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로나 또는 간호사로 독일에 취업했던 한인들은 처음에는 낯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장벽에 묻혀서, 남다른 외로움을 감수해야 했었고, 또 고국은 너무 멀고 당시 청취할 수 있었던 국내 소식은 겨우 KBS 라디오 단파 방송을 밤 11 시경에나 단 한번 청취할 수 있었던 실정 이였다. 이런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글로 된 소책자를 만들어, 그 정보를 서로 보급하려던 움직임이 차츰 일어난 것은 당연한 귀결 이였다.
그
러나 외국이란 특수한 환경 아래서 이와 같은 움직임을 완전하게 흡수 할 수 있었던 재정문제 해결의 어려움과 또한 한 가지 겹쳐서
우리나라 문자의 그 특수성 때문에 꼭 필요했던 한글 타자기나 인쇄 시설 미비라는 열악한 환경때문에 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초창기
몇 십년 동안에는 서로 엄두를 내지 못한 형편 이였거나, 그 결과 역시도 아주 미미했던 실적과 출판 사정 이였다.
‘재독 한인사회 출판 움직임과 그 성과’에서는 이들의 동포사회의 출판을 위한 끊임없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연재와 다음 번 연재에는 이정신문 편집인으로 취재 및 제작을 책임졌던 이종진 선생의 자필 원고를 싣는다. (편집자주)
시행착오를 안았던 창간 일화
신문사를 창간했던 이 사장은 그 해 8
월경 어느 날 저녁 시간에, 프랑크푸르트 정 진우 한인회장과 함께 필자의 집을 방문하고는 간곡하게 신문 편집 일을 도와 주도록
요청하는 처음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시간이 닫는 선에서 신문사를 출입하였는데, 그런데 그동안 이사장은 신문 창간 작업을
하면서 마인츠 대학에 다니던 유학생 오 재국씨와 또 몇 명의 다른 학생들에게 의뢰하여서 신문 편집을 해 왔으나, 그동안
기술상으로 아마 여의치 못한 입장으로 보였다.
|
주
간 『유럽 신문』으로 신문 제호와 함께 또한 발행 체제까지 전폭적으로 다시 바꾸면서, 1984 년 8 월말 이후부터 국내 보다
무려 2-3 년 가량을 앞서서 한글 가로 쓰기 기사 작업을 처음으로 단행하였던 당시의 신문과, 그 후 청흑 색으로 2 도
인쇄까지 다시 한번 시도했던 모습 |
그도 그럴 것이 편집 진들이 처음 시작한 방식은 한국의 모 정규 일간 신문 2 부를 24 시간 내로 배달해 주던 직송( DHL
편)우편 통신으로 매일 받아서는 이 기사를 가위로 오린 다음 다른 편집 가판(暇版)용지에다가 다시 붙이는 짜깁기 원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신문사를 출발시킨 다른 이유로는 그 당시에는 윤 남수씨가 운영하였던 「한국 일보 서독지국」이 한
주일 동안에 약 2 회 정도 고국의 일간 「한국 일보」를 유일하게 각 가정으로 우편 배달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의 입장으로 볼 때는 이미 2 -3
일이나 지난 옛 구문을 한꺼번에 받아 보면서 해외 체재 생활에는 그렇게 적합하지 못한 한 계를 가진 정보만을 접하고 있다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폐단을 없애면서 또 신속하게 독일 현지에서 신문을 직접 제작하겠다는 그 착상은 현실적으로는 신문 기자와
인쇄공 등 여러 분야의 기능인들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출발하였던 그 자체는 너무나 큰 무리였다.
그
리고 또한 가지의 직접적이던 편집 상의 기술적인 문제로는 당시 한국 신문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기 편집을 하였던 시절 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신문지의 기사 내용 자체들은 매우 촘촘하고 비좁은 인쇄 상태이었는데, 이런 마치 깨알과 같은 작은 인쇄 활자의
자간과 자간의 그 간격 사이를 오려서 이번에는 규격과 규모가 현격하게 서로 다른 가(假) 편집 용지에다 몇 mm 의 오차가 나지 않도록 그 지면을 다시 배정하면서, 그때마다 무리한 빈 공간도 나오지 않도록 정확하게 서로를 맞춰가며 재편집하겠다는 그 자체는 어느 모양으로도 결단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 이였다.
결
국 이사장과 조 기자는 신문 제작을 너무 소홀하게 여기지나 않았나 는 의문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오랜
이중 문화 생활로 인해서 그만큼 고국 소식에 목 말라하면서, 어떤 형태가 되었던 우리 문화의 창출을 고대하였던 그 뼈저린 심정을
다른 안목으로 보며 새롭게 인식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갈 급한 심정은 외국에서 장기 체류를 하며 현지 생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았던 사람은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상황으로, 결국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삶과 현지 생활 속에서나마 그 쓴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남다른 고충이라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그
리고 또 한가지의 결정적인 실책도 결국에는 소자본인 경제 여건이 첫 번째 요인으로 보였다. 그것은 이 사장은 처음 한국 신문 광고
지면의 그 하단 부분을 제거면서 그대신 독일 현지 지역의 광고로 대치하므로, 그때 그때의 신문 출판 경비를 충당할 계획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미 구입해 버린 소형 인쇄기로는 대형 윤전기로 인쇄했던 한국 신문의 그 절반 크기 규모까지 인쇄 할 수 있다는
점이 첫 문제였다.
