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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이 될 49박 50일의 고투?
10월 7일, 화요일.
내가 타고 귀국할 비행기가 이 달 21일(화요일) 오전에 간사이공항(大阪市)을 이륙하므로
오늘부터 1주간은 나의 일본체류의 남은 모든 요일이 1번씩 남게 하는 날들임을 뜻한다.
다음 화요일부터는 모든 날이 하루씩 지워지고 남은 마지막 날에 귀국하게 되니까.
그러나, 이것은 나의 일본 체류일정이며 시코쿠헨로 걷기는, 소위 케치간노레이조(結願の
靈場)인 종착지(88番大窪寺)를 향해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도중에 돌발사 없이 순조롭다면 오늘은 -9일이 되는 날이니까.
아마도 재회가 없을 듯 싶은 일본과의 영별(永別)이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미 누누이 언급했듯이 내게 일본은 만나고 싶지 않은, 불가근불가원의 특수 관계다.
그래서, 포기했던 길을 돌연 걷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의 현실 도피성 선택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내게 시코쿠헨로도 없었을 것이니까.
세월호의 비극을 곁에서 이겨내지 못하겠기 때문에, 선은 없고 악 뿐인 현실에서는 가장
가까운 일본의 시코쿠헨로를 걷는 것이 최악을 면하는 차악 정도라고 생각되어 택했는데.
그랬는데도, 까미노와 달리 일각이라도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그 날(귀국일)이다.
마지막(귀국일)이 다가올 수록 못내 아쉬워하던 까미노의 나날과 달리.
팽목항이 떠나올 때 그대로인 상태에서 귀국한다면 원점으로 회귀, 소위 도루묵이 될 것이
분명하며 49박 50일의 고투가 무의미로 끝날 것이 명약관화한데도 오죽 힘겨우면 그럴까.
귀국을 늦춘다 해도 현실도피일 뿐이며, 오히려 샌드위치를 자초하는 꼴일 것이다.
시코쿠헨로에서 특별한 체험을 한 그저께 밤과 달리 시 지정 긴급대피장소 아래에서 보낸
간밤은 걱정근심이 없는 밤인 듯이 갔다.
매사에 주도면밀한 것이 강점인 일본의 지자체가 모든 재해의 피난소로 지정한 곳인데다
미하라(三原邦春)의 헌신적인 양보로 더욱 안온한 장소를 점유했으니까.
이에 더하여 온 하늘에 촘촘한, 크고작은 별들의 속삼임이 자장가로 들리는 밤이었으니까.
나보다 더 일찍 기상한 미하라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정자를 떠난 시각은 아침 6시 19분.
한데, 어제 해가 많이 남은 시간대였는데 왜 보지 못했을까.
지근에 온천(湯之谷溫泉)이 있는 것을 알았다면 여유로운 시간을 온천에 활용했을 텐데.
아쉬움을 남겨놓고, 카이도(街道)로 불리면서도 번호를 받지 못한 사누키카이도를 따라서
어제 오후에 이어 걷기를 잠시 계속했다.
마에카미지에서 1.1km지점, 11번국도에 합류하기 직전에 헨로미치는 2개로 나뉜다.
사누키카이도를 따라 직진하여 국도에 편입하거나 2시방향의 무명로를 따르거나.
지도에 의하면 두 길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전자는 8.2km, 후자는 9.0km다.
거리의 차(差)에 무관하게 나는 전자를 택했다.
잘 만들어진 인도를 따르므로 오류의 염려 없이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이점을 택한 것.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인가.
헨로 초기에는 까마득히 멀어져가던 팽목항이 아른거리고 침몰되어 가는 세월호 안 참상
의 환영(幻影)에 걸음이 비틀거려지는 빈도가 늘어가기 때문에 안전도를 고려한 것이다.
도로 좌측의 사이조시립 소학교(神戶小學校)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この街(まち)で生(う)まれた.そして大(おお)きくなった(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心(こころ)にゆとりをもって走(はし)ろう!!(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달리자)
학교 정면 쇠울타리에 걸어놓은 현수막의 글이다.
