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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속에 약동하는 인생: 선도회의 성립과 전개
박영재/ 선도회 법사, 서강대 교수
1. 들어가는 글
오늘날 자연과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역사는 약 150억 년 정도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더라면, 우리는 현재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인 우리는 지금 숨 쉬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롭고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사실을 말이나 글을 통해 머리로는 이해했다하더라도 이런 존재라는 것을 온몸에 각인하고 앞으로의 삶을 값지게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를 위한 좋은 실천 방안으로 물론 각자 소중한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많이 있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선수행과 더불어 전문가(물리학자)로서의 삶에 투신해 온 필자가 체험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바로 대혜(大慧, 1089-1163) 선사에 의해 제창된 간화선(看話禪) 수행법이다. 사실 대혜 선사는 그의 저서 <서장(書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승려들이 아닌 주로 사대부들과의 서신교류(서신입실)를 통해 간화선 수행 체계를 확립했기 때문에 오늘날 사대부에 해당되는 전문 지식인들에게 역시 간화선 수행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선도회의 종달 노사 문하에 입문해 체득한 선적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여정을 소개함으로서 현대인들이 누구나 삶 속에서 간화선 수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음을 밝히기로 하겠다.
먼저 불교 언론․출판계에서는 이희익(李喜益, 1905~1990) 거사로, 재가선(在家禪)의 세계에서는 선도회(禪道會) 지도법사로 알려진 종달(宗達) 노사께서, 1965년부터 1990년 입적하실 때까지 선도회를 이끌어 오시면서 재가(在家)의 간화선풍(看話禪風) 진작에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를 조명해 보고, 노사 입적 이후 필자가 선도회 지도법사직을 승계하면서 선도회 법사들과 함께 오늘날까지 선도회를 어떻게 이끌어왔으며, 또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이끌어갈 예정인지를, 필자의 선적 체험을 바탕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그런데 이제 화두 타파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전통 간화선 수행법이 오늘날, 고리타분하며 그 효용 가치가 떨어진 수행방법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간화선이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까지 일고 있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선도회는 오로지 화두 타파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간화선 수행체계를 고집스럽게 이어오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해 이런 선도회를 소개하고자 하는 핵심 목적은 새로이 참선 수행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재가에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간화선을 별 어려움 없이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데 있다.
2. 선도회의 성립: 노사 입적 이전
2.1 종달 노사와 선도회
선도회 조직 이전
노사께서는 일본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다음 귀국 후 조선불교재단에서 발행하던 <조선불교> 잡지사에 근무하다, 발행인이었던 삼소(三笑) 나까무라 선생의 권유로 일본 임제종 남선승당(南禪僧堂) 소속의 화산대의(華山大義) 노사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종달(宗達)이란 법명은 이때 받으셨다. 그 후 화산 노사 문하에서 8년 동안 조석(朝夕)으로 입실(入室)하며 참선 수행하신 결과 임제종의 법맥을 이으셨고, 일본 임제종 최대파인 묘심사파(妙心寺派)의 '한국개교사(韓國開敎師)'라는 사령장도 받으셨다. 자격은 인정받으셨으나 스스로는 개교의 일선에 나서기는 아직 이르다고 겸허하게 생각하셔서 여러 다른 노사들을 찾아 탁마를 하면서 9년간 오후(悟後) 수행을 계속하셨다. 그러다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한국 불교계로부터 일본 임제종의 법맥을 이으신 노사를 인정하지 않는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 재가에 머무시면서 월간 <대한불교> 발간, 법시사 참여 및 최초의 한국 선전문지인 월간 <선문화> 발간 등 불교 언론 잡지 분야의 기초를 다지는 일들을 지속해 오셨다. 그런데 이처럼 여러 가지 선불교 관련 일들에 종사해 왔으나 노사의 전공은 선이었기 때문에 자나깨나 참선을 지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잊어본 적이 없으셨다.
선도회 조직 이후
그러던 어느 날 이창훈이란 청년이 좌선을 지도해 달라고 찾아 왔는데 신심이 견고한 청년으로 여겨져 ‘무(無)’자 공안(公案)을 참구해 보라고 주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에 찾아와 입실을 하다 6개월쯤 될 무렵 드디어 ‘무(無)'자(字) 공안을 투과했는데 이것이 노사로 하여금 일반인에게 참선을 지도하려는 뜻을 본격적으로 세우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1965년 재가수행 모임인 선도회(禪道會)를 조직하시고, 효봉 선사의 후원 아래 조계사 법당을 빌어서 이희익 거사가 아니라 고부헌(辜負軒) 종달(宗達) 노사로서 당당히 재가수행자들을 위한 참선 지도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노사께서 선도회를 조직하시고, 문하생들을 입실 지도하시기 시작하여 1990년 입적(入寂)하실 때까지 25년이란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재가수행자들의 참선 모임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로 인해 조계사 법당에서부터 출발해 장소를 성약사, 백우정사, 불심원, 다시 백우정사, 백운암, 원각회 등으로 옮겨 다니며 선도회 참선 법회를 계속하시다, 결국은 입적하시기 전까지 목동 노사의 자택에서 참선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 이것이 노사의 일생을 통해 가장 핵심적이며 가치 있는 일이었다.
