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6일
핵심 구절 41-42절: “그리고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에게 말했다: 탈리타 쿰! –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소녀는 즉시 일어나서 걸어 다녔는데 그 소녀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싯다르타 고타마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 지역의 봉주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궁전에서 보호받고 평온하게 자랐습니다. 청년이 되자 싯다르타 고타마는 생애 처음으로 성을 떠나 주변 지역을 다니다가 처음으로 사람들이 늙고, 병들고, 고통을 겪고, 결국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러한 인생의 모든 것을 잊음으로써(해탈함으로써) 세상의 걱정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안타깝게도 인생 문제 망각은 죽음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진정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죽음의 권세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갈릴리 바닷가 동쪽 지역에서 예수님은 악령에 사로잡힌 미친 사람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다시 건너 서쪽 지역으로 돌아오셨을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군중 중에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곳 회당장 중 한 명인 야이로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 주위를 둘러싸고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예수님은 피를 흘리는 여인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그 여인을 고치시고 그 여인이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돕기 위해 멈춰서 있는 동안 야이로는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딸이 금방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과 이야기하고 계시는 동안,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당신의 딸은 벌써 죽었습니다!”라는 끔찍한 소식을 야이로에게 전했습니다. (35).
그 소식은 벼락처럼 야이로의 머리와 가슴을 강타했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얼마나 슬프고 절망적이었을까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덧붙였습니다: “주님을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야이로가 예수님께 더 이상 부담을 주지 말고 대신 딸의 장례를 준비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도움에 대한 희망을 빨리 포기하고 딸을 땅에 묻으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좋은 뜻으로 말한 조언은 야이로의 마음에 예수님 능력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는 말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이 말을 듣고 더욱더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왜 두려워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최악의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왔고 딸이 죽었기 때문에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어두운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인체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육체가 물리적으로 해체되는 것 이상입니다. 죽음과 함께 인간은 어둠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개인적으로 죽음에 직면했을 때 마귀의 어두운 힘을 느끼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36절에 그분의 반응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싶으셨어요:
첫째: 야이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병든 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딸이 죽자, 예수님이 더 이상 딸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능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야이로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신으로 믿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전능하신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폭풍우와 성난 갈릴리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시자 폭풍우와 바다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로 믿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었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닥치는 심각한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야이로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나를 믿으라!” “오직"이라는 말을 덧붙이시면서 야이로는 예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도우심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며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야이로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두려움과 의심이 생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과 그분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과 어둠의 권세의 포로가 됩니다. 물론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의 도움과 사랑을 믿고 슬픔과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종종 그런 상황에 처하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제게 몰려오는 의심과 절망적인 상황과 싸우는데, 이 싸움은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때 제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나라 하나님께서 저를 도우셔서 승리를 주시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과 도우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절망을 극복하고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싸움은 매우 힘든 싸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시고 큰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과 도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의심과 슬픔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2019년 12월 13일 아내 에스더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갔을 때 제게 마귀의 유혹이 컸고, 저는 매우 절망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도우셔서 아내가 천국으로 부활한 것을 기뻐할 수 있었고, 또 하나님은 에스더가 성령 안에서 항상 저와 동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의 제자를 데리고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통곡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죽음의 권세를 직접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모두가 죽음 권세의 포로였습니다. 죽음 권세를 피부로 느낀 그들은 모두 절망적으로 울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로써 야이로의 자매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울음으로 야이로의 자매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오빠에 대한 추억을 묻어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우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울고 나면 슬픔을 덜 느끼게 하는 심리적 효과는 있습니다. 하지만 운다고 해서 슬픔의 원인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애도하는 집과 비슷합니다. 누군가가 죽으면 사람들은 며칠 동안 울고 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 울고 우느냐?.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는 사람들이 잠자는 아이 때문에 울고 통곡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앞에서 슬픔과 절망에 빠진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물론 사람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슬픔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활하여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은 짧은 낮잠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잠이 들면 우리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잠을 7~8시간 자더라도 시간 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육체적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으면 세상의 시간으로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수백, 수천 년이 지난 후가 되지만 우리는 시간 간 것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육체적 죽음 후 즉시 부활하여 천국에 있게 될 것으로 느낄 것입니다. 오후 낮잠을 자고 나면 개운함을 느끼는 것처럼, 부활 후에는 매우 개운함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은혜의 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는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와 새로운 세계로 간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는 오직 생명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이 소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은 좋은 소식은 빨리 믿지 않고 나쁜 소식은 빨리 믿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야이로의 방에서 모두 쫓아내고 야이로의 아버지와 그의 아내와 예수님 제자 세 명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어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셨나요?
예수님은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마치 잠에서 깨우시듯 말씀하셨습니다: “탈리타쿰!” - 이 말은 이렇게 뜻합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열두 살 소녀는 즉시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죽은 자를 살리심을 통해 자신의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