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종은 신라 의상대사와 원효대사 이래로
한국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종파(?)로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신라 하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화엄종의 성세는
그 지속성과 영향력에서 다른 종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종파적인 명성보다는 불교사상으로서 교학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다.
부처님께서 성도한 다음
최초로 그 깨달음의 내용을 21일 동안 설하신
"화엄경"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화엄사상은
'법화경'의 천태사상과 더불어 대승교학의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불교의 중핵적인 사상으로서 자리매김해왔지만
특정 종파나 종단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엄의 진리를 깨달아
화엄경을 강설한 자장율사에 이어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종요','화엄경소' 등 화엄사상에 관한 저술을 하고
'법성종(해동종/ 분황사)'을 열면서 화엄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보다 체계적인 화엄교학의 연구는 '해동화엄의 초조'인 의상대사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화엄종 제2조인 지엄스님 문하에서 수학한 의상대사는
귀국후 태백산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열고 화엄교학을 널리 펴
오진,지통,표훈,진정,진장,도융,낭원,상원,능인,의적 등 10대 제자를 비롯한
3,000여명의 제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태백산 부석사,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모악산 귀신사, 계룡산 갑사, 과천 청계사, 서산 보원사 등 화엄10찰을 창건하여
화엄교학을 전국으로 전파하였다.
또한 방대한 80화엄경의 진수를 7언 30구 210자로 표현한 "화엄일승법계도(법성게)"를 남기셨다.
의상대사의 가르침은 신라말 관혜대사(후백제 견훤의 스승)와 희랑법사(고려 왕건의 스승)를 거쳐
고려초 탄문,균여('보현십원가'저술) 등의 고승들에 의해 화엄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된다.
원효의 해동종과 의상의 화엄종 등 신라의 화엄종은
국가에서 인정을 받는 교단제도적인 종파라기 보다는
각종 각파의 대립 분열이 없는 통불교적인 시대상황에서
하나의 교학으로 계승되어온 측면이 강하다 할 것이다.
화엄종이 종파로서 성립된 시기는 대각국사 의천이 활동하던 고려중기이나
당시에는 신라 의상보다는 당나라 현수 등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이 더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교단이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화엄종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종의 승과시험 과목이 화엄종의 소의경전인 '화엄경'과 '십지론(유가사지론)'인 것으로 보아
그 명맥은 계속 유지되어 온 듯하다.
1960년대 이후 창종되기 시작한 화엄계 종단들은
그 창종 배경이나 과정으로 보아 고려시대까지의 화엄종 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당대의 필요와 화엄사상의 포활함에 기대어 신생한 종단이라 할 수 있다.
화엄계 종단의 종조가 대부분 해동화엄의 시조라는 의상대사가 아니라
원효대사인 점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초까지의 화엄종은 해동 화엄초조인 의상대사의 맥을 이은 것이지
원효대사의 맥을 이은 것은 아니었다.
원효대사는 화엄뿐 아니라 불교사상 전반을 회통하여 이땅의 교학 수준과
실천행을 더욱 발전시킨 성사이지 화엄종이라는 종단의 창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언급할 화엄계 종단들의 경우 창종주나 몇몇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화엄교학에 밝다고 할 수 없으며, 종파로서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도 소홀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 이래 화엄은 한국불교의 골수에 배인 기본사상이지,
더 이상 어느 종단의 소의경전은 아닌 것이다.
1950~60년대 불교계 분규와 1962년 불교 재산관리법 제정과 연관하여
창종된 '대한불교 원효종'과 '대한불교 화엄종'을 비롯해서
소의경전이나 신행방편상 다소 분류에 애매한 면이 있지만
'대한불교 총화종'의 개요를 알아보고자 한다.
***대한불교 원효종***.
1)종지:
원효성사의 대도를 받들어 삼계유심의 근본진리를 사무쳐 깨닫고,
만법적멸의 금강삼매에 굳건히 머물러 일도해탈의 보살행원을 힘차게 닦아서
만선동귀(萬善同歸)의 지상불국을 건설하자는 것.
1963년 9월.김경택 등이 '대한불교 원효종 포교원'으로 창종.
동년 12월.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문공(현 문광)부에 등록.
