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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안식년을 마치면서.....
꽃샘 추위로 조금은 몸이 웅크리게 되는 아침입니다. 계절 또한 그 나름대로 어제를 보내고 오늘을 맞기 위해 아픔을 겪게 되나 봅니다. 우리 또한 부활을 맞기 위해 어떤 아픔을 겪어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는 오늘입니다. 환절기에 건강들 하시고 부활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안식년을 시작하면서, 저는 이번 안식년(=2017. 6.1일부터 2018. 3.31일까지) 동안 국내외 여행, 익숙한 곳과 낯선 곳 곧 새로운 곳을 여행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길이신 주님께 아직 저의 끝나지 않은 길(=인생길)>을 어떻게 걸을 것인가를 묻고 답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본디 그리스도인이란 길(=길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의 태도와 생각)을 걷는 사람이며 그 길 이외의 다른 모든 길은 사도(邪道=거짓된 길)라고 믿습니다. 저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때론 그 길(The Way)을 걸으면서도 가서는 아니 되는 길을 따라 걸었던 순간들(=마치 스페인의 미하스에서 너무 아름다운 길을 걷다 그 길에 흠뻑 빠져서 길을 잃어버려 당황했고 제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불편함을 체험)을 반복했었음을 인정합니다. 물론 길을 잃어버릴 때 그 길에 대한 갈망이 솟아나고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은 거짓된 길임을 깨닫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루가 복음 15장의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의 원형이며 우리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길을 잃음은 곧 길을 찾는 단초이고 바탕이기도 합니다. 상실이 회복을 향한 터전이며, 상처가 치유를 위한 바탕이듯이 말입니다.
인간이란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분투노력하는 존재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요1,38)라는 질문은 바로 이를 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어떤 그 무엇을 찾고 있지만 아직 그 무엇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체인양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갈망, 존재의 목마름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7,14)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끊임없이 이런 의문을 간직하고 생활했기에 11월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읽었던 소설책에서 힌트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댄 브라운의 오리진이라는 소설(=사실 개인적으로 댄 브라운을 좋아하지 않음)이었으며, 소설의 배경은 바로 작년 7월에 다녀 온 스페인의 몬세라트 수도원과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과 까사밀라 이었기에 더더욱 흥미를 지니고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댄 브라운은 미래학자인 에드먼드 커시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제기한 가장 근본적인 두 개의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질문이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며, 두 번째 질문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다시 말해 <우리의 근원 Origin(=인간의 창조)>과 <인간의 운명 Destiny>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질문을 묻고 있는 인간 존재인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덧붙여 솟아납니다. 아무튼 오래된 이 질문에 대해 지금껏 인류역사는 <종교인>,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이 우주의 수수께끼에 답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런 결과 현재까지 우리의 보편적인 이해는 <종교>와 <과학>은 이런 인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는 서로 다른 언어이며 접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의 관점은 댄 브라운의 견해에 동의하고 동조하는 게 아니고 다만 그가 이 소설을 통해 제기한 문제가 바로 저의 질문이었다는 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을 통해서 교회는 <세상>(*1요 2,15-17에 보면 세상이란 단어가 무려 7번 반복 사용하고 있음. 여기서 세상은 집단적 거짓 혹 집단적인 가짜 자기를 의미하며, 도로시 데이가 말한 ‘더럽고 썩은 체제 the system’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의 특징을 <변화>라고 요약했던 것처럼 우리가 목격하고 체험하고 있듯이 세상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또한 이 변화가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신속하고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화는 있지만 안정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오히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3,16),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1, 4~5) 그리고 <너희는 세상(=곧 더럽고 썩은 체제)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설의 대목 가운데 인상적인 것(=어쩌면 저의 무지와 한계)은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작품에서 댄 브라운은 그 질문에 대한 힌트내지 영감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그림이 있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고, 그 그림이 그렇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 역시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작품은 바로 폴 고갱의 (보스턴 미술과 소장, 캔버스에 유화, 139.1×374.6cm)<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그림입니다.
