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선언 하노라! 고종황제는 환구단(원구단)을
쌓고 그 단 위에서 황제에 오르면서 엄숙히 선언했다. 1897년
9월 17일..........., 황제에 오른 고종은 이 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천황등과 대등한 자주 독립국가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것이다. 그리고 1899년 그 옆에 황궁우를 짛어 신을 모셨고
1902년 고종즉위 40년을 기념해서 제사를 지낼때 악기를 형상화한 돌로
만든 석고를 설치했다. 환구단 앞에는 정문을 세워 환구단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일련의 시설이 환구단이다.
조선조 말 물밀듯이 밀려드는 외세의 와중에서
국모 왕후가 시해되고 궁궐을 떠나 외국공관으로 피난가야
했던 고종이 1년만에 궁궐로 돌아와 자주 독립된 나라의 기틀을
다지려는 큰 뜻으로 황궁 덕수궁 앞에 세운 환구단이다. 중국에서
오랜 세월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천단과 같은 격의 제단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몰론 그밖의 열강들과 대등한 자주독립국 "대한제국"
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비운을 맞아야 했고 나라를 빼앗은 일제는 그
환구단을 헐어 자주 독립의지를 말살 해 갔다.
환구단(원구단) 사적 제 157호 황궁우와 환구단의 정문, 석고
환구단이 헐린 자리에 일본총독부 산하
호화찬란했던 4층 건물의 철도호텔이 섰고 일본이
패망하자 미군정 사령부를 거쳐 이승만대통령의 집무실로도
활용되었던 조선호텔은 오늘날 “웨스틴 조선호텔” 이라는 이름으로
20층 건물로 바뀌어 화려함을 뽐내지만 그 호텔자리가 바로 나라를
빼앗은 일본이 대한제국 자주독립의 상징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지은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다. 많은 분들이 그 길을
오가고 조선호텔을 드나들어도 그런 사연까지를 알거나
깊은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듯하다.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투명 통유리로 된
창 너머로 황궁우가 바라보인다.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환구단이 자주독립국임을 상징하는 숭고하고 신선한
곳이라면 황궁우는 자주독립국 하늘 神, 조선 역대 왕의 신위가
모셔진 곳이다. 황궁우는 환구단이 있어서 세워졌다고 할 수있어서
황궁우는 환구단의 일부이지 그 자체가 아니다. 환구단은 사라졌고
그 부속시설만 남아있는 샘이다. 어찌 되었던 몸통 환구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도 그 정신을 이어가면서 남은
시설이라도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 하려는
노력에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디.
조선왕조 태종 때 소공주 궁으로부터
임진왜란 때 일본군 사령부, 또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온 명나라 이여송의 군 사령부, 남별궁, 환구단
조선철도호텔, 조선웨스턴 호텔 등으로 이어온 역사의
현장 그 얘기는 이미 써 올린 글을 이 글 끝부분에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오늘의 모습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철도호텔을 지은후 그곳에서 바라본
황궁우와 서울시가지 모습이다. 1913년 환구단이
헐리면서 그 정문이 우이동 그린파크 정문으로 쓰이는 등
그 모습이 바뀌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당국에서 남은시설이라도
원형을 살려야 된다면서 2009년부터 고증을 거쳐 엣 모습을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본식 석등을 새로 바꾸고 잔디조경으로 되어있던 바닥을
마사토로 깔았다. 환구단이 헐릴때 옮겨졌던 원래의 환구단
정문도 다시 돌아왔다. 남은 환구단 모습을 본다.
현재 남은 환구단의 주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황궁우 안에는 신위가 모셔져 있다. 아래 사진은 안에
모셔진 내부 신위함. 태조 고황제, 황지기, 황천상제의
모습으로 문화제 전문위원 윤홍로 선생님이 보내주신
사진이다. 내부 촬영을 위해서는 별도로 승인을
얻아 정해진날 촬영해야 한다
아래는 황궁우 천정반자 용문양이다.
원구단과 황궁우 출입문을 여러 방면에서 촬영했다.
위 사진은 황궁우에서 옛 환구단 터 조선호텔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문 뒤에 통유리 창문 너머로 조선호텔 1층
커피숍 내부가 잘 보인다. 황궁우에서 이 문을 통해서 밖으로
통하는 길은 없다. 오직 조선호텔 커피숍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커피숍에서 황궁우는 물론 잘 보인다.
조선호텔 쪽에서 바라본
출입문의 여러 모습이다. 답도라고
불리는 돌계단의 용머리나 수호신 등 정성을
들인 조형물이 배치되어있다.
출입문 세게의 통로 천정에는 다음과 같은 각가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다.
환구단을 헐고 짛은 옛날의 조선호텔과 황궁우가 함께 보이는 모습이다.
