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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가 깨우쳐 준 우리 백두대간의 소중함
안면(安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악의 기형이 된 척추로 인한 것이므로 천형에 다름 아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가 생각이 많기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더욱
잠을 자지 못하는가.
신심(信心)이 열렬한 뻬레그리노스는 온갖 의문과 비판을 신앙이라는 용광로 속에 던져버림
으로서 여과 희석과 단순화를 이루고 순도를 높이겠지만 그 신심이 없기 때문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접지 못하니 말이다.
내게 까미노는 한 번은 열성적으로 걷고 싶은 길이다.
그러나, 2번째는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전번에 이런저런 이유로 프랑스 길의 대부분을 2번째로 걸은 후에 내린 결론이다.
그럼에도, 당장에 또 40km를 걸어야 하고(노르떼 길 연장) 9월 어느 날의 50km 걷기(쁘리미
띠보 길의 연장)가 예약 상태다.
한데, 이 까미노가 깨우쳐 준 것은 백두대간의 소중함이다.
한반도의 2.5배를 넘는 이베리아반도에 광범하게 자리하고 있는 까미노.
뽀르뚜 길 일부 외의 모든 까미노는 이베리아반도의 85%를 점유하고 있으며 한국(한반도 남
반부)의 5배인 스페인의 사방으로 뻗어있으므로 가히 스페인의 까미노라 할만 한 길들이다.
이 까미노에서, 까미노를 통해서 새삼 깨달은 것은 한반도의 백두대간이 까미노로는 상대가
될 수 없을 만큼 우뚝하다는 사실이라니.
기독교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사도 야고보의 선교여정을 효시로 하는 전자는 기독교의 순례길
(영성수련의場)이며 후자는 한국 국토의 골간(척추)이다.
또한 대부분이 악산인 백두대간과 거의 평평한 까미노.
까미노가 종교적 구도자의 길(이 시대에는 아니지만)이라면 대간은 강인한 체력을 가진 애국
심이 전제되는 한국인의 길(예외는 있지만)이므로 어떤 형식의 비교도 성립되지 않건만.
까미노는 새 밀레니엄(millennium), 20c~21c의 전환기에 기독교(특히 가톨릭) 신앙의 영적
수련에 지고지선의 길로 평가되고 있다.
무수한 지구촌인을 불러들일 만큼 매력적인 길로 자리매김 되기도 했다.
이 두 매력의 상승에 따른 시너지(synergy) 효과가 더 큰 인력(引力)을 발산하고 있다.
특히 부화뇌동이 장기인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특효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내게, 까미노에는 백두대간 같은 인력이나 여운이 없다.
백두산을 목표로 북상했다가 휴전선에 막혀 지리산으로 회귀하기를 거듭(2번)한 백두대간.
험준한 산들, 같은 길을 4번이나 걸었는데도 싫증은 커녕 걸을 수록 인력이 강해지는 대간과
달리 단 1회로 족한 까미노.
신앙심이 부족한 탓일까.
끊길 듯 하면서도 이어지고 막힌 듯 하나 뚫려있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철 따라 전혀 다른 길로
변모하는 대간과 달리 까미노는 날이 갈수록 현실과 타협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까미노를 계절마저 같은 시기에 온종일 다시 걸어야 하다니.
더구나 미주알고주알을 되풀이 하는 것 보다
"아르수아~몬떼 도 고소"(Monte do Gozo)는 메뉴 '까미노이야기'의 47번글 '카미노
프랑세스(27) 멜리데에서 50km 몬떼 도 고소'로 대신한다.
중복되지 않는 이야기만 간추려 언급하고.
6월 9일(화) 날이 밝아오는 때 알베르게를 나섰다.
지금은 오직 프랑스 길로만 표지판 정리가 되어 있지만 4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석주(石柱).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이 길이 노르떼 길로도 불리었음을 뜻하는 돌기둥을 발견했다.
차라리 예전 처럼 노르떼 길과 쁘리미띠보 길도 종점을 산띠아고로 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짜증과 싫증
문득, 백두대간 태백(강원도)~삼척 구간의 댓재마루에서 대간 종주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유료지만) 노식(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대간에서 짜증이 나면 즉시 중지하고 하산해야 한다"는.