평범한 듯 하나 자라는 세대에게 애향심을 고취하고 넉넉한 심성을 강조하는 글귀다.
일본의 소학교(우리의초등교)에는 톡톡 튀거나 거창한 뜻을 담은 슬로건이 아니고 이처럼
그들(소학생)의 눈높이에 맞는 글귀들로 단장되어 있다.
불가사의한 빠른 시속과 긴 휴식
상거가 꽤 되는 카모강(加茂川橋)을 건넌 시각은 아침 7시 12분.
280m 다리를 건널 때 비로소 자전거를 탄 등교길의 소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다리를 건넌 후 사이조시 도심의 남쪽 지대를 지나는 헨로미치.
사이조시립 오마치(大町)소학교의 천진스런 학생들이 일렬 종대로 등교하기 시작했을 뿐
한가로운 아침 길이 썩 맘에 들었는데 그 끝에서는 금상첨화의 그림과 마주치게 되었다.
내 눈에 유난히 잘 뜨이는 서점(西条의 明屋書店福武店)을 지나서 이이오카(飯岡) 마을을
흐르는 무로 강 다리(室川橋/前神寺에서 6.3km지점)를 건넜다.
얼마 후에는 사이조 바이패스(西条Bypass) 도로와 합친데(飯岡交叉路) 이어서 나뉘었던
헨로미치도 하나로 뭉쳤다.
마에카미지로부터 8.2km(저쪽은 9km)지점이다.
11번국도의 좌우를 바꿔가며 원근에서 국도와 동행하던 사누키카이도가 어느 지점에선지
다시 헨로미치가 되어 국도에 합류하나 잠시 후 국도의 좌측으로 딴 살림 차려 나간다.
우측 멀리 떨어진 마츠야마자동차도로와 연결하는 사이조IC교차로를 통과했다
아루키 헨로상의 관심거리는 거대한 건물이나 공장보다 심야와 조조에도 이용이 가능한
편의점인데 패밀리마트와 로손을 연달아 지났다.
로손은 사이조시(西条市)와 니이하마시(新居浜市)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바야흐로
니이하마시 오조인(大生院)에 들어선 것이다.
오조인(大生院) 마을에 들어서서 우즈이 강 다리(渦井川橋)를 통과하는데 다리 끝 부분에
앞에서 언급한 금상첨화의 안내판이 서있다.
'오헨로상휴게소'(四國八十八か所靈場巡り お遍路さん休憩所)
(수고많으십니다
부담없이 물과 화장실을 이용하십시요.
이용 후에는 다음분을 위해서 청소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그림 참조)
'오조인연합자치회'(大生院連合自治會)의 오셋타이 프로그램이다.
다리 끝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되는데 홍보 안내판에 비해서는 약간 초라하다.
하지만 9km 이상에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휴식이 필요한 기록적인 걸음이었다.
8시 18분에 당도하여 51분에 출발했으니까 아침의 휴식에 33분이나 바쳤다.
빠른 시속(時速)과 긴 휴식, 모두 시코쿠헨로에서 신기록이다.
디카의 시계가 고장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으며, 비록 2시간에 불과하나 시속4.5km 이상인
것과 한 곳에서 30분 이상 휴식한 것 모두.
놀라운 사실은 필수 프로그램인 아침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빨리 걸은 기록이다.
시코쿠헨로의 첫날부터 단 하루도 빠짐 없이 압박해 오는 고통으로 시작한 일과였다.
심할 때는 황금시간인 아침의 2시간을 넘어 오전을 몽땅 고통 속에 몰아넣었는데, 바로 그
고통의 시간에 달성한 기록이라 불가사의라는 것이다.
헨로는 휴게소에 인접한 슈퍼마켓(FRESH VALUE大生院店) 끝에서 국도를 떠난다.
우즈이강 다리 직전에 국도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는 사누키카이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국도의 우측에서 국도와 나란히 가는데, 재결합하는 지점까지 8km 이상을 한 블록 안팎에
불과한 사이를 두고 간다.
