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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 운조루, 명당, 중대마을, 뒤주바위
지리산 문수골 산행지도
문수골 다랑이 논밭 사이 아래로 흐르는 개울.
개울이 굽이굽이 흘러가며 이룬 아기자기한 소
그 아래로 저 멀리 구례군 토지면 평야와 섬진강.
토지면은 옛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평야.
풍수지리설 상 여인(구례)의 음부(토지면)
문수골이 있어 가뭄을 타지 않는 토지면 토지.
'토지면 전답을 늘 촉촉히 적셔주는 문수골.'
문수골은 문수보살 불교문화에서 유래된 지명.
불교 전래 이전까지는 모계사회로 추정되는 곳.
문수골을 품은 노고단은 '마고 할미 전설의 고향.'
마고는 모계사회 족장회의를 주최했다는 여신.
마고는 일명 노고단의 여신 '노고(늙은 할머니)'
토지면 일대는 신석기 시대 모계사회의 영역인 듯.
노고단 깊고 깊은 문수골을 음부 같은 산세.
지리산 노고단은 아름다운 미녀와 같은 산세.
구례군 토지면 전답에 생명을 불어넣는 문수골.
'지리산녀가 살던 '전설의 고향'.. 문수골.'
아름다운 여인을 문수보살이라 여겨 문수골.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곳 여신은 산신 할머니
문수골을 품은 노고단 지명도 '노고'에서 유래.
노고 = 선도성모 = 마고 =문수보살.
아름다운 미녀 = 지리산녀 = 선녀.
모계사회 풍습에서 비롯된 민간신앙.
'하여, 문수골은 풍수지리 상 명당.'
..............'문수골의 3 명당터'............
상대 : 금구몰니 = 땅속에 묻혀있는 금거북이
중대 : 금환락지 = 선녀가 풀어놓은 금가락지
하대 : 오보교치 =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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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금환락지'는 문수골 최고의 명당터.
천신의 정기를 쏟게하는 선녀의 아름다움.
천신의 정기(비)를 부르는 문수골 계곡(음부).
하여, 형성된 상대마을, 중대마을, 하대마을.
주민들은 대대로 자기 마을이 명당터라 생각.
옛부터 이상향 청학동으로 여겼던 문수골 일대.
대나무가 많을 만큼 습기가 많은 마을들.
하여, 높은 곳이 상대, 낮은 곳 하대 마을.
이상향을 꿈꾼 옛 화전민들이 일군 산간마을.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전설을 품고있는 문수골
그 '전설의 고향'들을 찾아 문수골로 떠나보자.
아울러, 전설 속 명당터라는 3곳도 찾아가 보자.
풍수지리상 이곳은 섬진강 물을 마시는.. 용의 목덜미.
문수제 능선 너머 우리나라 4대 명당.. 오미리 운조루.
아침이면 섬진강 물안개가 서서히 차오르고
저녁이면 섬진강 건너 오산에 깔린 붉은 노을.
운조루에서 바라보이는 아침 물안개와 저녁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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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영조 52년(1776) 전통양반 가옥 운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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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운조루가 있는 계곡.
그곳에서 6km 올라가면 반달곰이 사는 문수사.
운조루와 불과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화엄사.
내친 김에 성삼재에 차를 주차하고 노고단 산책.
화개장터도 10분 남짓 섬진강 따라 드라이브 코스.
화개장터 옆 남도대교 건너 아래로 가면 매화마을
화개장터에서 하동방향으로 곧장 내려가면 최참판댁.
토지 드라마 셋트장과 멋진 악양들판을 감상할 수 있다.
구례 산동 지리산 온천과 그 건너 편에 있는 산수유마을
조금 멀리 순천 방향 '낙안 읍성 민속마을'과 보성 녹차밭.
그리고 하동 방향으로 가서 청학동과 삼성궁도 관광 볼거리.
구례군 농업기술센터 야생화 관람, 섬진강 쌍계사 벚꽃축제
승용차로 여행 다니기에도 적당한 문수골 일대.
며칠 여유 있다면 머물며 여행하기 적당한 문수골.
문수골의 깊숙한 개울가 민가에 며칠 머물러도 좋다.
지리산 자연환경에만 기대어 사는 오지 주민들.
도시문명의 이기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생활상.
지리산의 깊은 맛이 물씬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정 일급수 맑은 물속에서만 산다는 올갱이.
헤엄치며 올갱이 잡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듯 수많은 별도 아름답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저절로.. 동심.'
알몸 헤엄을 만끽할 만큼 인적 드문 곳.
대자연 품 속에 파묻힌 느낌이 드는 곳
지리산에서도 가장 지리산 다운.. 문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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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문수사리보살 지와 리를 본 딴 지리산.'
지리산에서 외지인 발걸음이 가장 뜸한 문수골.
그 덕분에 천연 야생 동물원 조건을 갖춘 문수골.
'반달곰을 방사할 만큼 야생동물에게는 천국.'
