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문 인쇄 시위 준비 척척
면서기까지 설득. 동참 이끌어내
예외적이지만 3.1 운동 때 면사무소가 방화와 파괴가 아니라 인쇄소의 역활을 한 곳이 있다. 안동 예안면 사무소다. 1919년 3월17일 예안 장터 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의 배후에는 예안면 사무소가 있었다.
시위를 주도한 이동봉 .이용호. 조수인은 고종 인산일에 서울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3.1 운동의 소식을 듣고 각 문중과 동리 사람들을 비밀리에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산 참여자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예안 장날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뿌리며 3.1 운동을 재점화시키기로 결이했다. 이들은 예안면 사무소야말로 의심을 덜받고 인쇄를 비롯한 각종 시위 준비를 해나가는데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다. 이동봉 이용호가 중심이되어 면사무소 서기와 촉탁들을 설득해 이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결국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예안면 사무소에서 만들었고 이들 면리원 까지 시위에 참서가도록 하였다.
면을 전초기지로 한 일제의 강점 통치에도 이 지역은 진성이씨 황성조씨 등 망명가들이 영향역을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들은 조선시대 내내 지역자치를 주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악의 시행을 통해 지역사회의 존경구조를 강고하게 구추가고 있었다. 지금도 이어지고있는 퇴계이황과 그 제자들이 자손에대한 지역사회의 존경은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결국 일제는 면제를 시행하고 구장을 배치했지만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데는 실폐한 것으로 보인다.결국 3.1. 운동이 일어나자 예안면 사무소는 일제의 첨병으로서가 아니라. 진성이씨인 이동봉 이용호와 하께 시위를 주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메우 예외적인 경우였고 같은 안동 이지만 임동 임하. 길안. 임북. 동후의 다섯개의 면사무소는 시위대의방화 파괴를 피해갈수없었다.
(매일신문 3월1일자에서 인용)
첫댓글 육선생님께서는 신문기사 하나 놓치지 않는군요. 제가 예안면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저 3.1운동은 옛이야기거니 하고 스쳐지나가기 일쑤인데, 금춘본가가 예안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립운동에 영향력을 끼친 기사를 옮겨 적으셨군요. 작년엔 금춘가족 봄맞이 번개모임으로 안동독립기념관으로 행차를 한 적도 있었는데, 나라를 살리기 위한 구국운동의 핵심적인 근거지가 안동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이미지를 금춘가족들과 함께 홍보해 나가야겠습니다.
신문기사를 인용해올려주셔서 3.1독립만세 운동각종인쇄물근거지 예안면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적는다면 지금 예안면이아니고 그때예안면은 안동댐으로인하여 수몰이되고 없었졌으며 이곳 현제 예안면은 임북면이였으며 이동봉독립 운동가는 현제 인계동가는길옆 향산공원이 이동봉을 기리기위함인줄아는데 그곳이 이동봉운동가 살던 곳이며 그때는 예안 면에 소속된 관할이였다는것으로알고있으며 지금은 예안면 관할이지요... 안동에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사람이 많아다는것도 자랑스럽네요
금춘헷살님 명심보감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