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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 맑고 깨끗한 시어(詩語)는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 허균 -
이 그림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이자 화가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 그린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입니다.
'앙간비금도'란
말 그대로 날짐승을 부러워하며 쳐다본다는 뜻입니다.
허난설헌은 본명이 '초희(楚姬)'이며 호는 '난설헌(蘭雪軒)'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조선 중기 30년간 관리로 있었던 허엽(許曄)이며,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문학사적 명성이 높은 허균(許筠, 1569-1618)이 허난설헌의 남동생입니다.
종이에 채색으로 그린 <앙간비금도(22.5×22.5cm)>는 허난설헌이 어린 시절 강릉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던 행복했던 한 때를 그린 그림으로 추정됩니다.
그림과 함께 왼쪽에는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라는 글씨와 허난설헌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한견고인서'는 한가할 때에는 옛 사람의 글을 읽으라는 뜻인데, 특히 고서를 즐겨 읽었던 허난설헌의 생각을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뜰밖에 붉은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지팡이를 든 아버지인 듯한 남자의 손을 잡고 잎을 모두 떨군 가을나무 너머로 날아가는 철새를 바라보며 한 손을 그쪽으로 뻗고 있습니다.
창공의 새들을 바라보느라 고개를 한껏 젖힌 소녀의 모습이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아마도 어린 허난설헌 자신과 아버지 허엽의 다정한 한 때를 나타낸 듯합니다.
이때만 해도 허난설헌은 행복했습니다.
사대부의 딸이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 허엽이 열린 생각을 가진 덕분에 오빠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으니, 이 작은 그림은 가련하고 작은 옥수(玉手)로 그려졌을 것입니다.
형태의 윤곽을 선으로 먼저 그리고 그 안에 색을 칠하는 구륵법(鉤勒法)으로 묘사한 묵직한 나무는 멀리서 지키는 아비의 모습이고, 날아가는 철새는 그곳을 떠나야 할 여식을 비유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자신이 공부하고 시 짓던 모정(茅亭)이 보이고, 먼 곳에는 가슴같이 나직한 산들이 먼 기억처럼 아스라합니다.
어려서부터 글재주와 용모가 뛰어나 8세에 글 작품을 창작하여 여신동(女神童)으로 불렸던 허나설헌의 이 그림은 허난설헌이 자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가부장제인 조선 사회에서 문인화에 남자가 아닌 여자아이가 그려져 여성의 자아가 투영된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유로이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부러워하는 그녀의 애잔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의 시에서 새는 이상향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의 그림이 중국의 고사인물도나 우리의 산수가 아닌 화보풍의 산수를 그린데 비해 허난설헌의 이 <앙간비금도>에는 주변의 실경(實景)이 등장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야 나타난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 오히려 선구적인 면이 있으며 직접 쓴 글씨체 또한 활달하고 개성이 넘쳐흐릅니다.
허난설헌은 15살에 안동김씨 김성립과 결혼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불편해 한 남편은 물론이고 시집에서도 철저히 무시를 당해 외롭고 서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빼어난 재능으로 시를 쓰면서 답답함과 외로움을 달랬으나 딸과 아들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광릉 언덕에 있는 아이들 무덤을 찾아 다음과 같은 시로 애끓는 마음을 달랬습니다.
곡자(哭子)
- 아들 딸 여의고서
"지난해에는 귀여운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숲속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그녀의 불행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임신 중이던 아이마저 유산하였고, 시댁과의 갈등, 친정의 몰락, 그리고 동생 허균의 유배 등으로 개인적 고통이 깊어갔으며, 이는 그녀의 시 세계를 더욱 섬세하고 애상적이게 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으로 시름을 달래던 비운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
그녀는 어느 날 시로서 그녀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며' -
그 예언이 적중해 허난설헌은 스물 일곱 송이 부용꽃이 지듯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한 칸 분량의 방대한 작품을 모두 태웠는데, 친정집에 있던 시와 작품도 소각하라 했지만,
그녀의 주옥같은 시를 아깝게 여긴 동생 허균이 유작 213수를 보관했다가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넘겨줬고, 1608년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이 발간되자
중국의 문인들은 앞을 다투어 그녀의 시를 격찬했습니다.