사실 노사께서 이처럼 재가(在家)의 간화선풍(看話禪風) 진작에 온몸을 던지신 결과 입참자 천여 명 가운데 ‘무'자를 봐서 거사호나 대자호를 받은 사람이 육십오 명에 이르고, 또한 이 가운데 무문관을 끝까지 투과해 법사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열 명이나 된다. 이처럼 재가법사의 양성을 통해 재가의 간화선 입실 지도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종달 노사의 법맥(法脈)
종달 노사의 임제종 법맥은 다음과 같다. 잘 아시다시피 인도에서의 傳法은 석가세존께서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하여 반야다라까지 법이 전해졌고, 중국은 인도로부터 법을 가져온 달마로부터 임제의 후손인 제51세 밀암함걸로부터 52세 파암조선을 통해 56세 석옥청공까지 이어진 법은 57세 태고보우를 통해 한국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52세 송원숭악을 통해 54세 허당지우까지 이어진 법은 55세 남포소명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73세 백은혜학을 통해 일본 임제종의 중흥기를 거치고, 81세 화산대의를 통해 한국의 의현종달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주로 관련된 제47세인 오조법연 선사부터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세존(釋迦世尊) → <인도> 1世 : 마하가섭(摩訶迦葉) → (26代略) → <중국> 28世 : 보리달마(菩提達摩) → (4代略) → 33世 : 육조혜능(六祖慧能) → (4代略) → 38世 : 임제의현(臨濟義玄) → (8代略) → 47世 : 오조법연(五祖法演) → 48世 : 원오극근(圓悟克勤) → 49世 : 호구소륭(虎丘紹隆) → 50世: 응암담화(應庵曇華) → 51世 : 밀암함걸(密庵咸傑) →
52世 : 송원숭악(宋源崇岳) → 53世 : 운암보암(運庵普巖) → 54世 : 허당지우(虛堂智愚) → <일본> 55世 : 남포소명(南浦紹明) → 56世 : 종봉묘초(宗峰妙超)→ 57世 : 관산혜현(關山慧玄) → 58世 : 수옹종필(授翁宗弼) → 59世 : 무인종인(無因宗因) → 60世 : 일봉종순(日峰宗舜) → 61世 : 의천현승(義天玄承) → 62世 : 설강종심(雪江宗深) → 63世 : 동양영조(東陽英朝) → 64世 : 대아단광(大雅耑匡)→ 65世 : 공보현훈(功甫玄勳) → 66世 : 선조서초(先照瑞初) → 67世 : 이안지찰(以安智察) → 68世 : 동점종진(東漸宗震) → 69世 : 용산경용(庸山景庸)→ 70世 : 우당동식(愚堂東寔)→ 71世 : 지도무난(至道無難) → 72世 : 정수혜단(正受慧端) → 73世 : 백은혜학(白隱慧鶴) → 74世 : 아산자도(峨山慈棹) → 75世 : 탁주호선(卓洲胡僊) → 76世 : 묘희종적(妙喜宗績) → 77世 : 가릉서가(迦陵瑞迦) → 78世 : 율해현창(潭海玄昌) → 79世 : 독담잡삼(毒湛匝三) → 80世 : 무해고량(霧海古亮) →
협산태우(夾山泰祐) → 82世 : 창내송당(倉內松堂)
81世 : 화산대의(華山大義) → <한국> 82世 : 의현종달(義賢宗達)
시산전경(柴山全慶) → 82世 : 승평종철(勝平宗徹)
52世 : 파암조선(破庵祖先) → 53世 : 무준원조(無準圓照) → 54世 : 설암혜랑(雪菴慧朗) → 55世 : 급암종신(及庵宗信) → 56世 : 석옥청공(石屋淸珙) → <한국> 57世 : 태고보우(太古普愚)
2.2. 선도회의 핵심 수행 가풍
노사께서 입적하신 다음 필자가 선도회 지도법사직을 이어받으면서, 노사 문하에서의 수행체험을 면밀히 살핀 결과 선도회의 핵심 수행 가풍(家風)은 다음의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귀의삼사(歸依三師: 세 분 스승께 귀의하기)
선도회의 수행 가풍(家風) 가운데 하나는 단적으로 말해 세 분 스승께 귀의하는 '귀의삼사'이다. 여기서 세 분은 ‘부처[佛]’이신 ‘석가세존(釋迦世尊)’과 ‘진리[法]’의 정수를 담고 있는 공안집 <무문관(無門關)>을 저술한 남송 시대의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 그리고 선도회 문하생들과 이 시대를 함께 하셨던 ‘스승[僧]’ ‘종달(宗達: 1905-1990)’ 이희익 노사(老師)이다. 노사께서는 선도회를 조직하신 이후, 한 평생 문하생들에게 석가세존과 역대조사들의 종지(宗旨)를 온전히 드러낸, 혜개 선사께서 지으신 <무문관> 48칙을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 최초로 제창(提唱)하시며 문하생들을 이끌어 오셨는데, 한글 세대였던 필자의 경우 1975년 갓 입문했을 때 비록 노사께서 <무문관> 원문을 한 구절씩 읽고 친절히 제창을 하셨으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런 과정을 통해 지속적인 참선 수행을 위해 매우 중요한, 선종문헌 원문들을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노사께서는 마치 우리가 지하철을 이용해 약속 장소 근처에 있는 처음 가보는 역에 내렸을 때 헤매지 않고 약속 장소까지 정확히 제 시간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 위치를 지도에서 확인하고 약속 장소와 제일 가까운 출구를 통해 나아가듯이, 도처에서 수행자의 현 위치를 일깨워주고 있는 <무문관>을 제자들의 근기에 맞게 자유자재로 활용하셨다.
입실점검(入室點檢: 정기적으로 입실해 점검받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선도회의 화두 점검 체계는 세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심자를 위한 첫 번째 과정은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이란 점검 과정이다. 여기에는 ‘외짝손소리[척수성(隻手聲)]’,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등 초심자들이 붙들고 씨름하기 쉬운 20여개 정도의 화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입실시 스승을 경외하던 심적 초긴장 상태는 사라지며, 법호(法號)를 받고 ‘무문관’에 있는 48개의 화두들을 본격적으로 점검 받는 두 번째 과정으로 들어간다. 대개 이 점검 과정을 마치면 스승 없이 혼자서도 지속적인 선 수행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끝으로 세 번째 마무리 과정에서는 벽암록을 포함해 조사어록에 있는 화두들을 가지고 스승과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법전(法戰)을 벌리게 되는데, 이 과정을 마치면 노사로부터 인가(印可: 학문의 경우 독자적인 연구와 교육 능력을 인정하는 박사학위에 비교됨)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자들을 입실 지도할 수 있는 법사로서의 역량을 나름대로 갖추게 된다. 한편 입실 점검의 중요성은 ‘서장(書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즉, 대혜 선사가 스님들이 아닌 주로 사대부들과의 서신교류(서신입실)를 통해 간화선 수행 체계를 확립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오늘날 사대부에 해당되는 전문 지식인들이 입실점검을 해줄 수 있는 스승만 제대로 만난다면 간화선 수행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리라.