지리산은 옛부터 지리 또는 두류산이라 불렀다.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이다.
신라때 오악은 토함, 계룡, 지리, 태백, 팔공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이라 불리워져 왔다.
지리산은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 또는 地利),
불복(不伏), 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 등등.
그 이름마다 배어있는 속내와 아픔을 알 것 같다.
지리산과 더불어 구례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
지리산 노고단에서 하늘과 산에 제사를 올리고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라 때 매년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어 제례를 받들고
이조 때 노고단 남쪽 현재 광의면 온당리에서의 제례.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더불어 3대 주봉 중 하나
노고단 정상 서쪽에 있는 30만평 넓은 고원인
옛날에는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祠)가 있던 곳.
'산신 할머니를 모시는 단'이라는 의미로 명명된 노고단.
'산신할머니'가 문수보살로 바뀐 것은 불교 영향.
한반도 모계사회에서 산신 할머니는 민간신앙.
문수보살은 민간 토속 신앙에 기대어 퍼져간다.
그러나, 훗날 문수보살은 산신 할머니 신앙을 흡수.
'문수보살은 차츰 독자적인 불교신앙으로 정착.'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절대자의 기품.
엄숙하다고 하다고 말하기엔 온화하고,
인자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엄격한 모습.
젊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의젓한 모습
노숙하다 말하기엔 너무 탄력있는 모습.
남성이라고 보려 하기에는 풍염하고
여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건장하다.
아버지라고 보려하니 너무 자비롭고
어머니라고 보려하니 너무 엄격하다.
이 세상 질서와 평화가 한 몸 안에 있는 듯.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이미 보았기에 감히 말 할 수 없는 모습.
문수보살 신앙은 그렇게 한반도 고대국가에 정착.
오늘날까지 문수보살은 지리산의 모습으로서 정착.
문수골은 문수보살에서 유래된 불교 색체 지명 같다.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인격화한.. 문수보살.'
문수보살이 나오는 경전은 250년 무렵에 만들어졌고
예술작품에는 400년 무렵부터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
오른손에 무명(無明)의 구름을 자르는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패엽(貝葉)으로 된 반야바라밀경을 든 왕자 모습.
남녀 양성이 한 몸에 있는 듯한 모습.
어떤 형태로도 변신술이 가능한 존재.
때론, 구도자를 유혹 시험하는 문수보살.
이집트 최초 여성 파라오 하쳅수트.
이집트의 통치자이자 최초의 제사장.
늘 남장을 하고 인조 수염을 단 여왕
(BC 1503~1482 재위) 이집트의 통치자.
헤라 여신 신화는 하쳅수트에서부터 유래.
출산과 결혼을 주관한 그리스의 헤라 여신.
세석평전 음양샘은 문수보살의 상징이자 생명의 산실.
음양샘의 샘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
음양샘을 들여다 보면 남녀 양성의 성기를 갖춘 모습.
'음양샘 베일 속 수수께끼가 여기서 풀리는 듯..'
중국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문수보살 신앙이 널리 유행
산시성(山西省)에 있는 우타이산(五臺山)은 문수보살 성지
우리나라 문수보살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유행.
신라의 고승 자장은 그 유포에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오대산은 문수보살 상주처(常住處)
643년(선덕여왕 12) 중국에서 귀국한 자장법사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
황룡사 9층탑도 자장법사의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
우리나라 문수보살은 대웅전 석가모니 좌측에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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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문수골 깊고 깊은 골짜기 끝에 있는 문수사.
지리산 문수골의 문수사는 반달곰을 사육하는 사찰.
사찰 입구에 커다란 흑돼지 사육하는 광경도 이색적.
'삼층 건물인 대웅전 지나서
계단을 오르면 산신각 문수전.'
백제 성왕 2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사찰.
화엄사 법계사 내원사 등등과 비슷한 시점에 창건.
문수사가 의외로 유서 깊은 사찰임을 알게 해 준다.
원효대사, 의상법사, 서산 소요 사명대사 등이 수행
1950. 6·25 당시 소실되었다가 1988년 대웅전을 복원
'반달곰을 사육하는 문수사로 찾아가는 길.'
섬진강변 19번 도로 오른쪽 길가에 문수사 안내판.
노고단에서 흐르는 밤재능선과 왕시루봉 능선 사이
해발 800m 높이에 아주 깊고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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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반달곰을 방사할 만큼 산간 오지마을.
멧돼지를 잡기 위해 설치한 올무에 희생된 반달곰.
반달곰이 올무에 걸려 힘들어하는 당시 모습도 공개
올무에 걸린 반달곰이 버둥거릴수록 파고드는 철사줄.
허리 깊이 파고드는 올무에 발버둥치던 단천골 반달곰.
허리 상처가 배를 덮고 있는 반달곰을 의료진이 긴급 수송.
하지만, 이미 상처의 고통으로 탈진한 반달곰.
이 반달곰은 지난 7월 방사된 북한산 반달곰 장강 21.
