩 몇 권 외에는 관련 도서를 못 구한 거예요. 급해서 인사동을 도는데 인사동의 어느 고서점 사장이 그렇게 말했대요. ‘여길 몇십 년을 돌아다녀도 전시물량 못 구한다. 수집가를 찾아가라.’ 이 교수가 ‘산 책을 수집하는 사람이 있느냐’ 되묻자 ‘있다’고 그러면서 제 연락처를 알려줬대요. 연락이 왔어요. 산 책을 모으냐고, 금강산 자료도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저희 집에 왔어요. 제 장서들을 보더니 그걸로 끝이었죠. 《동아일보》에 ‘금강산 박사’라는 타이틀로 인터뷰가 실렸어요. 유산기에 한해서는 국립중앙박물관, 규장각보다 제가 더 많이 갖고 있어요.
”40년간 책값으로 5억원 이상 지출
변 부회장의 지적 호기심은 산에서 시작해 역사, 문명사로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이만큼 모으려면 돈도 많이 들었겠습니다. “40년 동안 책 사는 데 쓴 돈만 5억에서 10억원가량 됩니다. 물가상승률 감안하지 않고 순수 지출액으로요. 그래도 우리 고서적은 상대적으로 비교해 보면 비싼 편이 아닙니다. 일단 그림이나 도자기는 비싸고 가짜도 많지 않습니까. 책은 거의 가짜가 없어요. 가짜를 만드는 게 더 돈이 들거든요. 한지는 수천 년을 가잖아요. 그래서 고서가 많고 그렇다 보니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양지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 산성화돼서 부스러집니다. 보관이 안 되는 거예요. 한지는 수백 년 가도 멀쩡해요. 미국에서 삼사백 년 된 책이 나온다면 많이 비쌀 겁니다. 산에 관한 고서 중엔 우리나라에서 저만 갖고 있는 책도 있어요. 나중에 보물로 지정받으려고 하는 책들이지요.
” 이 대목에서 서적 구입비를 어떻게 충당했는지 궁금증이 밀려왔다. 한국조폐공사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한 변 부회장은 회사 생활 기간은 물론 회사 생활을 마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도 꾸준히 책을 사모으는 데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장서 중엔 최근 단행본도 상당한데 주로 인터넷으로 구입합니까. “제목을 아는 신간은 인터넷으로 사지만 오프라인 서점에 안 갈 수가 없어요. 산 코너에만 산에 관한 책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대형서점에 나가서 거의 전 코너를 다 뒤지고 다닙니다. 전문 산악인들은 알피니즘을 배경으로 책을 쓰지요. 크게 보면 등산은 관광의 한 부분이에요. 관광을 다니다 산으로 가고, 그러다가 위험한 곳으로 올라가고…. 관광 쪽에서 등산을 주목한 지 꽤 됐어요. 등산에 대해 많이 연구해요. 관광학자들이 등산이라는 좋은 아이템을 찾은 거예요. 그런 분들이 정리한 논문 단행본이 굉장히 유익해요. 알피니즘과 상관없이 ‘행락문화’라는 이름으로 등산을 문화적으로 잘 정리해 놨어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떠나서 그 당시의 관광패턴, 있었던 일을 학자들이 잘 정리를 해놨기 때문에 그런 쪽 책도 부지런히 찾아보지요.”
―처음에 어떻게 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겁니까. “클라이밍계에서 반 농담으로 통계를 내본 게 있어요. 조사했더니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 중 70%가 외아들이거나 장남이라는 거예요. 부모의 과보호에 순응한 애들은 마마보이가 되고 그게 싫어서 가출한 애들은 산으로 갔다는 얘기죠. 저도 1남5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민 붐이 있었어요. 사람이 필요한 남미국가로 이민을 대거 갔지요. 그때 서울시내에 포르투갈어 학원이 많았습니다. 친구네 가족이 그렇게 남미로 이민을 가게 됐어요. 그 친구의 아버님이 남미로 건너가기 전에 우리나라 산을 많이 다니라고 장비도 주면서 가라고 권하셨지요. 그걸 계기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북한산을 다니면서 암벽등반을 배웠습니다.”
