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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다방 전경 출처 www.hakrim.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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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화의 산파역 - 공간사랑 강준혁 씨” [동아일보] 1983년 1월 1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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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사랑에서 탄생한 ‘사물놀이’의 첫 공연 1978년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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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사랑에서 공연된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 출처 [매일경제] 1982년 2월 1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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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따뚜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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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페스티벌 2008 한국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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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나담문화축제 행사장 전경 제공 메타기획컨설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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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한 축제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강준혁의 가방 | |
이미 알려져 있듯이 강준혁은 1976년 개관한 공간사랑 극장장으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이후 그는 스튜디오메타를 설립하고 문화예술분야 기획컨설팅을 독자적인 영역으로 전문화했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축제의 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춘천인형극제’를 시작으로 수많은 축제를 기획하고 만들어왔다. 그리고 다움아카데미, 추계예대 예술경영대학,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등을 이끌며 기획경영 교육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삶을 일별해보는 것 자체가 한국 문화예술기획의 전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문화기획자1호’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그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이라 생각하지 않는 일을 시작하지만, 그가 시작하면서 그의 일은 뚜렷한 하나의 영역이 되고 많은 이들이 그 일에 뛰어든다. 그러니까 그가 ‘문화기획자 1호’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처음’이라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홀로 저만치 앞서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선구자’나 ‘개척자’이기보다는 제2, 제3으로 이어지는 어떤 흐름의 맨 앞자리에서 물꼬를 터온 이다.
국내 최초의 음악캠프 기획한 미학과 학생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의 대학시절은 음악을 하는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일을 도모하는 음악청년의 그것이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부모님 덕에 어릴 때부터 “부스러기 주워 먹듯이” 음악을 접했고, 중학교 밴드부에서 시작한 클라리넷으로 고등학교 때는 전국음악콩쿠르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주위에서도 모두 음악가가 되려니 으레 그렇게 생각했고, 스스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음악가를 꿈꿨다. 하지만 정작 대학은 미학과로 진학한다.
“김지하 선생이, 형님인 강준일(작곡)의 친구였는데, 이상한 말로 꼬드기는 바람에 미학과를 가게 되었다. 진정한 음악을 하려면 미학과를 와라, 음대에 가서는 쟁이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잡아떼더라.(웃음) 고민을 많이 했다. 음대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학자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순수한 학문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었다. 고3 때도 11월까지 콩쿠르에 나가고 그랬다. 마지막에 굉장히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에 들어갔다.”
66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그는 거의 음대에서 살다시피 했다. 학교생활만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금난새와는 연주단체 메아리를 만들어 연주를 다녔다. 그 와중에 68년에는 금난새와 함께 음악캠프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의 음악캠프가 2년 후 서울음악학회로 발전하였고 지금까지 일 년에 두 번씩 열리는 캠프가 운영되고 있다.
“처음 계획은 서울대 농대 기숙사에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허락을 안했다. 여름방학도 다 끝나갈 즈음 다시 궁리를 하다가 매형의 은사이신 원주에 계신 장일순 선생께 의논을 드렸다. 장일순 선생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지학순 주교에게 말씀드리니 지 주교께서 아직 문도 안 열었던 가톨릭센터를 쓰라고 허락을 하셨다. 그래서 갑자기 준비해서, 음악캠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90여 명이 왔는데, 처음 있는 일이니 첼로 전봉철, 바이올린 양혜영 선생이 지도교수 격으로 왔다. 그때 박은성(전 지휘자협회 회장) 선배가 4학년이었는데 지휘를 맡아 오케스트라 연습을 했다. 강좌도 하고, 좀 엉성했지만 열흘 정도 재미있게 했다.”
“초기에는 항상 원주에 내려가서 했다. 하루는 장일순 선생의 동생이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었는데, 음악선생을 통해 학생을 하나 데려왔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한다고. 그때 선생님이 데리고 왔던 학생이 박종서(작곡)다. 그 때쯤 원주에서 학생이 오면 맡아 가르치기도 하고 했다. 박종서(작곡), 정치용(지휘) 등 우리 캠프가 작은 씨앗이 되어 원주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이들이 계속 나왔다. 캠프에서 배우고 학교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서울음악학회 와서 캠프 다니고 그랬다. 그때는 지휘과 같은 곳이 없었으니까 젊은 친구들이 우리 캠프 오면 지휘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결국 그 사람들이 원주시립교향악단을 만들고 지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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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을 만나다
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다니는 것도 아닌, 그 스스로 ‘백수시절’이라 부르는 그 시절, 그는 학림에서 음악 듣고 서울음악학회 친구들과 연주회를 하면서 20대 청춘을 통과해 간다. 그 사이 잠시 세실극장 개관 작업에 참여하게 되지만, 극장에 대한 그의 꿈은 조금 더 미뤄져야 했다.
“75년 가을쯤으로 기억하는데, 하루는 동아일보 사업부장으로 퇴임한 임석규라는 분이 서울음악학회에 찾아왔다. 그분이 퇴직금으로 공연장을 빌렸는데, 운영할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 자기를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서울음악학회가 새로운 오케스트라 운동으로 신문에도 나고 그래서, 보고 찾아온 거다. 오케스트라의 기획일을 내가 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기획이라는 말 자체를 안 쓰던 시대지만, 내가 하는 게 좋겠다 해서 가게 되었다.