별명이 왕초였을 만큼 무리 사이에서 활발했던 반달곰.
먹이를 찾아 단천골을 헤매다가 올무에 걸리고 말았다.
'단천골의 벌통을 습격하려다 농가 올무에 걸린 듯.'
올무에 걸리면 대부분 오랫동안 사투를 벌이다 죽게된다.
올무 한 개가 설치되면 3년이면 인근 큰 동물은 다 전멸.
반달곰 복원 사업이 시작된 지 5년 만에 일어난 올무 사건.
단천골 주민이 멧돼지 퇴치용으로 놓은 율무.
주민 입장에서는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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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1960 년대까지 반달곰이 마을을 다닐 만큼 외딴 곳.
얼마전 이 마을에 나타난 반달곰이 토종꿀을 먹어치웠던 사건.
인공 사육 후 방사한 반달곰들이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
문수골은 반달곰 서식지 조건을 갖춘 천연 자연환경.
이곳 청정 개울은 구례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쓰인다.
지리산 10 여 계곡 중 가장 규모가 작고 외딴 문수골.
맑고 깨끗한 개울 중간 중간에 헤엄칠 만큼 넓은 소.
옛날엔 이곳에서 헤엄치던 반달곰이 섬진강으로도 진출
섬진강 물고기까지 잡아먹었던 반달곰이 지금은 구걸꾼.
반달곰이 산장과 사찰을 기웃거리며 먹을 것 달라고 구걸.
앞으로 방사한 반달곰이 이곳에서 잘 살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문수골에 사는 토종꿀 농민들에게 반달곰은 애물단지.
꿀을 좋아하는 반달곰이 민가로 침입 토종꿀을 먹어치우기 때문.
'도시인에겐 낭만의 대상..반달곰.
토종 농가에겐 애물단지.. 반달곰.
관계당국이 겪는 말 못 할.. 애로사항
'강장제이자 여성을 상징하는.. 꿀'
그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곰의 식성.
웅담을 얻으려고 곰을 노리는 밀렵꾼들.
구례군 당국은 밀렵꾼으로부터 곰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방사한 곰의 보호구역인 지리산의 토종 농가들은 괴롭다.
반달곰들의 피해 농가들이 곰을 혼내 줄 방법이 없기 때문.
'빗장을 닫아 걸 수도 없고,
마을 밖으로 쫓아낼 수도 없다.
앞으로 관계당국이 풀어야 할 과제.
빨치산과 토벌군 틈새에서 죽어간 주민들
그 주민들의 봉분 없는 무덤이 많은 문수골.
후손조차 끊겨 돌보는 사람 조차 없는 무덤들.
문수골 곳곳마다 남아있는 치열한 격전의 흔적들.
이젠 반달곰 못지 않게 문수골 주민도 배려할 시기.
반란의 역사 증인들과 격전 유적지도 보호 할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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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깊이 빠져들수록 발길 사로잡는 곳.
우연히 다녀가도 그 추억 잊혀지지 않는 고장.
세속을 잊고 푹 파묻혀 있고만 싶어지는 여행지.
때론 어디론가 훌쩍 멀리 떠나고 싶을 때.
그럴 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문수골.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지고 싶을 때 갈만한 곳.
우리나라 산간 오지마을의 공통점은 흙 벽돌 토담집.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흙벽돌집들과 다를 바 없다.
흙벽돌 토담집은 우리나라 민족의 이동경로를 말해준다.
'문수골 산간마을 흙벽돌 토담집도 예외 아닌 듯.'
문수골은 오지마을이면서도 유서 깊은 전설의 고향.
지금부터 그 인적 드물고 외딴 곳으로 들어가 보자.
한번 빠져들고 나면 영영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은 그곳.
전남 구례군 토지면 산간 오지마을인 문수골.
노고단 아래 왕시리봉 경관 수려한, 인근 골짜기.
여순반란 패잔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숨어든 경로.
지리산을 같은 민족의 피로 물들이는 비극을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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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문수골은 남부군 출입 통로
1948년 10월 23일부터 1955년 5월까지 7년간 반란의 역사.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잠입했던 문수골.
당시 김지회,
구례읍과 인근마을에 빨치산의 야간 습격이 잦아지게 된다.
1948년 11월 5일 토벌대 주둔, 1949년 4월 18일까지 토벌작전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반격
동족상잔의 비극을 지켜보았던 지리산의 민초들
빨치산 토벌 작전 일환으로 진행된 거점 분쇄작전
<군작전상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소개령.>
지리산의 토착민들은 고향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비극
이념 싸움은 지리산의 오지마을을 모조리 파괴한 결과.
토지면 문수리 토착 주민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까지 지리산은 군작전상 소개령 지구.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마을로 방치되어 있었다.
1957년부터 문수골 옛 주민들은 하나 둘 다시 돌아왔다.
'아직도 반란의 역사 흔적이 가득한 문수골.'