즉 우리의 첫 번째 관심사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힌트를 고갱은 <바위 위에서 잠든 갓난아이>를 통해 “생명의 시작”을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림 중심 부분의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어울려 일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이미지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갱 나름대로의 직관이라고 하는군요. 마지막으로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 늙은 여자는 언젠가는 죽게 될 자신의 숙명(=인류의 운명)을 고민하고 있는 이미지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그림의 이해이며 해석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이 그림을 보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한번쯤은 생각하면서 살아갈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 소설의 정점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의 지하실에 비치된(=실제 사실이 아닌 소설에서만) 윌리엄 블레이크의 <네 조아들 The Four Zoas에 나오는 <어두운 종교는 떠나고 달콤한 과학이 지배한다.>는 문구를 통해서 댄 브라운은 화석화되고 만들어진 종교에 대해 비판과 경고를 합니다. 사실 저는 <알·씁·신·잡 1편>의 마지막 시간에 패널 정 재승 교수가 4차 산업에 대해 언급했을 때 이미 이런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지금껏 1차 산업(=물과 증기의 힘으로 생산의 기계화)ㅡ 2차 산업(=전기의 힘으로 대량 생산) ㅡ3차 산업(=전기 및 정보 기술을 통한 생산의 자동화) 시대에선 종교인이 그러나 4차 산업화 시대(=디지탈 혁명으로 촉발된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기술적 융합, 이는 곧 사물 인테넷과 소셜 미디어 등으로 모든 인간의 행위와 생각이 온라인의 클라우드 컴퓨터에 빅 데이터의 형태로 저장되는 시대)에서는 과학자가 종교인(=구약의 제사장, 샤만... 신부/목사- 랍비- 이맘-스님...)의 자리를 차지할게 될 것이라는 언급(=예언!)에서 충격만이 아니라 위기를 새삼 심각하게 느꼈습니다. 어쩜 수도자는 디지탈 마인드라고 보기보다는 아날로그 마인드에 최적화된 존재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아는 분들에게 농담으로 <나는 참 좋은 때, 가장 편안할 때 수도자이며 사제로 살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고 말한 까닭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새삼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지원자(=더 넓게 신학교에 지원하려는 학생들도 포함해서...)들을 보면서 애틋함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수도자-사제로 살고자 하는 동기나 확신이 없는 점을 보면서....4차 산업시대엔 과거처럼 단지 <성직자나 수도자>이기에 일방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할지도 모르며, 지금처럼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가 분명 예전 같지 않을 것을 예감하면서 웬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더더욱 몇 몇 지망자들 중에는 人性면에서는 물론 知性(*사실 7개의 대신학교가 있지만 그 중에서 대부분의 신학교 지원자의 입학 수준은 정말이지 형편 무인지경....물론 성적이 전부가 아니지만도...그렇다고 요한 비안네 성인처럼 굳건한 신앙을 겸하고 있다면 모르지만 신앙 연륜도 어느 정도 나이와 무관하지 않음)-그리고 靈性이란 관점에서 볼 때 뭔가 체험도 없고 확신(=믿음)도 부족한 사람들이 어떻게 모든 면(=정치-사회-문화-철학-종교 분야 등)에서 다원화와 개인화로 치닫고 있는 종교와 신앙 환경 속에 익숙한 동시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말하고 하느님을 증거하면서 하느님만이 우리의 기원이며 운명임을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물론 구원사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마11,25) 보다 <세상의 어리석은 것, 세상의 약한 것,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코1, 27~29)는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교회는 과학을 배제하거나 부정하기보다 과학의 영적 동반자가 되어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철학과 개인적 성찰, 명상과 영적 탐구를 활용함으로써 인류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기술이 인류를 파괴하는 대신 인류를 통합시키고 일깨우며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도록 도와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객관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학문인 과학과 달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진리와 의미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리진이란 소설에서 댄 브라운은 블레이크를 통해서 종교의 두 가지 측면, 곧 창의적인 사고를 억압하는 어둡고 독단적인 면과 자기 성찰과 창의력을 북돋는 밝고 탄력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댄 브라운이 블레이크의 <어두운 종교는 떠나고 달콤한 과락이 지배한다.>는 말을 인용해서 인류의 오랜 질문에 대한 화두로 제시하는 바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결국 종교가 인류에 대한 종교의 순기능적이고 창의적인 측면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부정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면만으로 확장하고 확대해 나아가거나 치중해 나간다면 그런 어두운 종교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4차-5차 산업화 시대에선 그 종말을 고하지 않을까라는 경고를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변화하는 세상의 징표를 읽고 회개와 쇄신을 향한 부단한 각오와 노력이 요구되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은 성서와 전통 속에서 깊고 영원한 의미 혹은 개인적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 있으며, 그것의 수천 가지 형태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어쩌면 서로 다른 종교들이 전하는 기본 메시지는 거의 서로 같지만, 서로의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다른 이미지, 은유(그리스어 ‘meta-phore 저 너머로 인도한다.’)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이 그의 생애 마지막에 스리랑카(=저는 미얀마에서도 베트남, 인도네시아에서 보아 익숙함)에서 비스듬히 누워(=瓦佛) 웃고 계시는 부처를 보았을 때, “나는 이제 표면을 뚫고 보았으며 또한 그림자와 겉모양 너머에 도달했다.”고 한 말과, 김 수환추기경께서 예전 석굴암의 부처님의 미소를 보시고 나서 “베드로 대성당을 보았을 때와 달리 마음이 뭉클하게 닥아 왔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상징(그리스어 sym-bolon은 ‘함께 던진다’는 뜻으로 상징은 그 사물 자체이다.)과 성사(sacrament 비가시적 것을 가시적으로 표지, 이를 통해 세상이 의미를 갖게 된다.)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와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급변하는 세상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의미의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미가 없이는, 더욱 깊은 의미를 찾지 못하고는 행복할 수 없으며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인은 보이는 것과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의미(=하느님의 뜻)를 캐내는 사람들이고 전문가들이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20,29)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발현하신 후에 하신 말씀을 우리는 머리가 아닌 온 존재로, 체험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어쩜 부활은 신비(*신비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무진장해서 ‘끝없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아듣는다면...) 중의 신비이고 우리가 찾고 있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저희가 (길이신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6,68)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우리 역시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이 아닌 존재로 주님께 온전히 귀의(歸依)해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고, 그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거짓이 아닌 당신 자신을 스스로 진리(=진리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말씀)라고 말씀하신 까닭을 조금씩 체험하면서 그분처럼 삶도 죽음도 하느님 안에서는 한 생명임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이 땅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체험들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스카의 여정이고 신비입니다. 다만 체험하지 못한 체험들을 향해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걷다가 보면 체험하지 못한 체험(=죽음)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거짓이 아닌 참 진리를 살게 되며(* 이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거짓된 자야가 필히 죽어야 한다.) 그런 삶을 살 때 이 땅에서부터 참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할 때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게 되고 그런 상태 (=정화와 조명의 단계를 거치고 마침내 합일과 일치의 단계에 도달 ㅡ 생명에 참여하는 천국)가 바로 인류의 여정의 종착지라고 저는 봅니다.