―대학교 때도 산악부 활동을 했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산에 다닌 친구들은 대학 산악부에 잘 안 들어가요. 들어가면 신입생이어서 새로 시작해야 되니까요. 저는 산악부에 들어갔다가 탈퇴했어요. 대학 산악부는 나가려면 규칙이 있어요. 야구 배트로 100대를 맞고 나가야 돼요. 제가 진짜로 나간다고 하니까 산악부에 비상이 걸린 거예요. 당시 산악부 부장은 말로만 듣던 100대를 진짜로 때려야 되니까 어떻게 하질 못하고 무섭잖아요. 졸업한 선배들도 말리러 왔어요. 밤 10시 넘은 시각이었는데 제가 어서 때리라고 우기면서 산악부 방에 있던 큰 테이블 위에 엎드렸어요. 그런데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산악부 선배가 마침 그때 술에 취해서 산악부 방에 자려고 들어온 거예요. 들어와 보니 가관이죠. 한 놈은 때린다고 배트를 들고 있고, 한 놈은 엎드려 있고. 그걸 보더니 ‘야 아직도 이런 문화가 남아 있어? 다른 놈은 맞으면 산에 안 다니겠지만 변기태는 맞아도 산에 다닐 건데 앞으로 어떻게 볼 거야?’ 그러더니 ‘너부터 맞아 봐’ 그러면서 야구 배트를 뺏어서 절 때리려던 선배를 때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선배가 27대를 맞고 기절했어요. 다음날 저는 산악부를 떠났고 그날 밤의 비극에 대해 누구에게도 언급을 안 했어요. 한데 그게 동국대학교 산악부에 전설처럼 남은 거예요. 몰랐는데 몇 년 전에 처음 알았어요. 산악부 후배가 와서 다른 얘기를 하다가 그 얘기를 하더군요.
”마약 중독보다 무서운 게 등산 중독"
등반가 로제 듀프라의 시 ‘언젠가 그 어느 날’에 작곡가 최영섭씨가 곡을 붙였다.
―좋아하는 산은 어딘가요. “역시 북한산이지요. 외국 어느 나라를 가도 도심에서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거리 내에 이렇게 좋은 산이 있는 나라가 없어요. 일본만 보더라도 1박을 해야 할 정도로 떨어져 있고, 산세도 험악해요. 우리나라는 산이 예쁘잖아요. 그러면서 암벽등반도 할 수 있고요. 친구가 묻더라고요. ‘골프보다 등산이 재밌어?’ 이렇게 대답했어요. ‘골프 치다가 죽는 일도 있나?’ 산은 전문 산악인도 등반 도중 죽는 일이 있잖아요. 그런데도 불나방처럼 많은 사람이 산으로 가요. 그 정도의 매력이 있다는 거죠. 등산은 중독성이 있어요. 마약 중독보다 무서운 게 도박 중독이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게 산에 중독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도박하다가 물리적으로 죽을 일은 잘 없잖아요. 산은 죽기도 하니까요. 40년 이상 산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됐어요. 예전에 직장 다닐 때, ‘변기태씨는 왜 그렇게 상갓집을 자주 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어요. 젊은 나이에 유난히 상갓집을 자주 다녔어요. 부친상, 빙부상 이런 게 아니라 본인 상이 많으니까요. 박영석, 고미영 죽었을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해 내내 장례식장을 오간 것 같아요. 히말라야에서 사고 나면 서너 명이 동시에 죽기도 하잖아요.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언젠가 그 어느 날’이라는 시가 있어요. 1951년에 인도 히말라야 난다 데비 봉우리를 횡단 등반하다 죽은 로제 듀프라(Roger Duplat)라는 프랑스 출신 등반가가 있어요.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일기장에 유언 같은 시가 쓰여 있는 거예요. 어느 날 산에서 죽으면 가족들에게 자신이 편안하게 죽었다고 전해달라는 내용이었어요. 전 세계 산악인들의 기본 정서를 대변하는 시예요. 제가 교장으로 있는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는 극한 등반을 추구하거든요. 극한 등반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슬픔의 공감대를 갖고 있어요. 나도 언젠가 산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는 거죠. 히말라야 같은 데서 사고 나면 거의 학교 동문들이에요. ‘언젠가 그 어느 날’을 번역한 시는 있는데 노래가 없었어요. 요즘 산에 다니는 친구들은 모르지만, 저희 때는 산에 다니던 누가 죽으면 비석에 이 시를 한 구절 꼭 인용했거든요. 노래가 없어서 허전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신 작곡가 최영섭씨를 알게 됐어요. 이분이 그동안 1000곡 이상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책을 못 내고 있는 거예요. ‘가곡재벌’이었는데 이혼하고 재혼하고 다시 이혼하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위자료로 다 내주었거든요. 제가 가곡모음집을 발행해 드렸지요. 고맙다고 뭔가 해주고 싶다고 하기에 이 시에 노래를 붙여주십사 부탁드렸어요.”
