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연기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사람의 마음은 말보다 먼저 밖으로 새어 나올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을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처음 알았다.
연기는 단순한 연소의 흔적이 아니었다. 밥 짓는 김이었고, 온돌을 데우는 숨결이었으며, 그 집의 하루를 대신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언어였다. 농촌의 겨울은 연기로 시작해 연기로 끝났다. 마른 가지와 생솔가지, 볏짚이 우리의 겨울을 태웠다.
아침이면 초가지붕 너머 굴뚝에서 연기가 하늘로 풀려 올랐다. 어떤 날은 가늘고 조용했고, 어떤 날은 바람에 흔들리며 금세 흩어졌다.
생솔가지가 타는 날은 달랐다.
연기는 매캐한 기운으로 마을을 덮었다. 사람들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누군가의 하루가 편치 않다는 것을.
어머니는 그 연기를 오래 다루셨다.
슬픔이 깊은 날이면 일부러 생솔가지를 더 넣으셨다. 짙은 연기 속에서 등을 굽힌 채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시던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때는 몰랐다.
연기가 눈물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연기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나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병석에 누우셨다. 집은 조금씩 비어 갔고, 어머니의 등은 날마다 더 낮아졌다.
나는 그 무게를 알지 못했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서울 박람회 견학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들은 들떠 있었고, 나 역시 그 안에 섞여 있었다.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머니를 졸랐다.
“소갈머리 없는 놈아. 아버지 병원비도 못 대면서 무슨 소리냐.”
그 말은 오래 내 안에 남았다.
나는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나와 마을 뒤 대밭으로 들어갔다. 억울함과 분노가 뒤엉켜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무엇이 그토록 서러웠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해가 기울 무렵,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일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집 쪽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짙은 연기가 무너지듯 흔들리며 하늘로 밀려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삼켰다.
그 연기는 낯설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피어오르던 바로 그 빛깔이었다.
나는 대밭을 가로질러 뛰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생솔가지를 불 속에 밀어 넣고 계셨다. 등은 깊게 굽어 있었고, 어깨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엄니…”
그러나 그 뒤의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으셨다. 다만 장작을 한 번 더 깊이 밀어 넣으셨다.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저녁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사람의 마음은 끝내 안에만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견디지 못한 마음은 어느 순간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것은 말보다 먼저 연기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닿는다.
(2002)
첫댓글 조선시대에는 봉화대에서 불이나 연기를 피워올려 소통했는데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그처럼 어머니들의 희로애락이 나타나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시절에는 우리집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그리도 반가웠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지금 집에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우리 민요에 '석탄백탄 타는데는 연기가 펼펼 나는데,이내 가슴 타는 데는 아무 연기도 안난다'고 했지요. 연기가 감정의
또다른 불출구임은 저는 소년때 알아차렸답니다.
수필가 목성균선생이 장문의 편지로 소감을 적어보내어 평가한 작품입니다.
선생님의 사춘기시절을 진솔하게 풀어낸 작품이군요. 사람의 기억이란 게 참 신기합니다. 그 오래된 장면 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저장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참, 그리고 어릴 적 부르던 이름이 병일이었나 봅니다. ^^
어릴적 이름이 병일이었습니다. 아명이지요. 남이 가던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니 당시는 그렇게도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살면서 서러운 일은 이후에도 많이 겪었지만요.
다시 읽어도 이 작품은 제 마음에 드네요. 손꼽을 만한 명작품입니다.
《굴뚝연기》는 심금을 울리는 순수 명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는 병상에서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도 못 받는 형편에 속알머리 없는 '병일'은 생떼를 쓰니 기가 막힙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 혼자 오남매 생계를 꾸려 지금 중학교 다니게 하는 것도 벅찬데 돈 있는 사람이나 가는 서울 여행을 가게 해 달라 하니 돈없는 어머니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모자지간의 情이 철철 넘치는 귀한 작품이지 싶습니다. 隨筆의 교과서를 읽는 기분입니다. 순수수필의 최고 龜鑑이 되는 명작입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스스로 자괴심에 어느 잡지에 발표는 못하고 묵어낸 어느 책에 끼어넣었던 작품입니다.
읽어주시고 감상평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 동부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