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글입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심청전에서, 인상깊었던 몇 장면중에 심봉사 꿈 해몽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심청이 왕비가 되어 눈먼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맹인잔치를 열었는 데, 도중에 뺑덕어미까지 다른 젊은봉사와 눈맞아 도망가고 우여곡절끝에 간신히 도성에 도착한 심봉사가 용한 과부맹인집에서 하룻밤 자면서 꾼 꿈의 해몽이었지요.
심봉사가 끌려가 알몸으로 껍데기까지 홀딱 벗겨내 그걸로 북을 만들어 둥둥 치는 데, 심봉사가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나죽는다'고 펄펄 뛰는 꿈이었지요. 그 끔찍한 꿈을 꾼 심봉사는 '마누라 먼저 보내고 자식까지 앞세우더니, 그동안 그 험한 꼴 당하면서도 모진 목숨 연명해오던 내가 이제는 틀림없이 죽을 운수인가보다'라고 생각하지만, 과부맹인은 정반대의 해몽을 내놓습니다.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치고 심봉사가 불길속에서 펄펄 뛰었으니, 북은 크고 좋은 일이 있을 때 치는 것이요 심봉사가 펄펄 뛴 것은 너무 좋아서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춘 것이라, 이는 틀림없이 심봉사에게 기막히게 좋은 일이 생겨 북치고 춤춘 것이니 대길몽이라는 것이지요.
정말 대궐에 가서 심청을 만나고 눈까지 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맺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그 끔찍한 꿈을 기막히게 해석한 그 과부맹인이 참 신통했더랬습니다. '꿈보다 해몽'의 첫 만남이었지요.
제 주변의 어떤 분은, 생전에 사이가 나빴던 시어머니가 꿈에 보이면 그날은 재수가 없고, 자매처럼 의지하고 지냈던 친정어머니가 꿈에 보이면 그날은 재수가 좋다네요. 반면에 어떤 분은 생전에 그렇게 자상하고 후덕해서 경제적 도움까지 많이 주었던 이복언니가 꿈에 보이면 그날은 아침부터 기분도 나쁘고 재수도 없는 데, 생전에 사이도 나쁘고 자주 싸우면서 살았던 이웃집 아저씨가 꿈에 나타나면 그날은 그렇게 재수가 좋다네요.
사람들은 매일밤 자면서 꿈을 꾸고, 그중 내용이 특이하거나 기억이 선명한 꿈은 나름대로 해몽을 해보지요. 돼지꿈을 꾸거나 누런 똥꿈을 꾼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복권을 사기도 합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꿈과 현실이 어느 정도 일정한 연관성이 있을 때엔 통상 '현몽'이라고 하지요. 미리 나타나서 보여준다는 의미겠지요. 이렇듯 꿈은 가끔 예지적인 상을 우리에게 드리워주기도 합니다. 무당같은 이들은 굿판을 벌이거나 여러 형태의 신점을 통해 그 속에 나타나는 상을 우리에게 나름대로 해석을 해주고 댓가를 받지요.
그런데, 이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의 그때까지 쌓아온 지식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 또는 성향, 그리고 영성의 깊이에 정확하게 영향을 받습니다. 꿈이나 굿판에서의 공수, 신점 속에서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상은 나름 객관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철저히 해석자의 주관에 달려있는 것이지요. 심봉사의 꿈을 심봉사는 틀림없이 자신이 죽을 꿈이라 생각했고 그 과부맹인은 대길몽이라고 했듯이, 같은 꿈을 놓고 정반대의 해석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제 주변 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시어머니가 꿈에 나타나면 '아이고 왜 나타나가지고...'라는 원망의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 시어머니는 이 날 각별히 조심하라고 며느리를 배려해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는 겁니다.
현실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제반 분야에서 보이는 이런저런 현상을 놓고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을 때가 많습니다. 이명박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결과를 놓고도, 한쪽은 역사가 퇴보했다고 분노하고 한쪽에서는 대한민국을 되살리게 되었다고 환호합니다. 현상은 하나인데, 바라보는 관점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 관점의 차이가 서로 다른 행동을 낳고, 그런 것들이 쌓여 방향성을 가지고, 결국은 각자의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상제님신앙 또한 같습니다. 상제님 말씀이 지향하는 바는 한 가지일 텐데, 그 말씀을 해석하고 신앙하는 형태 또한 참 다양합니다. 아, 물론 상제님 말씀 안에 그럴 소지는 충분히 있지요. 증언자들의 기억의 한계나 주관의 개입, 채집 및 편집자들의 주관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이 안될 수가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상제님 말씀의 중요한 특징중 하나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는 겁니다. 각자가 가진 웅심들을 다 풀어먹게끔 해석의 여지를 절묘하게 남겨놓으신 그 배려에 종종 탄복하기도 하는 데요, 사실은 가슴이 찡하게 저려오는 상제님의 애틋한 마음씀씀이에 다름 아니지요.
기억하시는지요. 상제님께서 벽을 향해 돌아누우셔서 느끼어 우시면서 "아무리 하여도 다 건져살리기가 어려우니,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요." 하셨던 것을요.
천하창생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시어 천지공사를 행하시고, 그 과정에서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감없이 보여주셨던 상제님. 상제님이기 이전에 '인간 강증산'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주셨던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 그 상제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걸려들기를, 걸려들어서 상극의 기운을 남김없이 빼서, 틀림없이, 빠짐없이, 상생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그리하여 모두 후천으로 살아 넘어가기를 바라시는 천지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담아 말씀의 그물을 촘촘히 짜놓으신 게 바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상제님 고수부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웅심을 일으키는 말씀 사이사이에, 끊임없이 근본을 생각하고 마음을 추스리고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우도록 말씀하고 말씀하고 또 말씀하시지요. 혹시 우리가 길을 완전히 잃어 당신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갈팡질팡할까봐서요.
마음을 바꾸기가 죽기보다 어렵다, 네가 너를 구원해야 나도 너를 구원할 수 있다, 종복이 되지 말고 어진 벗이 되라, 나는 마음만을 본다, 벽에라도 기대지 말라, 일심만 가지면 서촉에서라도 너를 찾을 것이다, 믿기를 활다리듯 하라, 길화개길실 흉화개흉실, 제 마음을 제가 찾아 제 일은 제가 하라, 인간사업하러 오셨다, 마음닦는 공부이니 심통공부 어서하라, 어질 인자를 잘 쥐고 있으라...
여러분은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는지요?
여러분은 '귀에 걸면 귀걸이...' 부분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심법을 강조하신 부분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새벽에 난데없는 천둥이 치더니, 눈이 하얗게 세상을 덮었습니다.
길 다니실 때 조심하시고,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진리 또한 하루빨리 오늘 내린 눈처럼 세상에 드러나 온 천지를 아름답게 덮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