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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도미니칸 영성의 특징
1. 그리스도 중심주의 - 신 중심주의
신학적인 차원에서 우리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심사인 자연, 인간, 신(神)의 차원에서 우리 영성은 신(神) 중심주의이다. 영성의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카리스마 주의도 포함된다. 사실상 모든 영성은 하나의 복합체이고 포괄적으로 하느님 중심인 것이다. 이 셋의 구별은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구별하는 것 만큼이나 분명하면서도 또한 구별할 수 없는 모호성을 지니다. 그렇다 해도 도미니칸 영성의 특징은 그 근원을 볼 때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인간 역사 안에 강생하심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실존하셨고, 우리가 가야 할 뚜렷한 길을 제시해 주신, 구체적인 모습의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이고 우리 삶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신 중심주의는 하느님을 가지 식으로 체험하고 상상하는 데서 야기되는 위험성을 가진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종교 다원주의가 표방되는 시대의 하느님의 모습은, 너무 다양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하느님은 착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띠는가 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해치고 적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정작 구원의 완성자인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도 한다.
카리스마 주의의 위험성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볼 수 없고 성령의 카리스마 역시 내적인 체험으로 고무되는 힘이고 직관이기에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차서 영이 일러주는 대로 여러 가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본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새 포도주에 흠뻑 취했다.”(사도해전 2,4.13)고 단정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구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 시대는 성령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성령의 움직임을 인정하기에, 구체적인 성령의 하느님을 그려내기는 더 어려워진다. 이런 점에서 성령 운동의 문제들과 그 위험성을 생각할 수 잇다.
우리는 신 중심주의와 카리스마 주의의 함축성과 위험성을 고려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신 하느님을 찾는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우리는 하느님을 바로 볼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를 증언하셨고 우리에게 당신의 길을 제시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요한 14,6)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고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과 성삼위의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게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도미니칸 영성의 특징은 균형과 조화에 있다.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 관상과 설교, 감성과 이성, 공부와 기도, 말과 모범들이, 어느 한 편에 속하면서 보완하는 정도의 균형이 아니라, 양쪽이 동등한 비중으로 자리하는 조화이다. 그것은 긴장과 노력이 용구되는 흑과 백의 공존과 같이 특단의 분명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완고한 유다인들의 치우침을 나무라셨고 율법에 가려진 왜곡된 하느님을 선포하는 그들의 태도에 분노하셨다. 율법은 유아적인 단계의 수단일 뿐이지, 진리 자체가 될 수 없으며, 율법의 정신과 완성은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보여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잃어버린 아들을 되 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 (루가 15,11-32)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이다. 예수는 이런 아버지의 용서와 화해를 설교하셨고 자신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 용서와 화해의 표지임을 십자가로서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 자신과, 그의 사랑의 삶이, 곧 구원의 진리가 된다. 도미니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현존과 염원을 세상에 투시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수난과 죽음을 수반하게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이고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1고린 1,23)
진리의 개혁은 일시적인 대응책으로서가 아니라, 역설적인 하느님의 방식,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통해 가능해 진다. 도미니칸의 삶의 원리 또한 이런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심
인간 그리스도에 대한 수도회의 다감한 애정은 도미니코의 모범과 형제들의 개인적인 성화의 추구와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선교 안에서 우러나온다. 형제들은 그들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을 이끌어 냇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성혈, 오상, 상처입은 성심, 성체에 대한 신심을 보여 주었고 발전시켰다.
도미니코의 참된 모습은 십자가 아래서 기도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고통중인 그리스도가 그의 관상의 중심이었고 완전한 집중으로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둔 채 성당 제대앞에 머무르곤 했었다. 토마스 역시 열렬히 십자가를 응시함으로써 십자가에 달린 구원자에게로 들어 높여졌고 그에게 말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토마스, 너는 나에 대해 잘 썼다. 너의 수고의 댓가로 무엇을 원하느냐?” 토마스는 대답했다. “주여, 오직 당신만을 원합니다.”
신비가인 헨리 수소는 신성(神性)과의 일치를 구하면서, 영원한 지혜이신 분께 사랑의 하소연을 하고 있다.
“나는 어디서나 당신의 신성(神性)을 찾는데, 당신은 당신의 인성(人性)만을 보여 주시고, 나는 당신의 달콤함을 원하는데 당신은 쓰라림만을 주십니다. 나는 젖을 구하는데 당신은 나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영원한 지혜께서는 대답하셨다 :
나의 인간적인 쓰라림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거룩한 경지에 이를 수 없고 경이로운 달콤함을 맛볼 수도 없다. 나의 인성을 무시하고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더 깊은 나락에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인성의 길을 걸어야 하고 고통의 문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니 무기력을 떨쳐버리고 기사다운 용기로 투기장에서 나와 함께 하자꾸나.
헨리는 십자가 길을 발전시킨 선구자였다. 그는 습관적으로 최후의 만찬에서 갈바리아까지의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일백개의 묵상들을 만들었다.