문수골은 소개령으로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와 이룬 마을.
낮에는 토벌군 세상, 밤에는 빨치산 세상에 살았던 그들.
지금은 야생 멧돼지와 방사한 반달곰에게 시달리며 산다.
'구산리 왕시리봉에는 57년에 들어선 외국인 별장촌.'
외국인 선교사들 노고단 번잡함을 피해 이곳으로 이전.
문수골 마셔도 될 1급수 개울에서 올갱이 잡기 신선놀음.
피서철 인파를 피해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산간 마을.
칠선계곡 심원계곡과 아울러 지리산 3대 계곡 中 하나.
문수골에서 왕시리봉 거쳐 지리산 종주도 좋을 듯.
산꾼은 성삼재 노고단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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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흙냄새 물씬 풍기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
토종꿀과 고로쇠 수액이 흐르는 지리산 자락 오지마을
구례는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는 뜻이 담겨 있는 지명.
오미리에서 문수사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만나는 문수리.
문수 저수지를 지나면 곧바로 깊고 아름다운 덕은내 계곡
무려 30리에 이르는 길고도 길다 못해 지루한 골짜기이다.
왼쪽 형제봉, 오른쪽 왕시루봉, 질마재 넘으면 노고단.
문수리는 문수보살이 문수암에서 성불했다는 뜻의 지명
임진왜란 때 김해 김씨가 밤재에 정착하며 마을이 형성.
밤재, 불당, 중대(영암촌), 상대(웃대내) 등의 마을.
밤재는 옛부터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고,
불당은 사찰이 있었던 것에서부터 유래되어 붙여진 이름.
중대는 영암에서 이주한 장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
영암촌이라 하다가 문수리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중대.
마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중대마을'이라 불리운다.
상대은 오미리에 있는 하대,
내대의 웃동네라 하여 웃대내.
문수리가 속한 토지(土旨)면은 원래 토지(吐指)라고 표기.
이는 천상의 옥녀신이 가락지를 떨어뜨린 곳(吐)이라는 뜻.
옛날 이곳에 지리산 형제봉 형제신이 살았는데,
이 중 한 남신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옥녀신 자매는 형제신과 결혼하도록 약속했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옥녀신 자매는 함께 형제봉에 올라가 빌었다고 한다.
이때 옥녀신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알게 되었다.
옥녀신의 손에서 떨어진 반지 형상을 띤 토지면 오미리 일대
지금까지도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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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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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봄은 오지마을 처마 밑 고드름의 낙수소리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늦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빨라져 봄을 부르는 노래.
문수골의 계단식 다랭이 논둑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낸다.
지리산 화엄 지구와 피아골 지구 사이 계곡에 파묻혀 있는 오지마을.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귀틀집, 초가집, 억새 지붕 샛집
전답이 부족한 원주민들은 토종꿀, 고로쇠 채취로 산에 기대어 살아간다.
이곳 고드름이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이유는 지붕의 눈이 먼저 녹는 탓이다.
산간마을이라 땅보다는 지붕이 햇살 받는 각도가 넓은 탓인 듯.
대지는 한겨울이라도, 그곳 오지마을 지붕에서는 봄이 시작된다.
눈 녹은 물이 지붕처마 끝에서 흐르다 얼고, 다시 녹아 얼기를 반복
고드름 단면에 나이테를 세어보면 며칠 간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처마 끝에 고드름을 빚고 그 끝에 맺힌 물방울들.
물방울은 서서히, 조금씩 커지는데 햇살에 반짝이면 영롱한 보석 같다.
고드름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며 ‘통통’ 맑은 낙수 소리를 낸다.
낙수 소리는 고드름이 아주 늦게 녹아 처음엔 소리 간격도 뜸하지만,
햇살이 따듯해질수록 점차 그 낙수소리 속도가 빨라지면 봄의 교향곡
땅바닥에 홈이 패이고 홈마다 흥건히 물이 고이면 더욱 아름다운 음악.
이따금 처마 끝 고드름이 통째로 하나씩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
이 무렵이면 개울가에 두터운 얼음장 밑에서도 "돌돌" 물이 흘러가는 소리
봄눈 위로 눈보라 소리와 설피를 신고 눈을 밟는 소리
산마루에서 봄바람에 마른 갈대끼리 부딪쳐 우는 소리
겨우내 마른 잎을 매단 참나무 숲에서 낙엽 구르는 소리
싸리비로 낙엽쓰는 소리, 벼 이삭 부딪히는 소리.
장마철 불어난 계곡물, 폭우, 우박 떨어지는 소리.
문수골은 사계절 자연이 빚는 소리가 아름다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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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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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일대를 비롯 문수골은 토종벌 보호구역으로 지정.
토종벌통에는 수십 수펄을 거느린 여왕벌 1마리가 통치자.
이천 마리 일벌이 위계질서를 이루고 분업생활을 하며 산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모여진, 하얗게 엉겨 붙은 꿀을 가을에 채취
5월 경에 새끼벌을 칠 때에는 사람이 벌통 주위에 상주한다.