참고로 노사께서는 이곳저곳 장소를 빌려 참선 법회를 주관하시면서 입실 방을 못 구하는 경우에도 입실 지도를 포기하지 않고 추운 겨울날인데도 헛간에 가마니를 깔거나 시민선방의 경우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으시면서 까지 입실을 받으셨으며, 입적하시기 직전 급격히 몸이 쇠약해 가는 가운데에서도 누워서까지 입실 점검에 온 힘을 쏟으셨다. 또한 이런 노력에 화답하며, 현재 광주 모임 법사인 조선대 혜정 김인경 교수 같은 분은 대개 30초에서 1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입실 점검을 받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매주 토요일 비행기를 타고 상경하는 등 문하생들의 이런 치열한 구도열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어 오고 있다.(요즈음은 제주도에서 입실하러 오시는 분도 있다.) 사실 오늘날 간화선이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것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도 이런 입실지도의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덧붙여 무엇이 혜정 거사로 하여금 비행기를 타고 입실하게 만드는가에 대해 그가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스승의 방으로 입실할 때면, 마치 온몸과 정신이 속속들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되는데, 반복되는 과정을 통하여 그동안 자신을 옥죄었던 온갖 욕심과 불안 열등감 등이 서서히 풀려나감을 느끼면서 같이 공부하는 이들이 그렇게 정답고 환하게 보일 수 없었다.”
좌일주칠(坐一走七: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하루를 부리기)
‘좌일주칠’이란 선어(禪語)는 그 뜻을 유추해보면, 우리가 잠자는 시간을 충분히 잡아도 8시간 정도이므로 깨어 있는 시간은 16시간 정도이다. 따라서 이 깨어 있는 시간의 1/8은 2시간이므로 2시간 정도 좌선하고 7/8인 나머지 14시간은 ‘주어진 하루 일과에 100% 뛰어든다[走]’라는 뜻이다. 필자의 경우 ‘하루 향 한 대 타는 시간 앉지 않으면 한 끼 굶는다’라는 가풍을 한 평생 선양한, 종달 노사 문하에서 매주 주말마다 입실 점검과 더불어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의 계획 및 1시간 좌선’(일상의 원동력),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 ‘하루의 반성 및 1시간 좌선’(숙면의 원동력)을 통한 간화선 수행을 지속한 결과, 10년 정도 지나면서부터 가슴에 맺혀 있던 모든 의심이 일시에 사라지고,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坐一走七]’ 늘 있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속한 공동체(가정, 직장, 선도회)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함께’ 주어진 일에 차별적인 분별심(分別心) 없이 온전히 투신(投身)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이른 아침의 좌선이 건강에 미치는 부수적인 효과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다. 1시간 정도 참선을 마치면 장이 정리되면서 화장실로 직행해 쾌변을 보게 되어 상쾌한 몸 상태로 하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좌선은 우리 몸으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알맞은 음식량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 결과 필자의 몸무게는 참선을 시작한 이후 2kg 이상 변한 적이 없다.
2.3. 필자의 선도회 입문
독서를 통한 불교와의 만남
돌이켜 보면 맨 처음 대학시험을 칠 당시 필자가 대학에 가려는 목적은 그저 막연하게 학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서강대학교에 입학한 후 나의 첫 학기는 거의 고등학교와 비슷한 시킴을 당하는 생활이었다. 요즈음은 웬만한 대학이 다 평준화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유독 서강대학교가 그랬다. 말로만 듣던 꿈과 낭만이 가득한 그런 곳은 결코 아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나는 대학에서의 나의 위치와 삶에 관한 강한 회의에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방학 내내 정신적인 갈등 속에서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괴로워했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 속에서도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내 삶에 관한 최초의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정신적인 갈등에 빠져있는 당시의 나에게는 유독 실감나는 것이었다. 그 결론은 “ 내가 택한 길을 최선을 다해 성실히 노력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뜻은 세웠으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과 삶에 대한 나의 견해(見解)가 구체화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 겪었던 괴로움보다 더 심한 진통을 겪었다. 2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때 내가 책을 접하는 방법은 큰 책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다 읽고 나면 또 다른 책을 사서보곤 하였다. 이때의 심정은 물속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것과 똑같은 상태였다. 그러다 1975년 7월 27일 종로서적에서 석가가 활약하던 초기불교시대에 관한, 법정 스님께서 번역하신 ‘숫타니파아타’란 책을 대하게 되었고 이 책을 차분히 읽어 가면서 들뜬 상태 속에서 헤매던 나의 방황기도 서서히 막을 내려갔다. 너무나 인간답게 살아간, 인간 석가의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뚜렷하게 찾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까지 잘못된 교육을 받아옴으로써 갖게 되었던 분석적인 사고방식, 즉 어떤 대상을 보면 갈기갈기 찢어버려 본래의 모습을 없애버리는 그런 태도를 벗어 던지고 석가의 길을 따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이른 바 직관하는 방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불교학생회 선배를 통한 노사와의 만남
이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서강대 불교학생모임인 혜명반(慧命班)에 발을 들여놓았다. 불교학생모임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어떤 인생관(人生觀)을 가지고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 몇 번 모임에 참가하다 1975년 10월 18일(토요일) 선배 한 분이 일반인을 위한 선(禪) 모임에 가자고 해서 그저 따라 나섰다. 이 때 처음으로 선(禪)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법당 맨 앞쪽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시고 그 뒤로 일반인들이 십여분 앉아 계셨다. 비어있는 맨 뒷자리에 방석을 하나 깔고 그냥 앉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맨 앞쪽의 할아버지께서 내게 다가오시더니 허리와 어깨를 손으로 짚으시며 자세를 바로 잡아 주셨다. 그리고 얼마 있으니까 죽비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그 할아버지께서 옆방으로 들어가시고 뒤를 이어 앞줄부터 한 분씩 차례차례 그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시는데 들어갈 때의 이 분들의 진지하면서도 초긴장 상태의 모습은 필자의 마음을 통째로 사로잡았다. 맨 마지막으로 필자도 초긴장 상태로 그 방으로 들어가 정면에서 할아버지를 첫대면을 했는데, 손자를 대하시는 듯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필자의 긴장 상태를 일시에 녹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노사 문하에서의 필자의 선(禪) 수행은 시작되었다.