―가사를 보니 ‘산에 조그만 케른(cairn)을 쌓아서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그렇게 매장하나요? “산에서 죽으면 기본적으로 현지에서 화장을 해요. 산에는 추모비를 만들지요. 박영석, 고미영씨 돌아가셨을 때도 히말라야 현지에 돌무덤을 만들었어요.
50세 기념으로 매킨리와 요세미티를 등반한 변 부회장.
우리나라 산에도 케른 형태로 쌓아서 피켈을 꽂아놓은 비석이 많았어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산에 비석 천지다 이러면서 다 없앴지요. 산사람들은 ‘그건 비석이 아니라 시비(詩碑)’라고 주장했지만 안 통했지요.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보면서 아 여길 등반한 사람들은 이런 마음이었구나 느낄 수 있을 텐데, 공단 측이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주변 지인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굳이 그곳에 가는 이유가 뭡니까. “조지 맬러리라는 유명한 등반가가 있어요. 1924년에 에베레스트에 가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인물이에요. 그때 극지는 남극과 북극밖에 없었는데 두 곳 모두 초등 기록을 뺏기자 영국이 자존심이 상한 거예요. 그래서 에베레스트를 제3의 극지로 칭하고 정복하려고 공략했던 시절이지요. 기자들이 맬러리에게 ‘거길 왜 가냐’고 물었어요. 맬러리가 툭 던진 말이 ‘(그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는 말이에요. 맬러리의 그 답을 지금도 전 세계 산악인들이 칭찬해요. 어려운 숙제를 풀어줬다는 거죠. 전 대답을 못 하겠어요.
예전에는 외국을 나가는 게 어려웠죠. 1982년에 제대하고 이듬해에 남미 안데스산맥으로 원정 산행을 다녀왔어요. 지금은 외국에 원정대가 많이 가지만 그때는 별로 없었어요. 여권도 ‘문화여권’을 받았어요. 도착해서 대사관 가니 뭐 필요한 거 없느냐며 의전도 제공해 주고, 마치 국가대표 등산 선수 같은 느낌이었지요. 등반에 성공하면 교포들이 축하파티도 열어주었고요. 안데스 원정 가는 데 그때 돈으로 500만원이 들었어요. 집에서 지원해 주어서 가능했지요. 다녀오고 한국조폐공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어요.
직장 다니면서 산에 잘 못 가다가 50세가 되고 그 기념으로 요세미티국립공원에 등반을 가기도 했어요. 요즘에도 등반에 관한 꿈은 여전합니다. 익스트림라이더학교에서는 아예 미국 요세미티와 프랑스 알프스의 샤모니라는 곳에 ‘시즌방’을 구해놨어요. 일정 기간 동안 동문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주택을 하나 구해놓은 거죠. 거기에도 가보려고 해요.