이들을 새 벌통에 입주시키지 못하면 까다로운 일이 벌어진다.
분가할 수천 마리 벌들이 주위를 맴돌며 나무나 바위에 머문다.
이때 (2~3시간 안에) 새로운 벌통으로 옮기지 못하면 집단가출.
벌들이 산속으로 도망가 새집을 만든 것이 '자연석청'.
바위틈이나 고목 통나무 속에 살며 꿀을 채집하며 산다.
꽃을 찾아 이동하며 치는 양봉꿀
제자리에서 이동 없이 치면 토종꿀.
토종굴은 효과가 뛰어나 고가에 팔린다.
지리산 주민들에게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유망한 소득업종.
덩치 큰 양봉벌이 토종벌을 공격해 보호구역내에 양봉은 규제.
가끔 남의 집에 잘못 들어간 벌은 그 집 벌들에게 호되게 혼난다.
'기하학적 육각형 벌집을 짓는 벌들의 공학세계는 놀라울 뿐.'
운조루(雲鳥樓).
문수사 가는 길 입구에 있는
이조시대 99칸 양반가옥 운조루.
운조루 이름 속에 담겨진 숨은 뜻.
'구름 속으로 새가 숨은 듯한 누각.'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글귀 중 구름 雲, 새 鳥.를 따., 운조루
8대에 걸쳐 가보인 돌거북은 1989년 도난
영조로부터
그가 잡은 호랑이 가죽을 영조에게 바쳤고
호랑이 뼈는 운조루 홍살문 위에 걸려 있다.
원래 호랑이뼈는 잡귀 침범 방지용
민간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고
남편 바람기를 잡는데 효험이 있다 하여
방문객 여인들이 긁어가 수난을 겪고 있다.
원래 1776년 무관 유이주가 지은 가옥 사랑채가 운조루.
현재 70 평(옛날 99칸) 가옥과 1000평 대지 전체를 운조루.
하인들이 거처하는 일(一)자형 24칸 행랑채는 대문을 겸한다.
운조루 사랑채는 T자형으로 지었고,
손님을 맞는 내사랑인 귀거래정이 6칸,
주인이 거처하는 외사랑인 운조루가 16칸.
정남향 사랑채 툇마루에 앉으면, 기와지붕 너머 오봉산
처마 깊숙이 스며든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곳,
운조루 대청과 누마루는 궁궐건축의 영향.
한옥이 갖는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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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선짐강 뒤로는 지리산'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세의 명당.
구름 속을 나르는.. 새가 산다는 집.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다 지치면 둥지로 돌아올 줄 아네' -도연명.
축성에 남다른 조예가 깊어,
말년에 수원 유수를 지내며
수원 화성을 축조한 공로로
정 2 품 자헌대부까지 특진.
유이주(柳爾胄,1726~1797))
1776년에 지은 아흔 아홉칸 전통 양반가옥.
현재 중요 민속자료 8 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조루를 더욱 빛내주고 있는.. 뒤주 하나.
유이주 8세손 건축공학자 전북대 유응교 교수
그가 지은 시 他人能解 속의 '운조루의 뒤주'.
조선조 아흔 아홉 칸 옛 주인은
백미 두 가마니 닷 되가 들어가는
나무 쌀통에 쌀을 담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빼 갈 수 있도록
쌀독 아래에 구멍을 낸 뒤에
그 마개에 他人能解라고 써 놓고
타인이라도 누구나 마개를 쉽게 풀 수 있다 하였으니
그 음덕 입지 않은 이 없었네/… 중략…
운조루 중문간 헛청에
석양빛만 가득 보듬고
외로이 서 있네
11대 200여년을 그대로
지키는 종부를 맞이하면서…
-시 <他人能解> 중에서-
유이주는 한 달에 한 번씩 뒤주에 쌀을 채웠다.
그의 농지에서 수확되는 이백여 석의 소출 중에
매년 삼십여 가마가 가난한 이웃을 위한 식량.
또 이 뒤주를 주인이 안 보이는 헛청에 놓아두어
얻으러 오는 사람들의 자존심까지 배려했던 것이다.
이조 후기 영정조 시대로 노론 소론 등의 당쟁이 극심
임금이 탕평책을 쓰고 심지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이십 팔 세 나이에 죽임을 당할 만큼 나라가 어지러웠다.
기록에 나와있는 것은 없지만
유이주는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운조루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한 듯.
운조루 이름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사도세자와 같은 시대의 살았던 사람으로서
뒤주에 구멍뚫어 숨통을 트게 하고 빈민 구제
사도세자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래려 했던 듯
운조루는 만석꾼 사돈 후원으로 건축하게 되었다
유이주 음덕으로 동학란 여순 반란사건에도 건재.
그리고 6,25전쟁 등의 회오리 바람에서도 무사.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아름다운 뜻이 더욱 빛난다.
