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 성인전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1-1846, 신부)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 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 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우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교의 명에 따라 황해도 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 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는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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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학 유학생
조선조 헌종 2년(1836년) 섣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열 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 일행 가운데는 15세 전후의 세 소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때 조선엔 잡입하여 활동하던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한테 뽑혀 머나먼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들 세 명이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였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음으로 모방 신부 자신이 숨어다녀야 하는 처지였고, 따라서 어떠한 교육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신부들과 상의한 끝에 어린 소년들을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이 낳은 최초의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2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더욱이 사제로서 생활한 시간은 겨우 1년 남짓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오히려 최초의 신학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쇄국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로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의 유명한 천주교 집안에서 김제준과 고 우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무렵, 그는 조부 김택현과 양친을 따라 용인 땅 한덕골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미 그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천주교 신자로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을해박해(1815년) 때는 그의 증조모마저 참수되었으므로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여행한 조선의 한양에서 중국의 남단 마카오까지는 9천리 남짓,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만이 국경 통과가 허용되던 조선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먼 여행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동료들과 함께 중국인 신자들의 인도로 1837년 6월 7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마카오의 신학교 생활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39년 4월에는 그곳의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조차 좋지 않았다.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회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모방신부도 새남터(현 용산 전철역 부근)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된 것이다.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
김대건의 신학교 생활을 5년만에 끝을 맞게 되었다 1842년 2월 아편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는 세실 함장이 이끄는 함선 두 척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여기에 김대건과 최양업이 통역으로 승선하게 된 때문이다. 프랑스 신부들은 이것이 조선에 입국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를 이용한 조선 입국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김대건이 탄 에리곤호가 마닐라와 대만을 거쳐 넉 달 뒤 중국 오송구(吳松口)에 도착했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세실 함장이 북상을 포기한 결과였다.
조선 입국을 바라던 김대건 일행은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건 일행은 스스로 입국로를 찾기로 결정하고, 잠시 머무르던 상해를 떠나 요동으로 향해 나아갔다. 이때부터 김대건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조선 입국때까지 2년 3개월여에 걸쳐 이루어진 이 모험으로 그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의지와 대담성이 더욱 강해졌으나, 뱃길 1만리, 육로 7천리의 길은 끝없는 고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요동 당 백가점(百家店)에 머물던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조선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만주교구장이던 배롤 주교조차 조서 입국의 위험성을 설명하며 이 모험을 말렸지만, 억압받는 조선 신자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일념을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김대건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 도움에 맡기고 있었다. 이후 김대건은 1842년 말과 이듬해 3월 과 9월, 세차례에 걸쳐 의주 변문(邊門)을 탐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날 수 있었고, 한때 조선 땅을 밟기도 하였다. 또 1844년부터는 동북쭉 국경을 통한 입국로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두만강을 넘는 길이 변문 쪽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되돌아가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페레올(Fereol)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여행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마음대로 조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며칠을 지내는 길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얼마나 잘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조국 땅을 밟는 것은 잠깐 동안, 그것도 중국 사람 즉 외국인의 자격으로밖에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인류라는 공통체가 형제 같은 입맞춤을 하며 하느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속에서 포옹할 날이 언제 오게 될지."
1844년 12월,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한데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생으로 인정을 받아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김대건은 서둘러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고자 했다. 조선의 신자들에 따르면 12월말이 조선 입국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고, 또 김 프란치스코라는 신자가 그들을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해박해 이후 더욱 엄중해진 변문의 경계로 인해 서양 사람인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고, 김대건 부제만이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따라 변문을 통과하였다.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다시 한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지난 8년동안 그리던 귀국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시와 박해의 위험뿐이었다.
한양에 도착한 즉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지시대로 앞으로 전교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신학생 선발, 조선 지도의 작성,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 안전한 가옥 매입등이 짧은 기간에 그가 해낸 일이다. 여기에서 조선과 상해를 잇는 해로를 찾아내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마침내 귀국하고 석 달쯤 되어 상해로 출발하는 배에 오르게 되었다.