극장에 가보니 조명, 음향 설비도 안 되어 있었고, 돈도 너무 부족했다. 결국 친구들 불러 모으고 발로 뛰면서 극장 설비를 마련했다. 청계천에 가서 대학생들이 극장 만든다고, 50만원인가 지금 생각해도 말로 안 되는 돈으로 조명기 사고, 디머는 친구들이랑 직접 만들었다. 좌석표는 건물 감리하러 나와 있는 건축가하고 둘이서 만들었다. 그렇게 공연장 설비를 겨우 마치고 개관이 다가와서 스케줄을 보니 다 극단에 대관이 되어 있었다. 처음 우리를 찾아왔을 때는 극장에서 음악도 하고 연극도 하고 다용도로 운영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개관공연으로 우리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했다. 돈이 없으니 대관을 한 거다. 프로그램을 짜고 말고 할 수가 없었다. 다른 프로그램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때 참 마음이 안 좋았다. 임석규 그 양반과 엄청 싸우고 일을 그만 두었다. 나는 사무를 보러 들어간 게 아니었다. 온갖 고생 하면서 극장을 만들었는데 시작하자마자 나와야 한다는 것이 서러웠다.”
하지만 “결국 잘 된 일이었다”. 세실을 그만두고 다시 학림과 서울음악학회로 되돌아온 그는 그해 겨울, 공간의 김수근 선생을 만나게 된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박여숙(박여숙 화랑 대표) 씨가 학림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이 월간 [공간]에서 일할 때였는데, 공간이 극장을 짓는데 사람을 구한다, 김수근 선생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 이미 말해두었다, 하더라. 12월 겨울음악캠프가 막 시작했을 때라서 갔다 와서 뵈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1월초에 김수근 선생이 만나자고 연락을 하셨다. 찾아갔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보더라. 면접이었던 셈인데,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몰랐다. 선생이 ‘공간’의 지향이 무엇인 것 같으냐 물으시길래, 현대와 전통의 조화인 것 같다고 했더니 맘에 들었던 듯하다. 그때 여전히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지금 당장 일할 수 있겠냐 하고 물으시더라. 대학을 안 끝냈다고 했더니, 그래도 일할 수 있겠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이 끝나고 공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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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사랑 10년 동안 카페가 내 사무실이었다”
“77년 1월초부터 일을 시작해서 4월 22일에 개관했다. 공간그룹의 메인은 건축이라서 당시 공간사랑 소극장은 획기적이었다. 블랙박스형 극장으로, 가로세로 45센티, 높이 15센티, 30센티의 박스들을 조합하여 객석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객석이 아닌 부분은 무대가 되는 거다. 승효상(건축가)의 아이디어였다. 승효상은 나보다도 어렸는데, 일찍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김수근 선생이 워낙 최고를 좋아하신 분이어서 설비도 최고였다. 음향은 정말 좋은 게 들어와 있었다. 그 작은 극장에 슈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주문해놨더라. 정말 놀라운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명기 배튼을 레일로 움직이게도 해 놓고. 그런데 디머도 금방 망가지고 조명은 좀 문제가 있었다. 아무튼 작은 공간이지만 굉장히 시설이 뛰어난 극장이었다. 박영구 선생, 황병기 선생, 강석희 선생이 공간 그룹의 자문위원이었는데, 개관공연을 할 때 도움을 많이 주셨다. 당시만 해도 나는 전통예술을 잘 모를 때여서 황병기 선생이 많이 도와줬다. 4월 22일부터 8일 동안 개관기념공연을 했는데, 전통예술의 밤 나흘, 현대음악의 밤 나흘을 번갈아가면서 했다.”
그에게는 물론 당연히 그렇지만, 한국공연사, 극장사에서도 공간사랑(空間舍廊)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간사랑은 건축그룹인 ‘공간’이 사옥을 건축하면서 만든 소극장이다. 공간은 이미 종합문화예술지를 표방하는 [공간]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고, 72년부터 [공간] 독자들을 위한 현대음악 감상회와 한국 전통예술 초청 공연, 각종 전시회를 마련하여 24회의 예술발표회 및 감상회를 가져왔다. 공간사랑은 그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어졌다.
“내가 ‘한국문화기획사’를 강의할 때에 공간사랑은 강조해 이야기한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극장들이 생겨나는데, 드라마센터, 카페 떼아뜨르, 에저또로 시작한 삼일로창고극장, 극단 실험극장의 실험소극장 등이 있었다. 그러니까 연극하려고 모여 있는 극단들이 자기들이 공연할 공간이 없으니까 소극장이건 카페건 점유해서 공연장화 하는 것이 70년대 중반 극장들이었다. 그런데 공간사랑은 공연단체 없이 공연장을 만들어놓은 거다. 그러니까 어디선가 공연할 사람을 데려오든가 직접 돈을 들여 제작해야 했다. 기획·제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공간사랑의 태생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단체에서 만든 공연장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예술가들이 식구같이 항상 여기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일 년 내내 사람 만나서 커피 마시고 떠드는 일이었다. 학림생활의 연장이다. 단, 공간사랑에서는 양악뿐 아니라 연극, 국악하는 사람들까지 폭넓게 만났다. 그때 황병기(가야금연주자), 심우성(민속학자), 최종민(동국대 교수) 선생을 자주 만났다. 그냥 차 마시러 얘기하러 오는 거다. 사랑방 오듯이.”