. . . . . .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모든 고통은 철저히 하나 하나 소환 되었다 . . . . . .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신심을 혼자 간직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구원의 유일한 원천인 수난에 대한 묵상을 하는 동안, 같은 어려움과 메마름을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영혼들을 위해 나누고 싶어했다. 이렇게 해서 묵상들은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는 1542년에서 1554년까지 12년 동안이나 매주 예수 수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고, ‘수난의 찬가’(Canticle of Passion)라 불리는 신심을 발전시켰다. 성서에서 발췌한 시구(詩句)들은 그리스도 수난의 요약으로 정리되었고 각 절에 대한 짧은 묵상은 수난의 고귀함으로서 영혼에 깊은 감동을 주며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해 준다.
초기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에 대한 신심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그 신심은 그들을 상처입은 그리스도의 성심에로 이끌어 들였다. 대 알베르또는 성심의 사랑의 선물인 성체를 보았고 마에스터 엑카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체의 성심에 대해 말하고 잇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불태우신 그 사랑의 뜨거운 불로 모든 것을 그 자체로 끌어 드리는 것을 봅니다. . . . . .
그의 심장은 불과 같이 타오르고 사방에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렇게 그는 온 세상에 대한 그의 사랑의 불로서 십자가에 불을 붙이고 그 사랑의 열로 온 세상을 그에게로 끌어 들입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리치의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와의 “심정(心情)의 교환”(Exchange of hearts)을 체험했었다. 리마의 성녀 로사는 탈혼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사랑인 로사, 나의 신부여”
뽀레스의 성 말띤은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는 공덕(功德)을 얻었다.
그리스도의 늑방의 상처와 성혈, 상처입은 성심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끊임없는 신심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편지 중에는 이런 신심의 내적인 의미를 함축한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하느님의 아들의 늑방에 당신의 입술을 갖다 대십시오. 그 곳에서 사랑의 물이 나오고 우리의 온갖 부정을 씻는 피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거기에서 쉼을 찾고 영혼의 눈은 사랑으로 열려지고 타버린 심장을 보며 그에게 일치할 것입니다. 너무도 강렬한 사랑 자체를 보게 됨으로써 영혼은 그 사랑의 보답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영혼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하느님이고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됨으로써 완전해질 것입니다. 영혼은 또 다른 자기인 그가 되기를 갈망함으로,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 나르니의 복녀 루시아 등 줄잡아 83명의 도미니칸들이 성흔의 혜택을 받았다.
거룩한 이름에 대한 수도회의 신심은 설교 선교로부터 퍼지게 되었고 수도회는 소명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이름을 전파하도록 위임되었다. 1220년 레지날드에 의해 이끌려졌던 꼴로니아의 헨리는 이 신심을 보여주었던 첫 도미니칸이었다.
형제로서 헨리를 사랑했던 죠르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생애에 대한 애정에 찬약술을 끝맺고 있다.
그는 어떤 경의와 예배 보다 더 가치 있는 예수라는 이름을 내놓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군림하며 교회나 강론 중에 너무도 많이 언명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즉시 경의에 찬 현시로 이끌어 준다.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은 제 2차 리용 공의회의 결정 사항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당시 총장이었던 베르첼리의 복자 요한에게 도미니칸 설교에서 이 신심을 전파할 것을 촉구한테서 확장 되었다고 본다.
그 공의회에서는 불경과 독성에 대한 치유책으로 거룩한 이름이 언급될 때 마다 신자들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공포했던 것이다. 베르첼리 총장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수도회의 설교 운동을 조직하였고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은, “예수라는 달콤한 이름에 대한 사랑의 확장”을 설교하고 “차가운 마음에 예수의 이름으로 불을 붙이는 거대한 열풍”을 모색했던 헨리 수소의 고무로 라인랜드(Rhineland)의 도미니칸 수녀들에 의해 14C까지 계속되었다. 15Cdp 도미니칸들은 많은 곳에 거룩한 이름의 학회(Holy Name Society)를 설립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에 대한 뚜렷한 표현들을 일깨워 주었다.
도미니코와 토마스, 시에나의 카타리나, 빈센트 페레르 등 많은 도미니칸들의 영성생활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거룩한 희생의 감사제인 미사와 성체에 대한 신심이었다. 토마스가 노자성체를 모시면서 언명했던 것 보다 더 힘있게, 성체에 대한 그의 신앙을 드러내 보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오, 내 영혼의 구원이시여, 나는 당신을 모십니다. 내 모든 연구와 기도와 노동은 당신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가르치고 썼던 많는 것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교회에 대한 신앙으로 나는 가르치고 썼으며 이제 모든 것을 당신 심판에 맡겨드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은 수난과 고통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가 된다. 도미니칸 영성의 특징은 십자가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고 그것은 고통의 십자가를 통한 것이다. 고통받는 하느님을 받아 들이지 못할 때 설교는 어려워진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고통 자체를 초월하는 힘을 지니며 그러한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가 알 때, 이미 고통은 고통이 아닌 사랑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신(神) 중심주의(中心主義)는 문자 그대로 하느님 중심으로 하는 사상을 말한다. 이는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 중심주의가 도미니칸 교의와 실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고자 한다.