아마, 헨로를 주축으로 개설한 국도의 직선화 과정에서 국도로부터 버림받은 굴곡구간의
일부를 사누키카이도가 재활용한 결과일 것이다.
농촌의 도시 체험에서 도시생활에서 농촌의 체험으로?
오조인의 헨로상 휴게소에서 하규(萩生)의 헨로상 휴게소까지는 시코쿠헨로에서 드물게
건물도 사람의 표정도 정갈하고 밝으며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마을이다.
오래되었으나 낡지 않은 주택들이 고풍스럽다.
관리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관리를 잘 한다는 것은 여유롭다는 뜻하며 여유로움은 안정에서 비롯되는데 경제적 여유
없이 안정이 지속될 수 있는가.
상대적 빈부는 불가피하지만 전체적으로 경제적 윤택이 감지된다.
마을길에 불과한 사누키카이도의 양편의 띄엄띠엄, 상당한 면적의 전답들이 여전히 농촌
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주변에 고층빌딩 들어서기가 진행형인 것으로 미루어 아직은 농촌이지만 미구에 도시화
농촌의 시대가 도래할 것 같다.
농촌 속의 도시에서 도시 속의 농촌으로 위상이 바뀌게 되는 것.
농촌에서 도시생활의 체험이 아니라 도시생활에서 농촌을 체험할 수 있는 지역으로?
오조인의 휴게소가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라면 여기 하규의 오헨로상휴게소(萩生庵)에는
잠자리에 침구까지 비치되어 있다.
두 곳 모두 말 상대가 없는 무인(無人) 휴게소(?)라 벽에 부착되어 있는 안내문으로 짐작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하기모리가 자기 성(萩森)의 첫자(萩)와 같다는 이유로 더 그랬나.
지도에 휴게소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적어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은 곳이니까.
까미노의 알베르게라면 8시 30분 전에 모두 퇴실하고 이 때쯤(10시전후)은 청소시간인데.
오조인에서 처럼 잠시 쉬는 동안에 아침식사(어제 구입한 빵)를 하고 일어섰다..
오헨로휴게소를 나와 직진(동진)하는 헨로가 1분만에 다리(黑岩橋)를 건넘으로서 하규를
떠나 나카하기 초(中萩町)에 진입했다.
바야흐로 니이하마시(新居浜市) 다운타운의 남쪽을 따르는 동진이 시작된 것이다.
나카하기소학교(中萩小學校)를 지났다.
4거리 건너 나카무라우편국(中村/左)에 이어 조부뉴지보육원(上部乳兒/右), 나카무라혼
마치(中村本町) 집회소를 끝으로 나카무라마을을 지났다.
츠치하시(土橋)자치회관에 이어 작은 강, 이름 없는 다리를 건너면 키코지초(喜光地町)다.
다운타운이라 하나 지나온 오조인과 하규가 더욱 청결하고 돋보이게 하는 마을들이다.
47번현도와 교차하는 신호등 4거리를 지나 상점가(よいこそ 喜光地商店街)를 통과한다.
다시 '오헨로하우스요코야'(お遍路House橫屋)를 지난다.
니이하마시 키타우치초(北內町), 사누키카이도 우측에 있는 오헨로상 휴게소(へんろ小屋
新居浜. 第五十五號)의 병설(倂設/동일건물)이라나.
'타비노야도'(旅の宿)의 여주인 야마모토 미소노(山本美園)의 '헨로하우스'(메뉴 '시코쿠
헨로' 13번글 참조)와 동류의 여러 하우스 중 하나란다.
젠콘야도와 여관의 중간쯤이라 할까.
미소노처럼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를 모토(motto)로 한다면 신뢰는 의심할 여지 없다.
그러나 후한 정성이라 해서 정오 전인데 묵으려 할 수 있는가.
더구나 소도마리(素泊/잠만 자는 것)가 2.000y이다.
최초의 만남은 우연, 2번째는 기적, 3번째라면 사기?