사제서품과 영원한 귀향
조선을 떠난 지 한 달 남짓한 어려운 항해 끝에 김대건 일행은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와 새로 중국에 들어온 다블뤼(Daveluy) 신부를 만나 다시 조선에 입국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인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부제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면서 간직해 왔던 꿈을 마침내 이루게 된다. 이날 상해 부근의 금가항(金家港)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을 사제로 서품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소년은 조국을 떠난 지 8년 8개월만에 한국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고 조선입국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상해를 떠난 지 40여 일 만인 10월 12일에 조선에 상륙할 수 있었다. 도중에 그들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기도 했지만, '라파엘호'는 마침내 강경부근의 황산포(黃山浦)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라파엘은 곧 여행자들의 주보(主保)로 존경을 받는 대천사의 이름이다.
조선에 다시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다음해 4월까지 서울과 용인 지방을 다니며 전교하였고, 여기에서 홀로된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새 입국로 개척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임무가 되고 말았다. 서울의 마포를 떠난 그의 일행이 연평도와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관헌들이 그를 체포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3개월 여의 옥중생활과 문초 끝에,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한 김대건 신부는 진정한 조선인 성직자였다. 그는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곧 억압받는 조선인들을 하느님의 품안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갖가지 모험, 오랜 역경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또 그것들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그는 조국을 등지고 종교의 자유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언제나 조국 안에서 전교활동을 원하고 있었다. 옥중에서 그가 조선 교우들에게 남긴 다음의 한마디가 바로 이와 같은 의자(義子)로서 용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한몸 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경향잡지, 1996년 7월호>
聖 金大建 神父 略史를 더듬어보며,
김대건 신부님의 25년 짧은 일생을 보면 실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제로서는 13개월뿐, 그나마 형무소 한곳에서 가장 여러 달을 지내었다.
대신학생으로서도 한곳에서 충분히 신학을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되는 여행 중에 머무는 사제관의 선교사들에게 배워야 했다.
솔뫼에서 태어난 후, 소년시절부터 용인 한덕골로, 굴암으로, 은이로, 서울로, 구산으로, 마카오로, 필립핀으로, 대만으로, 마카오로,북경으로,의주로, 팔가자로, 경흥으로, 서울로, 상해로, 제주도로, 이리 강경포로, 서울로, 은이로, 연평도로, 서울로, 새남터로,,,!!!
순교하신 후에도, 유해가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용산 신학교 성당으로, 용산 성직자 묘지로, 밀양 성당으로, 서울 백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시성식 때는 유해 일부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다시 한국으로, 미리내로,,,!!!
순교는 순간에 피는 신앙의 제사가 아니라, 뿌리와 줄기와 잎이 자라면서 피우는 꽃과 열매처럼,이미 무혈의 순교생활이 선행되고 전제되어 완성되는 제사다.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의 사제로서 13개월 못지 않게, 사제가 되기 전의 24년간의 신앙생활,무혈의 희생으로 충만한 순교생활에 눈을 멈추어 바라보며 존경과 찬미를 드리자.
여기 소개하는 [聖 金大建 神父 略史]는 故 김구정 옹이 저술한 \"聖雄 金大建 神父\" 책의 말미에서 전재한 것으로 그래도 거의 정확을 기하고 있으며, 이를 저술하기 위하여 김구정 옹의 노고와 희생에 머리를 숙여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Msgr.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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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8월 20일 충청도 내포(內浦)지방 솔뫼(松山里)에서 김해 김씨 안경 공파(安敬公派)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모친 고 우르술라(長與 高氏)에서 탄생. 아명 재복(再福, 族譜名 芝植, 冠名 혹 雅號 大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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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15세 여름 경기 용인(龍仁) 은이(隱里) 공소 한덕골(寒德洞)로 피난하여 漢文 수학. 불란서인 聖 모방 신부(羅 모방)에게서 영세, 교명 안드레아.
7월 11일 丁夏祥 성인의 소개와 안내로 예비 신학생으로 간택. 서울 나신부 자택에서 수학(그해 봄에 선발된 최과출 프란치스꼬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와 동문 수학.
12월 2일 3인 함께 신학생으로서 서약(誓約).
12월 9일 3인과 중국인 유신부(劉 빠치피꼬), 정신부(샤스땅)의 영접군 교우들과함께 丁夏祥 성인의 인솔과 안내로 서울 출발.
12월 28일,중국 변문 샤스땅 정신부 거처에 도착.