”정부가 국민을 과보호"
―등산의 이점은 뭔가요. “초중고 때는 부모 말 잘 듣고 착한 학생을 최고로 치잖아요. 저는 방학 되면 배낭 메고 산에 가서 보름씩 나오지도 않고 얼마나 답답한 자식이었겠어요. 그런데 음주나 다른 안 좋은 곳으로 빠지지 않고, 산으로 일탈했다는 게 돌이켜보면 제 정서를 함양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줬어요. 제가 산에 가지 않는, 그저 순종만 하는 아들이었다면 사업도 못 했을 거예요. 산에서 제일 중시하는 게 개인의 무사와 함께 조직의 안녕이거든요. 현대사회가 원하는 게 개인의 이익보다 조직의 이익을 추구하는 직원을 뽑는 거잖아요. 15년 전부터 산악연맹이 주최하는 대학생 오지탐사 프로그램이 있어요. 6대륙에 각 10명씩 대학생을 보내는 프로그램이에요. 경쟁률이 정말 높습니다. 여기에 선발되려고 국내 국토대장정 경력을 쌓기도 해요. 한 사람에게 1000만원을 투자하는 프로그램이거든요. 코오롱이 스폰서예요. 이전엔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일부 지원해 줬는데 작년부터 예산이 잘렸어요. 오지탐사가 굉장히 힘들어요. 20일 이상 가는데 관광객이 안 가는 곳을 가요. 해발 4000m 이상 올라가기도 하고요. 다녀와서 보고서를 내야 해요. 사전 훈련도 정말 힘들어요. 중도에 탈락하기도 해요. 그런 과정에서 남을 배려하고 조직의 이익을 위하는 배려심이 생겨요. 극심하게 힘든 상태에서 인간의 바닥을 볼 수 있어요. 그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 배려하고 협동심을 키우는가 젊은이들이 알 수 있는 기회죠. 다녀온 학생들이 공통으로 하는 얘기가 ‘평생 같이 갈 친구가 생겼다’는 말이에요. 해마다 다 같이 모일 때는 훈련받다가 탈락한 친구들도 함께해요. 선발과정이 공정하니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요. 심사위원의 자식들이 통과한 사례가 없거든요. 청소년의 개인주의나 나약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인데, 정부예산이 없어져서 안타깝지요.”
―우리나라 등산 문화의 문제점은 뭡니까. “최초의 교육부터 잘못됐어요. 야외활동은 뭐든지 개인의 책임으로 해야 합니다. ‘탐험 없이 인류의 발전 없다’는 게 선진국의 기본 슬로건이지요. 선진국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려주고, 그에 따른 책임은 개인이 지는 문화예요. 예를 들면 햄버거 가게에서 ‘바닥이 미끄럽다’는 표지판 안 붙이면 바로 소송이 붙어요. 그것처럼 위험하면 위험하다고 고지하면 돼요. 우리나라는 위험하다고 울타리를 쳐놔요. 울타리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비용이 들잖아요. 그런데 울타리나 난간 주변에서 놀다가 아이가 다치잖아요? 그러면 울타리 구멍이 커서 아이가 다쳤다느니 하는 식으로 관리 주체에 소송을 겁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년 내내 수십 건의 소송에 시달려요. 우리가 국립공원 가서 발만 다쳐도 법률적으로 공단 측에 30%의 과실이 있어요. 등산로 정비를 안 해서 돌부리에 걸려 발목을 다쳤다는 식이에요. 이게 제대로 된 겁니까. 모든 국민을 과보호하는 거예요.
이렇게 자란 국민이 사회에 나가서 리더가 된다고 하면, 정상적인 리더가 되겠어요? 자연이 좋다, 운동효과가 좋다며 둘레길이다 뭐다 만들면서 정작 국민들의 정신세계는 과보호 속으로 밀어넣는 겁니다. 산에서 돌이 떨어지면 그 밑을 지나가는 사람은 다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산에서 돌이 떨어진다고 아예 봉우리 전체를 입산금지를 해버려요. 이런 나라가 없어요. 일본 알프스에서는 연간 수십 명이 죽어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또 우리같이 산에 가면 담배 피우지 말라, 불 피우지 말라, 밥해 먹지 말라고 일일이 금지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미국의 모든 국립공원과 산에서는 캠프 파이어도 할 수 있고 담배도 피울 수 있어요. 일본의 모든 산에서 담배 다 펴요. 저는 이게 우리가 문화 후진국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규제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조경 패턴을 예를 들어 볼게요. 예전에는 시내 한가운데에 잔디밭을 만들 때 네모 반듯하게 꾸몄어요. 윗사람이 사무실 창문에서 봤을 때는 그편이 보기 좋겠지요. 근데 그게 유지가 안 돼요. 사람들이 잔디밭 한가운데로 질러가거든요. 아무리 들어가지 말라고 푯말을 붙여도 소용없어요. 요즘엔 아예 잔디밭 중간에 예쁘게 보도를 만들어요. 막는 게 아니라 더 편하게 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규제만 하지 말고 조화롭게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자는 말이지요. 국립등산학교 설립이 추진 중이에요.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그겁니다.