초기의 선(禪) 수행
선 수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필자의 삶은 보다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학문과 인생은 하나가 되기 시작했고 나의 삶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절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누구나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한번은 해야만 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후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겪는 일들이 비록 당장은 힘들고 어려운 것들일지라도 모두 나로 하여금 보다 올바르고 인내하는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져 나에게 다가오는 괴로움도 곧 즐거움으로 변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확실히 아랫배에 길러진 힘(똥배짱)은 나로 하여금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하지 않고 마주 부딪혀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선수행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선도회에 입문해 8개월쯤 지날 무렵 학교 공부가 바빠지기도 하고 입실(入室: 제자가 스승에게 선 수행의 경계를 제시하는 행위)해서 화두의 경계를 제시하는 것마다 퇴짜를 맞고 쫓겨 나오게 되자 더 제시할 것도 없기도 해서 선도회 모임에 한동안 참석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서의 수행은 혼자서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런데 ‘줄탁동시(啐啄同時: 거의 부화된 병아리가 알속에서 부리로 알을 깨려할 때를 기다려 어미닭이 부리로 알껍질을 탁하고 치는 행위)’라는 선어(禪語)처럼 묘한 일이 벌어졌다. 일년쯤 되는 어느날 아침 참선하며 화두를 들다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체험했는데 노사께서 마침 그날 저녁 “요즈음은 왜 선모임에 나오지 않느냐?” 하시며 집으로 전화를 주셨다. 필자가 전화를 받은 그 주 주말이 되자마자 노사께 입실해 집안이 떠나가는 소리를 내며 경계를 제시하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처음 왔을 때는 모기만한 소리를 내더니 언제 그런 힘을 키웠냐고 매우 기뻐하셨다. 필자 또한 이때의 기쁨과 노사의 환한 미소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른 종교와의 만남
선 수행을 계속하던 어느 날 무심코 크리스처니즘을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선가(禪家)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역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필자는 가톨릭 수도회의 하나인 예수회 교육정신에 따라 세워진 서강대에서 또 다른 세계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이미 놓여 있었다. 신학에 대해서 여러 과목을 듣기도 하고도 성직자와 신자들과도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선 수행을 하면서 내가 추구해 가는 방향과 너무나도 똑같은 일치감을 느꼈다. 이 분들도 불가(佛家)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구도자의 입장에서 경건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여기서 나는 누구나 자기가 택한 바른 길을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궁극적으로는 같아진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이제 외곬로 보다 열심히 선 수행에 몰두하게 되었다. 선 수행은 단지 석가나 선사(禪師)들이 걸어간 길을 흉내내며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그 어느 누구와도 뚜렷이 다른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공통점은 이 길을 자기 혼자만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의 구별이 없는 모두를 위한 길을 간다는 것이다. 바로 크리스처니즘의 조건 없는 사랑을 행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선수행 10년후의 필자의 하루
꾸준히 선 수행을 통해 필자의 삶을 다져가기 시작한지 오 년이 지났을 무렵 문득 처음 선 수행을 시작할 무렵의 나와 오 년이 지난 나를 비교해 보게 되었다. 비록 하루하루는 눈에 띄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것이 몇 해가 지나고 보니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예전 같으면 가슴에 한 달쯤 맺혀있을 일들이 일주일이면 사라지고, 일주일쯤 맺혀있을 일들은 하루면 사라졌다. 그러는 가운데 십 년이 지난 다음부터는 아예 맺혀있는 일들은 하나도 생기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진지하게 마주 부딪혀 나갈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 선가(禪家)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하루하루가 끊어져 지나갔으나 이제는 하루하루가 이어져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여러분에게는 단조로운 하루로 보일지 모르나 나의 입장에서 중심이 잘 잡힌 하루는 이렇다.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다. 일어나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방석을 끌어 당겨 다리를 틀고 앉는다. 물론 처음 몇 개월은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울리는 시계에 의존하여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 난 후의 일이다. 사홍서원(四弘誓願)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새기며 십여분 있노라면 멍하던 정신도 맑아져 오고 그런 후에 하루의 일과를 차분히 생각하며 그날 가장 시급한 일들이 무엇인가를 속으로 다짐해 본다. 그리고는 화두를 들고 한 시간 정도 참선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때 들고 있는 화두 심지어는 나조차 없어져 버리면 그럴수록 그날 하루 일과는 다른 어느 날 보다 더 중심이 잡혀 있음을 느끼곤 하였다. 참선이 끝나면 나의 본업인 교육과 연구를 하러 학교에 간다. 선가에 들기 전에는 그저 막연히 학문을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했으나 이제는 적어도 내 경우에 있어서는 왜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일과를 마치고 저녁때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화두를 들며 밖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비워간다. 집에 도착할 때는 한결 차분한 마음이 되어 있다. 저녁식사 후 하루 일과 가운데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거나 수행관련 독서를 한다. 나는 또한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에 비해서 일찍 잔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두를 들며 한 시간 정도 참선을 하고 그 후 십여 분간 하루의 중심이 얼마나 흐트러졌는가 또한 나의 행동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는가를 냉철하게 반성하고 사홍서원, 반야심경을 새기고는 내일을 위해 조용히 눕는다. 이것이 노사의 문하에 입문해 10년이 지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지속되고 있는 나의 하루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단순한 반복일지 모르나 나에게 있어서는 하루하루가 새롭다. 아니 순간 순간이 새롭다.
