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변씨세보(黃州邉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변려(邉呂)는 중국농서(隴西) 사람으로 송(宋)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귀화하여 취성(取城:황주의 옛 지명)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변려는 1232년(고종 19) 몽골군이 송경(松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나간 고종을 시종(侍從)하는데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져 식읍을 하사받았다고 한다.[1]
황주(黃州)는 황해도 북부에 위치하는 황주군 일대의 지명이다. 고구려 때는 동홀(冬忽) 또는 동어홀(冬於忽)이라 불렸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취성군(取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전 태봉 무렵에 황주(黃州)로 바꾸었고 983년(성종 2) 황주목이 되었고, 993년(성종 12)에는 절도사(節度使)를 두었으며 천덕군(天德郡)이라 부르며 관내도(關內道) 관할로 두었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목으로 개편하여 서해도(西海道)에 예속하였고 1217년(고종 4)에 지고령군(知固寧郡)으로 강등되었다. 1269년(원종 10)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였고, 1290년(충렬왕 6) 서북면으로 관을 옮겼으며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으로 환원되면서 서해도에 이관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어 2도호부, 6군, 5현 등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평양부 황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황해도 황주군으로 개편되었다. 북한의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황주군이다.
변득양(邉得讓, 1723년∼1801년) : 조선 후기의 문신. 1754년(영조 30)에 진사가 되고,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760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지방의 시관(試官)으로서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유생들의 항의로 1762년에 삭직당하였다. 곧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복직되었으나 왕의 부름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 1765년 삼례찰방(三禮察訪)에 기용되어 사간원의 헌납(獻納)·사간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69년에 승지에 오르고 1774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된 뒤 지돈녕부사·부사직(副司直) 등을 거쳐, 1793년(정조 17)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그뒤 판돈녕부사·판의금부사·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