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배금태조 전문이예요 ^ ^
단군대황조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후 4386년 5월 무치생(無恥生)이 동사(同社)의 친구와 자녀를 버리고 망망한 천지에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아무 연고도 없이 압록강을 표연히 건너가니 바로 만주대륙의 흥경(興京) 남계(南界)였다. 파저강(婆楮江)을 거슬러 항도천(恒道川)에 도착하니 산중에 들녘이 펼쳐지고 들 가운데 내가 흘러 별개의 동천(洞天)을 이루었다. 근래에 우리 동포들이 이 곳에 이주해 오는 것이 점차 늘어나니 동지 제현들이 뒤 따라 취거하여 학숙(學塾)을 개설하고 자제들을 교육하니 문명풍조가 이에서 파급함은 실로 흡족한 일이다. 우리 동포의 앞길을 위하여 참으로 축하할 바다.
무릇 이 땅은 우리 선조의 옛 영토이다. 지금 그 여도(輿圖)의 전부를 살펴 고대의 유적을 찾은즉, 백두산은 단군대황조께서 발상(發祥)하신 땅이요, 현도(玄도) 이북의 천여리에 걸치는 고부여국(古扶餘國)은 오늘의 개원현(開原縣)으로 단조(檀祖) 후예의 땅이고, 요동(遼東) 서쪽의 이천리에 걸친 영평부(永平府)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의 경계이고, 서쪽으로 금주(金州) 해안을 경계로 하여 동쪽으로 흑룡강(黑龍江)을 끼고 북으로 개원현(開原縣)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고구려과 발해의 강역으로서 우리 선조대에서 이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시던 정황을 추상해 볼 때, 혹독한 추위와 혹심한 더위와 싸우며 질풍폭우와 싸우며 또는 독충 맹수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방의 강적과 싸워 수천만인의 땀을 뿌리고 수천만인의 피를 흘리면서 자손에게 산업(産業)을 물려주신 게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자손된 이들은 선조의 땀과 피를 이어 나가지 못하고 천여년 동안에 선조의 그 업적을 오랑캐의 것으로 만들고 말았는가? 강의 왼쪽 한모통이에 소조정(小朝廷)의 규모로 구차하게 편안(偏安)을 도모하며 오로지 고식(姑息)만을 일삼아 천여년 동안 그러한 선조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되찾고자 한 이가 없으니, 이로써 볼 때 천년이래의 우리 민족은 모두 선조의 죄인이요 우리의 역사는 타국의 노적(奴籍)이다. 이에 그 선조의 죄인된 것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자칭하여 이르기를 예의지방(禮義之邦)이라 하며, 타국의 노예가 된 것은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이름하여 이르기를 소중화(小中華)라 하니 이른바 예의지방은 선조의 공덕을 기념하지 않는 자의 구실일 뿐이고, 이른바 소중화는 타인의 노예를 스스로 감수하는 자의 휘호(徽號)인 것인가? 오로지 그 유래의 원인이 이러한 까닭에 필경 금일의 현상과 같은 결과가 있게 되었다.
이는 역사에 대한 감념(感念)으로 옛날을 돌이켜 보고 오늘을 살피며 혹은 창산(蒼山)에 해질 무렵 방황하고 머뭇거리거나 또는 여관의 썰렁한 등불 아래에서 비분 통탄하던 끝에 역사의 연상(聯想)으로 지리(地理)의 연구에 이르렀다. 대개 지리는 인물계에 관계되는 영향이 있는 까닭에 심산대택(深山大澤)에는 반드시 용사(龍蛇)가 난다고 한다. 때문에 이 만주(滿洲) 산천에는 옛날부터 영웅 호걸이 출산하는 곳이다.
이러한 만주의 지리에 대하여 대략 보면, 졸본(卒本)과 환도(丸都)는 고구려 동명성왕과 대무신왕과 광개토왕의 발상지이고, 백산(白山)의 동부는 발해의 고왕(高王)과 무왕(武王)과 선왕(宣王)의 발상지이다. 성경(盛京) ㆍ 회령(會寧) ㆍ 흥경(興京)은 요나라의 태조, 금나라의 태조, 청나라의 태조의 발상지이며, 또한 연개소문 양만춘 등이 배출된 곳이다. 이렇듯 하늘이 영웅호걸들을 이 땅에 많이 나오게 하여 사방의 여러 부족을 다스리게끔 한데에는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이를 위해 내가 지리에 대하여 연구한 바가 있다.
백두산은 그 기운이 사뭇 광활한 지역에 서리어 있어 그 높이가 수백리이고 그 넓이는 수천리에 이르고 있다. 또 그 정상에는 큰 연못이 있어 둘레가 팔십여리에 달하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이 된다. 압록은 천리를 흘러 서해에 들어가고 혼동은 육천리의 긴 줄기로 동해에 들어간다. 산을 남북으로 나누어 구분해서 남쪽은 조선팔도가 되고 북쪽은 만주 삼성(三省)이 되니 대간장지(大幹長支)가 서로 엇갈려 만주 대륙을 이루고 있는데, 북으로는 천리의 흥개호(興開湖)가 있고 서로는 칠백리의 평원인 요동들판이 있고 그 외 3강(江) 5하(河)는 산세를 타고 흐르며 무수한 계곡과 무수한 광야는 풍운(風雲)을 품어 내며 영기(靈氣)를 함축하고 있으니 넓고 웅혼한 기운이 인물을 산출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배출된 인물은 용건웅위(勇健雄偉)한 기개와 크고 넓으며 활달한 기량(器量)으로서 웅비할 사상과 사해(四海)를 다스릴 만한 경륜이 있는 것이다. 이는 청년 제군이 지리의 연구를 통해 그 지기(志氣)를 배양하고 그 심흉(心胸)을 개척할 일이다.
또 지리의 연상(聯想)을 통하여 민족의 성질을 연구해 보면, 대개 퉁구스(通古斯) 종족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특별히 우등 민족으로서 알려진 자들이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그 땅이 고원(高原)에 위치하여 풍기(風氣)가 한랭한 고로 그 민족은 하늘과 투쟁하여 인내성이 많고, 그 생활은 온대나 열대지방과 같이 물산(物産)이 풍부하지 못하여 목축과 수렵이 아니면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목축을 주업으로 삼는 관계로 수초(水草)를 따라 옮겨다니다 보니 활동력이 강하고, 또 수렵을 업으로 삼는 관계로 늘 무장단련의 수업을 받아 무사(武事)의 재주를 가졌다. 그리고 의식(衣食)의 원료가 풍족치 못함으로 자연 놀고 먹는 게으른 습성이 없이 근면 역작(力作)의 민족성을 지니게 되니 바로 이러한 점이 이 민족을 세계의 우등민족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결점이 되는 것으로 산세가 고준(高峻)하여 외래의 기운을 접하는 것이 쉽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통력(開通力)이 모자라며, 의식(衣食)을 찾는 데는 분주하여 근검성(勤儉性)은 많으나 문학(文學)의 노력은 부족하여, 현대에 이르러 문명발달이 다른 민족에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무릇 한가지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단점이 있기 마련이니, 천하에 완전한 것이 있기 어렵다. 오호라. 우리 조선족과 만주족(滿洲族)은 모두 다 단군대황조의 자손으로 오랜 옛날에는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기도 했고, 또 서로 통하기도 했는데 필경은 통일이 되지 못하고 분리(分離)되면서 두만(豆滿)과 압록(鴨綠)을 경계로 이루어 양쪽의 인민(人民)이 왕래도 하지 못하고 각기 살은 지가 천여년이 되었다. 이에 따라 풍속이 같지 않게 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남같이 생각하면서 다른 종족처럼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쇄국시대(鎖國時代)에 폐쇄된 정책으로 인하여 서로 넘나드는 것을 법으로 엄히 다스려, 혹 월경(越境)하는 자 있으면 주륙을 행하였는데, 탐관은 이를 이용하여 인민(人民)의 재산을 약탈할 목적으로 잠상(潛商)이라, 또는 범월(犯越)이라는 죄명을 씌워 인민의 피를 두만, 압록강변에 뿌린 지 삼백여년이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어, 우리 동포의 이주가 증가되었고 이에 따라 서북간도(西北間島)와 해룡부(海龍府) 등지에 우리 동포의 촌락이 형성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장래 어떠한 좋은 결과가 있을지 예언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개통(開通)의 영향을 관찰해 볼 때 실로 우연함이 아니다.
이에 역사와 지리와 민족의 관념으로 이리 저리 생각을 해보며, 여하한 방법으로 우리 선조(先祖) 시대의 영예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여하한 방법으로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강산에 무수한 영웅아를 불러낼 수 있을까? 여하한 방법으로 이 민족 성질에 대해 좋은 것은 이용하고 나쁜 것은 개량하여 문명의 정도에 이끌어 나갈 수 있나 하고 궁리했다.
이같은 생각으로 앉으나 서나 밥을 먹거나 쉬거나 간에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하며 5, 6개월이 지났어도 마침내 좋은 방법을 얻지 못했다.
관자(管子)가 이르기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귀신이 통한하고 하니 나도 깊은 생각에 잠기면 혹시 신명(神明)의 지도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하였는데,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니 음력 10월 3일은 우리 단군 대황조(檀君大皇祖)께서 강림하신 기념일이라 일반동지와 학생과 함께 기념식을 행한 후 객지에서 전전하며 대종교(大倧敎)의 신령한 이치를 고요히 생각하다가 홀연히 장자(莊子)의 나비로 변화하여 바람을 부리어 구름을 타고 백두산의 최고 정상에 내려 큰 호수에 이르니 하늘과 바다가 서로 이어져 천상(天上)의 맑은 기운이 깊고 넓게 퍼지고 성월(星月)이 어울려 빛남이 영롱하다. 그런 중에 높이 솟구쳐 빛나는 한 전각(殿閣)이 구름 속에 문득 나타나니 전각의 현판에는 개천홍성제전(開天弘聖帝殿)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전각을 우러러 보고 묵념하면서 “옛날에 대금국(大金國)의 명창(明昌)년간에 백두산 신(神)을 숭봉하여 이르기를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라 하고 묘(廟)를 세웠다더니 이 전각이 바로 그것이구나. 대개 대금국의 태조황제는 우리나라의 평주(平州)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고 그 민족의 역사로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족은 마한족(馬韓族)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金國)의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의 한 작은 부락으로 흥기하여 단숨에 요나라를 멸하고 다시금 북송(北宋)을 취하여 중국 천지의 주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리 국토의 산(産)이요, 우리 민족의 인(人)으로 특별히 천제(天帝)의 비길 바 없는 복록을 받아 더할 수 없는 광영을 나타낸 것이었으니 이는 실로 단군대황조의 음덕과 백두산의 신령스런 도움으로 이룩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구구하고 작은 조선의 땅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여 다른 민족에 땅을 뺏기고 쫓겨나 뿔뿔이 흩어지고 정처없이 떠다니며 천지간에 몸둘 곳을 알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렇듯 번성한 지로부터 팔백년간의 사이에 민족의 몰락함이 어 찌 이토록 극에 다다르도록 되었는가? 푸른 하늘이여, 푸른 하늘이여, 우리 민족만이 이 무슨 일인가”하고 깊은 탄식을 하며 암석 위에 앉아 몰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홀연 구름이 자욱히 피어오르면서 그 속에서 천상(天上)의 관복을 입고 날개옷을 펄럭이며 선관(仙官)이 나타나 불러 말하기를 “대금태조황제(大金太祖皇帝)께서 부르시는 명이 계셨다”하매, 무치생(無恥生)이 크게 놀라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에 선관(仙官)을 따라 개천홍성제전(開天弘聖帝殿)의 동편으로 돌아나가 또 한 전각을 우러러 보니 [기화요초(琪花瑤草) ; 선경(仙境)에 있다고 하는 아름다운 꽃과 풀]는 담을 수놓았고 천구적도(天球赤刀)는 황제의 거처를 비추어 아롱지는데 좌우에 굳센 무사와 정연한 신하가 줄지어 서 있어 위의(威儀)가 맑고 엄숙하였다.
이 때 대금태조황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를 “짐이 지난날 상제(上帝)의 명을 받들어 인간의 부도(不道)를 정벌하고 억조의 생령을 구제하였더니, 또 이 천국에 올라와서는 상제(上帝)의 명으로 중생의 선악을 감찰하여 화복(禍福)의 자루를 맡은지라 상천(上天)은 공평무사하여 착한 것에는 복을 주고 부정한 것에는 화를 줌이 조금도 틀림이 없는데 네가 하늘을 부르며 비탄하고 애원하니 어떠한 포원(抱寃)이 있는가? 숨김없이 모두 말하여라”함에 따라 무치생이 황공하여 엎드려 아뢰었다. “하늘의 도에서는 선(善)에게 복을 주고 음(淫)에는 화를 주는 것을 신(臣)이 우매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선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고 동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큰 것이 무엇이고 악 중에서도 나라를 팔고 동족에 화를 끼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에 신이 보건대 나라에 충성하고 동족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피를 흘리고 뼈를 들판에 내던져 비상한 참화를 당하는데, 나라를 팔고 동족에 화를 끼치는 이들은 모두 황금과 권세가 당당하여 복락을 누리니 이와 같이 천하의 이목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도 화복의 보시(報施)함이 큰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선과 악이 현저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화복의 보시 여하를 알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는 신(臣)이 천도(天道)에 대해 알기 어려운 바입니다.”
황제께서 이를 들으시고 크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평일에 성현의 교훈을 새기며 천하의 의리를 강구하는 자로서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에 대하여 크고 작음을 분별치 못하고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 가볍고 무거움을 깨닫지 못하는가? 천리와 인욕의 대소(大小)로 말하면 천리는 사람의 생명 위에 있는 고상하고 청결한 것이고, 인욕은 사람의 육신 위에 있는 저급하고 불결한 것이다. 사람의 바라는 바는 무릇 고상한 지위와 청결한 것이다. 사람이 능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동족을 사랑하면 이는 천리의 고상 청결한 것을 얻어 신성한 자격으로 만세의 숭배를 받을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만약 나라를 팔고 동족을 화(禍)되게 하면 이는 인욕의 저급 ㆍ 불결한 것을 취하여 만세의 지탄을 받을 것이니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육체와 영혼의 경중(輕重)으로 말하면 사람이 부모의 피를 받아 육체가 되고 조화(造化)의 불가사의함을 받아 영혼이 된 것이라 육체의 생활은 잠시이고 영혼의 존재는 영구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능히 나라에 충성하고 동족을 사랑하면 그 육체의 고초는 잠시요, 그 영혼의 쾌락은 무궁할 것이고, 만약 그 나라를 팔고 동족에게 화를 끼치면 그 육체의 쾌락은 잠시요, 영혼의 고초는 무궁할지니 어찌 천도(天道)의 보시(報施)로써 차이가 있다고 하겠는가?”
무치생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천도가 선에는 복을 주고 음에는 화를 주는 것은 다만 이(理)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까? 사실로 확증될 수가 있습니까?”하자, 황제는 “물(物)이 있은 후에 이(理)가 있는 것이니 사(事)와 이(理)가 본시 하나의 물(物)이라 그 사(事)가 없으면 어찌 그 이(理)가 있겠는가? 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가 깊고 심오한 것이라 사람의 정신력으로 살펴 보지 못할 바가 있고 물(物)의 기계력으로 측량하지 못할 바가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무치생이 “그러면 상제(上帝)께서는 선한 자에게는 영혼의 쾌락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영혼의 고초를 주시는 사실을 가히 들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황제가 “ 천도는 전공(全公)하니 가히 이를 믿지 못할 것이고, 신도(神道)는 전명(全明)하니 가히 이를 행치 못할 것이다. 일체의 사람의 선악을 모두 적흑의 두 장부에 기록해 놓았으니, 적적(赤籍)에 적혀 있는 선한 자들은 쾌락을 주고 흑적(黑籍)의 악한 자들은 고초를 준다”라 답하자 무치생이 말하기를 “그 쾌락과 고초를 주는 실황을 또한 가히 들을 수 있습니까?”하자, 황제는 대답하기를 “적적의 선한 자들은 그 등급에 따라 혹 그 이름을 하늘의 장부에 차례로 써서 상청진인(上淸眞人)의 지위를 얻는 자도 있고 혹은 인간 제상에 윤생(輪生)하여 현지복록(賢智福祿)의 인간이 되는 자도 있다. 흑적의 악한 자도 그 등급에 따라 혹 아비규환의 지옥에 영구히 빠뜨려 칼로 자르고 불로 지지고 방아로 찧고 맷돌에 가는 형벌을 받는 자도 있고 혹은 인간 세상에 윤생하여 충수천악(충獸賤惡)의 물(物)이 되는자도 있다.”고 하였다.