3. 선도회의 전개: 노사 입적 이후
선도회는 필자가 1975년에 입문했을 당시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던 문하생이 열 분(모두 50대 이상)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980년 무렵 네 분(현재 세 분은 입적)이 선도회 사상 최초로 함께 인가를 받았다. 그 후 1987년 9월 입문 12년 만에 필자가 인가(당시 32세)를 받으면서 젊은 세대들이 자연스럽게 선도회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으며 1990년 종달 노사 입적 이후에도 선도회는 필자가 제2대 지도법사를 맡으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확고한 입실점검 체계를 바탕으로 종교와 종파를 떠나 대학생, 예술가, 종교인, 교수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약 70여 명의 회원들을 입실 지도하는 전국(목동, 신촌, 정릉, 광주, 인천, 퇴계원) 규모의 모임으로 성장하면서 간화선의 대중화를 위한 좋은 본보기가 되어 오고 있는데 노사 입적 이후의 선도회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선도회 제2대 지도법사직 승계
필자는 1975년 10월(당시 서강대 물리학과 2학년) 노사 문하에 입문해 입실지도를 받으며 간화선 수행을 해오다 1987년 9월(당시 강원대 물리학과 부교수) 노사로부터 印可를 받았으며 1990년 6월 7일 노사께서 入寂하시면서 유시에 따라, 선배 노거사님들의 헌신적인 후원 아래 노사께서 하시던 일을 法을 제대로 이어 받아서가 아니라 참선에 뜻을 둔 분들을 돕는다는 심부름꾼의 입장에서 형식상 선도회 제 2대 지도법사가 되어 선수행을 원하는 분들의 入室 지도를 해 오고 있는데, 사실은 이 분들 덕택에 오히려 필자가 선수행을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博士學位와 印可
물리학의 경우 지도교수가 학위과정의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학생들의 연구성과에 따라 석사과정을 포함해 대개 5년에서 7년 사이에 박사학위를 수여하게 되는데, 박사학위의 의미는 이제 혼자서도 충분히 연구를 수행해 갈 수 있다는 것이지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어서 더 이상 연구할 필요도 없이 놀고 먹으며 그저 제자 양성에만 힘써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한편 간화선 수행을 하는 禪家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스승이 제자의 수행이 무르익어 혼자서도 충분히 수행해갈 수 있을 정도로 제자의 마음이 열렸다고 판단되면 대개 ‘박사학위증’에 해당하는 ‘인가장’을 써 주는데, 여기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한다는 뜻이 담긴 전법게가 들어 있기도 하다. 물론 오도송이니 열반송이니 전법게니 하는 것 자체를 군더더기라고 생각하여 이런 게송들을 전혀 남기지 않는 선사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印可를 받은 제자는 박사학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수행이 끝났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제부터는 혼자서도 철저히 禪 수행을 지속적으로 계속해 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제자도 바르게 입실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새로운 공안의 제창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를 통해 파동성으로 잘 알려져 왔던 빛이 입자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연이 대칭성을 가지고 있다면, 입자도 입자성뿐만 아니라 파동성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생각이 量子物理學을 통해 검증되었는데 여기에 착안해 필자가 노사 입적 직후 새롭게 提唱한 公案은 다음과 같다.
‘내 연구실에는 문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직접 밖에서 들어오는 문이고 하나는 조교실을 통해서 들어오는 문이다. 누구나 내 연구실을 들어오는 사람은 어느 한 문을 이용하여 들어오기 마련이나 수행이 무르익은 사람이라면 두 문을 동시에 통과하여 내 연구실을 들어올 수 있다. 자! 두 문을 동시에 통과해 보라!’
숭산 노사와의 만남
종달 노사의 뒤를 이어 선도회의 지도법사로서 참선 모임을 지도하던 중 한 스승밑에서만 수행해온 필자의 경계를 확인 받아 볼 필요성을 느껴 1999년 미국에 계신 숭산(崇山) 노사께 편지를 드렸다. 한동안 이 일을 잊고 있었는데 노사께서 ‘서울국제선원’ 건립 관계로 화계사에 나오셔서 연락처와 함께, 필자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즉시 제자인 무심 스님과 연락을 취해 드디어 화계사로 숭산 노사를 찾아가 입실 지도를 청했다. 아침 8시에 삼배를 올리고 거의 2시간 동안 독대(獨對)를 했다. 필자가 종달 노사의 제자라고 하자 숭산 노사께서 종달 이희익 노사와는 불교신문 관계로 같이 일을 한 적도 있다고 하시면서 잘 아신다고 하셨다.
필자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드리고 본격적으로 화두에 관한 문답을 나누었다. 노사께서는 화두들에 관한 나의 견해에 관해 아주 자상하게 하나하나 대해 주셨다. 특히 <무문관> 제14칙의 ‘남전참묘(南泉斬猫)’에 관한 문답을 통해 필자는 선 수행에 또 하나의 새로운 한 획을 긋는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는 맨 마지막에 이제 바탕은 잘 길러졌으니 보다 세밀한데 까지 철저히 살피라는 조언을 주셨다. 한편 이날 이후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입실 지도를 하게 되었으며 필자의 수행의 깊이도 훨씬 깊어진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미사 강론: ‘평생에 단 한 번의 만남[一期一會]’
1995년 4월 26일 오전 8시 서강대 교직원 미사에 참석해 강론을 했는데 ‘평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이란 제목으로 매번 일주일마다 반복되는 것 같지만 오늘의 미사는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중한 미사라는 것을 제창(提唱)하였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 보잘 것 없는 저를 교직원 미사의 강론 연사로 초대해 주신 데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 드릴 주제는 ‘평생에 단 한 번의 만남’에 대한 것으로 이미 진실한 신앙인으로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계신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제 자신을 다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냉철히 돌이켜 보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에도 잠시 주님과 참 자기를 가끔 놓치고 살아가고 계신 분이 있다면 도움이 좀 되겠지만요.
먼저 미사를 보기로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여러분들은 매주 1번씩 미사에 참석하고 계신데 비록 매번 반복되는 미사인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매번 평생에 단 한 번뿐인 미사에 참석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심지어는 다음 주 미사에 오늘 참석 하신 분들이 그대로 다 모이신다고 하더라도 역시 평생에 단 한 번뿐인 미사인 것입니다. 사실 저 자신은 참선 수행을 해오고 있는 거사로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매주 미사에 참석하지는 않습니다만 집안에 천주교 신자들이 여러분 계셔서 가끔 참석합니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매번 똑같이 느끼는 것은 신자들이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이 소중한 미사들을 통해, 짧막한 제1독서와 제2독서 및 신부님들의 훌륭하신 강론들을 가슴에 품고와, 끊임없이 묵상하며 지난 한 주일을 반성하고 새로운 한 주일을 더욱 알차고 보람 있게 설계한다면, 여러분 모두 종교간의 벽을 허물며 다른 종교인들과도 손을 맞잡고 이 사회를 보다 밝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리라 확신합니다.