그녀의 서정적이고 가슴 절절한 시는 1711년 일본에서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 간행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그녀의 시재(詩才)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허공의 꽃과 물 위의 달빛처럼,
가을 연꽃이 못에 솟은 듯,
봄날의 구름이 하늘에 아련한 듯,
맑고 빼어나다."
강릉에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와 기념관이 있는데, 이 자그마한 그림 <앙간비금도>는 아직도 허씨 문중을 떠나지 않고 허엽의 12대 종손이 소장하고 있어, 푸른 울음을 울다간 여인의 '가을볕처럼 짧았던 행복'을 아쉬워하게 합니다.
雨雪
허난설헌 그림 한 폭 (앙간비금도)
참 나
2012. 12. 21. 18:30
파일:Angganbigeumdo.jpg
'閒見古人' 난설헌 (1563 ~ 1589) 난설헌,난설재 는 호, 본명은 초희, 또는 옥혜.
그림 제목: 앙간비금도 (仰看飛禽圖)
'앙간비금'은, 날짐승이 맘대로 날아다니는 것을 쳐다본다 라는 뜻일겁니다.
그림 속의 '여자아이'(난설헌)가 손을 쳐들고 한 무리 높이나는 새 떼를 부럽고 반가운듯 쳐다봅니다.
당시, 여자아이는 절대로 그림 속에 그려내지 않는다 라는 불문율(?)을 깨뜨린 파격이랍니다.
갑갑하고 답답한 현실을 표현해 내었습니다.
그녀는 내 방식대로 사는 삶,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혈액형(B형)이었을겁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한견고인' 이라면, '한가로이 옛 사람(의 글)을 본다'
사람 인(人)자를 크게 썼다, 전체의 발란스 때문이었겠지요. 아랫 쪽이 빈약하면 (비 맞은 새처럼) 볼품이 없다,
천재. 스물일곱(만 26세) 한창 나이, 병도 없이 이유없이 죽었다고 함. 죽음을 예고하는 시를 남겼습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라고 했다지요.
이 그림은 동생(허균, 洪吉童傳의 저자)이 갖고 있다가 버리지 않고 따로 보관했다 함.
욕구불만이 엄청 났을겁니다. 남편 김성립과의 불화가 심했다고.
여자한테 교육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안 지어 줬다는 조선시대에, 천재로 태어나 짧고 비극적인 생을 살았지요.
'가인박명' 재주 많은 사람은 하늘도 시기를 한다, 300여 편의 시, 산문,수필 유작 중 詩 213首가 전해진다고.
난설헌의 글자를 그 오밀조밀한 필획을 따라 가다 보면 젊은 처자의 처연(悽然)한 심정이 느껴집니다.
'15~16세기'...
이 때는 지구 전체로 인문학(영성) 광풍이 몰아친 매우 특수한 시기였지요. 이런 특이한 우주의 기운은
500년 주기로 19~20세기 에서도 마찬가지로 불어 닥칩니다.
서양에선 종교개혁을 비롯한 르네상스, 천문학이 꽃을 피웠고, 일본에선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한국에선 난설헌이나 이순신을 위시하여 수많은 이적과 초능력을 보여 준 정신계의
고수들이 명멸했던 시기였습니다. 정신세계사 발행, 소설 '丹' (1984)에는 많은 야사,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슈퍼스타들을 개관해 보면,
이퇴계 (1501~1570)
이율곡 (1536~1584)
유성룡 (1542~1607)
이순신 (1545~1598)
한석봉 (1543~1605)
서산대사(休靜1520~1604) 임진왜란때 명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 임제종파
사명대사(惟政1534~1610) 서산대사의 제자. 휴정과 같이 평양성 탈환
황진이 (1500?~154?)
허난설헌 (1563~1589)
신사임당 (1504~1551)
서경덕 (1489~15? )
왕양명 (1572~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