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 이곳은
내 고향은 대전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의 정확히 준간 지점이다. 내 고향에서 서울도 한 시간, 대전도 한 시간이 걸린다. 고속도로 통행요금도 같다. 정확히 중간지점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 음성톨게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지금은 대소톨게이트라고 개명한 중부고속도로 나들목이 있는 동네가 내 고향이다. 고향에서 서울로 가는 교통편은 아주 좋은 편이다. 대략 30분 간격으로 서울 가는 버스가 있다. 그러나 대전을 직접 오갈 수 있는 대중교통편은 없다. 청주까지 나와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지금도 그렇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같은 시간, 같은 거리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서울까지 한 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지만 대전까지는 두 시간 이상이 걸린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상 우리 고향 사람들은 서울과 경기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일찌감치 상경해 자리를 잡고 출세한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그들이 조카며 사촌동생이며 친구며 고향사람들을 불러올린다. 그러다보니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가는 사람이 더 늘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데다 아는 사람의 신세를 질 수도 있으니 서울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 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고향에서 경기도 안성시 접경까지의 거리는 불과 20여리 남짓이다.
서울은 북쪽인데 반해 대전은 남쪽이다. 남쪽으로 대전을 향해 가다보면 청주를 거치게 된다. 청주로 학교에 진학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서울만큼은 못 돼도 청주로 터전을 옮기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대전은 청주와 비교할 때 두 배 이상 큰 도시지만 서울과 비교할 규모는 못 된다. 청주는 대전의 절반에 그치는 도시지만 그래도 도청소재지로 웬만한 교육, 문화,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국립대학교도 있고, 지방명문 사립대도 있고, 제법 큰 산업단지도 있고, 상권도 발달돼 있다.
지금껏 내 고향의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설명한 것은 내 고향사람들이 대전에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이다. 북으로 가고자 하면 서울로 가고 남으로 가고자 하면 청주로 가서 터를 잡았다. 청주라는 만만치 않은 도시가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니 대전까지 내려오는 이들이 없었다. 88년 이후 4반세기를 대전에서 살고 있지만 고향사람 만난 수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이다. 대전은 그만큼 내게 낯선 도시였다. 처음 이곳 대전에 왔을 때 친구도 친척도 단 한명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대전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완벽한 대전 사람이 됐다. 고향에는 몇 안 되는 친구와 친인척, 어려서 알고 지내던 많지 않은 마을사람들이 있을 뿐이지만 대전에는 너무도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있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 많은 지역 가운데 지금 내게 대전보다 편한 곳은 없다. 나는 대전에 대해 너무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을 때 어느 식당으로 달려가야 하는지, 몸이 아플 때 어느 병원 어떤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지, 어느 시장에 가야 어떤 물건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디가 아름답고, 어디가 명소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대전은 내게 너무도 편한 도시이다.
만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년 후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목가적 생활을 하며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앞서 밝힌 대로 이미 대전보다 편한 곳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현업을 떠나도 대전에서 살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고향을 등지고 살아갈 이유는 없다. 내 고향은 대전에서 한 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곳이다. 친구를 만나고 싶고 누군가가 그리우면 달려갈 것이다. 더 나이가 들어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대전에서 계속 살겠다는 것이 지금의 구상이다.
대전에 발을 디딘 이후 줄곧 서구와 유성구에 살았다. 서구에서는 도마동, 내동, 갈마동, 정림동에서 살아봤다. 유성구에서는 봉명동, 궁동, 관평동에서 살아봤다. 관평동에서 8년 반을 살다가 최근에 다시 봉명동으로 회귀했다. 적을 두고 살았던 모든 곳이 편하고 좋았다. 외지에서 거처를 대전으로 옮겨 살고 있는 내게 어디서든 누구 하나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모두가 고향사람처럼 푸근하게 대해줬다. 어찌 생각하면 무척 특색 없는 도시이고, 개성 없는 도시일 수 있지만 타지인이라고 해서 어떤 불필요한 서러움과 어려움이 없는 곳이 바로 대전이다.
정부대전청사가 둔산동에 자리를 잡고 외청 직원들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강제 이주해온 일이 있었다. 이들은 이주 초기에 좀처럼 대전에 정을 두지 않았다. 그저 재수가 없어 시골로 직장이 옮겨가 마음에도 없는 대전에서 일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년 넘게, 혹은 2년 넘게 서울에서 대전을 오가며 출퇴근 하는 공무원들을 무수히 많이 봤다. 이제는 사정이 정반대가 됐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대전으로 거처를 옮겨왔고, 지금은 대전을 떠나 살 수 없다는 ‘대전바보’가 됐다. 3군 본부나 군수사령부, 코레일, 한국철도시설공단 등이 이전해오면서 대전에 정착한 많은 이주자들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가장 편하고 익숙하다. 그래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다. 나야 대전에 적(籍)을 갖고 대전에 정을 붙였으니 대전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지만 타 지역에서 거주하는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정 붙이고 살고 있는 지역이 가장 편하고,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같은 대전 지역 내에서도 저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좋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대전에 26년 사는 동안 여덟 번의 이사를 했고, 아홉 동네에서 살아봤다. 동네 저마다 특색이 있고, 장단점이 있었다. 굳이 각 마을마다 순위나 서열을 매길 수는 없는 일. 그래도 정이 가는 동네는 정림동이었다. 적당히 시골스럽고, 적당히 정비돼 있는 동네면서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갑천이 은빛 물보라를 치며 황홀하게 반짝였다. 갑천변을 산책하기도 좋았다. 물론 다른 동네도 좋았다.
대전에서 청춘을 보냈고, 대전에서 중년을 보내고 있다. 대전에서 인생을 배웠다. 그래서 대전은 내게 스승 같은 도시이다. 한편으로는 고향처럼 푸근한 도시이다. 나의 분신인 두 명의 아들은 대전에서 태어나 줄곧 대전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고 있다. 아비 고향이 충청북도 음성이고,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도 그곳에 묻혀 계시니 너희 고향도 충청북도 음성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아들들은 입으로만 알았다고 대답할 뿐 자신들은 철저히 대전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살아보지도 않은 곳이 고향이라고 우기는 아버지 말이 머리가 굵어지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 아무려면 어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아비가 그토록 정을 붙인 대전이라면 아들 녀석들이 고향이라고 우겨도 너그러이 받아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