즉
이는 서로 다른 신문 규격 차이를 감안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소자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입한 소형 인쇄기의 그 규격에다 맞춘
새로운 편집 지형을 떠서, 다른 신문으로 발행 할 수밖에 없겠다는 최종적인 결론 이였다. 어쨌든 첫 구상이 어느 정도 미흡한
상태로 결국 유럽 땅에서 유일하게 자체신문 제작, 발행하려던 첫 한글 신문사가 출발했던 셈이다. 결국 약간의 결정적인 착오가
있었던 창간 당시 계획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한글 인쇄 규모 시설을 갖춘 사정이므로, 이를 적극 활용하면서 그의 훌륭한 꿈을 같이
실현시켜 보려던 엇비슷한 의욕으로 이 자리에 같이 참여하였던 몇몇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과 그 땀방울이 이국 땅을 촉촉하게 적신
출판 문화의 첫 걸음마를 시작했던 셈이다.
결
국 무슨 작은 일이던지 처음으로 어떤 일을 새로 개척하고, 이를 도모하려는 과정에는 어차피 고된 수고가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그랬기 때문에 그 후로도 많은 시행 착오를 다시 극복하려던 엄청난 노력이 같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체재 개편하여 주간 「유럽 신문」으로 새 출발
|
불치병 「에이츠」에 대한 4 P. 분량의 상세한 특종 기사를 보도한 내용 |
이
런 저런 착오들을 새롭게 교정하면서 이때 인쇄가 가능한 실질적인 인쇄 규격(신문용지 4 절지)에다 같이 맞춘, 신문 편집 지형
크기부터 먼저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의 또 다른 문제로는 이 사장은 오펠 자동차 공장에서 정상적인 퇴근 이후에나 신문일 에
직접 메 달릴 수 있었던 형편과 나 또한 일정한 직장을 나가던 동등한 입장 이였기 때문에 주 1 회의 신문을 발행하면서 모든
기사는 스스로 직접 작업하는 새 체재로 전환하였던 것이 곧 주간 「유럽 신문」이였고, 후일 이 모델은 컴퓨터가 개발된 후, 다른
신문사에서까지 그들의 현실에 맞도록 채택한 사실이다.
이
때의 신문 모습과 전국 우편 발송 체제가 후일 7-8 년 가량 뒤늦게 새로 창간하였던 재독 한인사회 속의 역사 깊은 주간「교포
신문」과 주간 「우리 신문」, 그리고 월간「크리스천 신문」사들에게 오지에서도 신문 발행의 그 가능성과 자극을 함께 보여준 귀중한 한
모델 케이스가 된 셈이다.
이
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출발하며「유럽 신문」을 만들고 개척하려던 그 과정에도 역시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시절
대부분의 한인 가정들은 두 내외가 똑같이 맞벌이를 하면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던 눈코 뜰 사이가 없었던 시절이 이었고, 또 그때
그때마다 돌출했던 크고 작던 여러 가지의 난제들을 언어가 다른 이중 문화권속에서 자신들 스스로가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결과로,
교회 단체나 역시 한인 단체들까지 그렇게 눈에 뜨일 정도의 움직임은 마른 가물에 콩 나듯 드물었던 실정으로, 각자는 가장 힘든
인생 고비를 넘기던 과도기로도 볼 수 있다.
이
런 저런 상황 때문에 신문이 일일이 보도해도 좋을 만한 행사라고는 연합회가 주최하였던 일년 동안에 가장 큰 모습의 3. 1 절
행사나 그리고 또한 광복절 축구 시합을 크게 손꼽을 정도였고, 또한 우리나라의 올림픽을 몇 년 앞두고 어느 정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양궁협회」나 「수영 협회」가 눈에 뜨일 뿐이던 시절 이였다. 이러한 현실 자체는 신문사가 직접 보도 할 만한 뉴스의 소재
원이 그만큼 좁았었고, 그런 환경 속에다 지방을 뛸 수 있던 보도 기자까지 확보하기가 어렵던 실정도 역시 마찬 가지였다. 이처럼
여러 가지의 악조건 속에서 처음 주 16 페이지로 첫 발행하였던 신문지면을 어느 정도 작업 능률이 익숙해 진 후부터, 주 24
페이지로 다시 증면하는 동안에 전체 기사를 자체적으로 모두 해결하려던 그 고충도 만만하지 않았다.