공간사랑에서 일했던 10년 동안 따로 사무실도 없이 공간사랑 1층 카페가 곧 그의 사무실이었다. 커피 마시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곧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사람과 친해져서 다음 번엔 뭘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났던 것은 아니다. “평소에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그걸 통해서 자연스럽게 공연이건 뭐건 활동이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세대인 그는 “모든 것을 비즈니스로 하지 않으면 시간의 손해”인 것처럼 생각하는 요즘 세태가 불편하다. 스튜디오 메타에서 와인파티를 시작한 것도 옛날처럼 ‘장이’들이 모일 자리가 없어졌으니까, 그런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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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전통예술의 밤에서 시작된 ‘사물놀이’
“진정성 있는 사람들은 계속 만나다보면 자연스럽게 일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이가 심우성 선생이다. 심 선생은 공주 출신의 부잣집 자제였는데, 선친께서 남겨주신 재산을 민속학 답사한답시고 거의 탕진했다. 물론 그래서 좋은 것을 많이 컬렉션하고 나중에 공주민속극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다. 필드를 잘 아시는 분이었다. 공간사랑을 자주 드나들며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했다. 77년 가을 쯤, 심우성 선생이 한번 와서는 도와줄 일이 있다고 하는 거다. 민속악회 시나위라는 그룹이 있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전통음악계에서는 괜찮은 친구들이 모였는데, 결성만 했지 도무지 연주할 곳이 없다, 이 친구들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거다. 그럼 일단 공간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겠다, 대관료 없이 우리가 프로그램 기획하겠다, 했다. 그래서 78년 2월에 ‘공간 전통예술의 밤’이 시작된 거다. 연주할 마땅한 기회가 없었던 민족악회 시나위에 정기적인 연주공간이 생긴 것이다.”
“첫 프로그램에는 시나위 합주, 웃다리 풍물이 있었고 마지막은 채희완(무용평론가) 씨의 허튼춤이었다. 웃다리 풍물은 장고 김덕수, 꽹과리 김용배, 징 최태현, 북 이종대 이렇게 넷이 연주했다. 최태현과 이종대는 타악 연주자가 아니고 해금과 대금 연주자이다. 웃다리 풍물은 중부지방의 농악가락이다. 본래 농악대가 대열을 이루어서 연주하던 것인데 그 가락을 소극장에서 공연한 것이다. 정말 멋있게 했다. 78년 2월 22일, 23일 이틀간 공연이었는데, 연주자들도 너무나 좋아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전문공연장에서 이런 식으로 공연한 것이 처음이었다. 첫 번째 공연이 끝나고 웃다리만 할 게 아니고 아랫것도 해보고 다 해보자, 하고 합의가 됐다. 그래서 그 다음에 삼천포 12차 농악을 했다. 그러다보니 전문적인 타악 주자가 들어와야겠다. 그래서 이광수, 최종실이 들어왔다.”
영광에 곱사춤 잘 추는 사람이 있다는 꼬드김에
전통예술을 소극장이라는 현대적 극장공간에 접목시키면서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또 하나의 예가 있으니, 바로 공옥진의 창무극이다. 이 역시 그가 말했던 그의 작업방식, ‘카페에서 일 년 내내 사람들 만나서 떠드는’ 중에 시작된다.
“78년 개관 후 1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정병호 선생이 영광에 곱사춤을 잘 추는 사람이 있는데 부르면 어떠냐고 꼬드기는 거다. 곱사춤이 여흥거리로는 괜찮지만 개관 1주년 극장프로그램으로 곤란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너무 재주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일단 개관 1주년 프로그램에 넣었다. 드디어 공연 날, 아무도 없는 아침에 와서 공옥진 씨가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통공연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내 눈으로 봤을 때 살풀이를 정말 제대로 추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병신춤으로 넘어가더라. 앞곱사, 뒷곱사 춤을 추고 또 <심청가>의 맹인잔치를 소리와 몸짓을 섞어서 하더라. 제대로 다듬어 올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공옥진 씨에게 부탁을 했다. <심청가> 전편을 소리와 춤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 했더니 할 수 있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서 여름쯤에 잠깐 서울에 들르셨기에 기억하는지 물어봤더니, 기억한다, 연습이 거의 다 끝났다고 하더라. 그래서 봤는데, 길고 늘어지는 부분이 있는 거다. 어떤 부분 줄이고 해서 올린 것이 <1인 창무극 심청가>이다. 공간사랑에서 초연했다. 78년 10월이었다. 1주일을 공연했는데, 공간사랑이 120명이 적정 관객수인데, 마지막에는 250명이 들어왔다. 정말 꾸역꾸역 들어왔다. 관객들을 앉히고 보니 화문석 한 장도 안 되는 공간의 춤출 자리만 남았다. 결국 그해 12월에 앙코르 공연을 보름을 더 했다.”
무명의 예인이 서울 공연계의 중심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물론 작품이 가장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처음부터 관객이 많았던 건 아니다. 첫날은 우리가 공연 때면 발송하는 공연 안내를 보고 온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본 사람들이 거의 다시 오고, 다시 오면서 사람들을 데려오고 그렇게 관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외국인들도 많이 왔다. 그때가 어떤 점에서는 더 꼼꼼하게 일했다. 공연안내문은 항상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해서 발송했다. 그래서 대사관이나 문화원에서 많이 왔었다. 그 다음해인가 프랑스의 마임이스트 마르셀 마르소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공옥진 씨의 공연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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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례 정기 연주회, 페스티벌, 문화강좌 그리고 채플린영화제
사물놀이나 창무극과 같은 전설적인 히트작(?) 외에도 공간사랑 소극장 운영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사물놀이가 탄생한 ‘전통음악의 밤’만이 아니라 ‘판(PAN) 뮤직페스티벌’ ‘전통음악의 밤’ ‘시낭독회’ ‘재즈페스티벌’ ‘무속페스티벌’ ‘현대무용의 밤’ ‘공간춤판’ ‘모던발레의 밤’ 등 공연 자체가 쉽지 않았던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을 월례 정기연주회나 페스티벌 등으로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정기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어갔다. 정기공연들은 전부 대관비 없이 이루어졌다. 공간은 물론 기자재 등을 모두 제공하고 홍보 등도 모두 극장이 도맡았다. 79년 가을에 시작한 ‘공간재즈페스티벌’은 길옥윤 씨가 주로 앞장섰었다. 이때만 해도 재즈를 연주할 곳이 거의 없었다. 이태원, 미8군 클럽에나 있는 정도로 호텔에도 거의 재즈공연이 없었다. 아주 열심히들 했다. 표도 몇 장 안 팔리는데, 여기서 공연한 티켓값을 일 년 내내 모아서 고아원 자선연주회 같은 것을 했다. 그때 재즈페스티벌에서 가장 인기 없는 현대재즈가 있었는데, 강태환 트리오(강태환, 최선배, 김대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고인데,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강태환 트리오는 공간재즈페스티벌에 한 번도 안 빠지고 끝까지 같이했다.”
