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張氏)의 분관(分貫) 현항
문헌에 250여 개 본관(本貫)이 전하나,
오늘날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본(本)으로는
인동(仁同), 안동(安東), 흥성(興城), 단양(丹陽), 결성(結城), 울진(蔚珍), 나주(羅州), 목천(木川), 구례(求禮),
순천(順天), 옥구(沃溝), 창녕(昌寧), 부안(扶安), 진주(晉州), 전주(全州), 예산(禮山), 영동(永同), 진천(鎭川),
청송(靑松), 진안(鎭安), 옥천(沃川), 지례(知禮), 흥양(興陽), 해풍(海豊), 태원(太原:충주忠州), 영천(榮川),
흥해(興海), 천녕(川寧). 덕수(德水), 절강(浙江) 등이 있다.
베풀 장(張)을 쓰는 성씨 중 덕수, 절강 장씨를 제외하고 장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일반적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을 세우고 삼한벽상삼중대광공신이 된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동장씨는 대체로 위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동장씨
인동장씨는 본관은 같되 시조를 달리하는 양대 계통이 있다.
고려시대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그것이다.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계통은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인동에 세거한 연유를 좇아 인동을 관향으로 한 것으로 전하는데, 인동이 한동안 옥산(玉山)으로 불렸으므로 옛 명칭을 따라 본관을 玉山으로 하는 후손들도 있다.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장계(張桂)는 시조 장계는 장정필의 14世孫으로서 고려 충렬왕 때 등과하여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역시 옥산군에 봉해졌다고 전한다. 그가 일찍이 인동현 남쪽 발영전(拔英田)에 정착해 살면서 후손들이 인동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인동장씨에서 분적한 성씨
인동장씨에서 분적한 성씨로 부안장씨가 있다. 부안장씨 역시 본관은 같되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따로 계대를 잇고 있다.
장을호(張乙湖)를 시조로 하는 계통
그 하나는 고려 인종 때 좌복야를 지낸 장을호(張乙湖)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장을호는 장정필의 7世孫으로 전해지는데 그가 부령군(扶寧君: 부령은 부안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부안을 관향으로 하여 인동장씨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장연(張淵)을 시조로 하는 계통
다른 하나는 고려조에 광정대부였던 장연(張淵)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그 역시 장정필의 7世孫으로 부령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부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안동장씨
안동장씨는 태사 충헌공 장정필을 시조로 하여 계대를 헤아린다.
장정필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3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을세워 고창군에 봉해졌는데 뒤에 고창군이 안동부로 승격되면서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우리나라 장씨 성씨 중 덕수 절강장씨 만을 제외한 모든 장씨가 태사 충헌공을 도시조로 하고 있다. 2007년10월 고려 선양회에서 고려 통일대전에 공신 충신 유현의 위페봉안을 하였는데 태사 장정필을 고려 공신으로 모셨다(고려말 충신으로는 결성장씨 평장사 중시조 張 夏)
흥성장씨
흥성 또는 흥덕을 본관으로 일컫는 장씨는 고려시대의 장유(張儒)를 시조로 한다.
장유가 세거했던 상질현이 오늘날 전라북도 고창에 속해 있는 흥덕인데 한때 흥성으로도 불렸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흥덕 또는 흥성으로 일컫고 있다. 장유의 아들이며 현종 때 호부상서를 지낸 연우(延祐)를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단양장씨
단양장씨는 시조 장순익(張順翼)이 고려시대에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을 지내고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짐으로써 단양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장순익 이후 몇 代를 失傳하여 후손들은 장연유 계(張延裕系), 장한문 계(張漢文), 장춘 계(張春), 장맹우 계(張孟友), 장명한 계(張明漢), 장철견 계(張鐵堅), 장복지 계(張福智), 장만길 계(張萬吉), 장준 계(張俊), 장구 계(張龜) 등 계통을 달리하여 繼代를 이어오고 있다.
결성장씨
결성장씨는 도시조 태사 충헌공 장정필의 14世 현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하시중 판전리감찰사사 상호군을 지내고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해진 장사(張 楒)를 시조로 하고 고려말 충신이신 평장사 결성군 장 하(張 夏)를 중시조로 世系를 이루고 있다.
고려 선양회에서 지난 07년 10월 도시조 태사 충헌공 장정필(張貞弼)은 고려를 세운 공신으로 평장사 중시조 장 하(張 夏)는 고려말 고려의 충신으로 각각 고려통일대전에 위폐가 봉안되어 있다.(장씨 중 유일하게 두 분임)
집성촌은 충남 연기군 동면. 홍성군 결성면.개성시 일원으로 대별되며 현제는 서울 경기 일원에 많이 거주하고 인구는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1,068명으로 장씨 성 중 5번째이다.
울진장씨
울진장씨는 장정필의 현손 장말익(張末翼)을 시조로 삼고 있다. 장말익은 고려 정종 때 등과하여 호부상서 문하시중 평장사 상주국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가 울진부원군(蔚珍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울진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나주장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광평시랑을 지낸 청계공(淸溪公) 장유의 22세손 장세동(張世東)으로 전한다. 장세동은 조선 인조 때 가선대부였는데 대대로 나주에 살다가 황해도 장연으로 터를 옮기면서 선대의 세거지였던 나주를 관향으로 일컫게 되었다고 전한다.