까미노에서도 통하는 명언으로 부상되어 왔다.
'짜증'과 '싫증'은 닮은 듯 하나 전혀 다른 심리적 현상이다.
본질이 다름은 물론 짜증이 일시적 현상이라면 싫증은 한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만혹, 까미노에서 싫증의 경지라면 지체 없이 귀국 비행기에 올라야 하나 어떤 환경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짜증)이라면 그 환경에 변화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래서 2번째인 이번 길에서 짜증나는 구간에 직면하면 그 길을 버리기로 하고 걷는 중이었다.
노르떼 길을 선도하듯 접근하며 가던 N-634국도와 헤어진 기띠리스 이후 아르수아까지 홀로
온 노르떼 길이 빨라스 데 레이부터 프랑스 길을 동반하고 있는 N-547국도와 자주 만난다.
어느 지점이 될 지는 모르나 짜증이 고개를 든다면 국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까미노를 국도로
바꾸고 그래도 잠잠하지 않을 때는 까미노와 국도를 모두 버릴 작정이었다.
첫 대면지점인 쁘레곤또뇨(Pregontoño)를 지났다.
기초지자체 아르수아의 교구 부레스(San Vicenzo de Burres)의 작은 마을이다.
아르수아 다운타운에서 2km 남짓 되는데 한꺼번에 몰려나온 많은 뻬레그리노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는지 국도를 걸어가는 뻬레그리노가 눈에 띄었다.
만물이 휴식을 마치고 기지개를 켜는 이른 시간대라 늙은 몸도 싱싱한 듯 가벼웠으므로 나는
그냥 까미노를 택했지만.
까미노는 같은 교구의 미니 마을인 아 뻬로하(A Peroxa), 아스 낀따스(As Quintas)와 주민
40명대의 마을 아 깔사다(A Calzada)를 지난다.
오 삐노(O Pino)로 바뀐 기초지자체의 빠로끼아 페레이로스(San Breixo de Ferreiros)에 속
한 마을 까예(Calle), 보아비스따(Boavista)를 지나 살쎄다(Salceda)에 이른다.
아르수아에서 11km 정도 되며 까미노의 재탕이 짜증을 유발하려 한다면 벗어나기 좋은 2번째
접선(국도와 까미노의) 장소다.
걷기 좋은 길이라 전 번에도 멜리데에서 몬떼 도 고소까지 13시간에 50km를 걸었던 길이지만
재차 걷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특징이 없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변화가 필요하겠기에 얼마쯤 국도와 까미노를 옮겨다니며 걸었다.
보이모르또에서 아르수아를 거치지 않고 가는 지름길이 국도를 횡단해 프랑스 길에 합류하는,
오 삐노의 빠로끼아인 쎄르쎄다(Ceceda)의 루가르 오 헨(O Xen)까지.
프랑스 길은 피로감을 주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국도를 계속해서 걷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노식(백두대간)의 권고대로 몬떼 도 고소까지의 남은 프랑스길을 떠나려 했는데 그 곳
(Monte do Gozo) 경유 버스는 30여분을 기다려야 한단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장거리 버스를 이용한 적은 있으나 이처럼 무의미한 기다림은 처음인데 30
분을 넘어 30분을 더, 장장 1시간을 기다리게(연착) 했으면서도 버스는 무정차 통과해 버렸다.
공교롭게도 버스가 도착하려는 순간에 대형 트레일러(트럭)가 정류장 앞을 지나가면서 버스
운전기사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에 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무정차 통과하여서는 안되지만, 그래서 지나쳤다 해도 백미러에는 비쳤을 텐데도
그냥 가버린 버스.
까미노의 고장이라는 자긍심을 가진 갈리씨아 지방이며 까미노의 성지라는 산띠아고 데 꼼뽀
스뗄라가 지척이며 까미노 프랑쎄스의 뻬레그리노스에게 잘 알려진 도로에서 그랬다
연착했기 때문에 서두른 것이라면 연착한 미안함 때문에라도 꼼꼼히 챙겨야 하는 것 아닌가.