정기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유진규, 김성구의 마임공연, 실험무대, 실내악 등 비주류, 실험적 공연들을 계속 만들어갔다. 한편 80년 신파극시리즈, 코미디시리즈는 비수기 탈출을 위한 대중적 기획을 진행하기도 했다.
인형극 상설공연도 공간사랑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인형극단도 둘셋이 전부인 데다가 상설공연은 어렵다는 답이었다. 유일하게 서울인형극회 안장희 선생이 하겠다 해서 시작할 수 있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공연기회가 늘어나면서 인형극, 인형극단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인형극 상설공연은 이후 샘터파랑새극장, 바탕골소극장의 인형극 상설공연으로 이어진다.
개관 이듬해인 78년부터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문화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공간 하계대학, 공간 동계대학 등의 이름으로 미술, 사진, 음악 등의 강좌를 열었다. 전통미술 강좌도 있었다. 이외에도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과 같이 하는 비정기적인 강좌를 열었다.
“공연장에서 열리는 강좌는 처음이었다. 지금은 백화점 문화센터 등 일반인 대상의 문화교육프로그램이 많지만 그때는 없었다.”
79년 4월에는 ‘채플린 필름 감상 및 강좌’를 열기도 했다. 당시에는 채플린 영화가 상영이 금지영화였다. 규제를 피하기 위해 강좌랑 같이 했다. 강준혁은 지금도 여름이면 홍천 집 앞마당에서 지인들과 함께 채플린 영화 감상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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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직함 따지지 않고 그때그때 보이는 대로 일했다”
‘공연장 영업이 아닌 문화운동’을 표방했다고 했지만 백퍼센트 자체 제작으로 공연장을 운영할 수는 없다. 게다가 당시는 공연장이 절대 부족하던 시절이다.
“1980년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본다면 기획과 대관이 2대1 정도였다. 101작품, 490회 공연을 진행하면서 가동률이 100% 이상 이였다. 공연 건수로는 음악회가 많았다. 전문극장을 지향했기 때문에 대학생들에게는 대관도 하지 않았다. 건축설계실에서 운영비를 댔다. 건축가들은 자기가 번 돈을 우리가 쓴다고 하고, 우리는 공간사랑 때문에 그룹이 홍보가 되는 거 생각해보라고 했다. 돈 많이 들었다. 대신 나, 강영걸(연출가), 기술을 맡은 문광인, 그리고 여사무원, 이렇게 네 명이 모든 일을 다 했다. 인력을 최소화했다. 역할이니 직함이니 할 것 없이 그때그때 있는 사람이 일을 하는 식이었다. 어떤 때는 내가 음향오퍼 하고. 역할을 나누면 다 소화할 수 없었다.”
“다른 데서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구태여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공간의 지향이 있었고, 또 사회가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하는, 채워지지 못하는 부분들을 우리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직감적인 건데,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건데, 받아줄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할 때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공간 3일 연주회’를 했는데 사흘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사람들이 무대에 섰다. 하영일은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슈만의 <시인의 사랑>, 한국가곡으로 사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연주자들이 레퍼토리가 풍성하지 못했다. 젊을 때 사흘 정도 다른 레퍼토리를 할 수 있는 실력을 쌓으면 두고두고 자신의 재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끌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걸 하게 만드는 힘은 공익성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이 사회에 필요할 거다, 앞으로 필요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보기에 지금 프로그램의 기획력이 떨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근본적인 정신이나 공익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비즈니스가 되느냐, 성과가 있느냐만을 따진다.”
그래도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운도 있어야 잘 된다.(웃음) 예술가들과의 접촉이 끊임없이 있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이나 사람들의 취향을 알아야 한다.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래야 우리가 보이고 싶은 것에 대한 평가도 알 수 있다.”
그의 첫 직장이기도 했던 공간사랑 소극장에서의 활동은 88년 즈음에 마무리된다. “뒤돌아보니 10년마다 변화가 있더라”고 말하는 그는 “86년 김수근 선생이 돌아가시고, 내 마음 속으로 3년상 치룬다 생각하고 88년까지는 있어야겠다 생각했다. 88년에 완전히 공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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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프로그램 매뉴얼 소위와 아리아카데미
“내가 공간을 그만둘 즈음이니까 86~7년쯤인 것 같다. 그때 예술의전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예술의전당 프로그램 매뉴얼 작업을 하는 소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김문환(미학자), 구히서(연극평론가), 이건용(작곡가), 유홍준이 있었고, 김철수라고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하고 일해재단 소속으로 정리 작업을 했던 이가 있었다. 앞으로 예술의전당이 어떤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프로그램 모델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예술의전당은 공연장을 여러 개 한꺼번에 모아둔 물리적인 콤플렉스에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중앙과 지역, 우리나라와 해외를 잇는 거점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구체적인 실행프로그램으로 제시해보자 해서 첫해에 ‘지역과의 만남’이라는 주제 하에 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지방의 오케스트라가 와서 오케스트라 축제를 하고, 전시관에서는 지역작가 순회전을 하고, 이런 것을 공연장, 전시관 등 여러 공간이 한꺼번에 움직였으면 좋겠다 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제안한 것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교향악축제, 합창축제였다. 그런데 ‘지역과의 만남’이라는 큰 주제는 잊어버리고 ‘교향악축제’만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 소위가 몇 달 동안 활동해서 매뉴얼북을 만들어 예술의전당에 줬다. 몇 년 동안은 그걸로 직원교육도 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안 하는 것 같더라.”