목천장씨
목천장씨는 장빈(張彬)을 시조로 삼고 있다. 나라에 공이 있어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진 그를 시조로, 목천을 관향으로 삼아 후손들이 세계를 잇게 되었다. 일부 문헌에는 장빈의 아들 극민(克敏)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구례장씨
구례장씨는 고려시대에 시중을 지낸 장악(張岳)을 시조로 하는 봉성(鳳城 : 지금의 求禮)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봉성군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본관을 구례로 삼고 있다. 일부 후손은 관향의 옛 이름인 봉성을 고수하여 오늘날 본관을 구례와 봉성으로 함께 일컫는다.
지례장씨
지례장씨는 고려 충숙왕 때의 장일성(張日成)을 시조로 하며 안동장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장일성은 뒤에 나라에 공이 있어 지례백(知禮伯)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지례를 관향으로 하여 안동장씨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순천장씨
순천장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등과하여 중서시랑을 지내고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진 장천로(張天老)로 전한다.
옥구장씨
옥구장씨의 시조는 장정필의 12세손으로 전하는 장익(張)이다. 장익은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내고 옥성부원군(沃城府院君 : 옥성은 지금의 옥구)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이를 연유로 옥구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나 장익 이래의 몇 대가 실전하여 고려말 판도판서를 지낸 장송(張)을 기세조(起世祖)로 삼아 계대를 헤아린다.
옥천장씨
옥천장씨는 옥구장씨의 시조 장익의 동생으로 전하는 장식(張)을 시조로 한다. 장식은 고려시대에 옥천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창녕장씨
창녕장씨의 시조 장일(張鎰)은 장정필의 6세손으로 전한다.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시어사에 이르렀다. 장일이 고려 원종 때 삼별초의 난을 무마한 공으로 하성군(夏城君)에 봉해졌는데 하성은 창녕의 옛 이름인 까닭에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진주장씨
진주장씨의 시조는 인진부사를 지낸 장방언(張邦彦)으로 전하며, 전주장씨의 시조는 전주부원군(全州府院君)에 봉해진 장응익(張應翼)으로 전한다.
예산장씨
예산장씨의 시조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내고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진 장영위(張英暐), 또는 장영위의 아버지 예산군 장유(張裕)로 전한다.
진천장씨
진천장씨의 시조는 장정필의 9세손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장몽룡(張夢龍)의 셋째 아들 장유(張裕)로 전한다. 장유는 문하시중을 지내고 나라에 공이 있어 예산군에 봉해졌는데 뒤에 다시 진천군(鎭川君)에 봉해짐으로써 진천장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계보상으로 예산장씨의 시조로 전하는 장유 이하 장영위에서 장원달(張源達)까지 5代가 동일하게 이어지다가 장원달의 아들 代에 예산장씨는 장근수(張根秀)로, 진천장씨는 장송(張松)으로 비로소 다른 인물이 나타나고 있다.
영동장씨
영동장씨는 고려시대에 등과하여 정당문학을 지내고 영산군(永山君 : 永山은 지금의 永同)에 봉해진 장항(張沆)을 시조로 한다.
청송장씨
청송장씨의 시조는 장영민(張英旻)으로 전한다. 장영민은 보문각직제학을 지낸 장보(張補)의 둘째아들로 중추원사를 지냈고 나라에 공이 있어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청송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진안장씨
진안장씨의 시조는 판서평리 장원열(張原烈)로 그의 손자 장사익(張思益)이 응양장군(鷹揚將軍)으로 공을 세워 진안군(鎭安君)에 봉해짐으로써 진안장씨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흥양장씨
흥양장씨의 시조는 장정필의 5세손으로 나라에 공이 있어 흥양군에 봉해진 장선익(張善翼 : 또는 張玄翼)으로 전한다.
해풍장씨
해풍장씨의 시조는 금자광록대부 장맹경(張孟卿)으로 전하며,
충주장씨
충주장씨의 시조는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거창현감을 지낸 장문한(張文翰)으로 전한다.
영천장씨
영천장씨는 장세훈(張世勳)의 아들로 1648년(인조 26)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낸 장준남(張俊南)을 시조로 하고,
흥해장씨
흥해장씨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장위(張暐)를 시조로 한다.
천녕장씨
천녕장씨는 중랑장 장인기(張仁起)를 시조로 전한다.
한편
장정필의 후손이 아니므로 다른 장씨들과 계통이 전혀 다른 성씨가 덕수장씨와 절강장씨이다.
덕수장씨
덕수장씨의 시조는 장순룡(張舜龍), 또는 문헌에 따라 장순룡의 아버지 장백창(張伯昌)으로 전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장백창(또는 張卿)은 본래 회회국(回回國) 사람으로 원나라 세조를 섬겼다 한다. 장순룡의 본래 이름은 삼가(三哥)로 고려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겁령구로 따라왔다가 장순룡이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고려인으로 귀화했다. 그뒤에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 : 덕성은 덕수의 다른 이름)에 봉해져 후손들이 덕수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절강장씨
절강장씨는 중국 명나라의 절강성 사람으로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에 출전했다가 정착한 장해빈(張海濱)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출신지인 절강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2000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장씨(張氏)는 가구 수 28만 7,195호와 인구수 91만 9,339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 순위 9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