1837년 6월 7일 마카오 도착(서울 출발 육로 도보 7개월 후).빠리외방전교회 동양 경리부 깔레리 신부 문하에서 수학 시작. 8월경 마카오 민란으로 마닐라로 피난.겨울에 마카오로 귀환.
1838년 11월 26일, 최과출 프란치스꼬를 사별(死別).
1839년 4월 6일 마카오에서 또 민란. 깔레리 신부, 드플레스 신부(선생 신부)와 함께 마닐라로 피난, 동 9일 도착. 동 5월 7일 마닐라에서 30리 되는 폴롬베이 도미니꼬회 별장에서 수학. 동 8월에 부모 편지 접수.
11월경 마카오로 귀환.
1840년 철학 공부(조선 4대 주교가 될 베르뇌(安) 신부와 존선에 나와 전교할 매스뜨르 신부한테 배움).
1841년 철학 공부 계속(베르뇌 신부 뚱낑으로 출발하므로, 매스뜨르 신부에게서 수학).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아주 떠남(6개월 간 불란서 극동함대 제독 세실씨의 통역관으로 임시활약).
2월 28일 마닐라 도착.
3월 2일경 마닐라 출발, 대만(臺灣)으로 향함.
6월 27일 주산도 (舟山島) 도착. 동 7월 초순 오송(吳淞)도착(최 토마는 동 4월 25일 마카오 출발, 8월 23일 오송에 역시 도착).
8월 29일 남경(南京)조약 체결에 제3국인으로서 입회 참석.
9월 11일 오송에 도착, 황세흥(黃世興) 집에 유숙.
9월 16일 샹하이 (上海) 베시 주교 댁에 유숙.
10월 10일 샹하이 출발.
10월 25일 따챵허(大裝河)에 도착. 해변에서, 중국 관헌으로부터 서양신부를 구출(救出)함.
10월 26일 요동 서남단(西南端) 해안에서 6,70리 빠이갸덴(白家店)에 도착.
12월 23일 조선 안내원들 만나러 책문(柵門, 중국 변문)으로 출발. 동 26일에 변문에서 30리 못미쳐 도중에서, 조선 안내원 김 프란치스꼬 상봉, 조 선 교회 소식 상세히 들음. 동 27일 변문에 도착.
12월 29일 변문 출발.1백 30리 걸어 의주(義州)를 바라봄. 소장사들 틈에 끼어 입국(入國). 밤새도록 약 백리 보행. 동 30일 주막에서 축출당함. 중도의위험을 각오, 의주로 돌아옴. 동 31일 압록강을 다시 건넘.
1843년 1월 1일 다시 약 1백 30리 도보로 변문 도착. 동 2일에 변문 출발.동 6일에 빠이갸덴(白家店) 도착.
3월과 9월 변문을 2회 왕복.
12월 31일 개츄(蓋州)에서 고주교 성성식 참례.
1844년 1월 24일 고주교와 봉천(奉川) 동행. 조선 교우 상봉. 서양인 국경 잠입 불능 소식 들음. 고주교와 몽고 빠갸즈(八家子)로 출발.
2월 4일 김대건 신부 혼자 훈춘, 조선 경원(慶源)으로 출발(왕복 약 4천리).동 3월8일에 훈춘 도착.경원에서 조선 교우 상봉. 소간사(所看事) 실패.
4월 빠갸즈(八家子)로 와서 매스뜨르 신부한테 신학(神學)공부.
12월 15일(이전) 6품(부제품) 받음(사제품은 연령 미달로 연기됨).
1845년 1월 1일 고주교와 함께 중국 변문 도착. 조선 교우 상봉. 김대건 부제만 조선으로 출발. 무사히 국경 돌파.
1월 15일경 서울에 도착, 돌우물(石丼里)에 잠거.
2월 중병에 걸려 15일 간 위중 상태로 앓음.
3월 국내에서 사제 지망생 예비신학생 2인에게 수업.
4월 30일 마포에서 샹하이로 목선으로 11명 교우와 동행 출항, 1개월간 구사일생 항해.
5월 28일 오성(吳淞)에 도착. 중국 관헌의 위협을 영국인 보호로 면함.
6월 4일 샹하이(上海)도착, 배 수선. 고주교를 고대(苦待), 약 3개월 체류.