국내 사정 때문에 오지 못하는 북한 외에는 지구촌의 모든 나라, 모든 인종이 자유자재로 드나
드는데 이 버스 기사가 특정 국가나 특정인을 기피할 리 있는가.
그러니까, 나와 어떤 척이 진 관계가 아닌데 나를 골탕먹이려고 그랬겠는가.
그래도 치미는 부아를 어찌 한다?
하도 어처구니 없고 황당했기 때문일까 잠시 허탈했다.
부아를 진정시키려면 무작정 걸어야 했다.
아스 라스(As Ras), 아 브레아(A Brea), 오 엠빨메(O Empalme) 등 같은 교구(쎄르쎄데)의
마을들을 지나고 아르까(Santaia de Arca) 교구의 마을 산따 이레네(Santa Irene)까지 갔다.
분노할 기력이 없도록 피로가 쌓일 때까지 걷는 것이 내 평생의 특기니까.
하마터면 나도 주인공이 될 뻔 한 사망 순례자의 비(碑)
이 구간에서는 말로 할 수 없이 애석한 현장 2곳을 지나야 한다.
2km도 되지 않는 간격을 두고.
<순례자 기예르모 와트(Guillermo Watt)
1993년 8월 25일, 산띠아고에 도착하기 하루 앞두고 69세에 하느님 품에 안기다>
열망하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가 겨우 29km 남았을 뿐이기에 이 70노인의 사망은 그동안
보아온 어느 사망자 보다 더 애석한 일이다.
해 안에 가야 할 길이 아직 23km나 남아 있는데도 무거운 걸음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라스(Ra
s)를 지날 때 만난 우리 자동차(기아)에 가라앉은 기분이 전환되는 듯 했다.
먼 땅(海外)에 와있는 우리 제품들은(자동차, 냉장고 불문) 늘 나를 고무시키고 있으니까.
그러나, 앞 망자비에서 2km도 채되지 않는 곳, 산띠아고를 27km도 못남긴 브레아(Brea)에서
또 한 사람 사망 순례자의 비(碑)와 마주쳤다.
<보행 순례자 마리아노 산체스-꼬비사 까로(Mariano Sanchez.Covisa Carro)
1993년 9월 24일 여기에서 사망하다>
1993년 8월과 9월 한달 사이에 겨우 2km 어간에서, 오매불망으로 그리던 산띠아고(Santiago
de Compostela)를 목전에 두고 둘이나 사망했다.
겨울이 아니었으며 여름철이라 해도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지역이므로 추위나 더위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18년(2011년 1차때 기준)에 불과한 과거지만 강산을 두번이나 바꿔놓을 세월이 흘렀다.
순례자들을 위한 외적 환경은 오늘날에 비해서 열악하였겠지만 내적 정서는 오히려 더 중세에
가까웠으며 순수했을 시기.
숫적으로는 폭발적 증가 현상인 이즈음과 달리 순례자의 수는 적지만 그 때의 그들은 오늘의
순례자들처럼 영악한 것을 지혜로 여기지 않았을 것.
오히려, 고난은 물론 죽음까지도 '그 분'의 섭리로 믿고 묵묵히 감수하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신앙을 순례자의 금과옥조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 또는 전염병에 걸렸다 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아 변을 당한 것 아닌가.
애석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채 귀국한 나는 이듬해(2012년)에 한반도의 남반부 해안을 걸었다.
인천 연안부두를 기점으로 하여 서해-남해-동해의 최북방인 고성(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에서는 주로 썰물 때를 이용해 물 빠진 백사장을 걸었는데, 하마터면
시신도 찾을 수 없는 수장(水葬)을 할 뻔 했다.
맹장이 터져서 바둥대다가 숨이 끊어지거나 밀물 때 몰려온 고기들의 밥이 되어버리거나.
영광군(全南) 지역 해변(白沙場)을 걷다가 황급히 귀가하게 되었다.
딸의 약간의 돈을 안전이 보장된 범위 내에서 이율이 높다는 제2금융권(저축은행)에 맡겼는데
그 은행이 부실 경영으로 문을 닫았다(退出)며 성화인 아내 때문이었다.