헨로하우스를 지나 곧 그 젊은이를 또 만났다.
내 뒤를 따라오다가 내가 헨로코야에 들른 사이에 나를 추월하게 되었나.
4번째라면 인연을 들먹일 만도 하겠는데, 일본인 담임선생이었던 구로타와 흡사한 이미지
이기 때문인지 앞에 가는 그와 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서행했는데 무슨 이유였을까.
그가 잠시 멈췄기 때문에 우리는 동행이 불가피해졌다.
아무 약속도, 언질마저도 없는데다 원치도 않는 사이인데 4번째 재회라면?
최초의 만남은 우연이고 재회는 기적이며 3번째라면 필연이 아니라 사기(詐欺)라는 어느
(일본) 드라마의 한 대사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가장한 의도적 접근을 경계하는 범죄 수사물의 한 대목인데 우리의
거듭된 재회야말로 의도가 전혀 없는 만남이다.
어제 마에카미지에서 만났을 때 예약한 여관에 간다 했던 그였는데 느지막이 출발했나.
긴 코쿠료 강(國領川/國領橋)을 건너 좌측의 풀밭 공터에서 잠시 휴식한 후 떠났다.
딱히 할 얘기거리가 없으니까 그의 한팀이었던 영감이 절로 화제가 되는데도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입에 담기조차 거부반응인 청년이기 때문에 묵묵히 걷기만 했다.
코쿠료 강을 건너, 후나키초(船木町)에 들어선 한참 후 11번국도와 합치는 길을 함께.
다만, 그는 나와 달리 스마트폰 내비(navigation)의 안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국도와
현도 등 공공 도로에 포함되지 않은, 내비 영역 외의 좁은 헨로는 걷지 못한다.
헨로도 이케다교차로(池田交叉点)에서 한몸이 된 사누키카이도를 변함없이 따른다.
곧, 완만한 비탈을 오르는 중에 우측, 교통안전 기원의 석지장 (石地藏) 옆에 있는 사카노
시타 대사당(坂之下大師堂)을 지난다.
본래 이 지점에서 150m 동쪽에 있었는데 1960년(11번국도 개통때)에 이축(移築)했단다.
아마도, 그쪽이 헨로미치였는데 국도의 직선화로 인해 남은 자투리땅에서 옮겨왔으리라.
이후에도 헨로를 안은 사누키카이도는 수시로 국도를 들락거린다.
'구카이도'(舊街道)라는 표지판이 도로 도처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누키카이도는
11번국도의 건설 이전에 있던 주도로(主道路/main road)였을 것이다.
직선화 된 국도로 인해 발생한 작은 자투리땅은 무시되지만 일정한 거리 이상인 경우에는
살아서 구카이도로 남아있는 것이리라.
그 때(개발할 때) 제외된 헨로가 현재에도 사누키카이도를 거부하고 따로 가고 있는 일부
오리지널 헨로일 것이다.
해발180m 세키노토(關の戶) 고개를 넘는다.
니이하마 시와 시코쿠주오 시(四國中央市)의 시계(市界)가 되는 지점이다.
후나키초(船木町)를 뒤로 하고 도이초우에노(土居町上野)에 진입하는 지점이기도.
도이초우에노의 세키노하라(關の原)에 진입하자마자 사누키카이도가 또 갈라선다.
헨로도 물론이다.
이 지점, '엔메이지(延命寺 )5.5km' 라는 이정목과 헨로미치 심벌판이 서있는 위치에 당도
했을 때 헤어지자는 젊은이.
예약한 호텔로 가려면 국도를 따라야 한다며.(내비는 국도를 헨로미치로 안내?)
헨로는 이 지점에서도 사누키카이도를 따르는데,(이 지점 이후로 11번국도는 헨로미치가
아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의 일 아닌가.
산도쿠리대사(三度栗大師)와 이자리마츠(いざり躄松)의 전설
현 위치가 64번마에카미지에서 65번상카쿠지(三角寺)까지 반도 되지 않는 22km지점이며
현재 시각이 13시 48분이라면 이른 아침의 시속4.5km가 믿겨지겠는가.