아래는 황궁우 뒤로 통하는 문이다.
아름다운 단청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무슨 시설인가 내려가 보았더니 을지로
입구로 통하는 길이었다.
황궁우 바로곁에 돌로만든 북, 석고(石鼓)가
있다. 1902년 고종황제 등극 4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조형물이다. 세개의 조형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 한 것으로 용무늬가 새겨져있다. 조선조
말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환구단의 정문이다. 환구단의 명칭과 정문에 대해서 문화제
전문위원 윤홍로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정문은 호텔 건축 시 철거하여
우이동 그린파크 정문으로 했다가 몇 년 전에
그린파크 폐쇠로 철거하려던 것을 서울시청에서 이 일을
알고 보존하기 위해 크게 수리하여 현 위치에 이전 하였습
니다. 정문의 원래 위치는 현 호텔 정문 쪽 도로상이었
습니다. 도로 때문에 원위치로 이전하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원구단으로 쓰던 명칭이
환구단으로 변경된 이유는 문화재청에서
2005년에 고시하였습니다. 원구단과 환구단이
혼용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검토했는데. 결과는
1897년 10월 12일자 독립신문에서 환구단이라고
표기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정문 바로 밑에 도로와 접해있는 조형물이다.
환구단 시민광장임을 알리는 북과 원구단이 소개돈 북 그리고 환구단
시민광장을 소개하는 북 이렇게 세개의 조형물이 있다.
오늘 글은 문화훈장에 빛나는 대한민국 문화재위원 윤홍로선생님
도움으로 썼고 유카리나님의 연주곡 황성옛터와 아리랑을 올렸습니다.
상록수 선생님께서 댓글을 쓰셨기에
본문에 옮기고 필자의 답글을 함께 씁니다.
환구단을 원구단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적이 도시의 빌딩에
포위되어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하지요
주말 편하게 보내세요
답 글
고맙습니다.
일제강점기 정동에 있는
덕수궁과 방송국, 덕수궁 눈 앞에
보이는 조선호텔이 하나로 연결된 조선
경성의 명소였습니다. 경성방송국 얘기를 쓰다가
얫날의 조선 철도호텔을 알게 되었고 그곳이 놀라웁게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원구단 자리였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자주 들리고 글도 썼습니다. 그런데 지난 3월에 가보니
공사를 하고 있고 정문이 새로 설치 되었어요. 7월에 가보니 공사가 끝나
바닥이 마사토로 바뀌고 석등이 바뀌는 등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현장을 다시 촬영해서 다시 글 한편을 썼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안내
표지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날 보니 안내판이 있고 그 안내판에
환구단이라고 되어 있어요. 일제 강점기에 쓴 글들을 근거로
환구단이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 했었지요. 그런데 전문가
들이 환구단이라고 하니 저도 거기에 따르기로 하고
환구단 원구단이라고 썼습니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적이
도시의 빌딩에 포위되어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하다는 말씀 당연합니다.
사실 1968년 조선 호텔을 다시 지을때 서울시청 광장도 그 무렵에 넓혔는데 그때 지금처럼
문화재나 사적을 중요시 했다면 서울시청 광장에서 원구단
까지를 하나로 묶어 복원 했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때를 노친것 같고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린것 같습니다. 늘
그 곁을 지나며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이곳을 찾으시는 분들이
함께 보실 수 있도록 참고로 이 부근의 옛 사진
한장과 얽힌 얘기를 씁니다.
1920년경 아직 경성부청을 짓기전
서울의 중심가 사진입니다. 경성부청과
중앙청은 192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서울시청 터라고
쓰여있는 곳은 그때의 경성일보사로 해방후 서울신문을 거쳐
지금은 프레스 센터로 불립니다. 이 경성일보사도 민족지를 총독부가
접수해서 총독부 기관지가 되었지요. 이 경성일보사 앞에 일제가 경성부청을
지어 덕수궁의 맥을 끊었습니다.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으로 지어졌다가 합병후에
조선은행이 된 것이고 미스코시 백화점이라고 쓰인곳이 1930년에 문을 연 미스코시
(三越)백화점이고 그 전에는 오복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입니다.
경성부청이라고 쓰인곳이 옛날 제일은행 본점으로 1930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
지역이 일제가 들어오면서 개발되기 시작한 서울의 중심지 충무로와 소공로
입니다. 이 소공로도 일제때는 초대총독 하세가와(長谷川 )이름을 따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조선호텔 앞에는 경성 공회당이 있었습
니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1926년 일본 이시이
바쿠[石井漠] 춤을 보며 감명을 받아 무용공부를
했고 여기서 1927년 데뷔공연을 했습니다.
정성길 선생님이 공개한 사진에 필자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파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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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