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서의 공성
<출처 : 용수의 공사상 연구(프레데릭 J. 스트렝 저, 남수영 역, 시공사)>
‘공성’의 이해에 대한 심리학적 차원은 ‘자유’의 관념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공성의 자각은 해탈론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그것은 여러 주장의 허구적인 본성을 인식하고 그 자각을 넓혀 나감으로써 존재와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적 관념을 따르려는 시도에서 생겨나는 충돌과 혼란에 적용되는 자유이다.
모든 개별적인 사물들은 ‘부정적인 동일성’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권리를 상실하는데, 공성의 자각도 그런 방법에 속한다.
최고의 수준에서 이 자유는 심리적인 경향들을 통해서 분명해지며, 내적 갈등의 소멸을 통해서 인식된다.
그것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그 상황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서적인 강박 관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공성 속에 머무는 것’이란 경험의 개방 상태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공성을 자각하면 개인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대상이나 세력들이 공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런 자유를 얻게 된다. 이런 자각이 커지면 점차 그런 주장들로부터 초연해지고, 깨달음은 확장된다.
이것은 존재의 다른 차원으로 신비하게 탈출하는 특별한 순간이나, 어떤 신성한 시간과 장소에서 사제(司祭)의 활동에 의해 획득되는 자유가 아니라, 존재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자유이다.
용수의 사고와 반야부 경전의 관계는, 공성의 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정신적 수행과 함께 성장하는 점진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공성의 자각은 결국 지적, 정서적 자각의 모든 영역 속으로 확장될 것이다.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알게 되면 지성과 감정은 온갖 억측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또한 일종의 정화(淨化) 과정이다.
그것은 집착에 수반하는 증오, 두려움, 탐욕, 분노 등의 온갖 악들을 제거한다.
공성을 자각한 사람은 욕망 및 욕망의 ‘원인’이나 ‘결과’가 모두 공허함을 자각함으로써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욕망은 더 이상 그를 유혹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용수에게 번뇌(煩惱)는 열반과 다른 존재 양태로 생각되는 존재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구분이나 독자적인 존재성, 혹은 불변성이라는 관념에 속박되어 있는 삶을 의미한다.
‘존재의 흐름’, 즉 윤회로부터의 자유라는 관념은 자아로부터의 자유라는 관념과 상호 관련된다.
의지, 행위,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결과’들의 연속체로 정의되는 자아는 속성들을 소유할 수 있는 실체적인 본질을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제일원인(第一原因)이나 최종적인 결과로 간주될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볼 때 무아설의 확장으로 볼 수 있는 공성의 자각은,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따르는 요가 행자가 ‘자아’를 알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실체에 대한 절대적이고 내면적인 체험에 대한 관심을 차단한다.
현상적인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법들도 아무런 궁극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자아로부터의 자유란 부분적으로는 진리를 알기 위한 잘못된 범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그 잘못된 범주가 사라지면, 그로 인해서 일어난 실체들에 대한 정서적인 집착도 사라질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 낸 정신적인 허구의 그물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소멸은 어떤 것 속으로 흡수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여진 것을 ‘공화(空化)’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공성의 자각, 즉 공화 과정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의미를 예언적인 종교들이 주장하는 우상(偶像) 파괴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상이 삶과 진리의 지배자인 신(神)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인 것과 마찬가지로, 용수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추구가 허구적인 존재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라고 보았다.
그 두 가지에는 모두 실제로는 궁극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집착이 있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하는 이유는, 구원의 수단으로 간주되는 공성의 자각이, 파괴되어야 할 실재적인 악(惡)이나 실재적인 파괴나 실재적인 악의 파괴자를 상정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악, 파괴, 그리고 파괴자는 사실은 정신적인 허구들이며,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해탈의 길을 가리키는 데 유익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어떤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는 자각이 바로 ‘실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것이다.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 즉 법(法)에 대한 이해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이런 ‘공화(空化) 과정‘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이다.
