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옆짝 친구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임 수 철
〈속초고등학교〉-(1974년 3월 입학, 1977년 2월 졸업)
처음으로 입학시험이라는 것을 치러봤음. 체력장을 포함하여 국어부터 음악·미술과목까지 모든 과목이 출제되었는데, 체력장 20점을 포함 총200점 만점이었음.
나의 체력장 점수는 13점으로 응시자들 중 최하위 점수였음. 음악은 다 맞았던 것 같은데, 그래봤자 10점 만점이었음.(내 자랑이 아니라, 중3 때 이미 나의 음악이론 실력은 웬만한 음악 선생님 수준이었음)
당시, 속초고 입시에는 300명 모집에 350명이 지원, 50명이 탈락하였음. 원래는 더 많은 인원이 탈락했을 뻔 했으나 240명 모집에서 한 학급(60명)이 갑자기 증설되어 300명으로 증원되는 바람에 나도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음.
하지만 영어 수학 성적이 워낙 나빠서 속칭 돌반인 2반으로 배정이 됨.
1학년2반
개인 정보 차원에서 이름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우리 반이 돌반이었던 만큼 내로라하는 주먹짱들은 다 몰려 있었음. 하지만 그 시절의 주먹짱들은 힘 약한 급우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음. 그 세계의 무리들끼리 바깥에서 세력 다툼은 했었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성격이 엄청나게 바뀌어 멜랑꼬리하고, 솔리터리하고, 아주 사색적이고 과묵해졌음. 악동(惡童)에서 완전히 탈피하였음.
3월 첫 시험에서 300명 중 207등을 했음. 그 때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실망을 했으나 1학기말은 68등으로 마감했었음.
변명 같지만, 지나놓고 생각해보니 당시 시험 평가 방식이 아주 불공정했었음. 과목마다 지정된 참고서를 중심으로 문제가 출제되었고, 모 선생님은 개인 과외를 하면서 출제 경향 정보를 흘렸다고 함.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교과서 구입도 제대로 못했던 나는 언감생심.
게다가 집에 가면 집안일을 돕느라 공부에만 몰입할 수가 없었음.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기타 연습에다 나팔 연습을 하느라 영어 수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음.
그런데 그 시절은 내신 성적 반영을 하지 않던 때라서 학교 성적 부진으로 인해 대학입시에서 피해를 본 것은 없었음.
태병일
-설악중 출신의 짝, 나하고는 출신 학교가 달라 초면이었지만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금세 친해졌음. 수학 성적은 우리 반 60명 중 최고였으나 영어는 완전히 바닥이었음. 물론 나도 영어를 못했지만, 나의 경우는 그래도 영어의 최소 기본은 알고 있었음. 그런데 병일이는 발음기호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몰랐었음.
이 친구는 완전히 무협지狂이어서 빌려온 무협지를 틈만 나면 읽어댔음.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한테는 수다스러울 정도로 온갖 얘기들을 다 해주곤 했음.
춘천교육대학으로 진학, 현재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음. 설마 지금도 교장실에서 선생님 몰래 무협지를?
2학년3반
2학년 때에는 문과반과 이과반으로 편성되었음. 1·2·3반이 문과반이었고, 4·5반이 이과반이었음. 당연히 나는 문과반이었는데, 당시 문과 우수반은 1반이었음.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은 기억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나에게는 인생 최대의 위기였었음. 설상가상으로, 담임선생님은 머리도 비상하고, 전공 실력은 출중했으나 교육자로서 자질은 매우 부족하였음. 돈밖에 모르는 속물이었음.
당시 나는 학교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골백번을 더 했음. 그 무렵에 유년 시절의 고향 진해에 대한 향수병이 극에 달함.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린 시절의 고향 진해가 어른거림.(진해에 비하면, 거칠고 무질서하고 누추한 속초가 무척 싫었음.)
여학생 얘기에, 아주 거칠고 저속한 말투에, 술·담배에다 음악이라고는 송창식·이장희밖에 모르는 불량스럽고 통속한 여러 명의 급우들, 그리고 오로지 일렬종대의 성적순으로 평가되는, 입시 사관학교같이 살벌하고, 삭막한 학교 시스템은 나를 정말 힘들게 했었음.(그렇다고「말죽거리잔혹사」분위기 정도만큼은 아니었고, 나를 괴롭히는 급우도 없었지만)
당시, 나는 여학생과의 고고한 플라토닉 사랑을 꿈꾸었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사랑했던 클래식 음악狂이었음.
아무튼 극심한 우울과 고독에 빠져 허우적댔음.
박진호
-중3 때 가장 친했던 진호가 짝이 됨. 우리는 또한 관악부원이기도 했으므로 수업 시간 외에도 거의 매시간을 붙어 다녔음. 둘 다 음악계열로 대학 진학을 희망했음. 하지만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체계적인 음악 공부를 할 수 없었음. 독학밖에 길이 없었음.
진호와는 너무 친해서 문제가 될 정도였으나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았던 김모 친구는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 노골적으로 무시함.
그 친구는 훗날 3수 끝에 나와 같은 대학을 다녔음. 그 친구, 대학에 가서야 나를 학구파로, 또 수재(?)로 인정해주었음.
이재언
-짝은 아니었지만, 당시 나의 유일한 학문적 친구. 클래식 음악을 잘 이해했고, 폭넓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던 급우.
