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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하는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2)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원의 구성요소가 같기 때문에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일 수가 없다!
저는 앞에서 ‘복음’과 ‘계명’에 있어서 두 시대의 신앙시스템이 같기 때문에 절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지 두 시대의 신앙시스템뿐 아니라 구원의 구성요소도 같습니다. 이것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칭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모르면 신약시대에만 칭의가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을 칭의의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도 이신칭의가 존재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대부분 잘 압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거듭남에 상응하는 것이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에 대한 것은 금시초문일 것입니다. 대부분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므로 계명을 지키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야고보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라고 말한 대로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요셉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말씀대로 살 수 있었고 그런 자들이 궁극적인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구원은 단지 칭의가 아닙니다. 물론 칭의가 중생을 포함하기는 하나 칭의와 중생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심판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칭의는 있는데 중생은 없었을까요? 듣고 보니 아닐 것 같지요!
거두절미하고, 저는 구약시대에도 거듭남에 상응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음 네 구절을 볼 때, 신약시대와 같은 수준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예레미야 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처럼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그 수준이 다릅니다.
-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새 언약 하에서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았던 성령이 임하고 내주하십니다.
-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이처럼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입니다.
- 요한복음 1:11-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처럼 새 언약을 믿고 거듭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거듭남에 상응하는 것이 신약시대의 중생과 수준이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어쨌든 그 시대에도 신약시대의 중생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마음의 할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마음의 할례가 신약시대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는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저는 신명기 30장 6절이 그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만약 모세가 백성들에게 “네 후손”이라고 했으면 신약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이라고 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고, 구약시대에도 마음에 할례가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30:1-5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그 후, 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처럼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 구절이 모세시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황당하지요! 때문에 J. G. 맥콘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수로 진술되고 있는 이곳의 본문은 원칙적으로 미래 세대를 겨냥한다.”
또, 그는 다음과 같이 정확한 지적을 했습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강화의 결과, 약속의 땅을 차지한 것은 과거의 사건이 될 것이며(5절), 그것을 차지한 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모압 세대를 가리키지만, ‘네 조상들’로 불릴 것이다.”
그 뒤, 6절을 설명하면서 마음의 할례를 새 언약과 연결시켰습니다.
“6절. 이 약속에서 가장 극적인 새 일은 여호와 자신이 회복할 백성에게 ‘마음의 할례’를 베푸시겠다는 것이다(6절)... 미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모세의 강화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못한 실패를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본다. 따라서 본문은 파기된 언약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합의에 동참한다. 이것은 단순히 시계를 돌리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이스라엘의 악한 성향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새로운 일이 시행되어야 한다. 해답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약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렘 31:31-34; 32:39-40; 겔 36:24-27).”
또, 유진 메릴도 마음의 할례를 미래에 일어날 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다. 그러나 집단적, 민족적인 의미에서 선택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볼 때 모세와 바울이 여기서 말한 할례는 미래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마음의 할례가 구약시대에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정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 이은 유대인의 귀환으로 그 땅의 재소유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렘 29:10-14; 30:3), 더 크게 번영하고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구약성경 시대에는 달성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여전히 문자 그대로 실현을 기다리고 있다(학 2:6-9; 슥 8:1-8; 10:8-12 참고). 여기서 마음의 할례라고 묘사한 근본적인 중생 사역은 언약 백성 전체에 대해서는 아직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한 마디로, 5절 하반절의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가 구약시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뒤에 나오는 마음에 할례가 구약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정말로 그럴듯하지요! 그래서 저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5절 하반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전보다 더 넓은 땅을 주시거나 더 강대국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번성”의 히브리어 “라바”는 “많다(많아지다), 크다(커지다), 증가하다”라는 뜻입니다. 라바는 창세기 1장 22절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라바)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또, 라바의 표준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증가하다, 번식하다'로 인구증가와 관계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합니다. 그런데도 이 약속이 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7-8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그런데, 여기서 “너”(“네”)는 신약시대가 아니라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앞 절에 나오는 마음의 할례도 그들이 받을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깨달은 후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증거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예레미야 9장 25-26절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을 벌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도 마음에 할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 아닐까요? 정당한 추론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이 구절이 구약시대에 마음에 할례가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막상 찾아서 읽어보니 “보라 날이 이르면”이라는 말이 있었고, 이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문구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또, 로널드 클레멘츠는 이 부분에 대해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에게 종말론적인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기대를 다룬다.”라고 썼습니다.
물론 주석들에는 이 구절이 정확하게 신약시대에만 적용되는지 아니면 구약시대에도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가능성은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실망한 저는 더 확실한 증거들을 찾다가 5가지 구절들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레위기 26장 41절입니다.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이것은 포로로 잡혀간 뒤이지만 분명히 구약시대입니다. 또, 이 구절은 그들이 그 전에 마음에 할례를 받았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러므로 결정적이진 않아도 증거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두 번째 구절은, 신명기 10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이것은 분명히 모세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한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한 가지 흠은,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의무인 것처럼 마음의 할례도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패트릭 밀러가 이에 대해 설명을 잘했습니다. 그는 신명기 30장 6절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스라엘이 주께로 돌이키는(2, 8절) 이 회개는 이스라엘의 운명(3절)을 회복시키는 야훼의 돌이킴과 맞물린다...