무치생이 말했다.
“천당 ㆍ 지옥에 대한 설은 사람마다 익히 들었으나 모든 인간들은 모두 현재의 영욕만을 알고 장래의 영욕은 알지 못하며 육체의 고락만 알고 영혼의 고락은 알지 못하는 까닭에 선을 행하려는 자가 적고 악을 행하려는 자는 많기 때문에 상제(上帝)의 만능하신 힘으로 선한 자로 하여금 육체의 즐거움이 있게 하고 악한 자로 하여금 육체의 괴로움이 있게 하면 모든 인간들이 모두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릴 것이니 그 조화됨이 더욱 신묘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너의 소견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천도와 신리(神理)는 오로지 진성(眞誠)뿐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진성(眞誠)에서 나와야 하늘의 도움과 신의 도움이 있는 것이다. 진성으로 선을 행하는 자는 영욕과 화복의 관념이 없는 것이므로, 만약 영욕과 화복의 관념으로 선을 행하면 이는 위선(僞善)인지라 하늘이 이를 미워하시고 신(神)이 이를 싫어하게 되니 어찌 영(榮)과 복(福)을 주겠는가?
또 너는 소위 영욕과 화복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생각해 보아라. 일신의 영욕과 화복과 국민의 영욕 화복으로 논하면 어느 것이 더 크고 어느 것이 작으며 어느 것이 무겁거나 가볍겠는가? 그러므로 어진 성품의 지사(志士)는 일신의 오욕을 무릅쓰고 국민의 영화를 얻게 하고, 일신의 고초를 취하여 국민의 복락을 주나 그 국가를 받들어 태산과 같이 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새털같이 가볍게 보고, 그 민중을 이끌어 천당에 오르게 하고자 하는 자라면 자기는 지옥의 고통을 대신 받을 것이다. 짐은 나에게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의사(義士)의 피와 뼈를 더할 것이 없는 최고의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데 어찌 너는 이를 화물(禍物)이라고 말하는가?
짐은 나라를 팔고 동족에게 화를 미치는 노예와 같은 무리들의 재물과 권력을 가장 추악한 오물로 인정하는데 너는 어찌 이를 영행(榮幸)이라고 말하는가? 생각해 보아라. 이 지구상에 그 나라가 문명(文明)하며 부강하고 그 민족이 유쾌하며 안락한 것은 모두 어진 지사(志士)의 피와 뼈로 이룩한 것이 아닌가? 너는 이것을 충분히 꿰뚫어 보지 못하고 다만 하늘을 불러 불평을 호소하니 이는 어린아이의 보는 바이고 또한 인간의 사상을 인도하는 것에 크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에 무치생이 두렵고 송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흐르는 땀이 등을 적시는지라 다시 말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황제가 특별히 온화한 가르침을 내리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 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너희 조선 민족이 종시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스스로 강해지는 방도를 구하지 않으니 현상도 극히 참혹하거니와 다가올 비운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네가 능히 조선 민족을 대신하여 그 사정을 모두 아뢰면 짐이 그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고쳐나갈 방향을 가르쳐 주고 스스로 강해지는 방도를 지시하고자 하니 너는 두려운 마음을 갖지 말고 장황한 것을 기탄하지 말고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들 중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과 혹 연구가 미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고 하였다.
무치생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상제(上帝)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공평하시어 모든 것에 똑같이 어지시니 하늘의 보살핌과 땅의 베품으로 모든 물류(物類)의 나는 것, 뛰는 것, 움직이는 것, 심은 것과 여기에 각색 인종, 즉 황인종, 백인종, 홍인종, 흑인종 등으로 하여금 모두 함께 살게 하고 또 함께 길러지게 하여 서로 눌리거나 피해를 보는 것이 없게 하십니다. 성인(聖人)은 이를 본받아 만물을 일체(一體)로 삼고 사해(四海)를 일가(一家)로 삼아 경계와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께서는 초년에 큰 새가 작은 벌레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크게 슬픔을 발하여 드디어 49년의 고행을 닦으며 설법(說法)을 연마하여 대자대비한 도력(道力)으로써 일체 중생의 모든 업직(業職)을 타파하여 경쟁을 끝마치고 복락을 함께 누리고자 하였습니다. 춘추(春秋) 시대의 화원(華元)은 미병론(미兵論 : 싸움을 그치자는 주장)을 주창하였으며 묵자(墨子)는 비공편(非攻編)을 저술하였으며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싸우기를 좋아하는 자, 최고형(最高刑)에 처한다’고 했으니 이는 모두 어진 군자(君子)의 자애로써 천하의 생민(生民)을 화란(禍亂)에서 구제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세상의 문명이 더욱 진보하고 인간들의 지식이 더욱 발달할수록 경쟁의 기회와 살벌한 상황이 극렬해져 소위 국가 경쟁이니 종교 경쟁이니 또 정치 경쟁이니 민족 경쟁이니 하는 허다한 문제가 첩첩히 생기고 나타나 세계에 전쟁의 역사가 그치지 않음은 물론이요 더욱 더 팽창되어져 백년전의 대전쟁은 지금으로 보면 그저 아이들의 놀음같이 되어 버렸고 10년의 대전쟁은 지금에는 아이들의 연극같이 되고 만 정도입니다. 허다한 사람을 죽여 성을 덮고 들판을 덮을 만한 기구(器具)가 갈수록 정교해져 소위 극로표(克魯표)니 속사포(速射砲)니 모슬총(毛瑟銃)이니 철갑함(鐵甲艦)이니 경기구(輕氣毬)니 하는 각종 기계가 바다와 육지에 진탕하고 하늘과 땅을 뒤흔들어 인민의 피로 시내를 이루고 인민의 뼈로 산을 쌓았는데, 약육강식을 세상의 법칙이라며 우승열패(優勝劣敗)를 천연(天演 : 진화를 뜻함)으로 인식하여 나라를 멸하며 종족을 멸하는 부도불법(不道不法)으로써 정치가의 책략으로 삼으니, 소위 평화재판이니 공법담판(公法談判)이니 하는 문제는 강권자(强勸者)와 우승자(優勝者)의 이용물에 불과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약자와 열자(劣者)는 그 고통을 호소하고 원통함을 펴나갈 곳이 없으니 상제(上帝)의 일시동인(一視同仁)과 성인(聖人)의 만물 일체에 대해 유감이 없기 어려운 바입니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너는 듣지 못했는가? 동양의 학가(學家)는 말하기를 하늘이 낳는 만물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었고 자라는 것은 배양을 하고, 넘어지는 것은 뽑아버리라고 했으며, 서양의 학가는 말하기를 물(物)이 경쟁을 하면 하늘이 택하여 적자(適者)를 생존케 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하늘의 도는 모든 중생을 아울러 낳고 길러 모든 것에 후박함의 구별이 없으니 도덕가는 이를 원본으로 삼아 만물일체의 인(仁)을 발휘하고 추진하여 천하의 경쟁을 그치게 함으로써 구세주의(救世主義)를 삼은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만물을 낳아 모두 함께 길러 서로 피해가 없게 한 것이지만 그 물(物)이 스스로 커나갈 힘이 있는 자는 생존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생존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부모된 자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 어질고 거침의 분별이 없는 고로 생활의 자본을 고르게 나누어주었으나 현명한 자식은 이를 보수하고 증식하여 생활을 스스로 족하게 하되 불초한 자식은 그 가산을 뒤집어엎어 실패하고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에 부모인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한 이유로 말하기를 자라는 것은 키우고 넘어지는 것은 뽑아 버린다고 함이다. 또 만물이 태어나는 데에는 마땅한 장소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 때가 있어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것이 한대지방에 적합하지 못함이 있고, 봄 ㆍ 여름에 자라는 것이 가을 ㆍ 겨울에는 적합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세계 인간들의 생활정도도 역시 그러하여 상고(上古) 시대의 정도로 중고(中古) 시대에 적합하지 못하고, 또 중고시대의 정도로 오늘날의 시대에 적합하지 못한 까닭에 적자(適者)를 생존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시대에 있으면서 구시대의 정도에 머무르고 적의한 방법을 찾지 않는 자는 천지 진화의 예를 거역하여 도태되는 화를 스스로 구하게 되는 것이니 하늘이 이에 어떻게 하겠는가?
대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발로 움직이고 심리로 느끼는 자라면 시대의 광경을 살려 진화의 예를 따름은 자연스런 추세인 것이다. 지금 시대의 광경은 생활정도로 말하면 농업이 진보하여 상공업시대가 되고 나무집이 진보하여 벽돌집의 시대가 되고, 교통정도로 말하면 역참이 진보하여 전신 전화의 시대가 되고, 차제(車制)가 진보하여 철궤시대가 되고, 경쟁정도로 말하면 화살이 진보하여 총포시대가 되고, 선제(船制)가 진보하여 철함시대가 되고, 정치정도로 말하면 전제(專制)시대가 아니고 평등시대이며, 사상정도로 말하면 숭고(崇古)시대가 아니고 구신(求新)시대라, 모든 광경이 이에 적합하지 못하고는 결코 생존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낳을 때 성분과 직분의 권리를 똑같이 부여하였으니 다른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아무도 못할 리가 없다. 하늘이 복을 내리셨다고 해도 만약 사업을 이룩하지 못하면 하늘이 내리신 복을 거절하는 것이다. 3백년 전에 이순신이 철갑군함을 제조하였으니 이때 서양인이 연구하지 못한 것이었고, 3백년전에 허관(許灌)이 석탄을 캐어 쓰는 이익을 설명했는데 이 또한 서양인이 발명하기 전의 일이었다. 이는 황천(皇天)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세계에 웅비할 재료로써 이 몇 사람의 손을 빌려 특별히 지시한 것이었으니 만일 조선 민족이 이순신의 철함 제조를 계속 발전시켜 해군력을 확장하며 허관의 석탄설명을 연구하여 기계력을 발달시켰으면 조선의 국기가 구미제국에 휘날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지만 그러한 사업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 놀기를 좋아하며 술에 취하여 혼몽한 세월을 보내며 줏대없이 떠돌다가 금일 이 지경을 당하였는가? 이는 하늘이 내린 복을 거절하고 도태의 화를 자초함이니 결코 하늘을 원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세상의 이른바 평화재판과 공법담판을 두고 말하더라도 자격이 서로 같은 자라야 시비를 따져 재판하고 담판하는 것이다. 너는 듣지 못하였는가? 한 마리의 소가 사람을 위하여 경작의 일을 다할 뿐 아니라 운송과 수송의 역까지 바치다가 사람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자, 소가 그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저승의 관리에게 호소하니 저승의 관리가 이르기를 짐승의 무리가 인류와 재판하는 권리가 없다고 함에 돌아가고 말았다. 지난날의 조선 정부가 호혜조약을 맺어 서로의 원조에 대한 맹약을 맺었던 나라에 의해 조선병합이 인정됨에 따라 조선 정부가 재판을 청구할 곳이 없었고, 또 조선 인민이 모국(某國)의 군사행로를 위하여 철로 놓는 역을 대신하여 군자(軍資)의 운송을 다했으나, 조선을 병탄한 나라가 오히려 그 나라였으니 조선인민이 또한 재판을 청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자격이 타인과 서로 동등하지 않고는 어떠한 고통과 억울함이 있어도 신원을 호소 할 곳이 없는 것이다.
대저 하늘이 부여하신 영능(靈能)을 닦아 사업을 이룩한 자는 권리를 얻고 그 영능을 닦지 않아 사업을 이룩하지 못한 자는 권리를 잃게 되는데, 그 내려 받은 영능은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금일에 약자(弱者) 열자(劣者)가 되어 권리가 없는 자라도 능히 스스로 강해져 사업의 진취가 있으면 이미 잃어버린 권리를 극복하여 우자(優者) 승자(勝者)의 지위를 얻는 날이 있을지니 어찌 상제(上帝)의 일시동인(一視同仁)과 만물일체(萬物一體)에 대해 유감이 있는가?
이는 짐의 역사로써 족히 증거 할 것이니, 짐의 나라는 동쪽 황막한 지역의 한 모퉁이에 있던 여진(女眞) 부락이었다. 저 요나라의 굴레를 받고 침략을 받음이 심하였는데, 짐의 병력이 정예하여 힘을 북돋고 장수들이 용감하여 뜻이 하나가 됨으로써 2천 5백의 병졸을 일으켜 요나라 70만 무리를 격파하고 나아가 송나라를 격파하여 중국의 판도를 차지하였으니, 이를 하늘이 준 것이라 하지만은 어찌 사람의 힘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무치생이 말하기를 “조선은 4천년 예의의 나라라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모두 중국의 것을 따르며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이 모두 중국풍을 숭상하여 신라와 고려시대에 우리 나라의 인사(人士)가 중국에 들어가 진사(進士)에 급제한 사람도 많고 중국의 명사와 더불어 학문의 이치를 강구하며 문인(文人) 학사(學士)의 이름을 얻은 자도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조선을 군자국(君子國)이라 하고, 또는 소중화(小中華)라 하였고 본조(本朝)에 이르러 더욱 유교를 숭상하여 문화를 발전시켜 풍속은 온아(溫雅)하고 명유(名儒)가 배출하니 임금의 덕을 계도하는 자는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컫고 세상의 교육을 주장하는 자는 중국의 한나라와 당나라의 법이 부족하다고 하고, 학설을 논하는 자는 저 송나라의 4대가의 가르침을 서로 전하며 문장을 드날리는 자는 당송(唐宋) 8대가를 모범으로 삼았으니 이는 세계의 특색인 것입니다. 황천(皇天)이 이러한 것을 버리지 아니하실진대 조선의 문물이 종내 땅에 떨어질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세계 만국이 모두 이교(異敎)를 내세워 괴이한 것을 숭상함으로써 선왕대의 모든 관습과 풍물이 이 땅위에서 사라지는 때에 유독 조선만이 그 명맥을 이어 옛것을 잃지 않았습니다. 금일에 이르러 비록 시세의 영향으로 형식상의 변천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대학(大學)의 장구(章句)를 쉼없이 강송(講誦)하고 있고, 또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는 자가 많으니 이와 같은 충의 민족이 어찌 멸망할 수 있겠습니까? 필경은 이 소중화(小中華)의 정신으로 오랑캐를 물리치고 선왕의 제도를 회복할 날이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짐은 무인이라 본래 학문과는 거리가 있는 중에,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정벌하느라 군사의 일에 바쁘고 바빠 학문을 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 짐의 옛나라는 여진(女眞)이라 백성이 다만 활과 말로써 업을 삼고 수렵을 풍속으로 하여 중국의 문인 문화가 전혀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따라서 유교의 경전과 사기(史記)의 학습이 없었으니 이는 짐의 마음에 걸리는 바이다. 지금 문사(文士)를 상대하니 마음에 위로가 많이 되는구나. 너는 짐을 위하여 평일에 읽은 것의 대강을 들어 한번 외워 보아라.”하고 말씀하셨다.
이에 무치생은 감히 사양하기 어려워 어릴 때 처음 배운 사략(史略)과 통감(通鑑)의 첫편을 가려 외우니 황제가 물어 보셨다.
“그것이 조선의 고대사인가?”
무치생이 대답하여,
“아닙니다. 중국의 고대사입니다.”하니 황제가 다시 물었다.
“나라의 모든 사람이 처음 배우는 교과가 모두 이런 책인가?”