안식년 동안 8번의 해외여행과 2번의 국내여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의 위대함(=노르웨이의 피요르드, 스페인의 몬세라트와 포르투갈의 까보다 로까, 알라스카의 골롬비아 대빙하와 맥켄리 산,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미국의 그랜드 케년, 브라질의 이과수 폭포와 페르난도 데 노로냐, 케이프 타운의 테이블 마운틴과 빅토리아 폭포, 미얀마의 인레 호수 등)과 인간이 만든 역작(=노르웨이의 플롬 열차,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렘블란트의 ‘돌아온 탕자’와 오슬로 뭉크 기념관의 ‘절규’, 스페인 바르세로나의 성가족 성당과 구엘 공원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 세비야와 똘레도 대성당, 미얀마 양곤과 로간 사원과 탑 등)을 보면서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는 앞선 이들의 발자국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 사제직의 시작인 일본 나가사키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1981년 서품 장소)과 그리고 유학했던 핏츠버그 듀케인 대학교와 십자가의 성 바오로 수도원(1984~1986년), 첫 본당 신부로 사목했던 제주 표선 성당(1987~1988년), 원목신부로 활동했던 안성의 성요셉 병원(2007.5~2010.6), 베트남 선교사로 활동했던 호치민 수도원(2011.3~2014,4)을 방문한 것도 제겐 참으로 의미로운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저의 삶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저의 길을 힘차게 행복하게 걷고 싶었기 때문에 그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오늘까지 저를 이끌어 주신 주님의 섭리와 은총 그리고 부족한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그 곳에 살고 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여행 가운데 인상적인 순간과 동행자는 첫 여행지인 러시아-북유럽 여행 중에 노르웨이 오타의 라팜 호텔에서 주일 미사를 드렸던 순간과 핏츠버그에서 스콜라스티카 자매 가족들과 만남 및 조 진빈 안드레아 회장을 위한 가족 장례미사, 그랜드 케년 여행 중 동행했던 스님들(=혜안&향일)과 경비행기 탑승, 미카엘&아네스 부부와 함께 브라질 여행 중 황 안나 어머님의 만100세 축하 미사, 아프리카 여행 중 테이블 마운틴과 희망봉에 함께 오른 바오로와 루시아 부부와 동반 부부, 베트남 호치민에서 인보성체회 수녀원에서 함께 미사를 드렸던 호치민의 상처받은 형제자매들, 미얀마 여행 중 인레 리조트에서 주일미사를 함께 봉헌했던 8분의 형제자매들, 막내 여동생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드렸던 미사와 여행... 그 순간 그 곳에 함께 했던 분들이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었고 은총의 만남이었습니다.
여러 사정에 의해서 저는 일본 여행과 미얀마 여행기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일본 여행은 바로 사제로 서품 받았던 우리카미 성당, 그 곳에 <다시 선다.>는 행위는 바로 제가 서품 받았을 때의 마음을 다시 새롭게 붙잡고 싶은 간절할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다보면 첫 마음을 잊어버리고 방황하며 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처음처럼!!> 곧 처음 가졌던 마음을 되잡고 끝나지 않은 길을 힘차게 걷고 싶었기 때문에 우라카미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불교의 경전 숫타니파타의 시구이며 공지영의 소설 제목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표현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단단하고 곧게 스스로 홀로 진리(道=길)를 추구하며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자 합니다. 저의 미래(=곧 모든 저의 가족들과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두려움 없이 이미 걸어왔고 마저 걸어가야 하는 길이신 주님의 길을 끝까지 가고 싶은 게 저의 다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이번 안식년을 통해서 제가 찾은 해답이며 증언입니다. 저는 이 길(=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을 찾지 못했으며 이 길이야말로 제가 마지막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신하고 증언합니다.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의 감사하는 마음을 대신해서 정호승시인의 <봄길>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이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저는 이제 3월 19일과 26일 백내장 수술을 받을 예정이며 이후에 광주로 내려가서 공동체와 함께 성삼일을 보냄으로 안식년을 마칠 것입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이 곳 청평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로마노 형제와 가족들에게 그리고 공동체 밖에서 혼자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빈자리를 메꾸어 준 수도 공동체의 형제들께도 감사합니다. 신앙 안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제게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미리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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