이른 아침과 달리 지나치게 나태한 오전이었음을 의미한다.
해 안에 23km 전방의 상카쿠지에 도착하지는 못한다 해도 분발해야겠다.
완만한 내리막 길이 농사용 수로를 건너 '関集會所'라는 이상쩍은 간판의 집을 지났다.
수일 내에 알게 된 것은 발상지가 니이하마지방인 '타이코다이'(太鼓台/민속祭禮의일종)
의 계승 발전을 위한 세키마을회관(関部落集會所)이라는 것.
개화된 농촌의 개량된 농로에 다름아닌 사누키카이도의 옛길, 12c 전이라면 취락이 형성
되기 전이었을 당시의 길을 상상하며 걷다가 미치노시타(道の下)삼거리에서 잘못들었다.
앞으로의 헨로는 11번국도와의 동행이 없다는데 삼거리에서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긴 거리가 아닌 것이 다행인 길을 되돌아 와서 세키 강(関川/熊谷橋)을 건넜다.
도로 좌측의 쿠마가이지장존(熊谷地藏尊), 세키카와우편국에 이어 세키카와 소학교, 세키
카와공민관 등을 지난 후의 헨로는 옛길 보존지역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안내판과 그 지시방향을 주시하고 살피기에 소홀한 결과는 돌고돌기 십중 팔구일 것.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길의 생멸과 변천의 시각교육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는 다수라는 공통분모가 형성되면 도로가 건설되지만 예전에는 개개인이 필요에
따라 걸으면 길이되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다.
헨로미치의 좌측에 자리한 키노카와(木ノ川)집회소와 접해 있는 지조인(三栗山地藏院)에
코보대사가 '산도쿠리대사(三度栗大師)가 된 전설의 설명판이 있다.
대사가 이 곳을 지나갈 때 애들로부터 밤 한톨을 받은 답례로 "앞으로는 (밤나무가) 1년에
3번 열매를 주리라" 말하고 떠났는데, 이후 이 일대의 밤나무는 연간 3번씩 열렸다는 것.
그래서 산도(세번)밤대사가 되었단다.
이후, 헨로(사누키카이도)는 신호등교차로에서 11번국도를 횡단한다.
마에카미지에서 25.8km지점이다.
국도를 횡단한 헨로(사누키카이도)는 세키 강에 합류하는 작은 강을 건넌다.
왼쪽의 JR요산선(予讚線) 철교와 지척 관계로 건너는데 곧 철도 건널목이다.
철도를 건넌 후 우측 사누키카이도를 따라서 도이초하타노(土居町烟野)의 마을 시모하타
노(下烟野)를 지난다.
쿠로이와 다리(常盤橋)로 우라야마 강(浦山川)을 건너면 도이초도이(土居町土居)에 진입
하고 엔메이지 0.7km 지점이다.
JR요산선철도 건널목을 다시 건너면 우측에 니시도이(西土居/土居町土居)집회소가 있고
좌측에는 '엔메이지0.3km' 이정목이 서있다.
시코쿠주오시(四國中央市) 도이초도이(土居町土居)에 자리한 엔메이지(延命寺).
시코쿠벳카쿠(四國別格) 20레이조(靈場)중 12번 후다쇼(札所)다.
시코쿠88헨로 중 54번인 엔메이지와 동명이며 공교롭게도 창건은 나라시대에 교키보살이
하고 정석인 듯 코보대사의 진언종에 속해 있다.
규모가 54번레이조에 버금가는 듯 한데, 코보대사가 심었다는 '도이노 이자리마츠(土居の
いざり躄松/앉은뱅이소나무?)의 전설이 있다.
헤이안시대 전기, 코보대사가 이곳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훗날에 순석(巡錫) 중에 소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이자리(躄/양댜리 장애인)를 본 대사.
부적(千枚通しの靈符)을 만들어 물에 띄워 마시게 했는데 금세 병이 완쾌되었단다.