그렇게 시작된 ‘공간사랑’ 밖으로의 걸음은 연기자 양성을 위한 아리아카데미로 이어졌다.
“내가 잘 이야기를 안 해서 다들 잘 모르는 것이 아리아카데미다. 87년인가 김옥랑 씨(동숭아트센터 대표)가 찾아와 자기가 공연장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달라는 거다. 별 뜻이 없었는데, 김옥랑 씨가 내 일을 도와줄 테니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때 김덕수 사물놀이가 어려울 때였는데, 해외 공연을 나가는데 비행기표를 해주겠다는 거다. 그래서 공연장을 짓는 과정에서 설계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했다. 또 극단을 만들고 싶다고 하는데, 기존 극단에서 좋은 사람 빼오느니 차라리 연극아카데미를 운영해라, 몇 년 운영을 하다보면 저절로 극단이 생길 거라 했다.
나도 나름대로 연극아카데미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공간사랑을 운영하면서 가지게 된 생각인데, 우리의 연기방법을 찾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꼭두각시 놀음이나 탈춤이 있지만 다 옛날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생각한 것 중 하나는 우리의 언어로부터 우리의 연기방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걸 교육시킬 수 있는 연기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나의 꿈같은 생각이었다.
나의 제안을 김옥랑 씨가 받아들였다. 혜화동에 있는 자신의 한옥을 아카데미에 쓰라고 내놓았다. 나는 기성 30대 연기자들을 재교육시키는 걸로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상을 30대 연기자 20명을 모았다. 괜찮은 사람들이 많이 왔다. 제일 연장자가 여무웅(전 시립극단 단장)이었고 김지숙, 정규수 등이 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9~12시까지 수업을 했고 학비 무료였다. 이러한 안을 김옥랑 씨도 동의하고 혜화동에 있는 한옥집을 아카데미를 위해 쓰라고 내놓았다. 아리아카데미라고 이름 붙이고 학교를 열었다. 신체훈련, 발성, 우리 가락에 대한 기초공부(시조, 판소리), 발음, 작품해석 등을 공부했다. 내 욕심으로는 2년쯤 지나서 내가 생각하는 코리안 메소드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해 3월에 시작해서 무난히 11월까지 갔는데, 내가 미국 출장을 간 사이에 김옥랑 씨가 갑자기 학교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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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메타, 공연기획가에서 문화기획가로
예술의전당 프로그램 소위, 아리아카데미를 거치면서 공간사랑에서 독립한 강준혁은 스튜디오 메타를 열고 ‘문화기획가’로서의 본격적인 행보을 시작한다.
“하루 아침에 아리아카데미를 끝내고 나니, 문신규 토탈미술관 회장이 안 쓰는 지하공간을 줄 테니 사무실을 차리라고 하더라. 거기에 작은 사무실을 냈다. 그때 ‘공간’에 있던 건축가 김병윤, 이종호가 와서 ‘공간’도 건축과 문화가 함께 있었듯이, 자기들도 그런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 메타라는 사무실을 내려고 하는데, 셋이 하면 어떠냐 해서 같이 하게 되었다. 스튜디오 메타는, 건축사무실은 한남에 따로 있고 정신적 파트너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후에 지금 원더스페이스 자리에 있던 집 위 아래로 들어갔다.
89년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미도파백화점 사장이 스튜디오 메타를 찾아왔다. 백화점 한 층을 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고 컨설팅 해달라고 하더라. 그것이 문화프로젝트 컨설팅의 첫 번째 케이스이다. 문화공간을 만드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자문을 구하는데 그때까지 그런 것을 돈 주고 하는 데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바른손에서 찾아와서 마찬가지로 문화프로젝트 컨설팅을 의뢰했다. 춘천에 어린이회관을 위탁운영하게 됐는데, 어떻게 할지 컨설팅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 작업을 하면서 어린이축제를 만들게 되었고 그것이 춘천인형극제가 되었다. 춘천인형극제 사무국장이었던 정연일 씨가 원래는 바른손 스태프였다.”
스튜디오 메타는 ‘문화기획가’라는 명칭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간에 있을 때 명함에 ‘공연기획가’라는 타이틀을 썼었다. 메타를 하면서 축제를 자꾸 하다 보니 맞지 않아서 문화기획가라는 타이틀을 썼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당시만 해도 기획이라는 말이 생소했었다. 일은 있었지만 그 일에 따로 명칭을 붙여서 부르지 않았다. 강의를 할 때 기획자의 롤을 일곱가지로 정리한 적이 있다. 조직자, 플래너, 프로모터(흥행사), 매니저, 문화촉매자(animator), 프로듀서, (자료를 모아 보고하는) 보고자. 내 경험에서 정리한 것이다. 내가 일을 할 때는 이런 역할들이 분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한 역할이 분화될 만큼, 그렇게 인력을 쓸 만큼의 규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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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시대가 시작되다
스튜디오 메타에서 컨설팅 작업이 이루어지는 한편 강준혁에게나 한국 문화예술사적으로나 ‘축제의 시대’가 시작된다. 지금까지도 성공적인 문화예술 축제로 진행되고 있는 축제들 중에는 초기에 콘셉트를 잡고 축제의 틀을 만드는 데에 강준혁이 직접 관여한 축제들이 많다. 안동탈춤축제, 전주소리축제, 원주따뚜축제 등이 그러하다.