무치생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조선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여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의 조선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처음 배우는 교과가 이러한즉 어릴 때에 벌써 머릿속에 노예정신이 깊게 뿌리 박혀 평생의 학문이 모두 노예의 학문이고 평생사상이 모두 노예의 사상이다. 이와 같이 비열한 사회에 처하여 소위 영웅자가 누구이며 소위 유현자(儒賢者)가 누구이며 소위 충신자가 누구이며 소위 공신자(功臣者)가 누구이며 소위 명류자(名流者)가 누구인가? 필경 노예의 지위일 뿐이다.
이러한 비열한 근성을 뿌리 뽑아 버리지 아니하고는 조선 민족의 자강 자립의 정신이 배태될 까닭이 없기 때문에 빨리 이런 종류의 방법을 개량하여 조선 역사로 하여금 백성의 머리 속에 살아있으면 그 민족이 어떠한 곳에 표류하더라도 조선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래 희망의 결과도 이렇게 해야만 생겨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현상은 고사하고 장래의 희망도 필시 없을 것이니 너는 십분 주의하여 실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하시고, 또 다른 책을 외우라고 하심에 무치생은 소학(小學)을 송독하여,
“새벽에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운운”하고, 대학(大學)을 송독하여
“물(物)을 격(格)한 후에 지(知)에 이르고”하니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소학(小學)을 읽을진대 닭이 울면 일찍 일어나 낯을 씻고 양치질을 한 적이 있었는가? 또 대학(大學)을 읽을진대 능히 천하의 물리(物理)를 깨달아 마음에 지식을 쌓은 적이 있었는가? 네가 과연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실공(實功)이 있을진대 천문(天文) 지리(地理) 각종 동식물의 이(理)를 설명하겠는가? ”하니 무치생이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황제가 “온 나라의 유생이 모두 그러한가?”라고 물으시자 무치생은 “그러합니다.”했다.
그러자 황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소위 유생이란 자는 말만 높고 행동이 따르지 못하여 세상을 속여 이름을 도적질하는 무리로구나. 말로는 충(忠)이요 효(孝)라 하지만 모두 공허할 뿐이고 또 인(仁)이요 의(義)라 하지만 과장될 뿐으로 쓸데없는 말과 겉치레로써 어찌 백성을 구제하고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있겠는가?
오직 그 실상을 버리고, 허위를 숭상하는 까닭에 그 표면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그 내용은 비루한 것이고, 또 그 입은 맑고 시원하나 그 마음바탕은 더럽고 탁하여 진실한 것이 없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진실로 몸을 바쳤던 선조의 후예 또는 집안으로 자처하여 눈으로만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고 학문 재상으로 칭하는 자들이 실상은 모두 나라를 팔아먹는데 공신이 되며, 또한 일반 대중 앞에서 애국주의를 부르짖으며 공익(公益)의 의무를 설명하던 자들이 모두 나라를 팔아먹는데 선구가 되었다.
이는 짐이 지난날 송나라의 정황을 겪어본 바 있었는데, 어찌 조선이 송나라의 병폐를 이어 받아 그러한 해독에 전염되어 이에 이르렀는가? 대저 송나라의 예의와 문물은 중국의 3대 이후에 제일이었고, 성리(性理) 철학은 공맹(孔孟)의 적통을 이어 받은 것이 아니었는가? 이때를 당하여 중국 천지에는 도덕원리를 강론하는 자가 수 천인에 이르렀고, 충효절의를 숭모하는 자와 존화양이주의(尊華攘夷主義)를 제창하는 자, 그리고 우국망신(憂國忘身)의 의기를 스스로 외치는 자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온 백성의 하나 하나가 충신 의사요, 나라의 기초가 태산 반석 같아 보였지마는, 급기야 대금(大金)의 군사가 중원에 들이닥치고 변성(변城)이 함락되는 날에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두 황제가 나의 포로가 되면서 송나라의 모든 땅이 나의 판도에 들어 왔을 때, 송나라의 황제를 위해 절의로 죽은 자는 이약수(李若水) 한 사람 뿐이었다. 저 진증(秦증) ㆍ 왕륜(王倫)과 같은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의 권력에 빌붙어 신하가 됨으로써 벼슬을 얻기를 자청하는 자가 수천이었다. 그들의 지난날의 소위 충신은 오늘에 반신(叛臣)이 되고, 지난날의 소위 의사가 오늘에 역적이 되듯이 순간 순간을 헤아리기 어렵고 되풀이 바뀌어 늘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로지 그 국가는 허식의 문장으로만 채워진 채 태평을 가장하고 소위 사(士)라는 무리들이 말만 앞세움으로써 명예를 도적질하여 진실이 소멸되고 허위의 악풍만이 자라난 때문 아니겠는가?
그 중에도 가장 가소로운 것은 저 중국인들이 중화(中華)의 신성한 지위로 스스로를 존귀하고 크게 하여 외국에 대하기를 이적(夷狄)과 만맥(蠻貊)이라 칭하며 천시하기가 심하고 모욕하기가 이를데 없이 지나쳤지만은, 급기야 저들의 힘이 굴복 당하고 그 세력이 다하게 된 경우를 당하여는 오히려 아첨하는 모습과 비굴한 모양이 사람으로 하여금 가소롭게 하는 것이었다. 짐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켜 요(遼)를 멸함에 저 송나라에서는 즉시 나에게 사신을 보내어 덕(德)을 칭송하면서 ‘해가 뜨는 곳에서 실로 성인(聖人)께서 나셨습니다’라 하였다. 저들이 그 전까지는 우리 나라를 이적(夷狄)이라 욕하며 우리를 짐승처럼 취급하다가 짐의 국세(國勢)가 발흥하고 군사의 힘이 커지는 것을 보고는 성인(聖人)이라는 칭호를 짐에게 바치니 그 가식됨이나, 기만된 아부의 정도가 어떠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저 남송(南宋)과 같은 경우에는, 짐이 남의 나라 종사(宗社)를 끊어 없애는 것이 차마 못할 일인 것 같아 강의 왼쪽 한 모퉁이를 주어 그 임금으로 책봉하여 송제(宋帝)로 삼았더니 그가 신(臣)을 칭하고, 질(侄)을 칭하며 관대한 처분을 바라기에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지내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그 나라의 문자에는 짐의 나라를 이르기를 금나라 놈들이라 표현하면서 우리를 오랑캐라고 욕설을 퍼붓고 있다. 이미 우리의 신하와 질이 된 자들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곧 오랑캐의 신하 또는 질이 됐다는 것을 스스로 보이는 것 아닌가? 결국 이는 문자의 거짓된 기만이고 실제의 사실을 반성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저들 송나라 사람들은 비록 화(華)를 숭배하는 유습의 폐단으로 국가와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 점이 있어도, 그 학문과 문장은 실로 높이 세웠던 특색은 있었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은 다만 이를 맹종할 뿐 스스로의 학문과 문장도 갖추지 못하고 한갖 화(華)를 숭상하는 유습의 폐단으로 더욱 허위만을 키움으로써 국가와 백성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하고 아직도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오로지 중국에 대한 쓸데없는 숭배와 유생의 그릇된 습속만을 고수하려고 하는가?
또 조선의 유생이 주창하는 존화양이(尊華攘夷)는 무엇을 말함인가? 세계 만국의 모든 사람이 모두 자기 나라를 존중함으로써 의리를 삼는 까닭에 중국인은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주장하거니와, 오늘날 조선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즉 중국을 존중하는 것으로 일대 의리로 생각하니 이는 자국의 정신을 소멸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조에 대한 은덕을 말할지라도 조선 사람은 마땅히 그 때에 전국 각처를 유린했던, 그리고 왕릉들의 도굴을 자행했던 왜구에 대해 먼저 보복하고 다음에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 의거가 있는 것이 정당하거늘 명나라를 위해 원수에 보복한다면서 자기들에 관한 불공대천의 원수는 전혀 잊고 말았으니 그 의(義)가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인가? 또한 대개 50년 전부터 일인(日人)이 조선을 침범하였거늘 이를 살피지 않고 오로지 존화(尊華)를 논하였으니 그 어리석음이란 얼마나 심한 것이었나?
그리고 유가(儒家)에서 공자의 춘추(春秋)의 의(義)에 근거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주창하는데, 공자의 춘추의 의로 말하자면 오랑캐가 중국에 들어가면 중국으로 대우하고 중국이 오랑캐가 되면 오랑캐로 대우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니 어찌 그 땅의 내외(內外)로써 존양의 의가 있겠는가? 만일 땅의 내외로써 구별이 있으면 어찌 성인(聖人)의 대공무편주의(大公無偏主義)라 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어느 곳을 정하지 않고 여기 저기로 다니시며 했던 것을 볼지라도 그 넓고 크게 두루 편력하신 마음에는 내외의 구별이 없으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공자의 춘추에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뜻이 있을지라도 공자는 중국 사람이라 그 뜻을 지속함이 오히려 가하다고 하겠으나 동방 해외의 사람으로 그 의(義)를 지니고 있음은 무슨 연유인가? 송나라 때의 유자(儒者)가 자기 나라의 정황을 통분하게 여겨 춘추(春秋)에 의탁하여 존화(尊華)의 설(說)을 더욱 부연하여 자기의 백성들에게 경고를 주고 깨닫게 함은 있을 수 있겠지만, 조선 사람이 송나라의 그런 것을 맹종하는 것은 또한 무슨 연유인가?
또 유림 가운데 가장 비루한 자는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는 공자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나라를 위하여 죽을 의리(義理)는 없다’고 까지 하니 이는 또 무슨 일인가?
지난 40년 전에 천주교도가 조선 정부로부터 학살을 당하게 됨에 따라 이에 독일 정부에 대해 군대를 보내 줄 것을 애걸하였는데, 그 때가 마침 보불전쟁(普佛戰爭 ; 독일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날 때라 독일이 원정을 할 수 없었던 고로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존화양이의 義(의)를 고집할진대, 만일 한 나라의 군사나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 ㆍ 이세적(李世勣) 등이 다시 쳐들어오면 앞장서서 그들의 향도가 되어 그 군사를 환영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조선은 선비의 주장으로 이끌어지는 나라인지라 사림(士林)의 영수로 국인의 태두가 된 자가 존화의 의리를 주창하는 힘으로 애국의 의리를 주창하였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다만 중국인의 문자에 심취하여 실제를 강구치 못하였을 따름이다.
대저 도덕의 범위로 말하면 타고난 천부의 성(性)은 세계가 모두 일반이고 그 정치 교화의 뜻도 대략 서로 같으나 지리와 풍속의 관계에 따라 이곳에 적합한 것이 저곳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으며 저곳에 적합한 것이 이곳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는 법이다. 따라서 정치계와 교화계(敎化界)에서 다른 나라의 문물을 수입하여 자기 나라의 정치계와 교화계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은 이로운 일이지만, 적합하지 않은 것은 취하지 않을 것이고, 또 좋은 것과 앞선 것을 취하고 그 좋지 못한 것과 뒤진 것은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문화가 자기 나라에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전혀 따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문화의 좋은 것과 나쁜 것, 앞선 것과 뒤진 것을 가려내지도 못한 채 중국의 땅에서 난 것이라 하면 모두를 선망하고 부러워만 할 뿐이니 이는 노예근성의 표본인 것이다.
만약 시부(詩賦)로 인재를 뽑는 제도를 말할 것 같으면, 이는 중국의 수나라에서 양광(楊廣)이 창설한 것으로 본래 중국의 제왕(帝王)이 천하의 인재를 소멸할 야심으로 시행했던 것인데, 조선에서 이를 본받아 시행함으로써 인재를 소멸하게 한 것이 8백여년에 이른 것은 무슨 연고인가?”
그러자 무치생이 말하기를
“시(詩)의 어떤 것은 인간의 심지(心志)에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하며 풍속을 훈도 하는데 가장 효력이 뛰어난 것이라 3백편은 숭상하고 있으며, 당(唐)과 송(宋)시대의 시가 가장 성하였던 때문에 신(臣)은 어릴 때부터 심히 좋아하였습니다.”라고 하자, 황제께서
“그러면 네가 당 ㆍ 송시대의 명가(名家)의 가작(佳作)을 선택하여 시험삼아 한편을 암송해 보아라”하셨다.
이에 무치생은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와 소식(蘇軾)의 독락원(獨樂園)의 시를 외워 ‘백년 3만 6천 일에 걸쳐 날마다 술을 기울이기 3백잔(백년삼만육천일 일일구경삼백배(百年三萬六千日 一日須傾三百盃))’라 하며 ‘한단지의 술로 봄날을 즐기고, 바둑을 두며 긴 여름을 보낸다(준주락여춘 기국소장하(樽酒樂餘春 棋局消長夏))’라 하니 황제께서 이를 들으시고 한탄하시면서 물으셨다.
“이것도 조선의 아동들이 학습하는 시가(詩歌)인가?”
무치생은 “그러합니다”라고 하자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 슬프구나. 이는 백성의 생명을 앗고, 그를 슬퍼하여 상여가 나갈 때에 부르는 노래 소리 같구나. 인간의 신체는 근로를 함으로써 건강하게 되고 인간의 심지(心志)도 근로를 함으로써 단련되고 또한 인간의 지식도 근로를 함으로써 더욱 발달하는 것이다. 뿐 아니라 인간의 생산이 풍족하게 되는 것, 인간의 사업이 발달하게 되는 것, 인간의 복록(福祿)에 이르는 것도 모두 근로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하는 인간은 하늘이 사랑하시고 신이 도우시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근로를 하지 않는다면 신체가 피폐하고 연약해져서 반드시 질병이 생기고, 또 심지(心志)가 흩어져 신기(神氣)가 왕성하지 못하며, 지식이 폐쇄되어 지혜가 신령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생산이 적어져 반드시 굶주림과 추위가 다가오고 사업이 퇴폐하고 위축하여 날로 소멸될 뿐이며 복록(福祿) 또한 멀어져 재앙과 환난이 일어날 것이니, 이러한 이유로 민족의 흥하고 망함은 오로지 근로와 태만으로 판단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스러운 것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떠한 직무가 있으며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
옛 성현이 이르기를 우주(宇宙)간의 일이 모두 직분내의 일이요, 직분내의 일이 모두 우주간의 일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대우(大禹)가 촌음을 아꼈던 것과 문왕(文王)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던 것과 또 주공(周公)이 잠잘 틈도 없이 일했던 것은 모두 그 직무를 폐하지 않고 그 책임을 버리지 않으려 함이었다.
개인의 생활이며 사회의 직분이며 국가의 사업이며 하루의 책임과 10년의 설계와 백년의 현재와 만세(萬世)의 장래에 대해 모두 그 담당한 것과 목적한 것으로써 진행하여 성취하고자 하면 낮에 행한 바를 밤에 생각하며 밤에 생각한 바를 낮에 행하여 일시 일각의 순간이라도 게을리 하지 말 것이며 용납하지 않아야 된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은지라 나를 위하여 연기되지 않는 것으로서 어찌하여 술 마시며 소일하거나 바둑을 두며 여름을 보내는 방탕한 행위로써 백성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겠는가? 지금 어린 아이 들에게 술 마시며 백년을 보내고 바둑 두며 긴 여름을 소모하는 시가(詩歌)을 이어주니 이는 민족을 멸망케 하는 방법이 아닌가?
짐이 이에 대하여 또한 실험을 해 본 경험이 있으니 너를 위하여 말해 보기로 한다.
짐의 가법(家法)은 선조(先祖)이래로 자연적인 도덕을 근본으로 하여 순박하고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음으로써 천지의 이치에 부합되고 인심에 근본 바탕을 두고 있으니, 이로써 우리 민족은 진실하고 근면하여 그 의복은 대마(大麻)의 실과 여우 이리의 가죽으로 되어 있어 비단 옷의 화려한 장식이 없고, 음식은 새나 짐승의 살과 잡곡이라 기름이 도는 맛있는 음식이 없으며 경작하고 목축하는 업으로 하루도 쉬지 않으니 도박을 할 겨를이 어찌 있겠으며 말을 달려 활을 쏘고 사냥하는 일로 사람마다 다투어 근면하니 노는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그러므로 체력이 강건하고 지기(志氣)가 활발하여 맹렬히 진전하는 용기와 강건하게 싸우는 힘이 곰과 같고 호랑이와 같아 세계에서 그 어느 종족도 필적할 수 없는 강한 민족이 되었다. 저 중국에서처럼 비단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술로써 생애를 보내고 풍류를 즐겨 강호풍월(江湖風月)에 시부(詩賦)를 읊조리며 세월을 보내거나, 또는 원림(園林)의 놀이터에서 잔치가 한창인 민족이 어찌 승부를 겨루겠는가? 나는 근로하고 저들은 태만하며, 나는 무강(武强)하고 저들은 문약(文弱)하며, 나는 진실하고 저들은 허위이니 지극히 공평하신 천심(天心)이 누구를 돕겠는가?