그래서 '이자리소나무'라 부르게 되었고 그 부적을 구하려고 다수의 참배자가 엔메이지로
모여들었다나.
아이사츠와 이츠데모 토코데모 다레니데모
128반현도와 교차하는 사거리를 건너면 도이초나카무라(土居町中村)다.
코바야시(小林)집회소(土居町小林)4거리를 건넌 후 작은 저수지를 지나 11번국도를 횡단
하면 도이초후지와라(藤原) ~ 도이초츠네(津根)로 이어진다.
개천에 다름아닌 히노키 강(檜木川)과 거기에 놓인 나카츠다리(中津橋)는 겉으로는 주목
받을만 하지 못하나 진입 우측은 석주(黃金井)와 육중한 석물들이 있는 소공원이다
좌측(북쪽)강가로 이어지는 수국원(堤あじさい園)도 볼거리란다.
무라카미(村上)의 소규모 저수지, 경찰서츠네주재소(四國中央警察署津根駐在所) 등 츠네
와 도이(土居)자동차도로의 고가 밑을 통과함으로서 도이초노다(野田)를 지났다.
1.200여년 전에, 헨로 이전에 어떤 연유로 있었던 길이 헨로가 되었고, 근대화의 바람으로
사누키카이도가 되기는 했으나 헨로 이전 옛 농로였을 길을 상상해 보며 걸었다.
여기까지는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2004년 이전에는 자치 도이초였단다.
2004년의 개편으로 시코쿠주오시가 되기 전에는 이요미시마시(伊予三島市)였던 지역.
노변에 농지가 아직도 적지 않으며 고풍스런 돌담이 보존되고 있는 토요오카초오사다(豊
岡町長田)와 토요오카공민관, 경찰서토요오카주재소(이상 豊岡町豊田) 등을 지났다.
다운타운의 위성 마을쯤으로 요량한 것이 나의 미스(miss)였나.
오마치집회소(大町集會所/우측)를 지나며 도심에 더 다가가는 토요오카초 오마치(豊岡町
大町)가 더 낙후되었으니.
까닭이 무엇일까.
북쪽이 세토나이카이 해안으로 상카와토요오카해변공원(寒川豊岡海浜公園/ふれあいBea
ch)을 상카와초(寒川町)와 공유하고 있는 토요오카초오마치다.
농촌이며 어촌인데다 후레아이(触れ合い/만남) 비치의 효과를 더하면 발전할 기회가 더
많을 텐데 농어촌이기 때문에 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까.
농어촌 중에 어느쪽이 주목을 받고 발전하면 더불어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쪽이 낙후
되면 덩달아 서리 맞는 격일까.
니시타니 다리(西谷川)를 건넘으로서 상가와초(寒川町)에 진입했다.
상가와니시집회소(寒川西集會所/좌측)를 지나고, 노변의 지장(地藏)과 진자(諏訪神社)를
지나는데 전에 없이 자비롭게 느껴지는 지장의 격려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 유구한 세월을 자나깨나 그 자리에 앉아있는, 존재 이유 아닐까.
시코쿠주오경찰서 상가와주재소, 상가와소학교를 지났다.
"아이사츠와 이츠데모 토코데모 다레니데모"(あいさつは いつでも どこでも だれにでも/
인사는 언제나 어데서나 누구에게나)
소학교 정문 옆에 서서 등. 하교 아이들을 세뇌(?)하고 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시공간을 초월한 도덕선생이다.
사누키카이도는 시코쿠전력 상카와변전소 앞에서 126번현도를 받아들여 함께 동진한다.
이요미시마(伊予三島)상가와 우편국을 지나면 구조초(具定町)다.
작은 강이 함께 하는 4거리를 횡단하면 나카노쇼초(中之庄町)다.
시코쿠주오시의 다운타운에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126번현도와 함께 가는 사누키
카이도는 카와노에미시마바이패스(川之江三島Bypass)가 된 11번국도를 횡단한다.
길을 건넌 사누키카이도는 9시방향으로 분기하고 헨로는 직진하는 126번도와 함께 간다.