정리가 되면 바로 걷기를 계속할 요량이었는데 여러날 만의 편한 잠자리가 되레 더 불편했다.
어렵사리 밤이 가고, 이른 아침에 119구급차에 의해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2년여에
걸친 만성맹장염을 방치함으로서 맹장이 터졌다(복막염)"며 핀잔이었다.
내가 그토록 무신경한가.
실은, 등산 때나 길을 걸을 때, 먼 해외에서도 이따금 하복부의 통증이 감지되었다.
그 때마다 진정될 때까지 걷기를 멈추었으며 10여년 간격으로 두번이나 한 헤르니아(hernia/
脫腸) 수술의 후유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참았을 뿐이다.
은행의 퇴출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영광 지역의 인적 없는 해변 어디에서 그 변(死亡)을 당했을 것이다.
시코쿠헨로와 두 번째 까미노에서도 사망 순례자의 비가 남의 것이 아니며 그 주인공이 될 뻔
했던 내 경우를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 오곤 했다.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
정오 경에는 3km쯤 더 전방이며 같은 교구의 루가르인 오 뻬드로우소(O Pedrouzo/Arca)에
당도해 있을 만큼 특기가 충분히 발휘되었다.
특기는 부아를 가라앉혔을 뿐 아니라 재탕에 대한 짜증도 누그러뜨렸다.
알량한 버스 타려고 기다리는 일도 없게.
더구나 아메날(Amenal/Hotel Parrillada)앞에서 오르는 된비알 숲길만은 다시 걷고 싶었는데
절로 소원 성취하게 되었다.
<길고 긴 유칼립투스 숲길이 끝나고 시야가 확보되나 싶었을 때 돌연 벽력과 함께 먹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1시간쯤 이른 시각인 것이 다를 뿐 어제 오후가 재연되는 중이었다.
판초와 우산을 꺼내고 배낭을 단속한 후 빗속을 걸을 때는 초저녁처럼 껌껌했다.
살짝 비켜 있는 오 페드로우소/아르카 도 피노(O Pedrouzo/Arca do Pino)에 들를 겨를이
있을 리 없다.
다시 유칼립투스 숲과 농로를 걸어 산 안톤(San Anton), 아메날(Amenal)을 지났고 시마데
빌라(Cimadevila)를 거쳐 오르는 길은 이미 세찬 물길이었다.
어제에 이어 샌들의 편의성이 입증되는 중이었으나 머리 위에서 번쩍대는 벼락과 우레는
오르막인데도 스틱을 짚지 못랄 만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감전의 공포로 인해서 금속부분을 피해 손잡이 천을 잡고 끌고 가게 할 만큼.>
위 글의 장면은 2011년 4월 30일 오후 5시쯤으로 기억된다.
2개의 스틱을 짚고 올라가도 역부족일 급류의 된비알인데도 스틱을 짚기는 커녕 그것 때문인
공포에 쩔쩔매야 했던 곳.
이번에는 청천 백일에 난감했던 그 때를 회상하며 그 스틱들을 당당하게 짚고 힘차게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부당한 운행으로 늙은이의 분통을 폭발 직전으로 키워놓았던 버스기사에게 되레 고마워해야
할 만큼 전화위복이 되었다.
아니다.
내 평생의 위기 마다 기상천외의 드라마로 관리해 오신 '그 분'이 이번에는 나의 반칙, 변칙을
막기 위해 버스와 트레일러를 동원한 것이리라.
맨 처음에 걷지 못했기 때문에 맨 끝으로 미룬 최초의 길(Camino Primitivo)이 남아있다.
그 길은 멜리데에서 합치므로 노르떼 길보다 10km나 더 길다.
9월 어느 날부터 다시 걷게(3번째) 될 그 길에서 이 짜증이 도지지 않도록 미리 단속하신 것?
그 때, 군소리, 군짓도 말고 의연하게 걸으라는 경고의 메시지까지 묶어서?