주로 번역 기사를 취급하며, 이중 직장 생활해
|
고국에서 조길옥 기자가 보내준 2 P. 의 「서울 소식」 |
또
한 당시의 특수한 사정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문 기사로 독일의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를 일일이 뒤져서, 그 자료들을 기본으로
번역한 내용을 신문 지면으로 처리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어려움은 이 시절에는 심지어 「Fax 」라는 기계까지 아직 보급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
렇기 때문에 매번 번역했던 그 원고를 청타자수 최 미숙 양에게 일일이 전달하려면, 이때 우편 처리를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한
방편이나, 그러나 청타를 치는 그 작업까지도 역시 적지 않았던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하므로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악
조건 이였다. 그래서 직장 근무를 마치고 나서 먼저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신문사까지 자동차로 왕복 108 ㎞를 일일이
띄면서 그 원고를 그때그때 직접 전해 주었고, 그리고 주중이나 주말로 거의 2-3 차례나 신문사를 자주 내왕해야만 했었다.
그
러면서 다시 청타가 끝난 기사로 이번에는 신문 편집을 한다거나, 또 주말의 인쇄 작업을 같이 돕던 일들은 마치 일종의 큰 전쟁을
치르던 시절 이였다. 또한 신문 편집 과정에서도 역시 다른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예를 든다면 큰 기사 제목으로는 작은 14 호
고딕체 크기뿐인 청타자기 글씨로는 직접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 작던 글씨를 사진으로 찍어 가면서 일일이 필요로
하는 머릿기사 규격 크기로 다시 키우던 별도 작업까지 했다. 그밖에도 그 당시에 약 1 천부 정도의 신문을 직접 찍으려던 주말의
어떤 때는 인쇄기까지 말썽을 부리면, 무려 12 시간 내내 인쇄 작업을 계속하던 고충도 자주 따랐다.
이
런 저런 힘들었던 각종의 체험들 때문에 컴퓨터가 놀랍게 발달한 오늘날에는 신문 독자들이 스스로 쓴 원고를 이미 교정까지 끝마쳐서
간편하게 메일로 보내 주는가 하면, 그밖에도 인터네트 상에는 각종의 세계 뉴스들이 끝없이 보도되어 있어서, 그때 그때마다 이를
선택하고 골라잡아서 그냥 사무실에 않은 체 간단히 편집해도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어진 요즘 세상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작업
환경과 그 옛 일을 서로 같이 비교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늘과 땅 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진다.
그
리고 본의 아니게 이중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어떨 때는 새벽 1 - 2 시경 무렵에 귀가를 하는 밤길 3 번 고속도로에서 마구
쏟아지는 피곤으로 자주 깜박 졸다가 크게 놀라며 또다시 차를 몰았던, 우리들의 험난하던 개척 작업은 인간의 한계선과 마주 싸운
정신적인 극기 투쟁이기도 하였다.
이
러한 노력을 기우리 는 동안 신문 지령이 2 년을 경과하면서 제 52 호를 발행하기까지 사철을 가리지 않고 하나우 시에서 먼 곳
뤼쎌스하임 신문사까지 늘 내왕하였던 그 시절은 한창의 혈기가 넘치던 젊음도 있어 서지만, 그러나 외국이란 환경 아래서 내 나라 내
말을 아끼려던 정열과 함께 이 일은 그 누군가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란 의무감 때문에, 신문 개척 작업 과정의 어떤
경비도 일절 청구하지 않은 체 자발적인 봉사라는 인식으로, 뛰었던 그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나 어쩌면 너무 바보 같았던
어리석은 짓이리라. |
어양우 화백의 유럽 여행기 |
그
런데 이러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기 그 이전의 현지 서독 지방에서는, 며칠이나 구문이 된 고국 신문을 몰아서 읽는 다거나, 그도
아니면 우리나라 KBS 라디오 방송국의 유일한 단파 방송을 하루 단 30 분 가량을 듣자고 자정인 밤 시간까지 기다리는 마음
작정하고서야 겨우 이 방송을 청취할 수 있던 온통 깜깜한 먹통 시대 때, 이 사장의 재정적인 개인 투자와 비상한 노력으로 그
시절에 신문사 개척의 길을 펴놓으므로, 오늘날에는 몇 개의 주간 신문사들이 이 땅에서도 버젓하게 일어서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본다.
또한 지금은 독일 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유능한 기자들과, 역시 글을 아끼는 지성인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매주 마다 많은 정보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밝은 환경이 된, 재독 한인 사회에 큰 보람과 희망을 가진다.
외국이란 남다른 황무지 속에서도 내 나라 내 언어를 자랑하고 아끼려던 그 충정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신문이 발행되면서부터 극심하게 남발하였던 여러 불온 문서들까지 그 언제인가 부터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춘 사실도 역시 그 부수적인 돋보이는 결과는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한다.
<730호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