분기지점(126번현도/64번마에카미지에서 약38.5km)에 43호 헨로코야(小屋)가 있다.
시코쿠주오시의 심벌(symbol)인 코스모스(秋桜)를 형상화함으로서 특이한 이미지다.
지역'카와노에(川之江)신용금고'의 사회공헌사업으로 건설했으며 간벌재(間伐材)를 활용
함으로서 비용도 절감했다는 것.
대다수의 헨로코야가 간벌목을 주자재로 하고 건설공임은 관내기관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또는 기술의 볼런티어(volunteer)로 이뤄진 듯.
기독교 신도가 일본 인구의 0.5%에도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까미노가 그러하거니와 헨로 역시 도심(downtown) 걷는 것이 가장 지루한 일이다.
발전과 더불어 변화무쌍해온 길이기ㅣ 때문일 것이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수시로 단행된 크고작은 도시의 발전 프로그램이이 까미노와 헨로의
보전을 전제로 했을 리 없는데 원형(original) 길이 남아 있겠는가.
상당구간에 각종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고 통째로 사라지지 않았다 해도 찢기고 갈리고....
소위 유서깊은, 역사적인 시설물이라면 이설하는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도심구간은 진입점에서 탈출점까지는 아무 길이라도 덜 지루할 것으로 판단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필수'를 강조하는 시설물의 경우에만 경유하는 정도다.
니이하마시 나카무라에서 분기해 마츠야마자동차도와 거의 동행하는 헨로미치는 시코쿠
주오시의 외곽을 타기 때문에 탈출지점에서 잠시 합류하지만.
126번현도를 따르다가 석지장과 석주를 끼고 우로 돌고(三谷紙工'株'前), 이시토코대사당
(石床大師堂)을 지나 319번국도를 횡단한 후 헨로미치석주(茂兵衛) 앞에 도달한다.
소위 오리지널 헨로미치란다(지도에)
그러나 나는 골목을 돌고도는 그 길을 버리고 126번현도를 따라 직진, 319번국도를 건넌
후 3시방향으로 북상하면 그 헨로미치석주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단지 도심을 편하게 통과하는 방식일 뿐 어떤 의도가 내포된 선택이 아니었다.
한데, 방향을 동진에서 냠향으로 바꾸는 지점(4거리)에서 무심코 주위를 살펴보다가 북쪽
노변 건물에 수직으로 붙어있는 파란 간판을 읽었다.
일본그리스토교단 소속 '미시마신고교회(三島眞光敎會)'
교회로 다가갔다.
단지 반가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입구에서 벨을 누르고 있는 나.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중인데 기대하고 있는 잠자리(戶川公園정자)를 찾아가는
문제를 남겨놓은채 무슨 짓인지.
응답에 이어 나온 젊은 여인.
내 행색으로 짐작했는지 헨로상이냔다.
까미노에 이어 헨로를 걷고있는 한국늙은이(かミノに続いてヘンロを歩いている韓国老人
/까미노니 츠즈이데 헨로오 아루이데이루 강코쿠료인)라는 응답에 이어서,
교회마루에서 자고 갈 수 없겠습니까.(教会の床で寝て行くことができないでしょうか/
쿄카이노 유카데 네데 이쿠코토가 데키나이데쇼카)
국내에서는 교회측의 흠쾌한 허락으로 교회 또는 그 부속건물에서 자는 경우가 종종 있었
지만 일본의 헨로미치에서는 기대하거나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는데 왜 이런 말이?
그러기 위해서(교회에서 숙박을 기대하고) 찾아간 것이 아니며 돌발적으로 나온 말이기는
했으나 국내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일언지하에 No가 나올 줄이야.
하긴, 구차스런 변명보다는 차라리 낫지만 하찮은 늙은이가 아니고 변장한 예수였다면?
"너희는 내가 . . . . .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언제 . . . . . .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습니까?"