부득이 앞문을 닫아야 하면 반드시 뒷문을 열어놓으시는 '그 분'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이
라면 애시당초 모르쇠하시겠는가.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룸"(기독교성서 로마서8:28)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기쁨이 사라진 기쁨의 산(Monte do Gozo) 어게인
한바탕 쏟아진 비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깨끗한 길을 걷던 그 때 보다는 못해도 여전히 청결한
공기와 길이 몬떼 도 고소 한하고 계속되었다.
오매불망하고 꿈에서도 그리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지척에 두고 마지막으로 목욕재계
하였다는 라바꼬야(Lavacolla)의 시온야 강(Rio Sionlla/작은 개울)도, 맑은 날에는 산띠아고
까떼드랄의 첨탑이 보임으로서 중세 순례자들을 기쁘게 했다 하여 '기쁨의산'이라 명명했다는
몬떼 도 고소(Monte do Gozo/gozo는 Galicia어로 기쁨)도 모두 4년 전과 여일했다.
(상세한 노정은 쁘리미띠보 길 때로 미룬다.)
전번에 몬떼 도 고소를 '기쁨이 사라진 기쁨의 산'이라고 말했는데 수정할 만한 변화가 없다.
그 때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교황 바오로2세의 방문 기념탑 주위를 한참 맴돌며 기뻐할만한
무엇을 찾아보았으나 실패했으니까.
달라진 것이 있다면 70대였던 내 나이가 80대로 바뀐 것이라 할까.
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말은 '아뇽'(안녕) 한 마디만 알지만 위트(wit)가 풍부하고 뻬레그리노스의 애로를 덜어
주려고 애쓰던 중년 '오스삐딸레로' 자리에 지극히 사무적인 '오스삐딸레라'가 앉아있다는 것.
800km 이상 걸어왔기 때문에 부상병동에 다름 아닌 숙소를 순방하며 부상자들의 상처에 맞는
비상약을 챙겨주었으며 남을 웃게 하는 재능이 남다른 남자였는데 이 여인은 글쎄....
그보다 더 유감스러운 변화라면 중요한 한 전통이 사라진 것.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지척에 두고 최후의 밤을 보내는 순례자들로 하여금 라바꼬야에서
목욕재계한 것처럼 마음가짐을 정리하라는 뜻에서 무료로 숙박하게 하는 전통이.
몸이 부실한 순례자에게는 몸 추스를 기회를 주기 위해 한 밤을 더 허용했으며 뻬레그리노스
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도나띠보(donativo) 함(函)마저 비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한데, 지금은 갈리씨아 훈따(Xunta) 알베르게의 정액 6€를 징구한다.
이것은 순례자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다.
6€가 부담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시대의 뻬레그리노스에게는 전통의 계승이 의미없으므로 오랜 전통을 버려도 된다고 판단
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긴,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 순례자들로 인하여 전체 순례자의 위상이
추락 일로에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아름다운 전통의 고수를 바랄 염치가 있는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같은 처사(전통을 깬)가 진지한 순례자들에게는 굴욕에 다름 아니다.
까미노에서 뻬레그리노스와 알베르게는 상호관계다.
굴욕을 당하는 뻬레그리노스와 달리 알베르게는 고고하고 초연할 수 있는가.
뻬레그리노스에게 전심전력, 지극정성인 일부 알베르게를 제외하고 상업화 되어 이윤 추구에
몰두하고 있는 많은 알베르게들 말이다.
'1900년 <20c의 끝 20년 < 21c의 4년' <현재의 1년
세월의 속도가 먹는 나이대로 빨라진다는 말이 있다.
20대의 시속이 20km라면 50대는 50km, 70~80대는 70~80km의 속도로.
더디 간다고 안타까워하는 젊은 세대와 달리 엄청 빨리 간다고 느끼는 70~80대에게 4년 사이
(전번인 2011년~2015년)의 변화도 그만큼 많게 느껴지는 것 같다.
20c 후반 20여년간의 변화와 발전이 이전 19c 동안에 이뤄진 것 보다 더 많다는 토플러(Alvin
Toffler)의 판단으로 봐도 이 4년에 이뤄진 것이 1900년을 능가하는 20년보다 더 많을 것이고.