직접적인 쾌락이나 고통으로 인도하는 욕망의 모든 대상들은 그 자신을 유지하는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가장 순수한 종교적 헌신의 대상조차도 ’공‘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인식이나 욕망의 모든 대상이 허구적으로 조작된 실체라면, 사람들의 ’신(神)‘ 역시 부분적으로는 정신적인 허구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며, 그 사람의 견해에 근거하는 가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식의 구조는 그 자체로는 유용성이 부정되며, ’의존적인 유용성,‘ 즉 공(空)적이고 현상적인 유용성만이 인정된다. 여기서 우리는 ’공성‘이 절대적 관념으로 간주된다면, 그 역시 독자적인 존재성을 주장하는 우상의 형태를 취하게 되므로 제거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한다.
만약 ’공성‘이 ’포착되어야‘할 어떤 대상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진실한 자유를 왜곡하는 비궁극적인 어떤 것이 되고 말 것이다.(’중송‘ 제24장 제11송)
공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내적인 평안함은 부분적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뒤 오는 마음의 평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성의 인식은 모든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해답이다.
그 이유는 ‘해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들이 이제 더 이상 ‘문제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중송’ 제13장 제8송) 이런 종류의 구원론적인 ‘해답’은 언어적인 표현과 비언어적인 지시 대상물 사이에 1대 1의 상관성을 가정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절대적인 실체의 부정은 절대적인 ‘근거’에 기반을 둔 가치 체계를 붕괴시킨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아의 붕괴이다.
우리들이 그 ‘자아’란 단지 연관된 체험들의 집합이며 실제로 거기에는 붕괴될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면, 그 자아는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다. ‘연관된 것’ 자체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성이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오직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사물들’에 대한 자각인 ‘공성’만이 있다.
이 자각이 절대적 혼돈(混沌, chaos)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용수가 ‘공성’이 허무주의나 무인성(無因性, ahetutva)과 동일하다는 비난을 거부했는지 알 수 있다.
인식의 ‘공허한 구조’는 순간적인 존재 속에서는 쓸모가 있지만, 절대적인 원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진리란 정말로 실재하는 실체와 고유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유용성을 주장하는 어떤 진술이 아니라, 그와 같은 모든 주장에 대한 무관심인 것이다.
첫댓글 서양인들의 저술은... 뭐랄까... 자아(self)를 중심에 두고 빙빙 도는 편이고, 자유등 "대"한 무엇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약이라 할 수 있는데요. 물론 자유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거구요... 하지만 방향성을 살필 때,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서양쪽 계열의 저술들이 좀 그런 편입니다... . . 중론의 사고가, 속박 즉 조건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구요... 속박 즉 조건을 긍정하는데, 속박 즉 조건에 따른 드러남은 자성이 없다는 점을 보이는 거죠... 어떠한 실체는 아니란 건데요... 속박 즉 조건을 부정한다면, 일체개고를 부정하는 것이고...그러면 고성제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가능하지 않거든요...
본글과 같은 내용의 글들은...아무래도 부처를 상상한 다음, 부처에 대해 설명하려는 자세가 강합니다. 그렇죠? 근래 다른 곳에서 이중표님의 견해에 대해서 그와 같은 비판을 한 적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불교는, 부처나 열반에 대해 입을 대지 않습니다. 확고하거든요. 불자는 괴로움을 이해하려고 해야지, 부처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단 말이죠... 중생은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뿐, 부처를 이해할 순 없단 말이예요. 이러한 기본 자세등에서, 사고등 마음의 행위에 있어서의 방향성도 결정되거든요. . . 방향성으로 따질 때, 중생에게 흡족한 것은 괴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거의 맞아요... 뭐...틀림 없거든요...
형상이 있을 때, 형상이 있음을 안다... 그런데 있음이 어떠한 실체로 있음이 아니라는 거죠...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니...다른 무엇이 변화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없다가 실제 생긴 것도 아니고, 무엇이 있다가 실제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다른 무엇이 변화해서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첫번째 원인이 있어서 그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 . 서양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반야부가 이해를 다룬다고 볼 수는 있는데요. 티벳불교도 그렇게 본단 말이죠... 그 이해가 밑도 끝도 없는 그냥 머리로만 이해가 아니라, 알아차림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견해의 다스림을 위한 이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아요...