한편 비단 미사뿐만 아니라 어떤 만남도 늘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만남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만남도 늘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주위 분들과 대립과 경쟁의 관계가 아닌, 대화를 통한 화합의 정신을 바탕으로 자기의 맡은 바 직무를 다하리라 확신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정신은 비단 다른 사람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피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짓 자기와 참된 자기와의 만남의 소중함을 토로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오늘의 제 강론은, 사실은 참된 자기를 순간순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 제 자신에게 한 것입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지나 않았나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두 문을 동시에 투과하다’ 저술
필자가 노사 입적 후 선도회의 지도법사가 되어 입실 지도를 하다 보니 초심자들을 위해 무언가 안내 책자가 필요한 것 같아 작은 책자를 하나 만들었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1996년 11월 새롭게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을 쓰게 된 구체적인 동기가 담긴 ‘들어가는 글’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요즈음은 참선에 관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좋은 환경(참선에 관한 좋은 책들과 큰스님들의 많은 초청 법회)속에 살고 있으나 막상 재가 불자들이 의욕을 가지고 몸소 참선 수행을 하고자 하면 대다수는 곧 여러 가지 구조적 한계에 부딪혀 포기해 버리고 만다. 나는 평소에 이런 점을 늘 안타깝게 생각해 왔었는데 마침 불광 편집부에서 선 수행에 관한 연재를 부탁해 와 글재주는 별로 없지만 지난 이십여 년 간 써 온 나의 수행일지, 여기저기에 기고했던 글, 그 동안 월간 불광에 게재했던 글 및 선도회 지도법사로써 일반인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들을 바탕으로 내가 재가자(在家者)로서 선가(禪家)에 입문하게 된 구체적인 과정과 입문 후의 작지만 생생한 나의 체험들을 있는 그대로 알려 재가자들의 참선 수행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드리고 싶다. 또한 참선 수행이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재가자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를 나의 경우를 통해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 직업이 물리학을 전공한 교수이기 때문에 참선 수행과 더불어 주로 물리학을 배우고 연구해 가는 동안 내가 겪었던 나의 체험을 열거하는 것이 되겠지만, 다른 전문직에 종사하는 분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종성 노사와의 만남
고불총림 서옹 방장 스님의 고제(高弟)이신 종성(宗成) 노사께서 필자가 지은 ‘두 문을 동시에 투과한다’란 책을 접하시고 “그 제목이 화두가 아니냐?”고 하시며 전화를 주셔서 “제가 새롭게 제창한 화두입니다.”라고 답해 드렸다. 그러자 거사로서 애를 많이 쓰고 있다고 하시며 진심으로 격려를 해주셨다. 그 후 종성 노사께서 손수 편찬하신 ‘서옹 선사 법어집’ I, II권과 그동안 이곳 저곳에 투고하셨던 글들을 자상하게 보내주셔서 필자도 답례로 종성 노사께서 주석하고 계신 관악산 임제선원을 직접 방문해 문안 인사를 드렸다. 그 때 노사 자신도 ‘거사로 37세까지 수행하다 서옹 큰스님을 친견하면서 출가했다’고 하시며 거사로서도 깊은 수행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삼박사일의 정기 여름 수련회 정착
선도회가 노사 입적 직후 직지사에서 여름 참선 수련회를 가진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3박4일의 수련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한 번은 전남 담양에 있는 혜정 김인경 법사의 청와헌(靑蛙軒)에서, 한 번은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송암 주지 스님께서 새롭게 창건한 도피안사에서 격년으로 수련회를 해오고 있는데 대개 수련회 둘째 날은 저녁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 용맹정진을 한다. 한편 매년 겨울철에는 거의 도피안사에서 1박2일 철야정진 수련회를 병행해 오고 있다. 참고로 필자의 경우 대학생 시절부터 매년 여름마다 철야정진을 포함한 참선 수련회에 참가해 오고 있는데 수련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 최소한 6개월 정도는 수련회 때 가졌던 마음 자세를, 따로 수행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유지하곤 하였기 때문에 특히 초심자들에게 3박4일 정도의 참선수련회 참가를 널리 권하는 바이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입실
요즈음은 세상이 참으로 편리해졌다. <무문관> 제48칙의 송(頌)에 ‘미거보시선이도(未擧步時先已到)’란 구절이 있다. ‘아직 한 발짝도 내디디지 않았는데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라는 뜻이다. 오늘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끼리 한 발짝도 떼지 않았는데 서로의 뜻을 이미 주고받고 있으니 참으로 옛 선사들의 혜안은 놀랍기만 하다! 필자가 강원대학교에 재직할 무렵 철학과에 재직 중이시던 김지견 교수님 연구실에서 매주 불자교수 모임이 있었다. 그러다 친해진 역사교육과 신종원 교수께서 필자가 참선 수행을 해오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참선 수행을 하고 싶다고 하셔서 입실지도를 해드리며 몇 해를 지냈는데 1989년 9월 필자가 모교인 서강대로 전직을 하게 되면서 선 수행의 핵심인 입실 지도가 어려워지자 필자가 인터넷을 통해 입실을 해보자고 권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자입실(電子入室)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는 신 교수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여러 분들이 전자우편으로 입실을 청해오고 있는데, 직접 입실할 때나 별 차이 없이 수행 점검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거사와 대자를 배출하기 시작하다
필자는 노사 입적 이후 선도회 제2대 지도법사로서 목동 모임의 혜연(慧淵) 한갑수 대자(大姉: 선지禪旨에 밝은 여성 재가 수행자)를 시작으로 다시 거사(居士: 남성 재가 수행자)와 대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한편 1994년 3월부터 시작해 매주 화요일마다 열고 있는 서강대학교의 견주굴(見主窟) 참선 모임도 이제 본 궤도에 올라 천흠(天欽) 박성호 거사를 시작으로 법호(法號)를 부여하기 시작했으며 거사호를 받은 분 가운데에는 1996년 겨울 서강 견주굴 모임에 합류한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서명원(세네갈) 신부님도 있다. 그는 매우 꾸준히 모임에 참가해 1999년 드디어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모두 투과하여 법호를 천달(天達)이라고 지어 드렸다. 이렇게 지은 이유는 ‘천주교의 달도인(達道人)’이 되시라는 뜻에서이다.
무문관 제창을 다시 시작하다
필자가 1975년 10월 18일 불심원에 열리던 선도회 참선 법회에 처음 참가했을 때 종달 노사께서는 1974년 출판하신 <무문관>을 교재로 매주 무문관을 1칙씩 제창하고 계셨다. 그러다 여기 저기 법회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안타깝게도 무문관 제창은 장소 사정상 중단되었다. 늘 이 전통을 살려야 하는데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어느 정도 선도회가 틀이 잡힌 1997년 9월부터1칙씩 다시 제창을 시작했었는데 어느덧 삼 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 8월 27일에 맨 처음 나오는 남송(南宋)의 이종(理宗)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表文)에서부터, 공안 48칙 및 맨 나중에 있는 안만 거사의 49칙어까지 빠짐없이 모두 마쳐 그 의의가 매우 뜻 깊다 생각되며 천재지변이 없는 한 매3년을 주기로 선도회 법사들과 더불어 무문관 제창을 계속할 예정이다. 한편 이 제창을 통해 단지 선도회 문하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필자의 법사로서의 지속적인 역할의 중요성과 수행자로서의 공부가 그 깊이를 더해 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참고로 사실 필자의 전공은 물리학이기 때문에 한문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지는 않았으나 노사 문하에서 12년간 무문관의 48개 공안을 한 칙씩 점검받으면서 한문 원문을 한 칙씩 온몸에 각인해 왔기 때문에 필자의 선적 체험과 그밖에 여러 선사들의 저술 및 선학자들의 관련 자료들을 참고하면서 가능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무문 선사의 체취가 물씬 풍겨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앞으로도 더 철저해지도록 애쓸 예정이다.
