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150428화 Deulrali 3200m-ABC 4130m
엊저녁 잠들 무렵 멀리서 무언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잠시 들려왔다. 약간 겁이 났지만 곧 잠이 들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다 보니 별들이
더 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간단히 하고 배낭은 숙소에 맡겨놓고
허리색 안에 지갑, 휴지, 물통만 넣고 06:20에 출발한다. 개나다인
Matt는 6시에 이미 출발했다. 잘못 전달받은
상황에 많은 우려를 했지만 길은 여느 길과 다름없이 편안하고 무난하다. 단지 배낭 없이 가벼운 차림이긴
해도 3200m에서 4100m까지 오르는 일이 좀 버거울
따름이다. 다시 날씨가 흐려지긴 했지만 비는 오지 않아 햇볕이 없어 수월한 편이다. 고도를 올릴수록 아랫동네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나무들이 없어지고
넓은 계곡을 타고 오른다. 3500m지점에서 Matt를 만나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독일인 가족을 만난다. 5살 6살
아이를 데리고 MBC에서 하산 중이란다. ABC를 갔었는지
확인은 못했지만 정말 대단하고 훌륭한 부모에 멋 모르고 따라왔겠지만 아이들도 대단하다. 아이들 부모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아이들이 하도 기특하여 부모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는다. MBC에 07:45에 도착한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Matt도 올라온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내가 먼저 출발한다. 장난끼가 많아 보이는 Matt는 모든
통신수단이 카트만두에 있고 아내는 손주들 돌보느라고 자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ABC를 갈지
여부는 MBC에서 결정한다고 했다. 그가 ABC로 오를지는 미지수로 남겨놓은 채 먼저 오르기 시작한 길에서 어제 만난 중국인 남녀를 만난다. MBC에서 자고 ABC에서 아주 훌륭한 파노라마를 감상하고 내려가는
중이다. 눈길이 시작되고 눈사태가 났던 지역도 지나간다. 토롱라를
지날 때만큼의 분위기만 못하지만 유사한 풍경을 자아낸다. 두 명 두 명 그리고 12명 또 다시 10명의 하산하는 무리를 만난다. 아직은 눈이 녹지 않아 발이 눈 속에 빠지지는 않는다. 여기에도
우려했던 위험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잘못된 정보에 의해 많은 트레커들이 ABC를 포기하고 중간에 돌아간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
역시 잘못 판단했었더라면 천추의 한이 될 만큼 후회할 뻔했다. 내게는 그저 아름답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새소리 조차 사라진 고요한 그리고 조용한 아름다움 그 자체다.
지진이 있었던 상황에서도 이 높은 고지에서 여전히 풀들은 봄을 맞아 자라고 있었고 야생화가 피고 있다. 고도계를 봐가며 대충 남은 거리를 가늠한다. 08:30경부터 가스가
차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던 예쁜 봉우리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린다. 멀리 ABC가 보인다. 안나푸르나에
들어온 지 23일만에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목전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는다. 평소의 속도로 오른다. 물론 무거운 배낭이
없어 조금 수월하고 조금 더 빠른 것은 사실이다. 09:30 출발한지
3시간 10분만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다. 처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박영석을 추모하는 동판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잠시
그와 그의 동료를 추모하고 식당으로 들어선다. 프랑스 젊은이 줄리안이
MBC에서 자고 이미 도착해 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간다. 원경은 어려워도 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가스는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내가 원하는 파노라마는 개봉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10:30경 하산할 생각을 하고 막 도착한 Matt와 줄리안에게 인사를 하려 하자 둘 다 이구동성으로 기왕에 늦은 거 여기까지 왔는데 하루 더 있다가 내일
아침에 파노라마 view를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함께 지내기를 권한다. 아내 때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하루 더 머물 것을 결정하자 Matt와
줄리안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아이들처럼 양 손을 들어 흔들며 환영하며 좋아한다. 그렇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 곳 ABC에서 안나푸르나 1봉은 보고 가야 한다. 그것이 이 곳에 온 목적이다. 11시가 되자 마차푸차레가 슬며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줄리안의
가이드 라즈가끼에 의하면 EBC에서 22명의 사상자가 났단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식당에서 락시를 마시며 또 다시
얼굴을 내민 마차푸차레를 한 없이 끝없이 넋을 앓고 바라본다. 12시경 데우랄리에서 함께 숙박했던 침묵의
사나이 러시아인이 올라온다. 마차푸차레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멀리 계곡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가스가
쉴새 없이 약을 올리며 방해를 한다. 여분의 옷이 없어 춥다. 내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두 개나 덮고 낮잠을 청한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8세와 10세된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인
부부가 도착한다. 녹은 눈 때문에 바지가랑이가 푹 젖었다. 가스스토브에
옷가지를 말리며 아이 둘이 앉아있는 모습이 기가 막힐 정도로 기특하고 훌륭하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존경스럽기만 하다. 우리나라 부모들도 본받아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잠시 후 따다빠니에서 함께 숙박했던 프랑스인 한 쌍이 도착한다. 모두 열 명이 되었다. 나는 즐겁고 행복하고 편안한데 그렇지 못할
거라고 걱정만 하는 아내에게 연락을 취할 수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18시경 지는 해의 빛을 받은
물고기의 꼬리 마차푸차레만 구름 속에서 보석처럼 눈부시게 반짝 반짝 빛난다. 내일 아침 하늘이 맑아지기를
기도하라는 Matt의 말을 듣고 잠자리에 든다. Matt, 줄리안, 미국어린이 등등 모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