이제는 방문객님이 말씀하시는 거 조금씩 이해가 되요 ...그 전에도 이해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머리로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어요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방문객님
"비약이라 이름할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내용을 잊지않기님이 올려주셨는데요. 32번 본글과 그 이후의 본글들을, 사고의 "결(방향성)"에 주의하면서 살펴 보면..."괴로움을 떠나려고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쪽에 안목이 분명하게 생기면, 역류문을 떠나는 일이 없게 되고, 보다 바르게 불법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위에 적혀 있는 제 말에 동의가 안되는 분들이 많을 수는 있지만 말이죠... 얼핏보면 같은 말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다구요... 하지만 그런 "결"에 민감해지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면 소위 일상에서도 사뭇 달라지게 되거든요...
좀 부연설명하자면, 32번 본글은 크게 두가지 관점에서 소위 "공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삼매와 사띠입니다. 집중과 자각이죠... . . ① 어떤 현상이 있을 때, 그 현상 자체를 떠나지 않고 바라보는 집중으로 파악되는 공성... ② 어떤 현상이 있을 때, 그 현상의 인과를 살핌으로서 파악되는 공성... 그리고 ③ 이러한 두가지 논의가 초점이 된 "어떤 현상"을 떠나서 말해지고 있지 않단 말이죠... . . 잘 읽어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어요... 법을 바라보는 안목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도 나이롱이긴 하지만, 저 정도의 나이롱은 저리 가라고 하는 완전 나이롱도 무지 많아요... 바로 우리의 성향에 보비위만 맞추는 나이롱들요...
그리고 위에 적었듯...우리 성향에 보비위만 맞춘다면, 역류문인 불법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죠... . .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32번 본글은..."색즉시공(형상은 공성)"은 '삼매(집중)'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고..."공즉시색(공성은 형상)"은 '사띠(자각)'에 따른 '비빠싸나(위빠싸나, 통찰)'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렇단 말이죠...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 가장 전통적인 서술 방식의 하나입니다. 대충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대충 하는게 아니라구요. 같은 말 같지만, 같은 말이 아니고 그런 경우가 많아요. . . 불자들이, 불법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보다 온전하게, 불법에 다가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적어 봅시다. 위에 보면,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 가장 전통적인 서술 방식의 하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근거등도 없는 뻥이 아니구요... 과거 말한 바 있지만, 중국 화엄종 법장조사의 반야심경 주석을 봐도, 소위 지관수행과 관련하여...색즉시공을 "지(그침, 집중)"에 대응시키고...공즉시색을 "관(위빠싸나, 통찰)"에 대응시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 지관을 함께 행한단 말이죠.... 두가지 방식으로 접근한 다음, 그 둘을 또다시 통합하는 것이죠?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이 따로 국밥인 것만은 아니라구요...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논의에서 과거에 적은 바 있는, 무자게 멋진 표현이 나와요.
[색즉시공을 알 때, 큰 지혜가 일어나 생사를 여의고...공즉시색을 알 때, 큰 슬픔이 일어나 열반을 여읜다.] 무자게 멋진 표현이죠? 제가 해당 표현을 읽었을 때, 정말 감동했었단 말이죠... 지금도 그렇구요... 해당 표현의 취지는, 상좌불교에서도 동일합니다. 상좌불교에서도, 소위 자비행과 관련하여 관법을 중시한다구요... 물론 관법이란 표현을 쓰기 보다는, "자비심을 배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편이긴 하지만요... 어쨌든...해당 표현에서 "열반을 여읜다"의 '열반'은, 중국 화엄종의 네가지 법계 중 이법계로 제한하여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구요... 그게 무난하다는 거죠...
꼬리글 읽고 32번 본글 여러번 읽었는데요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해가 어려웠어요 ...전체적인 의미는 대충 알겠는데 ...만약 제가 어느 정도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었다면 ...무슨 의미인지 몰랐을거 같아요 ...그만큼 불법을 바르게 이해하기가 어려워서겠죠 ...? 방문객님 설명을 읽고 다시 읽어도... 좀 어려웠어요 ...차라리 방문객님 설명만 읽는 것이 더 이해가 잘 된다고 할 수 있어요 ... ... ... [색즉시공을 알 때, 큰 지혜가 일어나 생사를 여의고 ...공즉시색을 알 때. 큰 슬픔이 일어나 열반을 여읜다.] 이 표현을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요 ...조금 아리다고 해야 하나 ...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