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심장이 두개 】
심장이 두 개인 사람이 있다. 어떤 저명한 의학저널에 보고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양성평등 의식함양을 주제로 교육을 할 때, 종종 사용되는 표현이다. 양성평등 의식 함양과 심장이 두 개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지하철을 타면 ‘노약자석’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공간이 있다. 그 스티커를 잘 살펴보면, 장애인을 표시하거나 노인을 표시하거나, 임산부를 표시하는 그림이 있다. 이 스티커를 잘 떠올려 보면 연결되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심장이 두 개인 사람.
양성평등 의식 함양 교육은 생활 속에서 성역할에 대해 왜곡되어 자리 잡은 것을 새로운 기준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심장이 두 개인 사람이란 표현이 있기 전에는 그저 ‘임산부’라고 불리었다. 배가 불룩 나와서는 뒤뚱뒤뚱 걷는 사람 말이다. 당연히 무조건 여성이다. 그런 여성을 위한 배려가 언제부터인지 개인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 불룩’나와야지만 임산부로서 배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 그림을 보면 거의 만삭에 가까운 그림으로 임산부를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그림의 영향 탓인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배가 나온’ 여성에게만 배려를 하려는 기준이 형성되고 만 것이다. 정말은 “심장이 두 개인 분”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데 말이다. 배의 둘레가 어느 정도인가의 기준이 아닌 심장 두 개가 뛰고 있는 상황이라면, 본인이 못 챙기고 있어도 옆에서 챙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전에 노약자석을 키워드로 하여 포탈 검색을 해 보았다. 예상대로 노약자석에 대한 사례와 기사가 무수히 많이 검색되었다. 대부분 노약자석이 ‘노인석’이냐 라는 명제를 앞세우고 있었다. 임산부도 노인에게 수모를 당하고, 다리에 깁스한 청소년도 노인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사례와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있어 보다 강건한 사람들에게 자리양보 의식교육을 한 것인데, 이들은 열외가 되고 약자들끼리 그만 서로 누가 약자인지를 내세우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른 공경하던 시대가 갔다’ 또는 ‘노인 전용 칸’을 주장하는 혹자들의 말이 있지만, 1970년대 지하철이 다닌 이래로 벌써 40년이 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면 서로에게 좋은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서울의 전유물인 것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이 정도의 변화를 겪으며 서로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은데, 그 속에서의 시시비비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지하철에 넣는 민원의 대다수는 아니라지만, 심심찮게 보고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노약자석’에 대한 것이란다.
심장이 두 개인 사람이 분명 엄살을 부리려면 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심장이 두 개 있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당최 그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짚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입장’이라는 것. 양보라는 것은 어쩌면 타인의 입장보다 나의 입장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인다. 내가 지금 어떠한 상태인가에 따라 상대방의 처지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입장’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심장이 두 개’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럴 것 같은 사람을 마주한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제 등산을 했더니 오늘 특별히 다리가 아프다. 이런 상태에서 ‘심장이 두 개’인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면,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것이다. 원래 자신은 자리도 양보하고 두 다리로 서서 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니 오늘 만큼은 외면하고 싶다는 것이다. 입장이라는 것은 ‘늘’, ‘당연히’ 라는 기준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만약 ‘늘’, ‘당연히’ 타인의 입장만을 고려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되려 물어보고 싶다. 노약자석의 스티커에 만삭의 임산부를 그려 넣은 것은 어쩌면, 다리가 아프더라도 그렇게 몸이 무거운 사람이 앞에 서 있다면 앉아갈 수 있겠는가?라는 묘한 압박을 받게 하는 요인이 있다고 보인다. 결국,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고 그에 따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입장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입장이 있다”라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타인에게도 그 자신에게 걸맞는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를 전제해 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입장차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서로의 입장을 비교, 대조 해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또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오다가다 옷 깃 스치는 인연인 경우라면, 서로의 입장을 살필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공중도덕에 대한 실천의지이다. 만인이 따르고 만인이 선택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본인도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 이렇게 된다면, 내 입장을 앞세울 필요도 타인의 입장을 일부러 고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저 모두 당연히 그리 하면 되는 것이다. “노약자석을 비워두세요”라는 캠페인을 보았다. 비워두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가 아니라, 보다 적합한 사람이 앉아가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심장이 두 개 이신 분에 대해서도 자신의 상태에 따라 여러 입장이 존재하는데, 일상에서 우린 어쩌면 상대에 대한 파악이나 상대에게 ‘입장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없이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버스에서 일어난 일이면, ‘공중도덕을 모르는 구나’라고 이해를 했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기에 앞서, 자신의 입장을 수용해야하는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심장이 두 개 이신 분이 직장을 다닌다. 출산할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자 하지만, 그녀의 이런 입장을 회사에서는 알아주지 않는단다. 회사 동료들의 입장은 “힘드니까 하지마”, “곧 들어가겠네”라는 입장을 앞세워 일을 주지 않는단다. 몸이 힘들고 입덧이 심해도 몇 개월 뒤에는 자신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지금’ 열심히 하고 싶은 입장이 있는데, 몇 달 뒤를 앞세워 회사와 회사동료는 심장이 두 개인 직장인의 입장을 고려해 주지 않는단다. 상대방의 입장을 알아봐 주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인 것 같다. <행가래로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