하지만 이 친구 역시 많은 방황을 하였고, 담임선생님과 불화로 무척 힘들게 학교생활을 함. 가정 사정으로 1년 휴학을 하는 바람에 동창들보다 1년 늦게 졸업함.
나와 같은 대학의 사범대 미술교육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고, 현재 중견 미술평론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석·박사 과정은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이 친구는 영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일본어 등등 외국어 실력이 아주 뛰어남. 한문 실력만 나보다 조금 뒤떨어짐.
2018평창동계올림픽 예술감독직을 맡아서 일하고 있음.
3학년4반
3학년 때는 다시 1학년 때처럼 문과·이과 구별 없이 반을 편성, 나는 최악의 돌반이었던 4반으로 배정이 됨. 얼마나 돌반이었던지 인근의 양양여고에까지 소문이 나서 양양여고생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함.
“얘들아, 속초고 3학년4반 남학생들 완전히 날건달들이래! 걔네들과는 절대 사귀면 안 돼!”
하지만 4반 친구들은 비록 공부도 못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우수반 친구들보다 의리도 있고, 낭만도 있었음. 문학 소년들도 많았음.(이강현·이용해·윤해근 등)
그 해 1976년도 5월에는 속초에서「강원도교련실기대회」라는 아주 큰 행사를 치렀음. 그래서 그 행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관악부원들은 거의 수업을 전폐하다시피하고 악기 연습과 행진 연습을 했었음.
나는 그 행사 끝나고 병명도 모르는 중병에 걸려 5월 하순부터 7월 중순까지 장기 결석을 함.(아마도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이어진 듯)
투병 생활 끝 무렵쯤에 피아노 전공 대학진학을 희망하던 속초여고생 2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었음. 느닷없는 방문에 당황스럽고, 한편 고맙기도 했었는데, 그 때 군대 간 형이 치던 낡은 기타로「로망스」를 연주해주었음. 그 곡 연주를 신청했었던 안 모양은 감탄의 한숨을 여러 번 내뱉으면서 아주 간곡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했었음.
“로망스 너무너무 좋아하는 곡이에요. 꼭 좀 가르쳐 주세요, 부탁해요!”
하지만 그 약속 40 년이 된 지금까지 지키지 못했음.
박진호
-3학년 때도 역시 같은 짝이 되어 내가 투병 생활을 하던 기간 내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병을 왔었음.
진호와 반 친구들의 의리에 힘입어 투병 생활을 접고 재기, 2학기부터 본격적인 학구파로 변신함. 성적도 상승세를 타면서 예비고사(수험번호 737538번)에서 2.6 대 1의 경쟁을 뚫고 여유 있는 점수로 합격.
독학으로 한 음악공부였지만, 2.7 대 1의 본고사(수험번호 3450번)에서도 무난히 합격함.
당시, 강원대 사범대 음악교육학과 작곡 전공 본고사 전공시험은 모두 6개 과목이었음.
작곡실기(피아노곡 작곡하기), 피아노 연주실기, 청음, 시창, 화성학, 음악이론 등.
피아노 연습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었기에 피아노 실기 시험에서는 완전히 죽을 썼고, 음악이론 25문제에서는 만점을 받음.
공부에 별 취미가 없었던 진호는 그 해 예비고사에서부터 실패를 하였고, 5수 끝에 음악과가 아닌 사회계열 학과에 합격, 늦깎이 대학생활을 함. 하지만 그 후 곡절 많은 인생살이를 하다가 2007년에 만성 간경화로 세상을 하직하였음.
임종 때 나만 찾았다는 그 친구, 그 친구에 대한 얘기를 다 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윤해근
-짝은 아니었지만, 또 한 명의 소울 메이트였음. 전형적인 문학 소년으로 고성군 거진읍에서 유학을 왔던 친구. 나를 음악의 천재로 알고, 무조건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음대 진학을 권했었음.
하지만 나는 음악을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었기에 나의 음악적 재능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으로 알 수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려웠기에 4년 간 수업료 면제에다 졸업 후 의무적으로 음악교사 임용 혜택이 주어지는 국립 사범대 음악교육학과로 진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
이 친구는 예비고사에서는 무사히 합격했으나 본고사에서 낙방, 재수를 하던 중에 군 입대를 하였음. 입대 전에 아주 절박한 심정의 내용이 담긴 엽서를 보낸 후 소식 두절. 지금까지 소식과 행방을 알 수 없음. 마당발이라고 소문난 동창회 문종빈 총무도 그의 소식만큼은 모르고 있음.
그리운 친구,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첫댓글 다 읽어보니 음악성은 천재였구만...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그 시절 음악과 대학 대학원을 다니면서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천재적인 선후배들을 꽤 많이 만났었네.
하지만, 재능만으로 대성할 수 없는 게 음악계의 현실, 끈질긴 노력에 경제적인 뒷받침도 많이 필요하네.
나는 조기교육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음악적 감각이 천재 수준까지는 못되고, 다만 음악을 논리적인 이론으로
이해하는 능력은 좀 타고났던 것 같다. 그래서 음악이론을 전공했다면, 꽤 괜찮은 음악학자는 되었을 것 같은데,
내가 대학을 다니던 그 시절에는 국내에 음악이론전공과가 없었네.
덕분에 비록 무명이지만, 작곡가가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