응당 근로하는 자와 무강(武强)한 자, 진실한 자를 도우실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민족도 태만과 문약(文弱)과 허위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으로부터 유린을 당했거늘, 하물며 조선은 소수의 민족으로서 태만하며 문약하며 허위적이니 그 위기와 패망이 아주 극도에 달한 것인데, 지금처럼 민족경쟁이 지극히 참혹하고 극렬한 상황에서야 생존의 행복을 바랄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조선 민족은 종전의 태만과 문약과 허위의 병을 뿌리 채 뽑아버리지 않으면 실로 다시 살아나기 어려울 것이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너는 깊이 살피고 깨달아 동포를 경고하고 깨우치도록 해라.”
이에 무치생은 “저 서양 여러 나라를 보면 수백리의 토지와 수백만의 인구로 나라의 독립을 보존하고 인권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은 3천리의 토지와 2천만의 인구가 있으니 역시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는데 지금 마침내 이 지경에 떨어진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고 물었다.
황제가 말씀하셨다.
“슬프구나. 너희 민족이 이르기를 2천만이라고는 하나 칼을 잡고 총을 들어 몸바쳐 적을 방어하는 자는 매우 적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냐? 세계 여러 나라에는 국민이 되어 병역의 의무를 짊어지지 않은 자가 없는지라 동방의 고대사(古代史)를 통해 보더라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다른 나라와 전쟁이 일어나면 창을 쥐고 기를 멘 선비가 출전하여 한 사람도 병역을 피하지 않았었다. 또 현재 세계 각국의 제도를 보더라도 제왕(帝王)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병학(兵學)을 배워 터득하고, 귀족과 평민은 군인 경력이 없으면 인격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조선은 벼슬하는 족속과 유생들, 그리고 향반(鄕班)의 족속, 이서(吏胥)의 족속이 모두 병역을 짊어지지 않고 또한 귀족집의 아랫 사람들과 노예는 국가의 병역보다는 집주인의 사역을 맡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보건대 벼슬하는 족속도 국민이 아니요, 유생 ㆍ 향반 그리고 이서의 족속, 귀족가의 아랫 사람들과 노예가 모두 국민이 아닌즉 2천만의 인구 중에서 국민의 의무를 짊어진 자는 몇사람이겠는가? 국민의 의무를 짊어진 자는 군적(軍籍)에 올려져 있는 백성뿐인데, 이들은 극심한 천대와 극심한 학정을 받음으로써 시달리고 있다. 이들이 내는 군포(軍布)는 왕실의 경비로 쓰이고 관리의 녹봉(祿俸)도 되고 이서의 급료로도 되는 까닭에 군적(軍籍)에 기재되어 있는 백성은 비록 갓난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군포를 내고,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사람도 군포를 바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어린이와 백골이 된 사람이 군포를 안내면 그 친족으로부터 징수하거나 그 동네 사람에게 떠맡겨 내도록 했으니 세계의 그 어느 나라 가운데 이처럼 불평등하고 이렇게 불법적인 학정이 일찍이 있었겠느냐?
5백년 이래 이러한 불평등에 대해 개량하고자 한 정치가가 한 사람도 없었던 이 나라에 하루 아침에 사변이 생겼을 때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킬 일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 것인가? 마침내 정치의 기초도 모르며 시무(時務)도 알지 못하는 썩은 유생들의 무리가 국민에게 오로지 충(忠)과 효(孝)만 들추어 교화하면서 윗사람을 받들고 또 윗사람을 위하여 죽을 것을 강요하기나 하고, 심지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말하기를 총과 대포의 위력이 화살에 미치치 못하는 것이라고 떠들고 있으니 이러한 생각이나 행동으로 어찌 적을 무찌르고 닥쳐올 재앙을 면할 수 있겠는가?
또 국민의 정신에 대해 말해 보면, 귀족들은 오로지 정권에만 눈이 어두워 백성의 생활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백성의 피로써 자신의 집안만 살찌고 기름지게 하려는 정신만 있다. 소위 유학파(儒學派)들은 제각기 예설(禮設)과 학설(學說)의 같고 다름에 따라 다투거나 또는 저마다 문호를 세워 명예만을 쟁취할 정신 뿐이니 일반 평민은 그같은 관리의 학정속에서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혹 자제 중에 총명하고 영준한 사람이 있으면 시(詩) ㆍ 부(賦) ㆍ 기(技)로 관리가 될 것을 도모하고 권세가와 귀족들에 기대어 자신의 가문을 보존하려는 정신 뿐이니 어찌 국가를 위하여 그 의무를 이행하려는 정신이 싹틀 수 있겠는가?
이로써 보건대 2천만 인구중에 국민 정신을 가진 자가 진실로 몇이나 되겠는가? 이는 조선의 2천만 민중이 서양의 작은 나라의 수백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지금 개인의 가정으로 말할지라도, 한 집안은 그 자제가 세네 명에 불과하나 이 자제가 모두 기술과 재능을 갖추고 직업에 근면하여 그 가업을 번창하게 하는데 비해 다른 한 집은 그 자제가 팔구 명이나 되지만 모두 기술도 없고 직업에도 힘쓰지 않아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먹기만 한다면, 이 집안의 생활은 놀고먹는 사람 때문에 생활이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니, 비록 형제가 팔구 명이 된다고는 하더라도 저 형제가 세네 명이 있는 집안에 미치지 못함은 명료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조선의 2천만 민중이 모두 그 국민의 의무와 국민의 정신으로 기능과 직업을 닦아 나가야 독립의 자격과 자유의 능력이 생겨 이 인종경쟁의 시대에 도태되는 화를 면하고 생존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무치생은 다시 묻기를
“각국의 역사를 살펴 볼 때, 태평시대가 오래 계속되면 정치는 부패할지라도 인구는 증가되는데, 우리나라는 태평 3백년에 호구(戶口)의 수와 논과 밭의 면적이 해마다 줄어 들고 있습니다. 모든 고을과 촌락이 쓸쓸하게 되어 가고, 철로가에서 산과 들을 바라보면 삼림은 마치 아이들 머리깍은 것과 같이 벌거숭이가 되었고 사람의 자취는 황량하여 차라리 황무지의 광경과 다름이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에서입니까?"하자, 황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도 정치가 불량한 결과이다. 정치가 발달한 나라는 그 백성의 납세가 많고 적음에 따라 권리의 우열을 정하기 때문에 납세를 하지 않는 자는 국민의 자격도 잃게 되는데,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기준과는 전혀 달리 다만 충신의 후예이니 효자 열녀의 가문이니 하는 명목으로 국세를 탈세하는 것이 권세있는 집안으로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이러한 이유로 호구(戶口)의 수와 논밭의 총수가 해마다 줄어드는 것이다.
정치가 잘되는 나라는 관리되는 자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마련인데, 조선의 관리라는 자는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고 약탈하기에만 전력을 쏟으니 그 백성이 자연 생활의 곤란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하여 기름진 옥토를 버리고 산 속으로 숨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 새나 짐승과 같이 생활하게 되는데, 이들은 산천의 독으로 나쁜 병에 걸려 죽는 경우도 많고, 또 가뭄이 한번 들면 굶주려 죽는 경우도 많아 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뿐 아니라 법률이 밝지 못하여 불법적이거나 포악한 형벌에 당하여 원통하게 죽는 사람도 많으며, 제대로 방역을 시행하지 않는 관계로 한번 질병이 유행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 가기도 한다. 그리고 조혼의 풍속이라는 것이 기질(氣質)이 부족한 사람을 일찍 죽게하는 것도 적지 않으니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인구를 감소케 하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른 민족의 강한 힘에 눌리게 되어 산업의 기지를 차례로 빼앗겨 불과 수십년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으니 그 참상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서 떠돌아 다니는 조선 사람들은 그들을 이끌어갈 지도자도 없으니 스스로 살 능력이 없으면 다른 민족의 학대가 혹 없다고 하더라도 산업의 권리에 억눌리고 지식의 힘에 억눌리어 물이 맑고 땅이 기름진 좋은 곳에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음달진 산비탈 차가운 산 속의 좋지 못한 땅에서 거주하게 되니, 산업이 증식하지 못하고 질병이 많이 생겨 인구의 감소를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조선 민족이라는 이름은 세계 역사에서 보존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니 어찌 심히 슬프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너는 이러한 뜻을 일반 동포에게 지성으로 권고하고 눈물로 간곡히 설명하여라. 그리하여 아침이면 아침마다 저녁이면 저녁마다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고 발분 하여 농사, 목축 등 산업에 충실하도록 하고, 혹 술을 함부로 마시거나 혹 노름의 잡기에 빠지거나 혹 태만과 유랑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여 수년 동안 근면하고 힘써 일한 보람으로 산업이 번성하여 좋은 땅 즐거운 곳에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자연 질병이 생기지 않아 자손이 번창하게 될 것이고 또한 옛 성현의 교훈과 훌륭한 선비의 올바른 가르침에 쫓아 자제들을 교육하면 지식이 열리어 나갈 것이며 품행이 훌륭하게 되어 다른 민족으로부터 우대를 받을 뿐 아니라 하늘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치생은 다시 묻기를
“현 시대의 각 민족이 그 지식과 세력의 우열로써 생존과 자멸의 기준을 삼고 있는데, 세력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고 또 지식은 학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까닭에 교육이 발달한 민족은 생존하게 되고, 교육이 쇠퇴한 민족은 멸망하게 된다는 것은 귀가 있는 자면 모두 듣는 것이요, 눈이 있는 자는 모두 보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지식을 접하기 어려운 외진 산골이나 또는 궁핍한 처지에서 태어나 농사나 짓고 짐승을 키우며 사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문자에 대한 배움이 전혀 없고 자기가 사는 시골 골목조차 벗어나 본적이 없어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또 민족경쟁의 풍조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여 깨닫는 느낌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새 시대의 교육문제에 대하여 처음 듣고 처음 보는지라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고 또 그 효력이 어떠한가를 알기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어릴 때부터 경사(經史)를 읽어 고금을 대략 이해하고 있는 유림(儒林)들의 경우는 세계 대세의 변천된 정황을 목격한 바도 있으며, 서적과 각 신문 잡지를 통해 신사상의 여러 면모를 접할 수 있었고, 또 그러한 관계로 세계 각국이 새로운 학술의 발명과 신교육의 발달로 문명이 부강하게 된 것을 깨닫고 있는 자들인데도, 이들은 이러한 신 교육과 신학술을 반대하고 방해함으로써 일반 백성으로 하여금 이를 깨닫게 하여 개명(開明)하게 하지 않고 우매하거나 무지하게 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입니까”하자, 황제가 대답하였다.
“이는 곧 개혁시대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왜냐하면 개혁시대에는 하등사회가 상등사회로 나아가 평등사회를 조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치는 바로 천지가 진화하는 모습으로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저 유생의 무리들은 지나간 시대에 상등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들로서, 만약 신시대가 도래하여 신 학술과 신교육의 지식으로 유신사업을 이룩하게 되면 그들의 고등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니 고등의 권리가 저들의 손에 있는 상태에서 하등 사회가 진보할 방면이 없는 것이고 그러한 까닭에 어찌 평등사회가 조성된 신시대가 오겠는가?
그러므로 오늘날에 이르러 ‘양반’이나 ‘유생’이라는 두 글자가 뇌리 속에 박혀 있는 자는 모두 신사상과 신지식이 들어가지 않으니 이는 하늘이 그 혼을 빼앗아 열등한 인류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무치생은 다시 묻기를,
“개혁시대에 천지간의 진화는 그와 같거니와 현재 하등사회의 동포로 말하자면 문자에 대한 학식마저 전혀 없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이를 알리고 가르쳐주어 상등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하자, 황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등사회를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상등사회를 깨우치게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것은 왜그런가 하면은 사람의 이목은 본래 총명하지만 다른 물체가 사람의 이목을 가리고 막으면 그 총명을 잃게 되는 것이고, 사람의 뇌는 본래 그 영험이 불가사의한 것이지만 오랜 습관이 뇌에 박히게 되면 그 불가사의한 영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각국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본래 구문화의 습속이 깊은 나라에서는 신문화의 발달이 더욱 더디게 되고, 구문화의 습속이 옅은 나라에서는 신문화의 발달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4천년 구문명을 간직한 조선이 오늘날의 신시대를 맞이하여 신문명 발달에 있어서는 구시대에 미개했던 저들 섬나라의 신문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구학문의 습속이 전혀 없는 자는 머리속에 인간 본래의 영험이 남아 있어 신문화를 끌어넣기가 어렵지 않은데, 구학문의 습속이 머리에 꽉 찬 자는 신문화를 대하는데 그 저항력이 강하게 마련이고, 또 고등 지위에 처한 까닭에 자현자족(自賢自足)의 습성이 몸에 배어 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신문화를 수용케 할려고 하여도 그 사상을 바꾸기가 어렵다. 이에 비해 구문화의 습성이 없는 자는 하등 사회에 처한 까닭에 자현자족의 습성이 없어 신문화의 권고를 쉽게 받아 들인다.
하물며 오늘날은 세계의 큰 기운이 평등주의로 기우는 시대이라 하등 사회를 끌어 올려 상등 사회로 나아가게 함은 천지간의 이치인 진화 발전에 순종함이니 이에 노력하는 것은 또한 자연스런 추세인 것이다.
옛날에 모세가 무지하고 완만하며 모진 유태 민족을 이끌고 사막을 방황한지 40년만에 가나안 복지로 인도한 일이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 대동 민족은 단군의 신성한 후예로서 이들을 지도하여 장래 평등세계의 새로운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느냐? 하늘이 우리 대동민족의 생명을 끊고자 하심이 아닌즉 제3의 모세와 같은 사업을 이룩할 자가 어찌 없겠느냐?”
무치생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 조선에서의 상류사회를 말할 것 같으면, 나라를 팔아 한몸의 영화를 구하는 도적같은 무리를 제외한 그외의 대부분의 소위 상류사회의 인사는 모세와 같이 동포를 구제하는 사업에는 전혀 뜻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몸만을 결백하게 하여 스스로 지킨다는 뜻으로 세상을 떠나 깊이 숨어서 옛날 중국의 백이(伯夷) ㆍ 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어 먹던 것을 이상으로 섬겨 이같이 처신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에 황제는
“아! 후세의 사람이 옛 성현의 깊은 뜻을 진실로 알지 못함으로서 그릇됨이 왕왕 이와 같이 되는구나.
백이 ㆍ 숙제가 주나라의 고사리를 캐어 먹은 것은 몸을 결백하게 하고자 함이 아니고 곧 세상을 구하려 함이었다. 왜냐하면 백이와 숙제는 성스럽고도 맑은 사람으로 그 나라를 사양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의 무왕(武王)이 정벌하게 되는 것을 보니 평화스럽던 옛시대의 아름다운 풍속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또 이에 따라 천하의 사람들이 제왕(帝王)의 권력에 의해 정벌된 일이 있었으니 백이와 숙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 몸을 스스로 궁핍하고 허기진 상황으로 던져 그 마음을 천하만세에 밝게 드러냈던 것으로 이는 얼마나 큰 역량에서였는가?