고위직에 있을 때 더 많은 부를 축적해서
자손만대까지 영화를 누리겠다고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하는 이들에게 보이고 싶은 운조루 뒤주.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윤리가 이러한 선비정신
운조루를 지은지 230년 세월이 흐른 동안 집은 쇠락.
그러나, 천왕봉보다 높고, 섬진강 물빛보다 고운 기품.
명당
풍수지리에서는 혈장(穴場) 부근이 길지.
혈(穴)은 생기(生氣)가 결집하는 곳이다.
이 생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간 길지가 명당.
흔히, 명당(明堂)을 명당(名堂)으로 잘못 표기
이름난 곳이 아닌 밝은 기(氣)를 가진 곳이 명당.
음냉하고 습한 곳은 좋지 못한 땅이며,
밝고 따뜻한 곳이 좋은 곳이고 곧 명당.
남향집 선호는 곧 풍수지리적 사고방식.
한반도에서 명당을 이루는 근원은 백두산.
따라서 백두대간 기의 흐름이 원활해야 명당.
명당은 혈로 비유되는 여성의 젖꼭지 중심 산세.
아기가 안겨 젖을 빨고 잠드는 어머니 품이 명당.
따뜻하고 포근한 산세가 명당의 기본.
흔히 좌청룡, 우백호는 명당 조건의 대명사
그러나, 땅의 기운에 생기가 있어야만 명당.
한양은 주산인 북악산을 중심으로
동 좌청룡 낙산, 서 우백호 인왕산,
안산으로 남산, 조산으로는 관악산.
경복궁은 혈처(穴處), 4대문 안은 내명당(內明堂),
4 대문을 둘러싼 강북지역은 외명당(外明堂)이 된다.
또한 명당은 산뿐 아니라 물도 산에 조화되어야 한다.
서울 4대문 안을 흐르는 청계천은 명당수
한강은 명당 밖을 감싸 흐르는 객수(客水)
한양은 산수(山水)가 조화된 밝고 따뜻한 곳.
'사람의 삶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곳이 명당.'
운조루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락지(金環洛地)
사랑채는 4칸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
몸채 왼쪽 끝 1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
사랑채는 궁전 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
여기에 대청이 있고 안채 통로를 겸한 큰 부엌이 마련
더구나 전체 살림을 한 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
운조루의 건축적 특징은 누마루방이나 누다락방
궁전 형식이지만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는 점.
운조루 = 지리산 미녀 + 금환락지.
풍수지리에 의하면, 한반도는 절세의 미인 형국
구례는 무릎꿇고 앉은 미녀의 옥음(玉陰)에 해당.
그녀가 금가락지를 풀어놓은 명혈(名穴) = 금환락지.
금가락지는 여성들이 늘 간직하고 있는 정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
가락지를 풀었다는 것은 곧바로 성 행위를 상징.
금환락지는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곳.
원래,토지면(吐指面)은 금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뜻.
현재, 토지면(土旨面)은 풍수지리에서 비롯된 지명.
지리산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 감으려다가 금가락지를 떨군 금환락지
그때 비녀도 떨어뜨려.. 금잠락지(金簪落地).
노고단에서 흘러나오는 신령스러움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龍)
왕시루봉과 어우러져 섬진강을 품은 모습.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안산으로는 오봉산이 춤추듯.
이곳은 우리나라 풍수지리가 태어난 탯자리.
구례에서 금환락지를 찾아가기 바로 전 마을.
상사리(上沙里)와 하사리(下沙里)는 장수마을
도선국사가 풍수지리 이치를 깨우쳤다는 곳.
도선국사가 모래밭에 그림그린 사도리(沙圖里)
금환락지는 다섯 가지가 아름다워 오미동(五美洞)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한 아름다움.
구례 오미동에 금환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다.
유이주 집터는 금거북이가 진흙에 묻힌 금구몰니 명당.
집터에서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가 출토
그래서 집을 앉힐 때 습한 곳에 부엌을 배치.
거북이가 말라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5 보물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명당.
오미동 구만리 들에서 상대 중대 하대
주민들은 자기네 고을이 명당터라 주장.
상대 : 금구몰니 = 운조루 안채 터
중대 : 금환락지 = 운조루 행랑채 밖 연못
하대 : 오보교치 = 토지면 소재지에 있는 돌탑
한편, 환동(環洞) 박 부자 집터 역시 금환락지라고 주장
원내리(垣內里) 주민들도 마을을 하대 오보교취라고 생각
금내리(金內里) 주민들은 금환락지가 금내리라고 생각한다.
오미리 일대는 모두가 풍수촌 명당 마을.
관청과의 거리도 멀어 횡포로부터도 안전
난세에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몸을 숨길 곳.
두마리 학이 춤추고 있는 쌍학지지(雙鶴之地)
하여, 옛부터 청학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곳.
동학혁명에 실패한 농민들이 이상향을 찾던 곳.