1965년 해인(海印) 정수용이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면서 조직체계가 정비.
1967년 '대한불교 원효종 총본원(경북 경주 망월사)'로 개칭.
1977년 현재의 종명으로 개칭.
1990년 송무진,서영운 등이 '한국불교 원효종(부산 수덕사)'로 분종.
1967년 '원효종 성전' 간행으로 종지 확립.
창종 당시 불교계 내부의 고질적인 분쟁상황에서도 원효사상을 중심으로
이념종단의 종지를 정립함으로써 많은 불자들이 동참.
교선(敎禪)을 겸비한 비구승 혜은 법홍대종사의 영입으로 비약적인 성장.
묵담 성우대선사로부터 해동 칠불율맥을
계수한 청정 율사(율전 강조)인 법홍 전종정은
'원효성전'을 간행하고
원효학술대회 및 열반대재를 주최하는 등 종단 내실화에 공헌.
1970년대 중반 일본에 원효종 분원 설치.
'원효종보'와 '법사불교신문' 발행.
총본산인 서울 안양암이 조계종과 소유권 분쟁 상태라
부산 금수사와 서울(종로)사무소로 총무원이 분립.
1965년 월승(月昇) 능해(凌海) 한영석이 창종.
원효와 의상대사의 화엄종맥을 되살리고
대화엄종주인 일승(日昇) 이회명(李晦明) 강백의 유훈을 받들어 화엄종 부활.
1967년 '화엄종 성전' 간행.
1971년 조카인 비구 해원(海源) 한구하가 제2대 종정으로 종단발전에 기여.
철저한 청정비구승인 월승 창종주는
평소 철저하게 검박한 생활을 하였으며 염불과 보살행을 강조함.
남모르게 실천한 교육,장학사업은 현재도 화엄종의 가장 주요한 사업으로 승계됨.
생활불교와 실천불교의 사상에 입각하여 대처 종단 설립.
종정과 종회의장의 2원체계.
약사사,해광사를 종단의 기본재산사찰로 하여 '안전기금법규' 제정으로 종단 안정 도모.
'화엄승가장학재단(1978년 설치)'과 '대한불교 화엄종장학회'로 장학사업.
총본산은 인천 해광사.
***대한불교 총화종***.
1)종지:
석가세존의 교리를 봉체하여 대승행원의 육화정신(六和精神)을 닦아
대중의 생활과 직결된 현대불교를 구현하고,
안심입명,광도중생,보국안민 추구.
2)종조: 태고 보우국사(창립 당시는 원효성사였고 청허 휴정(서산)대사를 거쳐).
3)소의경전: 화엄경, 반야경(창립시는 반야경).
4)기타:
1960년 백양사 스님들(조명기,최원종,이용조,신상균,홍영진 등)이 중심이 된
중립적인 인사들이 결성한 '화동위원회'에서 연원.
1950~60년대 비구,대처간 분규를 종식시키고 이들을 화동(和同)시킬 목적으로 결성.
1968년 '총화회'로 개칭.
1969년 '대한불교 총화회'로 창종.
(모든 종파와 제휴,종파를 초월하여 현실과 진리가 일치하는 생활불교 구현을 취지로 창립).
백양사 주지였던 최득연이 종정에 취임하여
총본산을 서울 종로 복원사로 옮기고 종단 조직 정비.
1971년 신상균 총본원장이 생산불교 표방하고
'불자의범' 간행 등으로 종단 활성화에 공헌.
1973년 태고종 중진 인사들의 대거 합류로 교세 팽창과 조직 개편.
1975년 태고종의 한국불교 통합운동의 실패 후 거대 종단으로 변모.
1979년 현재의 종명으로 개칭.
교리상의 차이에 따라 종단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불교계 분규과정에서 분립되었기 때문에
내부 분규가 심하고 지방 사찰의 통제가 미비하여
소속 사찰의 수가 심하게 변동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종단으로
1990년대 이래로 내부 분규가 끊이지 않고 있음.
첫댓글 오분향님의 깊이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요?......많은 보따리를 계속 풀어주셨으면 합니다....ㅎㅎ....요즘 많이 배우네요.....아니..알고싶은 욕망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시네요....감사드립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