그러한 때문에 성인(聖人)이요, 혹은 인인(仁人)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만으로 궁핍과 허기진 상황에 몸을 던져 죽었더라면 다만 일개 절개를 지킨 선비에 불과할 뿐 어찌 성인이니 인인이니 하고 부르겠는가? 백이 ㆍ 숙제는 원래 요동(遼東)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계죽국(季竹國)의 사람으로서 은나라의 녹을 먹은 바가 없었으니 은나라를 위해 신하의 절의를 지킬 의리가 없고 또 주의 문왕(文王)을 가서 만난 적도 있으니 은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다만 주의 무왕(武王)의 정벌에 대하여 반항심이 일어나 고사리를 캐어먹다 굶어 죽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 시가에 이르기를 ‘신농씨와 요순이 홀연히 떠났도다. 나는 어디로 가서 귀의할까.(신농우하 홀언몰혜 안아적귀의(神農虞夏 忽焉沒兮 我安適歸矣))’ 했으니 이는 평화스럽던 신농씨 시대가 이미 멀어졌으니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은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지키려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은나라가 이미 망해 버렸구나. 나는 어디로 가서 귀의할까’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의 구세주의(救世主義)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후세에 절의를 찾는 선비가 허망스럽게 고사리 캐는 것을 절의로 받아들이고 있음은 마치 주먹만한 돌멩이를 태산(泰山)과 같이 큰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하면서 탄식했다.
이에 무치생은 “은나라가 망하여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조선에 오신 것이 어찌 스스로 편안 하려는 뜻이 아니겠으며, 주나라가 쇠퇴하게 되자 공자(孔子)께서 구이(九夷)에서 살고자 하셨음은 어찌 불행한 시대에 대한 한탄으로 멀리 떠나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황제는 다시 탄식하면서 말했다.
“탄식할 일이다. 조선 사람이 대대로 기자(箕子)를 숭봉하고 있으나 기자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또 사람마다 공자의 글을 읽었으되 공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닌가?
기자(箕子)께서 은나라의 주왕(紂王)으로부터 구속을 받다가 주의 무왕(武王)에 의해 석방이 되었는데, 이 때는 이미 6백년의 종사(宗社)가 이미 폐허가 된지라 사방을 살펴보아도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점(占)을 쳐서 갈 곳을 결정해 보니, 점괘에 ‘이(夷)를 밝히라’고 나옴에 기자께서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해외에 있는 이족(夷族)을 문명(文明)하게 하시려는 것이라’ 하고 은나라의 유민 5천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갔는데, 이때 시(詩) ㆍ 서(書) ㆍ 예(禮) ㆍ 악(樂) ㆍ 무(巫) ㆍ 의(醫) ㆍ 백공(百工)이 따라 나왔으니 그 사상이 어떠한 것이겠는가? 마침 그 때 단군 자손의 따뜻한 배려로 생활의 터전을 얻으니 기자께서는 올바른 정치를 시행하며 백성들을 선도함으로써 자손의 번창함이 남쪽으로는 열수(열水: 한강의 옛 명칭)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영평(永平)에 이르러 모두 그 판도에 들어갔었다. 옛날 은이나 주가 번성했을 때 그 땅이 천리에 미치지 못했거늘 기씨조선(箕氏朝蘚)은 4천여리에 이르렀으니 해동(海東)의 새로운 은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기자의 사상이 스스로의 편안함만을 찾고자 할 것이라 할 수 있는가?
또 공자께서 요(堯) 순(舜) 왕의 도(道)로써 천하를 바꾸어 보고자 할 때 열국(列國)을 두루 다니며 앉아 쉴 틈도 없었으나 이때는 주나라의 말기라 문물의 모든 것이 피폐하여 순박한 풍속이 쇠퇴하고 교활하고 속이는 습속만이 성한지라 열국의 정치가들은 사사로운 권력을 탐애 하여 성인(聖人)의 지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가는 곳마다 뜻과 달라 도(道)가 행해질 수 없었다. 이때 공자께서는 생각하시길 ‘해외에 있는 이인(夷人)은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하며 그 마음이 질박하여 문물이 피폐되고 거짓됨이 없으므로 인의(仁義)의 가르침을 펴는데 적합할 것이리라. 또한 이는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나간 까닭일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세상을 구하려는 진실 된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내외(內外)를 가림이 없이 광대하고 두루 걸쳤음이 이와 같거늘 후세의 유자(儒者)라는 자들이 스스로 얕은 식견으로 그릇되게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는 병든 시대의 탄식이라, 멀리 떠나려 함이라’고 하니 성인(聖人)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니 어찌 때를 근심하여 멀리 가버리려고 하겠는가?”
무치생이 물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러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멀리 은둔하려고 하는 것은 가히 의지할만한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황제가 답하기를
“오늘날의 의(義)는 조선의 백성이 되어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의무를 다하는 것 뿐이다. 단지 몸을 지켜 스스로의 편안을 구하는 것을 본분의 천직으로 삼는 자는 그 죄가 매국노와 차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하의 일이란 이(利)가 되는 일이 아니면 반드시 해(害)가 되고 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면 반드시 손실이 되는 것이니 내가 남에게 이롭게 한 바가 없으면 반드시 해롭게 한 바가 있고, 내가 남에게 보탬을 준 바가 없으면 반드시 손실을 끼치는 것이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손실을 끼치게 되면 결코 선(善)이 되지 못하고 악(惡)이 될 것이다. 만약 그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도움을 준 바가 없고 보탬을 준 바가 없으면 어찌 해롭게 한 바가 없으며 손실을 끼친 바가 없겠는가? 필시 국가와 민족을 좀먹는 자나 그 뿌리를 갉아 먹는 자로서, 도박과 음주로 가산을 탕진하여 부모를 춥고 배고프게 한 사람과 집안 일은 돌보지 않고 자신만 호의호식함으로써 부모를 춥고 배고프게 한 사람은 그 불효에 있어서 서로 같은 것이다. 또한 황금에만 눈이 어두워 높은 지위를 좋아하며 그 나라를 팔아 먹은 자와 그 몸을 아끼고 자신의 이름만을 중히 여겨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그 불충(不忠)에 있어서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든 동족에게 화를 끼치든 헤아리지 않고 탐욕만을 일삼아 부귀를 도둑질하는 자와 나라가 망하든 동족이 멸망해 가든 상관치 않고 오로지 청류(淸流)에 의지하는 것으로 명예를 도둑질하는 자는 그 도둑질에 있어서 서로 같은 것이 아닌가?
저승의 천국에서는 죽은 자의 죄악을 조사하여 다스리고 있는데, 한 관리가 죽어 와서 변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정말 아무 죄도 없습니다. 나는 관직에 있으면서 아주 청렴하였습니다.”하자, 이에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를 뜰에 세우면 냉수조차 마시지 않으니 그대보다 훌륭하지 않은가? 청렴을 유지한 외에는 단 하나의 착한 일을 했다는 소문이 없으니 이것이 그대의 죄이니라”하고는 드디어 불에 달군 쇠판 위를 걷게 하는 혹형을 내렸다.
이러한즉 조선의 국민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가 그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의무를 다함이 없이 표연히 멀리 사라져 홀로 그 몸만을 깨끗이 하고자 하여도 역시 저승의 법률에 따라 앞서와 같은 혹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무릇 도덕은 공덕(公德)과 사덕(私德)의 구별이 있고 사업은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의 구별이 있는 것인데 도덕과 사업의 정도도 시대의 진화를 쫓아 증진하게 되는 것이니, 옛날에는 이웃 나라가 서로 마주 바라보아 개나 닭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려도 왕래하지 않던 시대인지라 사람들은 저마다 사덕(私德)을 닦아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사덕(私德)을 도모하여 집안을 홀로 화목하게 하여도 나라간의 편안함이 충분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세계 인류의 생존 경쟁이 지극히 거세고 치열하여 마치 큰 바다에서 용솟음치는 파도와 같으며, 또 큰산에서 내뿜는 분화와 같으니 이 지구상에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서로 힘을 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덕(公德)이 없으면 사덕(私德)이 없는 것이고, 공익(公益)이 없으면 사익(私益)도 없는 것이다.
소위 조선의 학자라는 자들은 이처럼 도덕이 진화하는 정도를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오로지 한 몸만을 닦으며 한 가정만을 다스리는 것을 더 없는 도덕으로 인식하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공덕심(公德心)과 공익심(公益心)이 전혀 없는 까닭에 이러한 결과로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고야만 것이 아니냐? 그런데도 오히려 ‘나는 아무 죄가 없다. 아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옳은가?
국가와 민족이 멸망해 가고 있는데, 이를 수수방관하면서 자신의 몸만을 거두어 도피함으로써 죄를 짓고 있거늘, 하물며 이름을 깨끗이 하여 높은 절개를 지키는 것에 의지하여 수양산(首陽山)의 고사리 노래를 이어 가노라고 하니 이렇듯 가식으로 명예를 노리는 행위가 심히 극에 달함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죄를 논하여 다스릴진대 어찌 매국노와 차이가 있다고 하겠느냐? 너는 결코 이들 가식과 위선에 찬 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지 말아라."하고 당부하였다.
무치생은 말을 받아 다시 말했다.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공덕(公德)과 공익(公益)을 발표하지 못한 죄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단지 과거의 시대에 무시무시했던 사정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마음이 서늘해지고 담이 흔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정치계의 압제도 극심하고 학문계에서의 무단(武斷)도 혹심하여서 백성 된 자가 감히 위에 있는 자의 불법(不法)에 혹 반항하게 되면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에 처해졌고, 선비된 자가 감히 선배의 언론(言論)을 위반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죄에 처해져 자신은 물론 그 집안까지 패망하는 화를 입게 되므로 이 같은 때 누가 감히 공덕(公德)과 공익(公益)을 위하여 생명과 가문을 버리려 하겠습니까?
그러한 까닭에 백성 된 자는 관부(官府)에서 어떠한 학정을 할지라도 다만 복종할 뿐이고, 선비 된 자는 감히 한마디도 반항하지 못하고 세상의 도덕이 아무리 부패하더라도 그대로 옛 것에 따라 이를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이치도 발명하지 못하였다고 하나 이러한 사정을 참고하면 혹 용서받을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이처럼 무골무혈(無骨無血)한 백성을 어디에다 쓸 것이냐? 자기 나라 정부의 학대에 한번도 반항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다른 나라의 학대를 받지 않겠느냐? 그리고 이처럼 쓸개없이 비겁한 선비들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자신의 화(禍)와 복(福)때문에 국민의 화(禍)와 복(福)을 생각하지 않으니 어찌 다른 민족의 노예 됨을 면할 수 있겠는가?
과거 백년전에 저들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는 정치압제와 종교압제가 극심하고 맹렬하였지만, 루소 같은 이는 만가지 고생을 무릅쓰고 「민약론(民約論)」을 크게 부르짖어 혁명의 도화선을 만들었으면, 크롬웰은 천하의 악명(惡名)을 불구하고 폭군의 머리를 베고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마르틴 루터는 교황의 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종교혁명의 공을 이룩하였다. 또한 4백년 전에 중국의 학문계에서는 주자학(朱子學)의 세력이 광대하고 심히 굳건하였지만 왕수인(王守仁)이 천하의 비방을 무릅쓰면서 양지학(良知學)을 주창하여 사기를 진작했으며, 50년 전에 일본에서는 막부(幕府)의 무력적 탄압이 강력하고 엄혹 하였지만 길전구방(吉田矩方)은 한 몸의 생명을 던져 대화혼(大和魂)을 주창하여 유신의 기초를 세웠는데 어찌하여 조선에서는 열혈아(熱血兒)가 없어 정치혁명도 못하고 학술혁명도 못하였는가?
천지의 진화로 인하여 신구(新舊)가 바뀌는 시대에 처하여 진실로 과감성과 자신력이 풍부한 호걸의 피를 갖지 못하면 능히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행복을 이룩하지 못한다. 만약 그 과감성과 자신력이 결핍되어 일의 시비에 두려워하고 화복(禍福)을 따짐으로써 감히 한마디도 해보지 못하고 하나의 일도 이룩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이 시대에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자이다.”
무치생이 말했다.
“기왕에 암흑시대 부패시대에 태어나 자란 늙고 썩은 자들은 공덕(公德)이 무엇인지 공익(公益)이 무엇인지 또는 국민의 자격이 무엇인지 국민의 책임이 무엇인지 본시 듣지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습성이 이미 고질화 되어 그것을 뉘우칠 수 없으며, 이미 머리의 영험한 정신은 쇠퇴하여 어떻게 이끌 방도가 없는지라 책망하여도 효력이 없고 거둬들여도 소용이 없으니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어찌 이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겠습니까?
오로지 이는 청년 자제를 교육하여 신국민을 양성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조국의 역사를 공부하여 재배(再拜)하고 스스로 마음속에 묻기를 이 역사가 무슨 능력과 무슨 복력(福力)으로 4천여 년이나 그 혈맥을 이어와 우리들이 태어나, 이나라의 땅에서 물 마시고 풍습을 이어 받아 자자손손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늙으면서 여기에서 농사를 짓고 여기에서 상업을 하며 이에서 배우고 이에서 벼슬하여 세계인류에 대하여 이르기를 ‘나는 조선국민이라’하며 천지신명에 대하여 이르기를 ‘나는 조선국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덕의 유래를 거슬러 생각해 본 즉, 이 반도 강산에 인재가 많이 나와 이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며, 이 나라의 기둥이 되며, 이 나라의 밑받침이 되어 우리 국민을 보호한 은덕이었습니다. 그런즉 4천년간 이어 내려온 슬기로운 조상을 향하여 절하고 축원하고 노래하며 칭송하려니와 오늘에 이르러서는 우리 청년 제군에게 역대 위인의 사업으로서 기대하며 권면하며 책려하며 고무할 터인저 어떠한 방법으로써 우리 청년 제군으로 하여금 과감성과 자신력을 풍부하게 하여 무한한 난관을 돌파하게 하며 중대한 책임을 감당하게 하여 4천년 역사의 과업을 빛나게 하겠습니까?
이에 황제께서는
“천지간에 일대 영험한 것이 있어 세계를 둘러싸고 고금(古今)을 한데 두루 하고 또 바다와 육지를 늘리고 줄이며 바람과 구름을 부르며 귀신을 부리면서 만물을 만드는 능력이 있으니, 이런고로 성인(聖人)도 이로써 성인(聖人)이 되며 영웅도 이로써 영웅이 되고 국가도 이로써 성립되며 사회도 이로써 조직되고 모든 사업도 모두 이로써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물(靈物)의 도움을 얻으면 천하에 가히 이룩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를 수련하여 활용하는 자가 별로 없다. 만약 그 수련하는 자세가 충족되면 과감성과 자신력이 생겨 활용할 것들이 마치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막힐 것이 없으니 이를 가르켜 「심(心)」이라고 한다.
이것은 본래는 영험하고 미묘한 것이라 우매하지 않고 청명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본능은 진실하여 허위가 없고, 스스로 독립하여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것의 진정(眞情)은 정직하여 굽지 아니하고 강직 강건하여 굴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의 본체는 공평 정대하여 두루 널리 걸치고 있으며, 이것의 능력은 시비를 가리어 내고 감응이 귀신처럼 빠른 것이다.
이처럼 더 없는 보배 같은 품격과 끝이 없는 영험한 능력을 사람마다 모두 갖고 있지마는 단지 사람이 이를 이용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는 습속과 육체의 정욕으로 인하여 추악한 사회에서 살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험하고 오묘한 것이 혼미하고 불령(不靈)한 것이 되며, 청명하고 깨끗한 것이 더럽고 불결한 것이 되며,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이 거짓으로 가득 찬 것이 되며, 떳떳이 독립된 것이 구차하게 의뢰하는 것이 되며, 정직한 것이 곡해된 것이 되며, 불굴의 강건함이 비열한 유약함으로 되며, 공평 정대한 것이 편협하여 그릇된 것이 되며, 또한 널리 두루 살피는 것이 좁게 치우쳐 편벽한 것이 되며, 시비를 감별하는 것이 분명하며 그 감응이 귀신처럼 빠르던 것이 모두 막혀 하나도 통하지 못하는 폐가 있게 되었다.