'화전을 일구며 이상향을 건설하려 했던 문수골.
14연대 반란군이 토벌군에 쫓겨 들어왔던 문수골.
현재 문수골은 방사한 곰을 비롯한 야생동물 천국.
문수골에서 명당터로 알려진 운조루.
금환락지 명당터로 알려진, 중대마을.
지리산녀가 살던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중대마을.
백제 개로왕이 사냥 왔다가 여인의 미모에 반한 곳.
<지리산녀>가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곧 중대마을.
옛부터 '금환락지' 명당터가 있다고 전해오는 마을.
전설 속 지리산 미녀가 금가락지를 풀어놓은 명당 터.
여인이 금가락지를 풀면, 몸을 허락하겠다는 의사 표시.
'과연, 전설 속 '지리산녀'가 그곳에 살았을까?'
문수리 첫 번째 상대마을을 지나 오른편으로는 계단식 논밭
계단신 논밭이 그림 같은 중대마을엔 아직도 초가집과 샛집들.
본체는 초가이고 까대기(행랑채의 사투리)는 샛집으로 되어있다.
이곳 주민 조씨는 하대에 살지만, 밤밭과 논밭은 중대에 있다.
하여 농번기가 오면 주로 중대에 있는 초가집에서 생활을 한다.
'농번기에만 잠시 머물다 보니 집 관리는 엉망인 편.'
잡초 무성한 마당에는 토종 벌통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70 통 한봉과 더불어 밤농사는 3천평 한해 70∼80가마 수확.
한창 밤을 주울 때는 어두워져서 밤이 안 보일 때까지 줍는다.
해발 1천 미터에서 채취한 맑은 물, 고로쇠 수액
밤나무와 함께 부를 가져다 준 것은 고로쇠 수액과 토종벌.
마을 곳곳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산수유나무가 흔히 보인다.
밤재에 사는 10여 가구 주민 주소득원은 고로쇠 수액을 채취
중대마을을 떠나 밤재 마을에 이르면
마을 초입에 있는 거대한.. '두지바우'.
'운조루 뒤주와 관련이 깊을 법한..두지바우.'
운조루 뒤주 쌀로 굶주림을 모면한 마을사람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두지바우라 불렀던걸까?
해발 1천 미터 산중 깊은 곳에서 자라는 고로쇠나무
지리산과 백운산, 곧 구례에서 채취한 수액이 최상품.
기온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적은 곳이라여 수액이 많다.
고로쇠 수액은 많이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고로쇠 수액 한 말에 보통 4만5천 원 가량 받는다.
옛날 노고단 화랑들이 고로쇠 수액을 마셨다고 한다.
문수골은 마치 흑백 필름에 담겨져 있는 옛날 풍경.
문수리에는 주인이 없는 귀틀집도 간간이 눈에 띤다.
오지 마을의 옛 주인들이 도시로 떠나가 버려진 폐가.
젊은이들이 떠나가 고령화된 문수골 오지마을들
버려진 폐가 귀틀집은 문수골의 현실을 대변한다.
도시의 이방인에겐 낭만의 대상으로 보이는 귀틀집.
'전설 속 지리산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노고단 산신 할머니, 노고 할미, 마고.
남녀 양성을 한 몸에 지녔다는 문수보살.
문수골에서 금환락지 명당 터라는 중대마을
'지리산녀가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찾아가는 길
구례에서 토지면까지 군내버스 수시운행(15분 소요)
화개방향 버스 타고 중도 하차 또는 택시로 7 분소요.
뒤주바위(두지바우).
1776년에 지은 아흔 아홉칸 전통 양반가옥..운조루
현재 중요 민속자료 8 호로 지정되어 있는..운조루.
쌀 두 가마 닷 되가 들어가는 뒤주가 있던.. 운조루
뒤주에 쌀을 담아 굶주린 이웃에게 나눠준 만석꾼.
존경 받는 사대부 다웠던 유이주(柳爾胄,1726~1797)
그의 선행은 오늘날까지 부자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뒤주바위 전설은 그의 선행에서 비롯된 듯..'
....................뒤주바위 전설........................
문수리 밤재 입구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바위의 이름.
이 바위가 갈라진 데에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뒤주바위 근처에 늙은 부부가 아들 하나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만 아들..'
갑자기 불행을 당한 부부는 아들이 죽은 뒤 이레가 되도록
그 시체를 땅에 묻지 않았는데 깜박 잠든 사이에 이상한 꿈.
꿈속에서 낯선 이가 찾아와 배 고프니 밥을 한술 달라는 것.
나그네는 차려 준 밥을 먹고 부부에게 슬퍼하는 연유를 물었다.
외아들이 죽었다고 하자 나그네는 시체를 보자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무덤을 큰 바위 위에 만드시오.
그러면 저 세상에서 큰 복을 받게 될 것이오."
꿈에서 깨어난 부부는 나그네의 말대로 묘를 만들었다.
뒤주바위에 아들의 시체를 올려놓고 흙과 잔디를 덮었다.