도미니칸의 외적인 중요한 목적은 설교이다. 관상으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먼저 영혼에 은총을 제시해 주고 이를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은총은 하느님 만이 주실 수 잇는 무상의 초자연적인 선물이고 영혼은 이 은총의 힘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 은총은 여러 덕(德)과 초자연적인 은혜를 주는 것이다. 은총은 우리 안에 성령이 머무르도록 하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벗이 되게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구원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은총으로 인간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단지, 그 언어와 모범을 통해, 특히 사제직을 통해 도구가 되고 통로가 될 뿐이다. 도구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손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특별히 사목자는 하느님 은총과 깊이 결부되어 있어야 진정한 하느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설교를 위한 영성은 필연적으로 신 중심적이어야 한다.
설교는 관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된 관상 안에서 설교는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대한 공동전례와 항구한 공부 역시 신 중심주의의 요소를 이룬다. 공동전례는 거룩한 진리의 연구를 사랑으로 하게 하고 열정적으로 이끌어 주며, 하느님의 빛과 힘으로서 신학자를 성인으로, 성인을 신학자가 되게 한다.
신학은 신앙의 내용을 인간의 노력으로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며, 신앙과 사랑으로 하느님과 깊이 일치된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일상 생활의 여러 크리스챤 덕(德)을 실천하고 우리 사랑의 중심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을 더 잘 인식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우리는 그에 대해 더 깊이 알기를 원하고 더 기꺼이 그의 뜻을 받들려는 것과 같이, 하느님이 우리 사랑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뜻을 더 충실히 따르려는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도미니칸이 신학을 연구할 때는 언제나 신 중심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하느님은 모든 신학의 주체이시고 인간 안에서 늘 새로워지는 하느님은 참된 탐구의 대상이 되며 신학은 인간을 연구할 때도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는 하느님을 연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외적인 조건은 하느님의 성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을 맞대면하게 될 때 우리를 둘러쌌던 모든 가시적 조건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희미하게 그의 실재를 반사하고 있지만 실재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하느님과의 관계 실존이고 하느님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거이시고 창조자이신 하느님은 스스로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인간의 영원한 행복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도미니칸은 피조물의 모든 완전성의 원인이 하느님께 있음을 인식하는데서 신 중심주의를 생각한다.
토마스의 은총론에는 신 중심주의가 잘 나타나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본래 선한 것이고 완성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인간은 은총없이 스스로 하느님의 존재와 무한을 알 수 잇고 자기 영혼의 영원성(Immorality)도 알 수 잇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는, 은총 없이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는 자연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도 없는 존재이다.
은총은 인간의 본질을 초월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소망, 사랑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성령의 모든 선물도 필요로 한다. 성령의 선물 또한 초자연적인 것이므로, 그것을 받게 된 인간은 그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 자체가 인간을 대신하여, 선(善)을 향해 걸어 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신다. 하나는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초월이고, 존재와 본질이 동일한 무한한 선(善)이시고, 최상의 지혜로서 외적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내적인 마음을 통해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에게 향하도록 고무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나,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 또한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신다. 이처럼 은총 역시 우리의 수용 여부의 자세가 요구되는 하느님의 활동이다. 은총은 모든 인간 행동 유발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그 행동은 인간에게 달려 있기도 한 것이다.
도미니칸 금욕주의는 도미니칸 신 중심주의로부터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일치라는 특별한 성격을 부여 받는다.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인간은 이웃 사랑을 구가하고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금욕도 하게된다. 이웃 사랑과 자신의 약점을 고치려는 노력은 하느님과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속성으로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의 확산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상과 사도직의 관계가 규명된다.
은총에 있어서도 도미니칸의 신비적인 생활에는 특기할 것이 있다.
많은 신학자와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적인 생활에서 인간의 영혼은 능동적이라기 보다 수동적이고, 은총이 영혼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마스 주의에서 이런 은총은 비상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다.
도미니칸에 있어 신비적인 생활은 어떤 특권적인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신비적인 생활은 완덕의 맨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며, 모든 사람이 그곳을 향해 가야하고 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상은 특히 주부적인 관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탁하는 신앙이 요청된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피조물을 향해 언제나 온전히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도미니칸 수도자는 자신의 보속의 실천을 잊지 않는다. 그를 통해 더욱 더 풍요로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외적인 객체성과 내적인 주체성의 하느님을 바르게 파악함으로써 이 세상에 산재된 모든 자연적, 초자연적, 인간적, 신적인 공통의 본질과 유리(遊離)를 읽을 수 있으며, 우리가 염원하는 종국적인 사랑의 실현, 초 실재와의 만남, 진리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된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합치, 사변적인 추리와 신비적인 정감의 합치(合致) 안에서만 가능한 실재,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미니칸 영성의 그리스도 중심주의-신 중심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