민간단체가 아무리 ‘산에 가서 하는 행위는 개인의 책임으로 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주장해 봤자 씨도 안 먹힙니다. 그렇다고 국립공원관리공단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어요. 공단의 직원들은 관리 업무를 위해 채용한 거예요. 관리, 단속 업무가 없어진다면 직원의 약 60%를 내보내야 하는데 섣불리 그런 주장을 하겠어요? 어느 이사장이 하려고 들겠습니까. 공공의 적이 되는데. 우리나라 국립공원이 21개인데 그중 15개가 산악공원이에요. 15개 산을 관리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등산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철학이 없으니까 직원 규모를 늘려도 끝이 없는 거예요. 1년 내내 등산로에 녹슨 덱 수리하고, 민원 들어온 거 확인하느라 얼마나 바쁘겠어요. 심지어 공단 측에서 ‘우리나라에는 원래 유람만 있었지, 등산이라는 문화는 없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어요. 환경운동 하던 이장호씨라는 분이 있었어요. 돌아가신 분인데, 그분이 공단 측과 토론을 하다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며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때도 이미 제가 아마추어 서지학자로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제가 대답했지요. ‘없었긴 뭐가 없었느냐. 기록이라면 많다. 심지어 등산이라는 제목의 시도 있다’고 답했지요.
”유람 문화는 동양적 알피니즘"
―선조들이 등산을 했던 기록이 꽤 있나 봅니다. “예전 우리 선조들의 유람은 단순한 소풍이 아니에요. 유럽에서 알피니즘 문화를 만든 주체가 귀족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한다는 고상한 명분이었지요. 우리나라의 유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서민들이 아니라 양반들이 유람을 가거든요. 서민들은 갈 수 없어요. 서울에서 금강산을 가려면 30박 31일, 부산이나 광주에서 가려면 60일이 걸려요. 두 달 동안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같이 가는 길목에 호텔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양반이라고 외지서 무조건 식사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어떤 지체 높은 양반이라도 일단 오랫동안 길 위에 있으려면 사람을 미리 보내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서 묵을지 동선과 계획을 짜고 그걸 미리 알려줘야 해요. 대부분의 유산기 앞에 첫마디로 이런 말이 나와요. ‘대처에 있는 사람들은 평생에 금강산 한 번 가기를 소원했다. 나도 평생에 금강산 가기를 소원했는데 이번에 관직을 내려놓게 돼서 금강산에 가게 됐다.’ 평생의 소원으로 가는 거예요. 요즘 한국에서 히말라야 가는 것보다 더 힘든 거죠. 길은 좋나요. 수많은 하인 먹을 거 다 챙겨서 가야 해요. 아무리 대갓집에 유숙한다 해도 수십 명 먹을 걸 다 내어놓으라 할 순 없잖아요. 가는 길에 있는 양반집이나 절에 연락해서 잠만 잘 테니 방과 부엌을 빌려달라 했지요.