이 돌이킴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마음의 할례를 통해 전적으로 헌신된 마음을 주시고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백성들이 순종할 때 일어난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6절) …… 너는(히브리어 원전에는 강조적 표현) 돌아와 야훼의 말씀을 순종하고(8절) …… 너희가 야훼께 돌아오기 때문에 너희는 야훼의 목소리를 청종하게 될 것이다(10절).’ 이 설교를 들을 때쯤에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깨닫고 순종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이러한 순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렇게 행동할 책임은 말할 것도 없이 각각의 개인에게도 전가되어 있다(29:2-9에 대한 주석을 보라.)... 교회는 이것을 의롭지 못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사역(칭의)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성화)이라고 불러왔다. 모압 계약에서 칭의와 성화는 심판당한 자들을 위한 축복이요 순종의 힘이다. 칭의나 성화, 어떤 범주이든지 간에 모압 계약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그것이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질적인 변화로 우리에게 도전한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전 존재로 야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데, 이 점은 특히 30:15-20에 나오는 계약적 강론의 절정부분에서 극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옳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명기 10장 16절이 마음의 할례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증거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구절은, 예레미야 4장 4절입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할례는 육신의 표피를 베는 것이므로 마음 가죽을 베라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뜻함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WBC주석에서 피터 크레이기는 이렇게 썼습니다.
“언약의 외적인 표식은 이스라엘의 종교 속에서는 할례, 즉 아브라함(창 17:10-14)의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관습의 표식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기서 이 관습을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즉, 할례 받아야 하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시대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증거임이 분명합니다.
네 번째 구절은, 에스겔 44장 7절과 9절입니다.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며...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자세히 보시면, 6-8절이 미래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과거입니다! 또한, 이방인에게까지 마음의 할례를 요구했다면 유대인에게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마음의 할례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다섯 번째 구절은, 사도행전 7장 51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
이 구절에 의하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와 백성들이 마땅히 마음의 할례를 받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처럼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이때는 성령 강림 후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 마음의 할례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구약 중간기 사람들이므로 그 전에 마음의 할례를 받았어야 합니다. 그 증거로, 그들이 조상들처럼 성령을 거스른 것은 그 이전부터였고 그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마음의 할례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이상 다섯 구절이 보여주듯이, 구약시대에도 마음의 할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마음의 할례가 신약시대의 거듭남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때도 개인적인 의지와 노력만으로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마음의 할례가 있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굉장히 생소한 내용이지요. 그래서 미심쩍고 100% 확신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실은, 저도 어느 신학자나 목회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도 매우 생소합니다. 그래서 이런 연구결과가 나왔어도 100%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이 주저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 24일, 설교준비를 하다가 잠깐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생각해야 된다!’
동시에, 제가 이 연구결과가 왜 옳은지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만약 이것이 옳지 않다면 그 사실을 증명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 아래 있었으나 의인들과 완전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의인들과 완전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신약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로는 성화가 불가능하다고 할까요? 또, 왜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아니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까요? 이것은 지극히 정당한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 ‘구약시대에는 마음의 할례가 있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능했으나 신약시대에는 마음의 할례가 성령으로 되는데 믿는 자에게만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이라고 이미 대답했습니다. 또, 구약시대에 마음의 할례가 있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고 성경으로 증명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면, 그때와 달리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아니면 절대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만일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듣고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어도 의인이나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는데 왜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으면 제 견해가 옳은 것이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옳다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실은 이런 의문조차 갖지 않지 않았나요? 그래서 답을 찾지도 않았고 그러니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히 이 의문에 답할 신학자나 목회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제 견해가 옳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한 이것이 이 질문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는 이상의 설명을 통해 힘을 얻게 된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의 거듭남과 비슷한 마음의 할례가 있었다!’는 것이 여러 가지 난제를 깔끔하게 정리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이것은 제가 두 번째 깔딱 고개에서 설명해드린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가 ‘죄 아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증해줍니다.
모든 학자가 ‘율법 아래’가 ‘죄 아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도 마음의 할례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것은 제가 두 번째 깔딱 고개에서 설명해드린 로마서 6장 14절과 갈라디아서 5장 18절의 “율법 아래”가 구약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증해줍니다.
이것은 저만의 초유의 해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확증해줍니다.
셋째로, 이것은 우리에게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모두 자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류역사상 자기 힘으로 말씀대로 살 수 있었던 사람은 타락하기 전의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아담은 범죄했고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 두 분 외에는 자력으로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타락했고 모두 마음이 부패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비극적인 실상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의인으로 또는 완전한 자로 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마음의 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뿐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편, 새 언약은 더 좋은 언약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마음의 할례보다 더 수준 높은 거듭남이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 구약시대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유리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불리한 구약시대에도 의인들과 완전한 자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이것을 명심하고 우리 모두 더 의롭게 살고 더욱 완전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넷째로, 이것은 구약시대처럼 신약시대에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신앙생활을 위한 시스템이 똑같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그림자 복음을 믿고 계명을 지켜야 했고, 신약시대에도 그리스도의 율법의 복음을 믿고 계명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또, 구약시대에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고 마음의 할례가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칭의과 거듭남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두 시대의 심판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제 말은, 왜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에는 구원받은 자가 버림받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두 시대 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심판입니다. 구원받은 후 계명을 지키고 언약 안에 거하지 않으면 결국 버림받을 수밖에 없고 멸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약시대와 달리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되지요!
더구나, 새 언약은 더 좋은 언약이고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구약시대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훨씬 유리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구약시대에 허용했던 것들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고 본래의 뜻을 보여주시면서 그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구약시대에도 타락하면 버림받았는데, 어떻게 더 유리한 신약시대에는 버림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할 수가 있습니까? 완전히 거꾸로 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불공평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깨다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매일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복된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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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하는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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