묘를 만들고 돌아가려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고 그 틈으로 아들 무덤이 내려앉으며
푸르스름한 안개가 퍼져 나왔고 그 속에서 백마가 뛰쳐나왔다.
부부는 그 백마를 아들처럼 여겨 데려다가 극진히 길렀다.
뒤주바위 한 귀퉁이에는 말발굽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후 바위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뒤주바위 전설은 사도세자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것 같다.
사도세자 사후에 뒤주바위 전설과 유사한 전국의 전설들.
사도세자에 관련된 비극적인 역사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
사도세자.
...........
이조 21대 영조는 42년간을 나라를 다스리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탕평책으로 당쟁을 조정하고 세금 균역법을 써서 민생을 돌보았고
신문고를 대궐 문루에 매달아 백성들이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했다.
영조는 세자가 차기 왕이 되었을 때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가르쳤다.
당시 권세를 잡고 있는 노론 일당과 세자의 친누이 화완옹주
영조의 젊은 후궁 문소의 간계로 왕과 세자 사이가 벌어졌다.
세자는 부왕 영조를 쫓아내고 왕이 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세자는 울며 결백을 아뢰었으나 영조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갇운다.
윤 오월 뒤주 안은 더웠고 물 한 모금, 밥 한 숟갈 주지 않았다.
세자는 피맺힌 한과 절규를 남기고 7일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뒤늦게 세자를 죽였던 것을 후회해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주었다.
사도세자는 죽은 뒤 융능이라 하여 경기도 수원에 묻혔지만
그 혼이 안주할 수 없었던지 무안군 운남 동암 땅에 나타났다.
무안읍에서 40리, 운남에서 10여리 거리에 있는 갯마을.
40년 전까지도 해안 2km에 백사가 깔리고 해당화가 만발
명사십리라 부른 이곳에 현재 김해 김씨, 김해 허씨 40 가구
2백여 년 전에는 성씨와 박씨, 이씨가 주로 살았다는 곳이다.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던 1777년
이 마을 앞에 배 한 척이 닿더니 귀공자가마을 뒷산에 올랐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마을사람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도세자다. 원한이 뼈에 사무쳐 나라를 섭렵하다가
이 곳 풍광이 아름다워 내 영혼이 머무를 것이니 그리 알라."
이튿날 마을사람들은 꿈 이야기를 나눴는데 저마다 같은 꿈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회의를 열고 뜻을 모아 초혼 후에 단을 모시고 제사.
매년 음력 정월 상순 정일에 올렸는데 소홀히 한 후로, 가뭄 돌림병.
마을 사람들은 연유를 몰라 한숨만 쉬면 꿈에 사도세자가 나타났다.
"너희가 내 영혼하나 위로할 줄 모르니 재앙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여, 버려진 단을 다시 쌓고 잘못을 빌고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 해가 1873년으로 고종 11년이었고 제사를 손 없는 한식일로 바꾸었다.
1918년 묘당을 지어 위패를 모신 마을제가 면제 지금은 군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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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미친 인물로 역사에 씌여 있지만 권력의 희생물.
절대권력 앞에서는 부자지간이라도 비정하다는 사례의 본보기.
문수리는 여순 반란사건의 14연대가 지리산으로 들어간 경로.
그리고, 남부군(빨치산)으로 불리며 반란의 역사가 시작된 곳.
지금도 이 마을엔 남부군과 토벌군간의 전흔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반란의 역사 애환을 대변하는 듯한 뒤주바위 전설.'
지리산 전설을 살펴보면, 남성 존재에 관한 내용은 유명무실.
남성을 영웅적인 존재로 부각시킨 전설은 우투리 전설에 불과
지리산 산골마을에서 아기 장수 우투리가 탯줄을 억새로 끊고 탄생.
지리산과 바다를 오가는 자기 수련과정을 거쳐 군사와 식량을 모아
세상을 평정할 꿈과 힘을 키우다가 어머니의 고발로 인해 좌절과 죽음
'이것이 고작인데 여기에서 '우투리'는 '우두머리'란 뜻.'
지리산은 '아버지의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지리산 자체가 남성의 상징인 때문.
천신의 정기를 방장신이 수호한다 하여, 방장산.
하여, 아버지의 산이라고도 불리우는 지리산.
여순 반란사건은 권력 사상다툼이 빚은 소산물.
양대 세력 간의 부딪침이 빚어낸 민족적인 비극
당시 우리나라는 어느 한 세력을 잡아야 할 입장.
어느 한쪽을 잡지 않으면 국가존립이 어려운 시기
따라서,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민족주의는 희생물.
반란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이제 지구촌에서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사상전쟁은 종말.
아직도 사상전쟁 후 분단의 후유증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
그 분단의 후유증은 38선 휴전선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이제는 그 후유증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줄 시기.
그리고, 서로 손 잡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할 시기.
사도세자 원한을 달래주는 전설이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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