서강대에서 선 강좌를 열다
1997년 9월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현재는 신학대학원으로 바뀜)에서 ‘선정사상사(禪定思想史)’의 강의를 열었다. 대학 동창이며 필자와 친분이 두터운 예수회 심종혁 신부께서 수도자대학원 원장직을 맡고 계실 때 수도자 대학원의 공통 강좌로 참선과 관련된 ‘선정사상사’와 ‘선어록강독’ 두 강좌를 개설하며 격년으로 강의를 부탁하셨다. 먼저 ‘선정사상사’를 강의했었는데 이때 이 강좌의 준비를 통해 그동안 필자가 선 수행자의 입장에서 조각조각 알고 있던 선정사상사를 한 꼬치에 꿸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1999년 3월 학부 교양강좌로 ‘참선’이란 과목이 개설되면서 학부생들에게 매주 기본적인 선정사상사 1시간 강의 및 좌선 실수를 1시간(초심자들이라 25분 앉고 5분 쉬고 다시 20분 앉음) 지도했는데 이 강좌는 매년 봄 학기마다 열리고 있다. 참고로 이 선강좌들이 인연이 되어 수강생들 가운데 몇 사람은 선도회에 입문해 선수행을 지금껏 지속해 오고 있다.
법사法師 배출 전통을 다시 잇다
종달 노사 입적 이후 선도회 제2대 지도법사의 자격으로, 노사께 입문해 무문관 과정을 반 정도 진행하시던 혜봉(慧峰) 거사와 입문은 종달 노사께 했지만 무문관 과정을 처음부터 필자 밑에서 수행하신 혜연(慧淵) 대자 두 분의 무문관 투과를 처음으로 인가(印可)하고 선도회 법사(法師)로 위촉하였다. 그 후 혜운(慧雲) 거사와 지천(智川) 거사께 두 번째로 무문관 투과했는데 혜운 법사께서는 성남에서(직장을 옮긴 관계로 요즈음은 쉬고 있음), 지천 법사께서는 인천에서 선도회 지부 모임을 잘 이끌어가고 있다. 한편 노사께 입문은 일찍 했지만 유학을 다녀온 관계로 22년만에 필자로부터 인가를 받은 법근(法根) 김진태 거사는 2000년 6월부터 대전에서 선도회 대전 지부의 법사로서 참선 모임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서강대 견주굴 모임의 천흠 거사께서도 얼마전 법사로 위촉되어 필자를 대신해 곧 견주굴 모임을 이끌어갈 예정이며 이때에 맞추어 필자는 잠실 지부 모임을 새롭게 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하루를 부리네’ 출간
이 책은 선도회 문하생들이 20세기 한국선을 산중(스님)에서 일반 대중 속으로 확산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종달 노사의 입적 10주기를 기리기 위해 편찬하였다. 여기에는 노사의 삶의 흔적과 그 속에 남겨진 사상을 더듬고 있으며, 또한 노사께서 설립한 재가자들의 선수행 모임인 ‘선도회’의 활동 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를 통해 참선수행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특히 제3부 <인생의 계단>은 노사의 자전 기록으로 자신의 성장부터 선도회를 이끌기까지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통해 지난했던 재가선의 확립과정은 물론, 개인적으로 차마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었음직한 사실들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4. 선도회에서 앞으로 할 일
노사의 사상 및 수행 체계 정립
첫 번째로 시급한 일은 앞에서 선도회의 핵심 가풍 세 가지를 다루었었는데 종달 노사의 15권의 저작물들과 여기저기 기고하셨던 자료들을 수집 및 정리해 노사의 사상 및 간화선 수행 체계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실천하기 쉽게 정립하는 일이다.
전문 재가 선원 건립과 법사 양성
두 번째로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전문 재가선원 건립에 관한 일이다. 2003년 현재 필자 나이가 48세이니 아직 정년 퇴직까지는 17년이 남아 있으며, 필자와 뜻을 같이 하는 선도회 법사 및 고참 수행자분들도 대부분 15년 전후로 정년을 맞을 예정으로 있어 수도권에 설립할 재가인을 위한 선도회의 총본부로서의 전문 선원 건립도 15여 년 후에 이루어지면 가장 적당한 시기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첫째로 인력 면에서 무보수의 재가 법사에 의해 운영되고 하루 종일 개방될 선원이기 때문에 정년을 맞이한 법사들이 충분히 많이 있어서 돌아가면서 하루나 이틀 정도 씩 상주하며 찾아오는 일반인들을 언제든지 지도할 수 있게 될 때라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현재 선도회 회원들이 정성껏 모금하고 있는 선원 건립 기금 3000만원과 법장 거사님께서 기증하신 7000만원 상당의 부동산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10여 년 간 지금처럼 회원이 늘어가면서 점차 모금도 늘어가면 충분히 선원 건립과 운영 기금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밖에 각 지역의 선도회 지부는 이미 광주 모임을 지도하고 계신 혜정 법사(조선대 미대 김인경 교수)께서 담양군에 다목적 주택, 즉 살림집 겸 작업실 겸 개인 선원을 건립하여 본을 보였듯이 그 지역에 거주하고 계신 선도회 법사들의 가정집이나 기존의 주변 공간(사찰, 성당 기도실, 도장, 기원 등)을 활용하여 참선 모임을 지속하면서, 간화선의 대중화를 위해 간화선의 핵심인 입실 지도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법사들을 양성하는 일이다.