“89년 춘천인형극제가 있었고 90년에 LA아트페스티벌 한국프로그램을 담당했고, 93년에 대전엑스포 해외프로그램을 맡았다. 대전엑스포를 하면서 우리도 좋은 자료들이 많은데 국제적인 축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머니즘이나 탈춤은 훌륭한 소재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러다가 95년인가 사옥을 짓고 스튜디오 메타가 다 모이면서 탈춤축제를 본격적으로 기획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안동출신인 세비코(Sevico)라는 음향회사(당시 태영교역-JBL 한국총판) 사장인 권경섭 씨가 기왕이면 안동에 축제를 해줬으면 좋겠다 했다. 사물놀이가 일본이랑 교환프로그램 할 때 그 분이 굉장히 비싼 음향기계를 무료로 빌려준 적이 있는데 빚갚음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아리아카데미도 그렇고, 내가 사물놀이 때문에 여러 가지 빚 갚음을 했다.
그래서 기왕이면 안동에서 하자, 하고 기획서를 써놨는데, 문화부의 한 사무관이 메타 사무실에 왔다가 그걸 보더니, 내가 안동시에 얘기하겠다, 문화부와 안동시가 예산을 같이 마련하면 괜찮을 것 같다 하더라. 그래서 안동시가 들어왔다. 그런데 한해 축제가 끝나고 나니까 지역대학 같은 데서 왜 외부사람이 와서 하느냐는 말들이 나왔다. 난 그런 게 정말 싫다. 그래서 나는 빠졌다. 최근에도 여러 번 사람이 찾아오지만, 진정성이 없다. 난 첫해 하고 손을 뗐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자체나 지역문화계가 외부(?) 전문가와 상생하는 소통에 원활하지 못한 것은 안동탈춤축제만이 아니다.
“2000년 소리축제를 맡게 됐다. 축제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그쪽에서는 자꾸 판소리쪽으로 끌어가려고 했다. 나는 판소리 위주의 축제를 하려면 현재 하고 있는 전주대사습을 키워라, 전주대사습은 조선시대부터 있던 제도이고, 소리뿐 아니라 무예까지 포괄하니 그게 더 적절하다, 국제적인 축제를 만들고 싶어 하면서 판소리 위주로 축제를 하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은 끼지 말라고 하는 거다, 국제적인 성격을 버리던지, 아니면 판소리로 한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얘기해도 그 사람들은 판소리 위주로 하려고 했다.
첫 회는 내가 총감독이니까, 소리에 관련된 모든 걸 다루고자 했다. 공연장소도 향교, 경기전, 대학 앞 재즈카페 등 전주 시내 곳곳이었다. 불교음악은 금산사 가서도 하고, 기독교 관련 음악은 전동성당 같은 데서도 하고, 모든 곳을 다 공연장소로 만들었다. 또한 모든 종류의 소리, 음악뿐 아니라 심지어는 건널목 장애자 신호음을 개발하는 등 소리와 관련된 모든 걸 다 다루는 축제로 시작했다. 그렇게 1회를 끝냈는데, 그 다음부터는 자기들이 하겠다고 하더니 판소리 위주로 끌어가고 있다.”
“2004년에는 원주에서 ‘원주세계평화팡파레’라는 축제를 맡아달라고 부탁이 왔다. 그때 원주에 대한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 시절 음악캠프를 처음 만들 때 장일순 선생, 지학순 주교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시작했겠나. 그래서 축제를 맡게 되었다. 우선 ‘원주따뚜’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군악대, 타투 축제인데, 타투하면 정감도 없고 하니까 라틴식으로 따뚜로 바꿨다. 그걸 군악축제가 아니라 관악축제로 바꿀 생각이었다. 내가 계속 맡아서 했으면 바꿨을 거다. 내가 맡았을 때는 군악 말고도 관악을 많이 했었는데, 그 다음에 맡은 친구들이 그 노선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게 많다.”
이외에도 2005년 베를린 아태주간 예술감독 등 그는 많은 축제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2005년 세계평화축전은 규모도 크고 의미도 남달랐던 축제이다.
“임진각 음악의 언덕은 꼭 가 봤으면 좋겠다. 평화축전을 하면서 만든 것인데, 축제를 통해 뭔가 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음악의 언덕은 두고두고 쓰임새가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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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인형극제 2010 |
세계평화축전(2005) |
아비뇽 한국주간, “찬란한 유산보다 현재의 창조력을 보여주고자”
아마도 그의 축제기획에서의 정점은 아비뇽축제 한국주간 예술감독이 아닐까 싶다. 당시 공연계에서는 아비뇽에서의 한국주간을 놓고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국내에 공연예술축제가 활성화되면서 아비뇽 축제에 대한 관심도 컸고 공연예술계의 권위 있는 무대에 한국공연이 선다는 것에 대한 관심도 컸다.