무릇 이러한 물(物)은 우리의 신령한 주인옹(主人翁)이요, 공정한 감찰관이니 생각하는 것의 옳고 그름과, 행하는 것의 시비를 대하게 될 때, 이 주인옹과 감찰관을 속이지 말아라. 이 주인옹과 감찰관이 허용해 주지 않고 명령하지 않는 일은 즉시 그만두고, 허용해 주고 명령하는 일이거든 남이 헐뜯는지 칭찬할는지에 관계치 말고, 또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를 헤아리지 말고 자신의 화(禍)와 복(福)도 돌보지 말고 설령 칼끝이라도 밟을 것이며, 뜨겁게 끓는 물 속이라도 들어가 반드시 행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과감성과 자신력인 것이다. 이러한 자신력과 과감성이 풍부하게 되면 장자방(張子房)의 커다란 철퇴와 같은 빛도 번쩍일 것이고 워싱턴의 자유종(自由種)과 같은 소리도 울리게 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 주인옹과 감찰관의 지위를 존중하고 능력을 발달하게 하자면 반드시 평일에 늘상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그 공을 쌓아야 하는데, 수련하는 것은 우환과 곤란이 제일 가는 학교이다. 이 학교에서 졸업을 하게 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험악한 길이 없어져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조선청년이 그 제일 가는 학교에서 수업을 쌓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좋은 소식이다. 이것은 하늘이 조선 청년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에 무치생이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움직이는 것은 다 생기(生氣)를 갖고 있으나, 혹 천연적인 압력이나 혹 외래적 압력이 있으면 발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노예의 씨앗이 성현(聖賢)을 낳을 수 없고, 거리에 버려진 풀이 향기롭고 고운 꽃으로 자랄 수 없다’고 합니다.
현재 조선의 정황을 말할 것 같으면 6, 7년 내에 사회에 대한 사상도 차차 감촉되고 청년의지기(志氣)도 차차 분발되어 그 영향으로 국내에는 학숙(學塾)들이 계속 설립되고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것도 증가하여 매우 번성하였는데, 이에 대한 압력이 태산과도 같이 밀어붙이고 또한 벼락같이 내리치게 됨에 따라 하늘이 기울어지고 땅이 흔들리면서 이 땅에는 한 점의 생기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산천에 물이 마르고 길이 막혀 한 줄기의 활로를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백성의 심정은 모두 절망적이고 낙담되어 있는 상태가 되어, 고난이라는 것이 비록 하늘이 세운 학교라고 할지라도 이같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실로 하늘이 내린 복(福)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황제는 이러한 무치생의 말에 대하여 “물(物)의 움직임은 압력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으로 조선인이 받는 압력이 극도에 이르지 아니하면 그 움직임이 생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치생이 묻기를 “어찌해서 그러합니까”라고 하자, 황제가 대답하기를
“조선은 본래 소국인(小國人)으로 스스로 낮추고 협소해져 노예가 된 것이 아닌가? 나라의 크고 작음이 어찌 하늘이 뜻하는 대로 계획되고 정해질 수 있는 것인가? 성탕(成湯)은 70리(里)의 작은 나라이요, 문왕(文王)은 백리의 작은 나라로서 천하에 큰 이름을 남겼고 진(秦)은 서융(西戎)에 치우친 작은 나라로서 사해(四海)를 병탄 하였으며, 월(越)은 회계(會稽)의 패잔병으로서 강병(强兵)과 싸워 이겼고, 현시대의 가장 강대하고 웅걸한 나라를 보더라도 영국(英國)과 러시아와 같은 나라의 옛 역사는 모두 구주(歐洲)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의 영국은 4만리에 걸치는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러시아는 3만리의 영토를 확장하지 않았는가?
조선은 지리적 형편으로 보면 앞에는 대양(大洋)이요, 뒤에는 대륙이 있기 때문에, 만약 영웅이 나와 활동의 능력을 기르고 진취하는 기상과 그에 따른 책략을 강구할 것 같으면 태평양이 곧 조선의 바다가 될 것이고, 북방 대륙 또한 조선의 영토가 됨으로써 해상권(海上權)과 육지권(陸地權)이 모두 조선인의 소유가 되어도 가할 것인데 어찌하여 조선인의 생각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나라의 크고 작음을 하늘이 정한 것으로 인식하여 ‘우리는 소국(小國)이다. 소국(小國)이다’라고만 말하면서 또 ‘감히 대국(大國)에 대하여 섬기는 일을 삼가지 않을 수 있으리오’ ‘감히 나라 바깥의 땅 한발자국이라도 갖기를 원하는 망상(妄想)을 하겠는가?’ 하면서 오로지 사대주의를 주장하는가? 그리하여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다른 나라를 섬기는 것을 마치 하늘을 섬기듯 하여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조차 소홀히 하지 않고 북으로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남으로는 대마해협(對馬海峽)을 하늘이 정한 나라의 한계로 생각하여 백성가운데 혹 국경을 넘는 자가 있으면 무서운 벌을 내려 주살 하였으니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슬픈 일이다.
조선의 백성은 장구한 세월동안 감옥에 갇힌 생활을 면할 수 없었으니 어찌 산업이 발달하고 시세(時勢)에 대한 감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좁은 나라의 땅에서는 비록 관마(管마)와 같은 정략(政略)이 있을지라도 시행할 곳이 없고, 손오(孫吳)와 같은 뛰어난 장수 재목이 있을지라도 쓸 곳이 없는 것이다. 이러할진대 정계(政界)에 있는 자는 다만 정권쟁탈만이 큰 사업이요, 당론을 주장하는 것을 큰 의리(義理)로 삼으니 그 백성에 대하여는 마치 물고기가 자기와 같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개가 남은 뼈를 다투어 먹는 것과 같이 서로 침탈하고 서로 해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수단이 되었었다. 이것은 스스로 편협 되고 좁아지는 근성에서 말미암은 것으로서 이는 다시 노예적 근성이 되고, 노예적 근성은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욕심으로 염치를 잃음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니, 이에 대하여는 극심한 압력이 있지 않으면 그러한 근성이 바뀌어지지 않고 또 동력(動力)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대외경쟁이 없었고 밖을 향하는 진취적 노력도 없었던 관계로 긴 세월에 걸쳐 놀기만 하고 하나의 일도 이루지 못하였으며 하나의 계획도 추진한 바가 없었는지라, 이러한 속에서 그저 안일하게 놀고 즐기는 것만을 추구하고 게으름과 태만이 사회에 넘쳐흐르고 황망됨만이 굳어져 뭔가 뜻을 세우는 기운이 살아나지 못하고 온 백성이 무기력하게 되어 주눅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조그만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또 머리 위의 파리조차 쫓아버리지 못할 정도로 정신과 기력이 쇠하여 마치 엎드려 잠자다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으니 이는 또한 극심한 압력이 아니면 기운을 진작시키지 못할 것이다.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묵자(墨子)는 송(宋)나라 사람이었다. 송나라는 약소국으로 진(晋) 나라와 초(楚)나라가 서로 전쟁하는 요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들 나라로부터 갖은 멸시와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 이에 묵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써 본분으로 삼았다.(마정여종 이천불즉위지(摩頂放踵 利天不則爲之))’ 라고 하는 주의(主義)를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초 나라가 송 나라를 공격하고자 할 때 묵자의 문인(門人)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초 나라에 가서 죽은 자가 무릇 70여인이나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국시대에는 강국(强國)을 억제하고 약한 나라를 도우려는 의협스러운 기풍이 크게 떨쳤는데 이는 모두 묵자의 교화에 힘입는 바이었다.
조선은 이미 전부터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 예속된 위치를 지녀옴에 따라 평등한 지위를 잃어 버려, 또 오늘날과 같은 망극한 치욕과 무한한 고통을 겪게 되었으니 마땅히 뜻이 있고 혈기가 왕성한 남자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신념으로 동포들에게 인도(人道)의 평등주의를 널리 알림으로써 동포로 하여금 하등(下等)의 지위에서 벗어나 상등(上等)의 지위로 나아가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계 만방에 대하여 그러한 사정을 알림으로서 동정(同情)을 요구하는 데에도 전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동포들로 하여금 세계의 우등(優等)한 민족과 평등한 지식과 자격을 갖추게 한다면, 부도불법(不道不法)의 강력 압제를 벗어나 그들과 평등한 지위를 차지할 능력도 가질 것이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하늘에서도 허락하시는 것이고 또 시대의 흐름으로 나아가는 방향인 것이다. 또한 세계 문명사회가 동정하는 바이라 자유주의가 발달하던 시대로 말미암아 워싱턴의 독립기(獨立旗)가 개가를 올렸던 것처럼 오늘날은 평등주의가 발달하고 있는 시대라 만약 의욕에 찬 남아가 있어 평등주의로써 동포를 깨우치고 세계에 호소하면 어찌 크게 좋은 결과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지금의 곤란은 실로 조선 청년에게 있어서 크게 할 바를 마련해 주는 것이고 또 큰 희망이 되는 기회인 것이다.”
무치생이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교육계에 몸을 담고 일한 적이 있사온데, 우리 조선 청년의 총명하고 지혜로움은 실로 다른 나라의 청년보다 월등한 자질이 있어 학문을 성취하는데는 뛰어나지만 그 인격이 대범하고 웅대하며, 또 강건하며 견실하여 기풍이 늠름한 자는 적으니 이것이 최대의 결점입니다. 그러므로 정신 교육이 제일 필요하고, 정신교육의 재료는 고대 위인(偉人)들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무릇 천지가 개벽한 이래 우리 동양 세계의 영웅에 대한 역사를 논한다면 대금태조황제(大金太祖皇帝)와 몽고 황제 징기스칸을 칭하는데 폐하께서는 동방의 조그만 부락에서 일어나시어 소수의 민족과 적은 병력으로 수년도 채 안되어 요(遼)나라를 멸하였고, 또 송(宋)을 치심으로써 중국 대륙을 정복하셨으니 이는 천하 만고(萬古)에서 없었던 일입니다. 징기스칸은 북쪽 황막한 땅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나시어 남을 정복하고 북을 쳐서 무적(無敵)의 이름을 드날리며 아세아, 나아가서는 구라파 대륙까지 손에 넣으셨으니 이는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그들 몽고족의 영웅이고 폐하는 우리 고려족의 영웅이시니 폐하의 일생에 대한 역사는 우리 청년 자제의 교육과 정신에 크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 효과가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백두산이 걸출 웅대하고 두만강이 만고에 흐르니 이는 짐의 발상지이다. 우리 동방 민족이 이에 대하여 어찌 짐의 옛날 업적을 생각지 않겠는가? 다만 시세가 옛날과 같지 않아 할 일도 또한 다른 것이다. 지금 시대는 팔백년전과 사뭇 달라 팔백년전은 가족시대에 그쳤으나 지금은 민족시대이고, 팔백년전은 육전(陸戰)시대이지만 지금은 해전(海戰)시대이며, 또 팔백년전은 활로 싸우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총기로 싸우는 시대이다. 짐은 가족의 강력함으로 천하를 정복하였지만, 지금은 민족의 강력함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또 옛날의 짐은 육전(陸戰)의 무적으로 천하를 정복하였으나 지금은 해전(海戰)의 무적이 아니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리고 옛날에는 화살의 뛰어난 재주로 천하를 정복하였으나 지금은 총기를 잘 사용치 않으면 안되게끔 되었는데 짐의 역사가 어찌 금일 청년의 교육에 적합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짐의 정신적 역사가 혹 후인의 정신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니 생각토록 해보아라.
짐의 옛 나라는 여진(女眞)이라 처음에는 요(遼)나라의 변방에 속하여 대대로 절도사(節度使)의 직을 받았는데, 요나라의 사신이 오는 때면 임금과 신하가 모두 절을 올리고 예식을 갖추어 맞았다. 그런데 짐이 어려서 이를 행치 않으니 요의 사신이 크게 화를 내며 온갖 협박과 횡포를 부렸으나 짐이 응하지 않고 요의 무례한 침탈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는 정신적 역사의 교훈으로서 하나가 될 것이다. 다음에 짐이 초기에 군사를 일으켜 인근의 각 부족을 정벌할 때 갑사(甲士) 70여인을 얻고 곧 천하에 진출할 뜻을 세웠으니 이는 정신적 역사의 교훈으로서 또 하나이다. 요나라는 천하의 강대국이고, 송나라는 세계의 문명국이었지만 이를 쉽게 이겼으니 이 또한 정신적 역사의 교훈으로서 하나이다. 만일 그때에 짐이 요나라의 강대함에 두려워하고 송나라의 문명을 숭배하였더라면 동쪽 황막한 조그만 부락의 생활마저도 보전키 어려웠을 것이니 어찌 세계 역사에 대금국(大金國)의 영예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에 짐에게는 강대한 자도 문명자도 보이지 않았던 때문에 그와 같은 결과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니 이는 짐의 정신력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에 조선 청년도 그러한 용기를 기르고 가슴을 피면, 크고 작음이나 강하고 약함에 기죽는 법이 없어 강대한 자를 대할지라도 두려운 마음이 없어지고 오로지 승리의 뜻이 굳건하게 될 것이며, 어떠한 문명자를 대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취하는 뜻이 가득할 것이니 능히 청년들의 자격도 높아지고 장래의 희망도 있게 될 것이다.”
이에 무치생이 말하기를 “금나라의 역사에 전하기를 폐하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흑룡강(黑龍江)을 건너실 때, 채찍으로 병사를 지휘하시며 말씀하시길 “나의 말머리를 보며 쫓으라” 하심에 병사들이 그에 따라 쫓아 강을 무사히 건넜는데, 그 후에 안일이지만 강물의 깊이가 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는 일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근세의 과학자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저는 폐하의 정신력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라 하자 황제는 “그렇다. 사람의 정신이 일도(一到)하면 천지가 감격하여 어떠한 일도 성사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치생이 말하기를 “폐하의 용병술은 신기에 가까워 정공법에 의해도 출정하는 대로 이기실 수 있는데도 왜 그토록 위험한 병술을 사용하셨습니까?” 하자 황제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짐에게 명하여 천하를 평정하라 하시는데 어찌 강물 하나 건너는 것을 두려워하여 적을 치는 좋은 기회를 놓치겠는가? 오직 위험을 무릅쓴 모험적인 정신이 그와 같아야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실로 보통 과학자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라 하였다.
무치생이 말하기를 “모험이란 두 글자는 인간의 사업을 이루게 하는 대가물인 것이므로, 세계 위인의 역사를 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끝도 없는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같은 배에 탄 사람조차 불확실하여 믿지 않는 상황에서도 굽힘이 없이 오로지 전진적인 정신력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던 콜롬부스가 그런 사람이고, 또 일개 승려의 신분으로서 각국의 군주를 다스리던 교황의 위력에 반항하여 신교(개신교를 뜻함) 자유의 기치를 올렸던 마르틴루터가 그런 사람입니다. 작은 배로 지구를 일주하며 온갖 위험을 무릅쓴지 3년에 태평양 항로를 개척하여 동서의 대양을 개통케 한 마젤란도 그런 사람이었고, 탐험정신에 가득차 수 만리 사막을 뚫고 아프리카 대륙을 답사하면서 온갖 질병과 맹수, 그리고 열대토양의 악조건과 싸운지 수십년만에 아프리카 전대륙을 개통함으로써 백인의 식민지를 개척하였던 영국의 리빙스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16, 7세기 무렵 유럽에서 구신교도간에 전쟁이 일어나 신교도가 압제를 받아 거의 전멸할 즈음에 극히 열세한 병력으로 항전하면서 신교도인을 도탄에서 구해내고 희생을 감수하였던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르 아돌프도 그런 사람이었고, 나라의 기운이 허약하고 백성이 우매한 것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귀한 신분인 왕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외국에 여행하여 몸소 기술을 배워와 국민을 가르침으로써 세계의 강국으로 만들은 러시아의 피터 대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또한 군주의 횡포한 불법적 전제정치에 대항하여 의기(義旗)를 들고 국회군(國會軍)과 혈전을 벌이며 8년만에 군주를 살해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입헌 정체를 제정함으로써 세계 헌법의 사범(師範)이 된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이 그런 사람이며, 미국 인민이 영국의 압박을 받아 무거운 조세와 인권탄압을 당할 때 이에 대하여 일개 농부로 분연히 일어나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한지 8년만에 나라의 독립을 이루게 했고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여 지구상의 일등 국가의 영예를 가져왔던 미국의 워싱턴이 그런 사람입니다. 프랑스의 혁명 풍조가 소란하여 유럽 대륙이 요동을 치며 제각기 할거할 때 일개 군대의 하급장교로 분기하여 사방을 정벌하여 전 유럽을 석권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그런 사람이고,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복속이 되어 종교의 압제와 학정에 시달릴 때 한갖 혁명지사의 몸으로 의려(義旅)를 모집하여 혈전을 벌인지 30년만에 국권을 회복하고 자신은 자객의 손에 생명을 잃었으나 후회가 없는 네덜란드의 오라니에 윌렘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수십년전에 노예를 판매하는 풍습으로 인도(人道)가 전멸되고 남북분열이 생겨날 때 일개 뱃사람의 아들로서 이러한 난국을 정의와 민의(民義)로서 풀어나가 평등의 이상을 실행함으로 천하의 법칙이 된 미국의 링컨도 그런 사람이고, 이태리 민족이 오랜동안 오스트리아에게 노예의 대우를 받았는데 일개 소년이 나라의 혼을 일깨우며 청년 교육에 앞장섬으로써 마침내 나라를 독립의 지위로 회복하게 했던 이태리의 마찌니가 그런 사람입니다. 이들이 모두 모험적 정신으로 모든 난관을 뚫고 이겨 나가 그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은 확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이라는 두 글자에 대하여 쉽게 말하는 자는 많으나 그것을 실행하는 자는 적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이를 실행하지 못함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람이 사업을 이룩하려는 뜻은 있으나 단, 위험스런 일을 눈앞에 당하면서 굴복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업을 목적하였을 때에는 유일 정신으로 오로지 그 목적만 보고 그 외의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말아야 모험의 실행을 얻을 것이다. 짐이 군사를 이끌고 흑룡강을 건널 때에도 눈앞의 적을 취하는 형편만 보고 물이 깊고 낮음에 대해서는 보지 않았다. 이리함으로써 이길 수 있었고, 그런 이치는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지금에 조선 청년도 눈앞에 오로지 조국과 민족만을 보고 그 외에는 일체 생각치 말면 족히 모험을 실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치생이 말하였다.