在家의 다른 實修 사례
필자가 알기로는 현재 조계종단에서 간화선 활성화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在家禪 모임에 관한 자료도 체계적으로 함께 정리 중에 있기 때문에, 보림선원, 선우회, 수선회, 무심선원 등 국내의 좋은 사례들은 앞으로 국내 선학계를 통해 다룰 기회가 많으리라 보고,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웃 일본의 모범적인 활성화 사례를 하나 들기로 하겠다. [23,24]
일본 眞言宗의 율맥을 이어받은 律僧이기도 하였던 일본 臨濟宗 般若窟의 無相定光(1884-1948) 老師(제1대 會長師家)는 기성교단의 부패와 승려의 타락에 대한 活路로서 36세가 되던 1920년에 在家人을 위한 釋迦牟尼會를 발족하고 遷化 이전까지 傳法弟子 居士 8인을 배출했으며, 京都대학 경제학부 및 東京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한 제2대 會長師家인 無作光龍 노사부터는 出家僧이 아닌 在家弟子에 의해 傳法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 系譜는 다음과 같다.
73世 : 백은혜학(白隱慧鶴) → (7代略)→ 81世 : 무상정광(無相定光)
→ 82世 : 무작광룡(無作光龍: 1901-1985) 1944년 釋迦牟尼會 제2대 會長師家 취임
→ 83世 : 무문용선(無門龍善: 1922-현재) 1985년 釋迦牟尼會 제3대 會長師家 취임
무득용광(無得龍光: 1943-현재) 1989년 釋迦牟尼會 제4대 會長師家 취임
특히 46세 때 제4대 會長師家職을 승계한 龍光 노사는 釋迦牟尼會의 武藏野般若道場 附屬 淡水寮(通勤 通學하는 門下生들을 위한 寄宿舍)에 기거하며 20여 년간 光龍 노사에게 입참해 大事了畢했으며, 淡水寮 출신들이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다.
참고로 武藏野般若道場은 都心 속에서 다음과 같이 參禪法會를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1) 月例接心會: 매달 둘째 금요일 저녁에서 월요일 새벽까지
(5, 8, 12월은 1일-8일까지, 2월은 쉼)
2) 日曜禪會: 매일요일 오전 9시-11시까지 坐禪, 11시-12시까지 禪語錄 提唱
3) 平日坐禪: 매일 새벽 5시-6시까지, 매일 저녁 7시-8시까지
(일요일∙목요일은 쉼)
5. 마치는 글: 간화선은 바쁜 현대인에 효과적인 수행
필자가 체험한 바로는 간화선은 스승만 제대로 만나면 간화선만큼 쉬운 수행이 없으며, 일상생활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하는 재가자(전문직 종사자)들에게 특히 효과적인 수행법이다. 간결할 뿐만 아니라 뜻만 있다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간화선이 힘들고 어렵다는 주장은 그래서 별로 설득력이 없다. 향 한 대 타는 시간 동안(40분 정도) 어떤 잡념도 없이 철저히 수식관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대개 6개월이면 충분), 누구나 화두 공부에 온전하게 몰두할 수 있게 되며, 입실지도를 통한 화두참구로 길러진 집중력은 번잡한 생활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각자 맡은 바 본업에 몰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실제로 필자는 1987년 9월 종달 노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1990년 노사 입적 이후 맡게 된 선도회 법사직과 본업인 교수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하면서, 즉 하루 24시간이 선정 속의 삶이라는 것을 철저히 자각하게 되면서, 늘 있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학교의 경우는 교수, 연구원 및 대학원생, 교외의 경우는 선도회 문하생 및 가정에서는 가족)과 ‘더불어 함께’ 주어진 일(주중 근무시간에는 교육과 연구, 주말 자유시간에는 참선지도 및 가장으로서 할 일)에 거의 100%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별로 학자적인 소양은 없지만 좌선을 통해 길러진 아랫배의 힘을 바탕으로, 우수한 동료교수, 연구원 및 대학원생들과의 원만한 공동연구를 통해 교수직에 재직해오고 있는 지난 20년 동안, SCI급 국외저명학술지에 100여 편의 논문을 게재해오고 있으며, 아울러 박사학위 수여 제자도 7명 배출해오고 있다. 또한 노사 입적 이후 선도회의 법사로서 문하생들을 꾸준히 지도해온 결과 간화선 수행을 지도할 수 있는 필자와 똑같은 자격을 갖춘 법사도 6명 배출해 오고 있으며, 결혼 22년 동안 지금껏 권태기라는 것도 모르고 아내와 함께 가정도 원만히 잘 꾸려오고 있다.
필자는 물론 지금까지 종달 노사 문하에서의 개인적인 선적(禪的)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왔는데, 이 속에 담긴 나의 삶의 태도가 비록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였다고 확신하고 있으나 결코 모두에게 최상의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도무문 천차유로(大道無門 天差有路)란 선어(禪語)처럼 바르게 수행하는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또한 주위를 잘 둘러보면 각자에게 맞는 좋은 스승도 만날 수 있다. 부디 여러분들도 나름대로의 최선의 선택을 통해 모두 확고부동한 인생관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도 더불어 함께 하며 각자 자기 맡은 일에 철저히 투신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바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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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慧開 紹定戊子夏 首衆于東嘉龍翔 因衲子請益 遂將古人公案 作敲門瓦子 隨機引導學者 竟爾抄錄 不覺成集 初不以前後敘列 共成四十八則 通曰無門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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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崇山, <바람이냐 깃발이냐> (법보출판사, 1992).
[14] 六祖 因風颺刹幡 有二僧對論 一云 幡動 一云 風動 往復曾未契理 祖云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二僧悚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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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박영재, “재가불자의 선수행을 위하여”, 월간 <佛光> (1993. 6.-1995.12.)
[19] 五祖曰 譬如水牯牛過窓櫺 頭角四蹄都過了 因甚麽尾巴過不得 無門曰 若向者裡顚倒著得一隻眼 下得一轉語 可以上報四恩 下資三有 其或未然 更須照顧尾巴始得 頌曰 過去墮坑塹 回來劫被壞 者些尾巴子 直是甚奇怪.
[20] 南泉和尙 因東西堂爭猫兒 泉乃提起云 大衆道得卽救 道不得卽斬却也 衆無對 泉遂斬之 晩趙州外歸 泉擧似州 州乃脫履安頭上而出 泉云 子若在 卽救得猫兒.
[21] 朴英才 法境 居士/ 靑山自不動/ 白雲自去來/ 雲山本空裏/ 四五是二十/ 丁丑 正月 七日 崇山 拜.
[22] 無門龍禪, <坐禪入門> (大藏出版, 1989).
[23] 禪味編集部編, <坐禪ノススメ> (龍源社,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