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순례(70) 초대회장은 금산의 역사를 한 줄 올려놓는데 큰일을 해냈다.
금산의 여성들이 대거(大擧) 참석한 가운데 승당 임영신 기념사업회가 2010년 11월 20일에 창립할 수 있도록 기둥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승당 임영신 박사는 금산군의 근대 역사 속에 빛나는 여성으로 한국의 잔 다르크이며 인재 육성이 국력의 근간이 된다는 신념과 철학이 투철했던 교육관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라고 강조했으며 국가관이 투철했다. 방순례 회장은 이러한 임영신 박사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어 금산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인물로 남게 하는 데 노력하였다.
특별한 희생과 봉사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애향심과 열정 속에 노년의 아름다움과 열정으로 가득한 방순례 초대 회장을 만나 본다.
■ 어렵고 험한 고난의 길...
열여덟, 꽃망울이 피기도 전에 백년가약 맺던 날 혼인 잔치의 주인공도 잠시...
정든 고향 엄마 품 떠나는 철없던 아가씨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더니 시어머니 정 붙이기도 전 무섭게 겪어나 가는 시집살이에 남모른 눈물을 흘린 것만 해도 흘러가는 금강 물만 할까?
사주팔자(四柱八字)대로 살아가는 그 시대의 가시밭길을 험난하게 걸어야 했던 그 길을 끝내 걸을 수밖에 없었던 방회장의 험난한 인생의 시작은 파란만장(波瀾萬丈)하였다.
그래서...
여자에서 부인으로,
부인에서 어머니로,
젊은이가 노인으로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이 들어 알게 된 사람 노릇 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방순례 여사의
일생(一生)이 시작된다.
-■ 여자나이 칠순(七旬)
칠순을 맞이한 그녀의 인생...
뒤돌아보니 어느새 한 세월이 다 지나가고 운명(運命)적이었던 희노애락(喜怒哀樂)도 여자라는 일생 속에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가며 살아야만 했었다.
그녀의 인생살이란 고난의 연속 속에서도 인내(忍耐)하며 가장(家長) 아닌 가장(家長)으로 38년간의 험난한 지난날의 시간들을 살아오며 말해야 될게 있고 말 안 해야 될게 있다고 하며 한숨을 내쉰다. 단, 가슴에 움켜 있는 덩어리는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게 본인의 숙명(宿命)이기에 이처럼 한번 앓게 되면 호되게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그때 다짐을 하고 또 하던 그 시절에 오직 하나, 뇌리를 꽉 채웠던 내 소중한 가정(家庭),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一念)의 한 많은 세월도 이제는 나만의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절대적 존재라면 어머니는 당연한 존재라는 그 속에 순리를 잉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식들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보며 헤쳐나갔던 지난날의 그녀는 자존심의 절대적 가치를 높이며 살았다. 이제는 칠순의 나이를 맞이한다.
사는 게 별거 아닌데 왜 그리 아등바등했는지 눈물만 나온다.
어느덧 칠순의 언덕에서 발밑에 피어 있는 할미꽃을 바라보니 자연의 섭리 속에 인생도
저 할미꽃 같겠지...
할미꽃의 모습이 오늘따라 아름답고 한없이 예쁘기만 하다.
■ 인삼요리연구가
방순례 회장은 전남 광주가 고향이다. 어릴 적부터 여섯 자매 속에 자라면서 그중 솜씨가 가장 좋았으며 손으로 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자매들 중 월등히 잘하여 언제나 칭찬을 받으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중에 특히 음식 솜씨는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힘든 일 중의 하나인 식당을 금산에서 운영하면서 그래도 열정과 성실로 연구하여 인삼요리 한정식으로 특별식을 개발했을 때 소문이 나면서 각 지역에서 신문을 보고 먼 길을 달려왔고 귀한 손님들은 거의 방순례 회장의 솜씨를 맛보고 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또한, 금산의 요리 연구가로서 인삼을 주제로 작품 요리를 선보였으며 한국일보. KBS 국악인 김성녀의 주부탐험대 프로에서 인삼요리를 특별히 선을 보이는 등 금산을 알리는데 앞장섰으며 인삼요리로서 금산의 홍보대사 역할을 하였다고 할 만큼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삼정 한정식집은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으며 금산에서는 가장 규모가 있게 이끌어 갔었다. 여러 사정상으로 식당을 놓아야 할 때 후대에게 솜씨를 물려주지 못함이 안타깝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정식을 하면서 방회장만의 전통적인 노하우를 전수 할 기회가 있다면 죽기 전에 가르쳐주고 싶다고 하였다.
■봉사만이 사회 환원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이 독립 유공자로서 국가를 위해 몸 바쳤던 만큼 헛되지 않게 방회장에게도 금산에 살면서 무엇인가 봉사를 하며 사는 것이 보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래서 승당 임영신 기념사업회 창립을 하는데 박희숙 사무국장에게 초대 회장을 권유받고 그 역할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보자 했다고 한다.
금산군에 후학들을 위한 장학 재단에도 참여하여 몇 구좌를 신청하였고 승당 임영신 기념사업회를 창립하는데 앞장서서 먼 훗날에 후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하면서 그렇게 초대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1,500여 년 고찰 보석사에서 13년째 신도회장을 맡으며 지방문화재인 보석사의 낙후되어 있는 부분을 보수하기위해 도비, 군비, 11억 6천만 원을 받아 내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시작한 보수공사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보석사 신도들도 적은 돈이든 큰돈이든 십시일반 돈들을 내어 불사하는데 협조들이 많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신도들의 단합과 화합이 있었기에 이룰 수 있어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70대의 노장에 에너지는 경륜(競輪)과 열정의 봉사를 하고 있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면서 앞만 보고 왔던 탓에 불우한 이웃과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중 더 늙기 전에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고인이 되기도 했지만 방순례 회장을 도와 주웠던 금산의 어르신들에게 더 없는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 금쪽같은 내 새끼들
일만 하는 사업가일 뿐 자식들의 응석을 받아줄 만큼의 인자한 엄마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크게 맘에 걸린다고 한다.
방회장의 두 아들은, 어려서 착하고 공부를 잘하여서 힘들고 어려움에도 신바람이 나면서 하루하루 일들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행복해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밥집 아들 소리를 안 듣게 하기 위해 도시로 보내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며 큰아들이 대학교에 다닐 때 작은아들도 함께 대전으로 학교를 보냈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했던가, 큰아들은 동생과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함께 가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모습이 너무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워 믿고 맡겼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우애가 넘쳐나는 형제로서 칭찬을 받고 부러움을 받곤 했다.
동생은 형의 말을 잘 따르며 서로 아껴주는 아들들에게 마음 한쪽으로 대견해하는 방회장이었다. 현재 큰아들은 가까이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끊임없는 학구파로서 여전히 공부하며 살고 있고 작은 아들은 대학교를 마치고 멀리 해외에서 직장을 다니며 살고 있다. 소중하고 귀한 예쁜 며느리들은 딸처럼 생각되며 너무 착하여 그저 부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살고 있다. 자식들에게 효도를 받으며 칠순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앞으로 가야 할 생로가 이제는 짧은 미래만 남아 있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고인다고 한다.
새삼 젊어서 일만 하느라 자식들을 따뜻하게 제대로 안아 주지 못한 것 같아 언제나 가슴앓이를 한다며 지금은 효자 효부사랑을 흠뻑 받으며 이만큼 살아온 방회장 인생에 금쪽같은 내 새끼들이 정말이지 예쁜 둥지를 틀어줘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이 든다는 방회장의모습은 그래도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감이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