“페하께서는 가족이 강력하여 천하를 정복하였던 것은 역사상의 사실입니다. 당시 정벌의 거사가 있으면 부형자제(父兄子弟)가 하나같이 종군하여 대장(大將)도 되고 편장(偏將)도 되며 또는 장교나 병졸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후방에서 지원하는 등 가족이 모두 참여하면서 군단(軍團)의 골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한 때문에 병사들이 정예화 되어 힘이 고르게 되고 장교들은 용감하여 뜻이 하나가 되었으니 이로써 천하의 무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 각국이 모두 그 전체 민족의 힘으로 경쟁하는 시대인즉 민족 단체의 힘이 아니면 다른 민족에 대적할 수 없고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세계에서 우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은 모두 단결된 정신과 단결된 세력으로 경쟁의 준비를 완고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치계와 종교계와 교육계와 실업계와 군사계가 모두 민족이라는 단체의 기관으로서 대중의 지혜를 합하여 커다란 집단의 지혜가 되고 또 대중의 힘을 합하여 집단의 힘을 이루는 까닭에 그 기초가 공고하고 그 실력이 건전하여 꾀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획득할 뿐 아니라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이룩하고 남과 경쟁하는 경우에도 실패가 없고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단결된 정신과 단결된 세력이 없으면 모든 사업이 모두 다른 민족에게 굴복하게 되고 실패로 되어 정치권이나 종교권, 교육권, 실업권, 군사권 등 모든 권리가 다른 민족의 차지로 돌아가 자기는 털끝 같은 자유권도 없이 생존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인사들도 이에 느낀 바 있어 이처럼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자보자존(自保自存)의 방책으로 국민 단체가 필요하다는 주의를 제창하고 설명하는 자가 있지만 근래 제가 본 바로는 국민전체의 단합은 차라리 말 할 것도 없고 몇몇 개인들이 조직한 조그만 단체의 경우라도 한 단체 내부에서 서로 권리를 다투고 서로 세력을 다투어 닭장 속에 닭이 싸움을 벌이는 것과 같고 또 대통 안에서 벌들이 서로 싸우는 것과 같아 필경 분열되고 사라져 타인으로부터 비웃음을 받는 자가 많고 그 중에 이른바 다수 단체는 더욱이 자립적 정신은 없고 의뢰적인 행동으로 타인에게 이용되어 조국을 팔고 동포를 해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본색을 나타내었습니다. 심지어 해외 각지에 이주한 동포는 정착된 생활보다 떠다니며 생활하는 가운데 서로 친애하는 정분도 특이할 것이며, 다른 민족으로부터 모멸을 당하지 않으려는 생각과 그에 따른 사상도 있을 것이며, 또 고난과 고초를 겪는 중에 천부(天賦)의 양심도 발생하겠거늘 도대체 무슨 권리, 무슨 세력을 다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서로 배척하여 당파(黨派)의 분열이 많은 속에서도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개인적인 행동으로 외국인의 구속을 받는 노예가 되어 마치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는 것과 같은 식으로 죄 없는 동포를 사지(死地)에 밀어 넣은 것을 일삼는 자가 심히 많습니다.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맹수도 자기와 같은 짐승은 잡아먹지 않거늘 그와 같은 비열한 종자는 인간은 고사하고 짐승의 무리에도 없는 것입니다. 무릇 모든 인간이 모두 천지의 기운을 받아 신체(身體)가 생겨나는 것이고 또 천지의 영(靈)을 받아 심성(心性)이 되었으니, 이런 이유로 사해(四海)의 사람은 모두 나의 동포라고 합니다. 더구나 한 조상의 자손이라면 핏줄 관계로 서로 사랑하는 정이 응당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우리 대동민족(大東民族)은 어느 곳에서 태어났든지 또 어느 성(姓)의 어느 파(派)로 태어났든지 간에 다같이 단군조상(檀君祖上)의 혈손이라 누구든지 모두 나의 친절한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지 않고 서로 싸우고 해함이 그와 같으니 필경은 모두가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실로 어깨를 치며 통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하여야 극히 비열하고 극히 악독한 심성의 뿌리를 뽑고 인애심(仁愛心)과 공덕심(公德心)을 배양하여 서로 친애하는 정으로 싸우고 해치는 일이 없이 국민단체(國民團體)라고 하는 신성한 주의와 공고한 세력으로 자보자존(自保自存)하여 천지간에 우리 단군 혈통이 마침내 멸망하는 경우에 이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의 말이 가히 슬프고 또 너의 마음이 참으로 괴롭겠구나. 이것은 곧 민족의 존멸이 달린 기관이요,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 말이 어찌 슬프지 않으며 그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짐이 그 근본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말하겠다. 비록 인간의 심사(心事)에는 선악(善惡)의 두 글자가 있으니 선악의 차는 털끝보다도 작은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충신 의사(義士)와 난신적자(亂臣賊子)와의 차이는 불과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대저 조선은 예부터 칭하기를 군자국(君子國)이라 하며 예의의 나라라 하여 4천년 동안 이어온 신성한 민족의 후예가 아닌가? 그 민족의 성질이 온화하고 충순하여 난폭하고 완악하지 않으며 또 총명하고 지혜로와 우둔하고 야만되지 않은데 어찌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지극히 비열하고 극도로 사악한 지경에까지 떨어지게 되었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 편협되고 비하시키는 습관이 이어져 내려옴에 따라 일종의 비루한 성질을 양성한 까닭이다.
대개 과거의 역사를 볼 때, 고구려 시대가 오직 강력의 기풍과 독립적인 성격이 있었고 신라 중엽에 이르러 일시적인 정책으로 타국에게 의뢰한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지키는 정신은 잃지 않아 외부의 압력과 침입에 대항하였고, 고려말에 이르러서 비록 몽고로부터 압제를 받기는 하였으나 자강(自强)의 기풍이 전혀 없어지지는 않았으니 최영(崔營)같은 호기에 찬 남아가 있어 요(遼)를 정벌하려는 거사를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후 5백년간은 순전한 의타의 시대이고 폐쇄시대로 점철됨으로써 대외경쟁과 밖으로 진취하려는 기상은 꿈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됐으니 비록 혈기 있는 자라 할지라도 누구와 더불어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사사로운 권력과 이로움만을 탐하여 자국내의 울타리에서만 경쟁할 뿐이다. 이에 정당(政黨)의 경쟁과 학파간의 경쟁만이 생겨나 서로 헐뜯고 공격함이 분분하여 그칠 날이 없었으니 저들 무리들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마치 거록(鋸鹿 : 중국 춘추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도읍)의 큰 싸움에서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의 군사를 격파했던 것과 또 적벽(赤璧) 싸움에서 주유(周瑜)가 조조(曹操)를 격파한 듯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조금이라도 넓게 보면, 저들이 일삼는 정쟁(政爭)은 파리의 머리에 붙어 있는 눈꼽만한 이익이요(승두장이(蠅頭徵利)), 달팽이 뿔에 있는 텅빈 이름(촉각허명(촉角虛名))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같이 비루한 행동을 불세(不世)의 사업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최고의 의리(義理)로 간주하니 이로 말미암아 그 국민이 모두 비루한 기풍에 물들어 각기 자기가 취할 수 있는 분수내에서 사권사리(私權私利)를 경쟁함으로써 제2의 천성(天性)을 이루었으니 어찌 국가를 돌아보고 동족을 친애하는 공덕심(公德心)과 의협심(義俠心)이 있겠는가?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나라를 팔고 동족에게 화를 미치는 극도의 사악한 행동이 바로 비루(鄙陋)두 글자의 결과인 것으로, 사회를 이루는 속에서 공체(公體)를 생각하지 않으며 공의(公義)를 지키지 않고 단지 사의(私意) 사견(私見)으로서 시기하고 쟁투하며 단합(團合)이 이룩되지 못하고 지리멸멸한 상태로 분열되고 마는 것도 또한 비루 두글자의 결과이다. 이같이 비루한 것이 돌아갈 곳은 금수(禽獸)한테 이고, 금수는 인간으로 하여금 쫓겨나고 죽임을 당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비루한 것은 인간의 본래적인 성질이 아닐 뿐더러 조선 백성은 원래 신성한 종족이었다. 그런데 단지 과거시대의 비열하고 너저분한 습속으로 인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나빠져 오늘에 이른 것이니 어찌 슬프고 가엾다 하지 않겠는가?
짐이 조선 민족의 보통교육을 위하여 해상보통학교(海上普通學校)와 대륙보통학교(大陸普通學校)를 건설하기로 경영하노니, 해상학교의 교사는 서반아인 콜롬부스를 초빙하여 항해술을 가르치면 그 안목이 넓게 열리어 좁고 편협한 마음들을 씻어 버릴 수 있을 것이고, 대륙학교 교사로는 몽고의 대신(大臣) 야율초재(耶律楚材)를 초빙하여 아시아나 구라파 대륙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던 정신으로 가르치면 그 신체가 단련되어 연약한 성질을 개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비루한 풍습이 자연히 씻기어 없어지고 신지식과 신도덕이 일어나 동포를 사랑하는 사상도 생겨 날 것이며 타민족에 대하여 인격(人格)을 잃어 버리지 않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이에 무치생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우리 민족의 생명을 구하고 살려내실 뜻으로 그와 같은 학교교육을 경영하시겠다니 참으로 감격하여 눈물이 쏟아짐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사 모든 물질이 그 종자의 질이 원래 좋지 않으면 비록 다른 곳에 옮겨 심는다고 하더라도 좋은 종자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이 본래 신성한 민족의 후예이지만 과거 수백년간에 비루한 풍습이 생육계(生育界)에 유전성(遺傳性)이 되었으므로 이것은 이제 태(胎)에서 나오기 이전의 병근(病根)이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민족이 혹 해외 각지에 이주하여 이국산천(異國山川)에 대한 안목도 넓히고 다른 민족의 풍조에 감화도 받았을 것이나 끝까지 동포사회의 단합은 기대하기 묘연한 상태이니 이는 곧 원래 질이 좋지 못한 까닭인지, 갖고 온 병근(病根)이 가셔지지 않은 까닭인지 신(臣)은 이에 대하여 더욱 두렵고 걱정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이것이 어찌 원래 종자의 나쁨에 기인하는 것이겠는가? 필시 병근(病根)이 가시지 않아 그러함이다. 비록 해외에 이주한 자라도 훌륭한 교육을 받아 새로운 정신이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은 곧 옛날 근성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으로 그러한 사람은 신국민(新國民)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짐이 광대한 학교를 건설하고 고등교사(高等敎師)를 초빙하여 훌륭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조선 민족이 모두 이같은 교육을 골고루 받아 개인이 발달하고 수준이 올라가게 되는 경우에는 그 광엄 장대하고 활발한 기상과 폭넓고 활달한 기량이 생겨나 저 섬나라의 일본 종족이 감히 미치지 못할 바가 될 것이다. 저들은 다만 해상에서의 생활로 모험활동의 힘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해상의 활동과 대륙에서의 비등(飛騰)하는 자격을 아울러 갖추면 어찌 저들보다 우월하지 않겠는가? 너는 그 성적이 어떠할는지를 고대(姑待)해 보아라.”하자,
이에 무치생이 “앞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하늘에서 세운 학교는 시대적인 관계로 청년의 자격을 만들어내는 곳이고, 해상보통학교와 대륙보통학교는 지리적인 방면으로 국민의 성질을 개량하는 곳인즉 교육기관이 광대하다고 할만 합니다.
이로부터 이제 우리 민족의 앞길에는 크게 희망을 걸 수 있게 되었는데 이외에도 다시 정신교육에 필요한 학교가 있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말하기를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의 건설로 4천여년 전래한 학교가 있으니 그 위치가 빼어나고 규모가 완전하다."
그러자 무치생이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의 특별하신 총애를 입어 우리 조신(祖神)께서 건설하신 학교를 우러러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실로 은혜가 가이 없겠습니다.”했다.
이에 황제가 대신종망(大臣宗望)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림으로써 지도하게 하셨다. 단군대황조께서 세우신 학교의 위치는 백두산(白頭山) 아래에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황해(黃海)와 면하고, 북으로는 만주를 베개로 삼았으며, 동으로는 벽해(碧海)를 끼고, 남으로는 현해(玄海)를 경계로 삼고 있었다.
단목(檀木) 아래에 한가닥의 대로(大路)가 탄탄평평하게 뻗어 있어 학교에 바로 이르고 있었으며 무궁화와 불노초(不老草)가 풍만한 빛을 발하며 피어 있었고 주위 풍경도 수려하여 학도들이 생활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데에도 극히 좋은 곳이었다. 그 학교 안에는 무수한 소학교(小學校)가 기라성처럼 즐비하였으나 일일이 시찰할 겨를이 없어 그 중에서 제일 저명한 대동중학교(大東中學校)를 방문하였다. 학교 교문 앞에 학교를 건설한 역사를 금강석에 새겨 세워 놓았는데 개교일은 지금으로부터 4천 2백 50년전 무진(戊辰) 10월 3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교장실을 찾으니 후조선태조문성왕(後朝鮮太祖文聖王) 기자(箕子)께서 교장이시었고 교장실내에는 홍범도(洪範圖)와 팔조교(八條敎)를 걸어 두었으며 교감은 고려의 안유(安裕) 씨였다.