'1900년 <20c의 20년 < 21c의 4년'
선하고 긍정적인 면에 국한된 변화와 발전이라면 오죽이나 좋으랴만 악하고 부정적인 분야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지수는 혁명적인 발전에 반비례하고 있는 것 아닌가.
4년만에 다시 걷는 까미노, 다시 묵는 알베르게, 다시 만나는 뻬레그리노스로부터 받는 느낌
도 그렇다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의 선교 족적을 기반으로 태어났다는 까미노와 알베르게, 뻬레그리노스도 후자에
속하기 때문에 무기력한 기독교의 실체가 노정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상기하며 소멸되지 않고 날로 흥성해 가고 있는 것을 축복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4년의 세월이 격세지감을 갖게 하고 있다.
몇개의 루트를 돌고 돈 후 까미노의 완결을 의미하는 쁘리미띠보 길이 9월 어느 날 끝나게 될
텐데. 3개월이 지난 그 때의 여기(몬떼 도 고소)는 어떤 모습일까.
직전 20년을 능가하는 4년이었다면 현재의 4분의 1년은 직전 1년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월이니까.
3개 루트(프랑스 길과 노르떼 길, 쁘리미띠보 길)의 까미노는 몬떼 도 고소를 지나간다.
2번째 묵는 기분이 흡족하기는 커녕 몹시 마땅찮은데도 3번째도 이 곳을 염두에 두고 있음은
산띠아고에 이른 아침(오픈 시간에 맞춰)에 당도하기 위해서다.
위 3개의 루트 외에도 1.000km가 넘는 최장의 쁠라따 길과 리스보아(뽀르뚜갈수도)에서 출발
하는 뽀르뚜 길, 잉글레스 길 등 3개 길의 종착지도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다.
6개 길에서 모여드는 뻬레그리노스로 산띠아고의 뻬레그리노스 사무실이 장사진을 이루므로
아침 일찍 도착하지 않으면 '꼼뽀스뗄라' 1장 받기 위해 많은 시간을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1개월여에 식성이 변했나.
빌랄바의 태권도장에서 준 신라면으로 저녁을 먹는데 어찌나 매운지.
아무리 매워도 그 안에 담겨 있는 태권도인 안또니오의 정까지 맵겠는가.
에스빠뇰과 꼬레아노를 맺어주는 꼬레아의 무술 태권도.
나는 태권도의 기본 동작도 모르지만 태권도의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가 이뤄졌다.
사랑이 지나치면 미움이 된다던가.
꼬레아가 미운 것도 정녕 사랑이 지나치기 때문인가.
조국이 없어 유리표박하는 떠돌이가 아닌 것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한 늙은 나그네다.
만만디로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족할 길(4.5km)을 남겨놓은 알베르게의 밤.
1개월여의 악전고투 끝에 승리한 무용담(?)으로 훤화(喧譁)하던 뻬레그리노스 대부분은 벌써
귀국 준비에 들떠있는 듯 하나 나는 이미 문을 닫았을 매점 겸 간이식당을 찾아갔다.
산띠아고에 도착해도 갈길이 아득하며(4년 전에도 그랬다) 3번 더 산띠아고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며 상거가 300m가 넘는 곳까지 찾아간 것은 위피(Wifi)를 이용하기 위해서 였다.
귀국을 재촉한다 해서 돌아갈 리 없지만 중동병(메리스)이 극에 달하고 있는지 귀국하겠다 할
까봐 걱정인 듯 한 아내의 응대에 야릇한 기분이었다.
한 순간이나마 갈 데 없는 외돌토리가 되어 있는 듯 한?
볼프강과는 연락이 끊겼고 알랭네는 목요일(6월11일) 석양에 산띠아고에 도착할 것이란다.
내가 입성하는 내일이 그들보다 겨우 하루 빠르니까 하루만 기다리면 된다.
흔쾌히 약속하고 재회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기분이었다.
뽀르뚜 길 뽄떼베드라의 이사벨에게도 금요일(6월12일)에 방문하겠다는 e-메일을 보내는 등
입성 전야에 할 일을 위피(와이파이)로 마쳤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