“96년에 최준호(현 프랑스 한국문화원장)를 통해 아비뇽페스티벌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와인파티에서 만났다. 98년에 한국공연을 초청하려고 하는데, 어떤 프로그램을 가져가면 좋겠느냐 의견을 묻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사흘 후에 다시 와서, 감독을 맡아줄 수 있느냐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이미 조사를 다 해왔다. 뭐가 중요하고 안 중요한지. 전통예술가 누가 좋겠다는 이야기는 다 끝난 상황이었는데, 현대물은 자기네 축제와 맞지 않으니 전통예술로만 꾸며 달라는 거다.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 과거에 어느만큼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느냐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재 그러한 창조력을 한국인이 가지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12월에 직접 축제사이트를 보러 오라고 하기에 현대공연은 어떻게 쓰면 좋겠는지를 그때 얘기하자고 그랬다. 현대무용, 재즈트리오 등을 넣은 프로그램을 들고 12월에 가져가서 사이트를 보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오케이 했다.”
국내에 내한한 아비뇽 예술감독이 연극, 무용 등 현대물에 대해서는 흥미 없다는 발언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아비뇽페스티벌 공연은 84년 <울타리굿>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덕수 사물놀이 네 명, 안숙선, 김경숙(판소리), 강태환-김대환-최선배 트리오, 남정호(현대무용), 이혜경(춤), 한무(전통무예, 수벽치기), 강준일, 정치용이 <울타리굿> 기본멤버이다. 여기에 구히서 선생과 내가 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뭔가 하나 제대로 된 걸 보여주자, 해서 문예회관을 빌려서 한 시간짜리 공연을 했다. 아비뇽페스티벌의 공연은 울타리굿의 확장된 형태다.
공연은 아비뇽페스티벌의 두 개 메인스테이지 중 하나인 절벽극장에서 했다. 다른 하나가 교황청 중정이다. 절벽극장은 높이가 40m인 채석장이다. 돌을 파내고 자연스럽게 둥그렇게 생긴 절벽 앞에 900석 가량의 객석이 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에 선물의 나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부채 같은 것들이 매달아 두고 미리 와있는 사람이 기념품으로 따갈 수 있도록 했다. 메인무대 앞뒤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고 절벽 중간에 강태환 선생을 앉혔다. 공연은 아홉시에 시작해서 1시 반에 끝났다.
절벽 중간에 앉아있는 강태환 선생이 연주를 시작하면서 공연이 시작되는데, 음악이 시작되면 비어있던 무대에 국립국악원 단원들이 들어와 앉아서 <수제천>을 시작한다. <수제천>이 끝나면 북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전통무예가 이이지고 현대무용이 나올 때는 김대환 선생이 반주를 한다든지, 그런 식이었다.”
아비뇽이라는 큰 무대에서 프로그래머를 넘어 직접 공연을 연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분화되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획부터 연출까지. 분화되지 않은 시대는 사실은 기본적인 인문학적인 토대 위에 설 수밖에 없다.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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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맥 중의 하나는 교육”
그렇게 다시 10년을 지나고 나서, 다시 한 번의 터닝포인트가 온다. 바로 다움연구회이다. 강준혁의 역할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종종 스튜디오 메타와 다움연구회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튜디오 메타는 몇 년 전 메타기획컨설팅으로 주식회사가 되었다. 2002년부터 메타는 이승훈 등 후배들이 맡고 있다. 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이하 다움연구회)는 사단법인이니까 전혀 성격이 다르다. 다움의 경우 초기에는 주로 교육을 했었다. 98년에 다움의 교육프로그램을 보고 추계예대에서 찾아왔다. 그래서 만든 것이 추계예대의 예술경영대학원이다. 2002년에 심장수술하고 쉬는 바람에 그 쪽은 끝냈다. 2004년 새로 성공회대하고 문화대학원을 만들었다. 교육과 관련된 것은 다움아카데미부터 지금까지 쭉 오고 있는데, 나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맥 중의 하나다.”
“다움연구회는 이승훈 현 메타 대표, 김보성(문화기획가), 박승현(문화기획가)과 같이 이야기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세 명과 일주일에 한 번씩 메타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정리는 추미경(다움연구회 상임이사)이 했다. 내가 일하는 스타일이 그렇다. 나는 꾸준히 오랜 시간 만나고 얘기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 기를 공유하게 되고,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축제를 할 때도 그렇다. 세계평화축전은 42일간 하는 큰 규모의, 엑스포형 축제였는데, 스무 명 정도의 스태프들과 함께 축제의 전반적인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해갔다. 서로가 확실히 공유할 때까지. 그렇게 되면 담당 업무를 그 개념에 맞춰서 자유롭게 해도 된다. 처음에 목표를 공유하지 않으면 일일이 감독, 감시해야 한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다.
오랜 시간 모여 한국적 문화기획, 문화기획자, 한국은 정체성이 있느냐를 끊임없이 이야기 해나가면서 몇 가지 길을 잡은 것이다. 그냥 강의로는 안 되겠다, 실제로 자기 자신이 해볼 수 있는 워크숍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튜터십의 도입이 필요하고, 한국적인 걸 하려면 실제로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등등 그런 밑그림이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왔다. 그러느라 시간이 걸린다. 또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히서, 이건용(작곡가) 등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같이 이야기를 한다. 다움연구회는 그 전통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한 번씩 운영위원회를 계속 하고 있다.”