"형제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 . . .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기독교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서 우측(양)과 좌측(염소)에 앉아 판결을 기다릴 때 후자(왼편)에 속할 것이
확실시되는 이 교회가 일본 그리스도교회의 모델(model/전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5c가 넘는 선교사(宣敎史)에도 신도가 일본 전체 인구의 0.5%에도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 짚혀진다면 무리일까.
더듬듯 헤매어 찾은 소스이공원(疎水) 정자
나카소네초(中曾根町)의 헨로미치도표(遍路道茂兵衛道標)앞에 당도했을 때는 여광(餘光)
마저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도심을 벗어난 지역이라 대형마트가 없기 때문에 작은 가게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어느
불켜진 사무실(건축설계?)에 들러 잔업중인 듯한 청년으로부터 깔판 종이박스를 구했다.
그의 길 안내 대로 마츠야마자동차도로 횡단터널을 지나 헨로도표 앞에 당도한 것이다.
그러나, 밤길이 순조롭기는 여기까지 뿐이었다.
이면도로를 따라서 모모야마신묘원(桃山新墓園/공원묘지)을 지나 카미카시와초(上柏町)
에 들어서야 하는데 미시마공원(三島)과 모모야마신묘원을 뒤지는 우를 범했으니까.
게다가 초조한 밤길이기 때문에 거리 감각이 무디어졌는가.
나카소네초와 카미카시와초(上柏町)사이, 같은 길(마츠야마이면도로)만을 마치 링반데룽
(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린 듯 거듭 왕복하고 있었으니.
카미카시와초 농촌의 불켜진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 집 청년이 백지에 약도를 그리며 안내한 건물(四國中央市水道局富鄕配水管理事務所)
은 한참을 되돌아가 있다.
도심에서 토가와공원(戶川)으로 직행하는 길인 마츠야마자동차도로 고가 밑 횡단도로와
이면도로의 교차점에 자리한 건물이다.
가고오기 몇번을 스쳐갔던 4층(?)건물.
다행히도 소등(消燈) 전인 사무실에서 초로남으로부터 자상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소스이공원(疎水)으로도 불리는 토가와공원의 정자가 이 사무실 건물의 지근에 있는 수력
발전소(銅山川水力發電所)의 월편(越便/동쪽)에 있음을.
단숨에 공원 초입부에 있는 정자에 당도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리도 많이 고생하게 된 까닭은 단지 시야가 전무한 밤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름, 소스이공원은 내력이 있는 이름이란다.
에히메현의 동쪽 끝부분에 위치한 시코쿠주오시는 일본 유수의 제지산업 도시다.
그 분야에서 발전을 계속하며 지역의 사회, 경제면에서의 거점 역할이 기대되는 도시.
4년에 1번꼴의 큰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이 지역농민들에게 도잔강(銅山川)물을 끌어오는
수로(疎水)는 100년 전부터의 바람이었단다.
장기간에 걸친 토미사토(富鄕), 야나세(柳瀨), 신구(新宮) 등의 댐(dam)건설은 이 지역의
제지업과 농업에 절대적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공원이라 토가와공원 외에 소스이공원이라고도 한다는 것.
한데, 이 공원에 정자가 있고, 이 정자를 경유해서 4km쯤 전방에 자리한 65번상카쿠지(三
角寺)에 가게 되어 있으므로 절로 아루키 헨로상들의 휴식소가 되고 있단다.
밤에는 헨로상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이 밤에는 이미 한 청년이 선점 상태였다.
2인도 가능한 공간인데 이 청년도 늙은이에게 양보하는 것인가.
몹시 미안하게도 간밤의 미하라처럼 이사갔다.
내게 노숙지(露宿地)의 유일한 조건은 비를 막아주는 것이다.
그 것 외에는 조건으로 내세울 아무 것도 없으므로 어제에 이어 만족스런 숙소다.
식수가 있고 WC가 있는 것은 금상첨화는 될지언정 조건은 아니다.
여간해서는 없는 허기와 피로감이 느껴질만큼 어둠속을 헤매었나 보다.
먹고 잠드는 것 외에는 약이 없는 상태니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