유럽의 알피니즘과 기본적인 정신세계가 똑같아요. ‘집 나가면 개고생’인데 양반이 집을 나가서 고생을 하겠다고 자처하는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 어떤 양반은 ‘여럿이서 가니까 불편하니 나 혼자 가야겠다’라며 단독으로 여행하기도 해요. 조선 순조 때 김금원이라는 처자가 있었어요. 양반 소실의 딸이었어요. 소실의 딸은 소실로 시집가거든요. 이 딸이 너무 똑똑하니까 아버지가 글을 가르친 거예요. 열 몇 살에 시도 지어요. 그러다 이 아가씨가 아버지에게 청을 넣어요. ‘아버지 나는 이렇게 살다 죽기 싫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결혼하겠어요.’ 아버지가 이 딸이 똑똑한 걸 아니까 허락을 해요. 14세 소녀가 남장을 하고 전국을 돌아다녀요. 3년 동안 설악산, 금강산 안 간 곳이 없어요. 유람만 한 게 아니라 다녀와서 《호동서락기》라는 문집을 냈어요. 그냥 유람만 한 게 아니에요. 남장을 했지만 여자잖아요. 다니다가 한 남자를 만나서 커플이 됐어요. 이 남자도 양반이었죠. 함께 여행을 다니다 헤어졌는데 이 남자가 김금원을 못 잊은 거예요. 그래서 어디어디 사는 양반집 소실이라는 정보만 들고 찾았는데 마침 찾은 거예요. 그래서 소실로 삼아요. 이후 이 양반은 김금원이 주변에 글 좋아하는 여성들과 모여서 함께 시를 짓고 어울릴 수 있도록 용산에 정자를 만들어줘요. 이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단입니다. 김금원의 존재를 산악계에 알리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산악인이라고 소개했어요. 김금원의 정신세계를 보면, 그대로 산악인의 정신세계예요. 우리 선조들의 등산 전통이 유구합니다.” ―등산 문화 얘기하다 최초의 여성 시단으로까지 이야기가 흘렀네요. 이런 식으로 관심사가 확장됐군요. “호기심 때문이에요. 궁금하잖아요. 매일 사무실에 평균 새벽 서너 시까지 있어요. 집에 가면 잠만 자니까 잠자는 시간이 아깝잖아요. 사무실에서 하루는 산에 관한 책 보다가 하루는 족보 책 보다가, 유산기 보다가 그래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학자가 되는 식이지요. 은퇴하면 공부하고 싶어요. 각론은 아는데 전체를 취합하는 그림은 모르니까요.”회원제 북클럽 만들어
하루재 클럽의 책을 받아보는 회원모임 하루재 북클럽에 몇 달 만에 600명 이상이 가입했다.
610번째 입회신청서.
변 부회장은 산악 서적 전문 출판사인 하루재 클럽과 하루재 북클럽이라는 일종의 유료회원 모임을 운영 중이다. 매달 일정액을 회비로 내면 하루재 클럽에서 내는 책을 받아볼 수 있다.
―책 수집가로 살다가 출판사까지 차린 이유가 뭡니까. “캐나다 밴프에서 매년 산악영화제를 해요. 2008년에 ‘밴프인코리아’라고, 당선작을 한국에서 상영하는 행사를 기획했어요. 기획하면서도 ‘누가 보러 오겠어?’ 생각했는데, 이게 예상과 달리 전 회, 전 좌석 매진이 된 거예요. 캐나다 밴프영화제 측에서 신기하게 생각한 거예요. 저희를 초청했어요. 가서 구경을 하는데, 기간 중에 북페스티벌도 열렸어요. 거기에서 《Fallen giants》라는 책을 처음 봤어요. 히말라야 등반 역사를 다룬 두꺼운 책이에요. 목차를 보면서 ‘아 우리 후배들한테 이런 책을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훌륭한 책이거든요. 어느 분야든 전문 분야를 가보면 의외로 책을 잘 안 읽어요. 제가 대전시립무용단의 후원회장을 10년째 하고 있거든요. 그림도 모으니 미술 쪽에도 기웃대고 있지요. 무용가도 그렇고 화가도 그렇고 의외로 공부를 잘 안 해요. 자신이 하는 일에만 미쳐 있어요. 전문 산악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온 국민이 등산복 입고 다니고 1500만 산악인이니 하잖아요. 전문 산악인들이 여기에 휩쓸리기만 하지 책을 잘 안 읽어요. 저는 연평균 500권의 책을 사서 주위에 나눠줬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 팔리니까 전문적인 서적이 출판되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예요. 글재주 있는 친구들이 외국의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읽질 않는 겁니다. 외국의 책을 들여와 번역해야겠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안 사주면 어떡해요. 찌라시처럼 무료로 뿌릴 수도 없잖아요. 북클럽 회원을 모집해서 강제로 안겨야겠다 생각했지요.
미국에 마운티어링북스라는 비영리 단체가 있어요. 110년 된 단체인데 회원이 1만명이 넘어요. 단행본 인쇄가 3000권이 기본이잖아요. 못 찍을 책이 없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당장 살 수 있는 책이 500권이 넘어요. 이걸 벤치마킹해야겠다 생각했지요.”