강의실은 수천칸인데 천문학(天文學) 교사로는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께서 맡아 첨성대(瞻星臺)의 제도를 설명하시고 백제의 왕보손(王保孫)씨는 일본국에 천문학을 전수해 주기 위해 이미 가버렸었다. 지문학(地文學) 교사는 팽오(彭吳)씨인데 단군 시대에 국내 산천을 개통하던 역사를 설명하였고, 윤리학 교사는 후조선의 소연대연(小連大連)씨와 신라의 박제상(朴提上)씨였고, 체조교사로는 고구려의 천개소문(泉蓋蘇文 : 연개소문)씨가 3척이나 되는 긴 수염을 휘날리는 늠름한 풍채로 몸에 수십개의 긴 칼을 차고 운동장에서 우렁찬 구령을 발하며 칼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국어교사는 신라의 설총(薛聰)씨가 맡고, 역사교사는 신라의 김거칠부(金居柒夫)씨와 고구려의 이문진(李文眞)씨, 그리고 조선조의 안정복(安鼎福)씨였으며 화학(化學 : 文學의 오기같음)교사로는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씨와 조선조의 양사언(楊士彦)씨였고, 음악교사는 가야의 우륵(于勒)과 옥보고(玉寶高)씨가 맡고 도화교사는 신라의 솔거(率居)와 고구려의 담징(曇徵) 두 선사(禪師)인데 담징은 일본국의 화학교수(畵學敎授)로 초빙되어 갔었다. 다음에 산술교사는 신라의 부도(夫道)씨이고, 물리교사는 조선조의 서경덕(徐敬德)씨였으며 수신(修身)교사는 고려의 최충(崔沖)씨였다. 강의실 옆에는 활자기계실이 있어 만권의 서적을 인쇄하여 출간하니 이는 조선조의 태종(太宗) 대왕께서 창조하신 바로써 세계 각국 중에서 가장 먼저 발명한 활자였다.
중학교의 서남편에 매우 웅장한 학교가 몇 개 있었는데 하나는 육군대학교(陸軍大學校)로 교장은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이시고 교사는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씨와 고려의 강감찬(姜邯贊)씨인데, 을지문덕씨는 살수(薩水) 대전에서 수(隋)나라 군사 백만명을 전멸시키던 사실을 설명하고, 강감찬씨는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 군사 수십만을 격파하던 사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해군대학교(海軍大學校)로서 교장은 신라의 태종대왕(太宗大王)이시고 교사는 고려의 정지(鄭地)씨와 조선조의 이순신(李舜臣)씨인데 정지씨는 호남해도(湖南海道)에서 왜선 120척을 크게 격파한 사실을 설명하고 이순신씨는 철갑의 거북선을 창조하여 수백척을 전멸시켰던 사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어서 각 전문학교를 둘러 보았는데, 정치대학교(政治大學校)의 교장은 발해의 선왕(宣王)이 맡고 계셨으며 교사는 조선조의 유형원(柳馨遠)씨와 정약용(丁若鏞)씨였다. 법률대학교(法律大學校) 교장은 신라의 법흥왕(法興王)께서 맡으시고 교사는 신라 효소왕(孝昭王)때의 율학박사(律學博士) 6인이었다.
다음에 농업전문학교 교장은 백제의 다루왕(多婁王)으로 논밭을 경작하는 법을 널리 펴고 있었으며, 교사로는 신라 지증왕(智證王)께서 우경(牛耕)의 편리를 설명하시고 양잠과 베짜는 일은 신라와 백제의 왕궁부인(王宮夫人)이 교수를 하고 차를 생산하는 것은 신라의 김대렴(金大廉)씨가 중국의 종자를 구하여 지리산(智異山)에 종식하였으며, 목면(木綿)은 고려의 문익점(文益漸)씨가 중국 남방에서 옮겨와 나라안에 많이 심었다.
공업전문학교 교장은 백제의 개로왕(盖鹵王)이시고 교사는 신라의 지증왕(智證王)과 백제의 위덕왕(威德王)과 신라의 이사부(異斯夫)씨와 백제의 고귀(高貴)씨였다. 고구려의 혁공(革工), 백제의 도공(陶工) ㆍ 대장공 ㆍ 마구공(馬具工) ㆍ 칠공 ㆍ미술공, 신라의 철공 ㆍ 목공 ㆍ 수예공 ㆍ 불상주조공 ㆍ 직기공 ㆍ 조선공(造船工)등의 각종업이 크게 발달하여 각국에서 이와 비견할 것이 없었으며 또 각 공사(工師)들이 일본국에 교사로 건너간 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고려의 최무선(崔茂宣)씨는 화포의 제조로 왜선(倭船)을 격파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의학전문학교 교장은 백제의 성왕(聖王)이시고 교사는 신라의 김파진(金波鎭)씨와 한기무(漢記武)씨와 고구려의 모치(毛治)씨와 조선조의 허준(許浚)씨인데 모치씨는 일본에 의학을 전수하는 교사로 건너갔었다.
철학전문과는 중국철학과 인도철학의 양과를 두고 중국철학의 교사는 고려의 정몽주(鄭夢周)씨와 조선조의 이황(李滉)씨와 이이(李珥)씨이고, 인도철학의 교수는 고구려의 순도(順道)와 신라의 원효(元曉)와 고려의 대각선사(大覺禪師)였다.
문학전문과의 교장은 조선조 세종대왕이니 국문을 처음 창제하여 국민의 보통학식을 계발하시고 한문(漢文)교사는 백제의 고흥(高興)씨와 신라의 임강수(任强首)씨와 고려의 이제현(李齊賢)씨와 조선조의 장유(張維)씨이고 백제의 왕인(王仁)씨는 일본에 교사로 건너갔다.
종교학은 대황조의 신교(神敎)와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선교(仙敎)와 중국의 유교(儒敎)와 인도의 불교(佛敎)가 차례로 흥왕하여 학당이 굉장하고 수려하며 교리가 명쾌한데 유교와 불교는 일본국에 파급되었다.
이러한 각 학교의 모습을 둘러 본 뒤 즉시 돌아와 복명(復命)하니 황제가 말씀하시었다.
“네가 관찰한 상황에 의거해 볼 때 그 정도가 어떠하였느냐?” 이에 대하여
“대황조의 교화가 융성하고 넓으시므로 제1아동을 교육하시는 규모가 광대하여 소학교가 마치 별과 같이 늘어서고 수풀같이 서 있으나 미처 이를 시찰할 겨를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자, 황제는
“소학교는 국민교육이 근본이다. 국가가 진보하는 능력은 여기에 있는데 오늘 시찰하지 못한 것은 일대 유감이다. 그러면 제일 저명한 중학교의 상황은 어떠하든가?”라고 묻기에 이에 대해서
“중학교는 문성왕(文聖王) 기자(箕子)께서 교장이 되었는데 홍범학(洪範學)은 천인(天人)이 극치요, 팔조교(八條敎)는 법률의 시조인지라 그의 이치와 참 모습은 한번 본 것으로 해서는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천문 ㆍ 지문 ㆍ 윤리 ㆍ 역사 ㆍ 국어 ㆍ 화학 ㆍ 물리 ㆍ 산술 ㆍ 도서(圖書) ㆍ 음악 ㆍ 수신 등 각과의 교사는 모두 명석한 천재와 심오하고 정예한 학술로 강연이 도도하여 마치 커다란 강하(江河)가 흐르는 것과 같았으며 또 그 영향이 두루 미쳐 사람으로 하여금 춤을 추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했으며, 제일 볼만한 것은 천개소문이 가르키는 체조와 창검술 교육이 활발 용건하여 마치 용이 오르고 범이 뛰는 듯한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각과의 교사를 모두 적당한 인재로 얻었으니 청년을 양성한 실효가 실로 매우 클 것이다. 각 학교의 정도는 어떠하던가?” 라고 묻자, 이에 “정학(政學) ㆍ 법학 ㆍ 병학(兵學) ㆍ 농학 ㆍ 공학 ㆍ 의학 ㆍ 철학 ㆍ 문학 등의 각 전문과가 모두 고상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양호한 것은 군사교육과 공사교육(工事敎育)이 실로 세계적인 특색이었는데, 다만 상업교육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 일대 유감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말씀하시었다. “이는 종래 조선인이 해상 무역에 주의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항해를 힘써 장려하여 해상권을 점령하고 상업을 확장하는 것이 가장 선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와 같이 인종이 성하여 가득 차고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는 육지생활만으로는 유쾌한 재미와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국가 권리로 말하더라도 해양으로써 강토를 삼고 선박으로 집을 삼지 않으면 활동할 무대가 좁고 막히어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어려우니 그런고로 현시대에 웅비 활약하는 국민의 경쟁점은 첫째는 해상권이요, 둘째가 육지권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짐이 조선민족의 교육을 위하여 해상보통학교를 건설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에 무치생이 말하기를, “단군대황조께서 학교를 세우신 기초가 이와 같이 공고하며 규모가 이같이 완비한 중에 제일 양호한 것은 군사교육과 공사교육(工事敎育)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세세손손이 그 복리를 이어받아 향유하면서 인격의 함양과 건강한 국체를 지켜나가 4천여년 역사를 빛낼 수 있었고, 또 해외의 다른 민족들이 우리 나라를 존경하고 스승으로 삼기를 원했던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과거 수백년간은 지도자의 방침이 잘못되서인지 일반 인심이 모두 부귀 영화만을 좋아하고 실질을 떠난 학문을 숭상하여 성리(性理)라는 낚시로써 명예를 낚으려 하거나 또는 문사(文詞)라는 것에 의해 마음을 파괴할 뿐이었습니다. 정학(政學) ㆍ 법학 ㆍ 병학 ㆍ 농학 ㆍ 공학 ㆍ 의학 등의 각 전문과에는 배움의 종을 철폐하고 배움의 뜰에는 찬기만이 돌아 선비 가운데는 쓸만한 실재(實才)가 없고 나라는 자립의 능력이 없어짐으로 마침내 그 결과로 4천년 조국 역사로 하여금 지하에 빠져 들어가게 한 현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를 선생이라고 호칭하던 자가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를 노예로 호칭하고 옛날에는 우리를 신성(神聖)으로 대하던 자가 지금에 와서는 우리를 짐승이나 가축으로 대우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사라져 간들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찌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다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진들 이 원통함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에 무슨 방법으로 우리 대황조께서 건설하신 학교를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구천(九天)의 하늘위에 올리고 4천년 역사의 광명을 한층 더 신성하게 하여 이 수치를 씻으며 이 원통함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그 방법을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느냐? 수치를 알고 원통함을 아는 것이 곧 그것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그러한 관계로 역사학이 정신교육에 필요한 것이다.
옛날에는 우리의 문명이 저들보다 훌륭했던 때문에 저들이 우리를 선생으로 호칭하며 신성으로 대우하였던 것으로, 지금이라도 우리의 문명이 진보하여 저들보다 훌륭하면 노예의 호칭이 변하여 선생이 될 것이오, 짐승과 같은 대우에서 신성한 대우로 변하게 받게 될 것이니 어찌 수치를 씻지 못하며 원통함을 달래지 못함을 근심하는가?
그러하므로 현재 천설학교(天設學敎) 중에서 일반 청년의 과감성과 자신력과 모험심을 단련하고 짐이 경영하는 해상보통학교와 대륙보통학교 중에서 일반 백성의 단합심과 활동심을 계발하고 4천여년 역사학교 중에서 수치심과 고통을 알게 하는데 힘을 쏟아 각과 교육의 발달이 일치하는 날이 오면 구지(九地)아래에 빠져버린 조선의 국기(國旗)가 다시 구천(九天)위에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치생이 말을 받아,
“지나간 대금국(大金國)의 역사에서도 특별히 부모의 나라를 위하여 또한 동족의 의를 위하여 항상 친애의 정을 표시했던 것은 두나라의 역사기록을 통해서도 역력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폐하의 영명(靈明)이 동족 인민을 간절히 생각하시어 현재의 고통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그윽하고 어두운 저승에서도 신령한 힘으로 지도하고 열어주시니 실로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臣)이 구구하게 원하는 바는 폐하께서 다시 현세에 나타나시어 혁혁하신 신무(神武)로 대지를 누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위 20세기에 들어와서 열국 멸종을 공례(公例)로 삼는 제국주의를 정복하고 세계 인권의 평등주의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우리 대동민족(大東民族)이 그의 선창자가 되고 또 주맹자(主盟者)가 되어 크나큰 행복을 온 세계에 두루 미치게 한다면 참으로 끝없는 은택이요, 더 없는 영광이겠습니다.”하자 황제가, “지난날 열국간에 전쟁이 그칠 날이 없게 되자 묵자(墨子)의 비공론(非攻論)이 나타났고, 또 교황의 압제가 심하게 되자 마르틴 루터의 자유설(自由設)이 주창되었으며, 군주(君主)의 전제가 극에 달하게 되자 루소의 민약론(民約論)이 나타났으며 열국의 압력이 더욱 심해가자 워싱턴의 자유주의가 떨쳐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이 일변하여 다아윈이 강권론(强權論)을 제창함으로써 이후 소위 제국주의가 세계에서 둘도 없는 기치가 되어 남의 나라를 멸망하고 그 종족을 멸하는 것을 당연한 공례(公例)로 삼았다. 이에 따라 세계가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 화로 말미암아 극도로 비참하게 되었으니 진화(進化)라는 관점에서 추론해 보더라도 평등주의가 부활될 시기가 멀지 않았다.
그런즉 오늘날은 강권주의와 평등주의가 바뀌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 때를 맞이하여 그것이 극도로 된 상황에서 극심한 압력을 받는 것이 우리 대동민족이며, 또 압력에 대한 감정이 가장 극렬한 것도 우리 대동민족이다. 그러한 이유로 장래에 평화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세계를 호령할 자가 바로 우리 대동민족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짐이 세상에 다시 출현한다고 할지라도 그 목적은 단지 이러한 주의(主義)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니 이 주의를 이행하는 경우에는 일개 아골타(阿骨打 : 金太祖의 이름)의 능력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가운데 수천만명의 아골타가 출현되어 그러한 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더욱 유력할 것이다.
너는 짐의 이러한 뜻을 일반 청년들에게 알리고 또 위촉하여 개개인이 모두 영웅의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영웅의 사업을 스스로 위임 맡아 평등주의의 선봉이 되기를 스스로 결심하면 짐이 특별히 옥황상제께 간청하여 그 목적을 성취하게끔 할 것이니 너는 이것을 십분 명심하라.”
그러자 무치생은 감격을 못이겨 엎드려 울다가 다시 얼굴을 들고 재차 청하여 물었다.
“폐하께서 옥황상제의 명으로 인간의 선악을 감찰하여 화와 복을 주재하시니 보시는 바처럼 우리나라의 매적당의 죄목과 애국지사의 선행에 대하여 이미 결심하신 바가 있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그 일은 물어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매국적당의 악한 기록과 애국지사의 선행한 기록은 이미 옥황상제의 재가를 받아 매국적당은 아비규환의 지옥에 영원히 던져 가장 혹심한 극형을 시행하고 애국지사는 영원히 가이 없는 복락을 베풀어 주기로 결정하였다.”고 함에 무치생은 하늘의 도와 신의 섭리에 대하여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묵묵히 생각하며 이르기를,
“내가 못남에도 불구하고 외람되이 황제의 소명에 의해 훈유를 받음이 이에 이르렀으니 실로 우리 동포의 살아갈 앞날을 열고 이끌어 주시고자 함이다. 그런데 감히 어찌 나같은 못난자가 지극하신 은혜를 사사롭게 생각하겠는가? 앞에서 말씀하신 수많은 가르침과 일깨움을 일반 동포에게 신속히 선포함이 마땅할 것이다.”고 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니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조금 기다려라. 짐이 너를 위하여 특별히 줄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좌우에 명하여 금화전(金花箋) 한 폭을 갖고 오라고 하신 후에, 황제께서는 친히 어필로 여섯자의 큰 글자를 쓰시어 선사하시니 바로 「태백음양일통(太白陰陽一統)」 여섯자였다.
무치생은 머리를 조아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물러나 대전 문밖으로 돌아 나오니 때마침 금계(金鷄)가 세 번 울고 바다 저 넘어서 해가 떠오는지라 큰 꿈을 생각하면서 장래를 내 스스로 알게 되었다.
우리 동포형제 가운데 누가 이를 단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진정한 진실이라고 말하겠는가? 꿈이라고 하기에는 구절구절 이야기가 너무 진정한 것이고,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그 거닐었던 바가 너무 꿈같은 경지였다. 꿈의 경지에서 진정을 구하면 우리의 영명(靈明)이 천지의 신명(神明)으로 감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그런고로 삼라만상의 만물은 모든 것이 오로지 마음에 달렸다고 하는 것이다. 아! 이 '마음'이여! 그 진지한 정신은 감격하게 하지 않는 바가 없고 이룩하지 못할 바가 없는 것이니, 아! 우리 동포 형제여!
출처: http://independence.or.kr/NEW/media_data/chong/e0008/e0008_1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