다움연구회는 2008년 지난 10년간의 작업을 정리한 『다움 10년 다음 10년』을 펴냈다. 연구회의 창립에서부터 10년간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의 집은 우리나라 문화복지 정책 1호”
강준혁의 직함 중에는 문화의집협의회 이사장이 있다. 워낙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지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화의집은 96년에 메타가 신사옥에 들어가면서 했던 작업이다. 문화의집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기본 컨셉을 잡아줄 수 있냐는 의뢰가 왔다. 당시 우리나라 문화정책이라는 것이 예술, 특히 창작 중심이었고, 중앙 중심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문화복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문화의집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때 개발한 것이 프랑스식 문화의집과 미국식 커뮤니티센터의 중간쯤 되는 형태다. 스스로 문화의집에 가서 자기계발도 하고 문화적 활동에 대한 교육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문화복지 정책 1호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교육이나 건강처럼 마땅히 받을 수 있는 문화적 혜택이 뭐가 있느냐 했을 때 그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지역마다 문화의집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매뉴얼을 만들게 된 것이다.
초기에 매뉴얼 만들고, 서대문구 문화의집은 직접 만드는 작업도 했다. 지금은 150개쯤 된다. 지금도 문화의집협회 이사장은 하고 있다. 사람만 있으면 그만두려고 한다.”
나담문화축제, “한국문화의 뿌리찾기이면서 통일을 준비하는”
강준혁은 기획가이자 교육가로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거기에 근래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으니 2008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몽골 나담문화축제이다.
“한국문화의 유목성, 북방문화와의 연결고리를 후배들과 계속 얘기해왔다. 관련된 일을 꼭 하겠다고 이 친구들이 생각하다가 몽골과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몽골에는 활쏘고 말타는 세계적인 스포츠 중심의 나담축제가 7월에 열린다. 몽골예술위원회(국가기관이 아니고 민간기관이다. 미국에서 기금을 대서 만들어졌다.), 몽골국립예술대학교 그리고 메타가 나담축제의 일부를 문화축제로 해보기로 합의하게 되어서 진행하고 있다.”
“축제를 하면서 트리오브컬처(Three of Culture) 미팅을 해오고 있다. 라이사 프쉐치니키오바(Raisa Pshenichnikiova) 동시베리아 아카데미 총장, 체데프 더저(Tsedev Dojoo) 몽골국립예술대학 총장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미팅이다. 브리야트, 몽골, 한국에 대한 문화적 주제를 담론화 하자는 것이다. 브리야트, 동고비사막에 이어서 세 번째인 올해는 한국에서 했다. 이번 주제는 ‘유목민족에서 정주민족으로’였다. 나는 ‘이야기꾼에서 판소리로’를 강의했다.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나담문화축제나 쓰리오브컬처를 하는 것은 유목민적인 기질을 통해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정리하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또 기반이 비슷한 동북아시아의 문화들과 잘 만나두면 통일 됐을 때 서로 좋은 점이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지금 북한 때문에 대륙하고 이어지지 못하지만, 위쪽하고 어떤 일을 하면 통일 후 금방 하나의 문화권이 될 수 있다. 대부분 아시아의 문화라고 하면 인도, 중국, 일본 같은 정주민 문화가 많이 알려져 있다. 유목민문화가 생소할지 모르지만, 이 부분을 이해하면 북방, 아시아 문화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 최고와의 만남
음악청년에서부터 나담문화축제까지 주마간산으로나마 한 기획자의 삶을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마칠 즈음해서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생겼다. 탁월한 국제적 감각이나 해외 예술가들과의 폭넓은 네트워크 등 지레 짐작으로 유학통이거나 장기간의 외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했건만, 그의 삶을 따라오다 보니 도무지 빈틈이 없다.
“해외 체류는 81년에 문예진흥원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3개월씩 유럽과 미국에 갔던 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일 때문에 오갔던 것이다. 국제적 네트워크는 공간사랑에서부터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 등과 같이 일을 하면서, 즉 국제적인 프로그램을 하다가 생긴 것들이다.
그냥 테이스트가 아닐까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항상 많다. 나는 지금 컴퓨터는 쓰지 않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공간 그룹의 이메일시스템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썼다. 당시 컴퓨터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 프로그램 만드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그거 하다가는 다른 거 할 수가 없겠더라. 이메일도 안 쓰지만 컴퓨터의 로직을 알기 때문에 디지털이라든가 사이버에 대해서는 대충은 안다. 세계의 흐름을 보려고 노력한다. 점치듯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인력들도 아주 좋은 인력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되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그런 기회가 많았다. 지나고 나니까 뱀(BAM)의 초기 총장, 넥스트웨이브페스티벌 총감독도 내가 만난 적 있는데, 그때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 몰랐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느냐가 결정적이다. 비교적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기획자건 감독이건, 국제적으로 최고였다.”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문화예술기획경영
문화기획가 강준혁의 이야기는 음악으로 시작되었다. “음악에 빠져서 학교도 지지부진 오래 다녔다”는 그가 예술과 관련된 기획을 하는 후배들에게 항상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예술분야든 깊이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예술가나 창작작업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렇다. 사람마다 정도나 방법은 다르겠지만 일찍이, 깊게 몰입해볼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음악을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음악은 시간 예술이다. 시간을 어떻게 잘라서 순간순간의 관계를 만드느냐에 따라 어떤 경우는 긴장감을 더 끌어당기기도 하고 이완시키기도 한다. 그런 관계를 쭉 이어가는 것이 음악이다. 그걸 잘 이해하면, 축제 흐름에 대한 이해를 훨씬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걸 권한다.”
앞서 그가 말했던, “새로운 것을 하게 하는 힘은 공익성”이라는 말을 상기한다면, 그가 말하는 문화기획이란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 대한 공공적 역할이라 할 것이다. 그는 그 두 개의 축으로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한국문화예술기획경영을 이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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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소연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소위 위원,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연극평론을 쓰고 있다. ‘상업지구 대학로를 다시 생각하다’ ‘이 철없는 아비를 어찌할까’ 등의 비평이 있다. kdoonga@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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