―처음 출판하는 책으로 라인홀트 메스너의 책을 고른 이유가 있나요. “산악 서적을 낼 때 가장 큰 문제가 번역이에요. 대충 뜻만 아는 게 아니라 행간의 의미를 알아야 하잖아요. 《Fallen giants》를 전문 번역가에게 맡겨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일단 제본만 해서 몇 년을 갖고 있는 상태예요. 김영도씨라는 번역가가 계세요. 독일어 번역을 하시는데, 우리나라 산에 관한 책은 이분이 거의 혼자 다 번역했다고 보시면 돼요. 이분이 라인홀트 메스너가 쓴 《세로 토레》를 번역했다고 가져오셨어요. 이미 제가 출판사는 설립해 놓은 상태였거든요. 책을 낸 다음, 들고 각종 행사에 다 갔어요. 가서 책을 사달라고 지인들에게 부탁했어요. 책을 수집하기만 했던 변기태가 이제는 책을 만든다는 걸 각인시키려는 거였지요. 올해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북클럽 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했어요. 자동이체를 하는 유료회원을 몇 달 만에 600명 모았습니다. 목표는 1000명이에요. 저는 출판으로 장사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본업이 따로 있으니까요. 회원들의 회비가 분명 출판에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600명이라는 독자를 확보했다는 거예요. 《Fallen giants》를 올해 안에 출간하려고 제가 직접 번역본을 윤문하고 있어요. 원래 이미 작업을 끝냈었는데, 당시 윤문을 끝낸 직후에 컴퓨터 하드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윤문해 놓은 게 다 날아갔지요. 혼자였다면 그냥 포기했을 수도 있는데 회원 600명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요. 다시 시작해서 이제 절반 넘겼네요.
” 책상 주변에 흩어져 있는 그의 40년 산행의 흔적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산에 오래 다닐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예전에 결심한 게 있어요.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말에만 만나자. 주중엔 일을 열심히 하자.’ 산에 오래 다니려면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돼요. 어릴 때 저랑 함께 산에 다녔던 사람들 대부분 커서는 산에 못 다녔어요. 나중에 자식들 다 키우고 지하철비가 부담이 안 될 나이가 되니 나타나더라고요. 저는 40년 넘게 단 한 번도 산악계를 떠난 적이 없어요. 비록 최고의 산악인은 못 됐지만 산에 열심히 다녔고, 사회에서도 제 역할을 무난하게는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영역을 구분해서 각각 최선을 다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단 집을 나서면 집 생각은 하지 않고 바깥 일에 최선을 다했고, 산에 가서는 산 생각만 했지만, 내려오면 일에 집중했어요.”
―목표는 뭡니까. “우이동에 산악 서적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요. 아웃도어 용품 가게 말고 그런 것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기태가 추천하는 책
《알피니스트의 마음》 장 코스트/평화출판사 장 코스트는 1904년 프랑스 리옹시에서 태어나 시립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1923년부터 4년간 알프스 14좌를 초등반하는 기록을 세웠다. 1926년 도피네 알프스의 맹주 ‘라 메이주’ 북벽을 초등반한 후 하산하는 도중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가 22세였다. 이 책은 생전에 장 코스트가 썼던 ‘등산일기’와 그의 편지를 모은 유고집으로 묶은 책이다.
《등산일기》 손경석/평화출판사 원로 산악인인 손경석 선생이 자신의 등산 인생을 회고한 책이다. 2013년 작고한 손경석 선생은 《등산백과》 《한국등산사》 등 많은 등산 서적을 낸 산악인이다.
《청춘을 산에 걸고》 우에무라 나오미/마운틴북스 세계 최초로 5대륙 최고봉을 등정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의 등정기다. 메이지대학 산악부 시절부터 5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른 다음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동계 완등한 1971년까지의 10년간을 글로 풀었다.
《집념의 마나슬루》 김정섭/한국마나슬루회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히말라야 마나슬루봉 정상을 오르려 한 한국 원정대의 도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김정섭 당시 등반대장이 이끄는 원정대는 1971년과 1972년 두 번의 등반에서 16명의 대원을 잃었다. 저자는 3차 등반을 앞두고 1, 2차의 실패를 분석하고 그 과정을 기록해 책으로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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