8월 17일 샹하이서 30리 김가향(金家港) 신학교 성당에서 고주교께 사제승품.
8월 24일 샹하이에서 약 30리 되는 완땅(萬堂) 성당에서 첫 미사거행(다불뤼 안신부가 첫미사 보조함).
8월 31일 샹하이 출발(고주교, 안신부 동행) 오송에 와서 17일 간 풍랑으로 체류. 동 9월 18일에 다시 출범. 동 21일부터 10일 간 풍랑과 싸움.
9월 28일 제주도(濟州道)에 표류착륙(漂着).
10월 12일 강경(江景) 황산포(黃山浦)에 하륙(승선한지 42일 만, 서울을 떠난지 7개월만에 귀국임).
11월 12일 서울, 은이 공소에 귀향,모친상봉).
1846년 4월 8일 은이에서 최후 미사. 서울로 출발.
5월 14일 황해도 앞바다에 중국 어선 교섭 차, 마포(麻浦)에서 출항.
5월 25일 연평도 (延坪島) 도착.
5월 27,8일 등산진(登山鎭) 도착(소강, 터진목, 소청, 대청, 백령도를 경유).
5월 31일 장연(長淵) 목동(牧洞)에서 중국배에 편지 1봉 부침.
6월 1일 등산진으로 돌아옴.
6월 5일 등산 첨사에게 체포됨(일장 설교, 형구를 자기 손으로 목에 댐).
6월 9일경 해주 감영(海州監營)으로 압송됨.
6월 21일경 서울로 압송(해주에서 서울까지 3백 75리 가량).
6월 22일 첫 공초(供招).
6월 26일 2회 공초.
6월 27일 압수된 편지 일체 압래.
6월 30일 3회 공초.
7월 1일 4회 공초.
7월 16일 5회 공초.
7월 19일 6회 공초.
7월 30일 신부들과 최 토마에게 최후 편지를 씀.
8월 24일 불란서 제독의 편지 서울에 도착.
8월 26일 고주교께 최후 상서.
8월 29일 교우들에게 최후 유서.
9월 5일 불란서 편지로 인해 중희당(重熙堂)에서 어전 회의 개최.
9월 15일 김신부 최종 판결 문제로 희정전(熙政殿)에서 어전 회의개최.사형선고. 좌우포장 파면.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순교. 그 현장에 가매장.
10월 26일 서울서 150리 거리 안성 미리내(美山里)로 교우들이 이장(移葬).
1857년 9월 23일 가경자(可敬者)로 반포됨.
1901년 5월 18일 묘지 발굴, 용산 신학교 성당으로 이장(移葬), 안치.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시복식(諡福式).
1949년 11월 15일 한국교회 성직자 대주보로 확정. 또한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함(로마 교황청).
1950년 6월 25일 6.25 동란에 용산 성직자 묘지에 이장. 9.28 수복시에 경남 밀양(密陽) 성당으로 임시 이장,
1951년 서울 수복 후에 서울 혜화동 (일명 백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이장함.
1960년 7월 5일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 이장 안치.
(*여기 실린 연월일은 주로 양력으로 하였고, 또한 전에 여러 가지로 김신부 약력의 연월 일이 일정하지 않아,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기재함* 저자 김구정).
9월16일은 김대건신부님 순교 161주년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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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신부가 된지 만 13개월만에 25세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일생을 간결하게 주요 사적 중심으로 살펴보자.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출생하여,
1827년 경기 용인 한덕골(寒德洞,일명,성애골)로 부모님들과함께 피난하였고,굴암, 등 주변 산골 마을로 이사다녔으며,
1836년 양지 은이(隱里) 공소에서 영세하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12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마카오로 떠났다.정하상 회장이 신의주 국경까지 데리고 갔다.
1837년 6월 7일 만 6개월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약 2만리 길을 6개월동안 걸어서 갔다. 김대건 15세, 최양업15세, 최과출 14세였다.
1838년에 최과출이 8개월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845년 8월 17일, 사제가 된 후 1년 후, 즉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칼에 목이 잘리어 순교하였다.대구교구의 김구정 옹이 집필한 [성웅 김대건 신부 전]이 아직까지는 가장 잘된 책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