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에는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골치덩어리가 된 법궤의 처리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블레셋은 결국 법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내기로 하고 정성껏 제사를 드린 후에 이스라엘에 반납합니다. 그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19절을 보겠습니다.
19 그 때에 벳세메스 사람들이 주의 궤 속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서 오만 칠십 명이나 쳐서 죽이셨다. 주께서 그 백성을 그렇게 크게 치셨기 때문에, 그들은 슬피 울었다.
벳세메스는 블레셋 도읍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도읍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소가 끄는 수레에 법궤를 실어 이스라엘로 보냈고 법궤를 끌고 가던 소가 이스라엘 경내로 들어와서 벳세메스라는 고을에 들어와 멈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그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정성껏 법궤를 모셔들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부 호기심을 참지 못한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보았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곳 주민 70명, 또는 50,070명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표준새번역에는 오만 칠십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개역개정본에는 오만이라는 숫자가 괄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칠십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서로 다른 이유는, 구약의 본문은 지금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고 사본만 남아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오만칠십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어떤 사본에는 그냥 칠십명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70명이 맞겠지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말입니다. 어쨌든 본문의 하나님은 이번에도 자기 백성 수십명을 또 죽이셨네요.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본문의 하나님이 말입니다.
만약에 본문에 기록된 이런 죽음의 기록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아마도 전염병이 돌아서 어느 고을에서 수십 명이 죽은 슬픈 사건이 이 설화의 소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설화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지내고 자주 싸웠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법궤를 빼앗겼다는 본문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인지 설화적 설정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서 본문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고 그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자료도 전혀 없으니까요. 어떤 기록이 다른 기록에 의해 보완되거나 증명되지 않고 고고학적 자료도 없으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설화에서 설정된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블레셋이 재난을 당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의미의 기록이고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메시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단군상을 빼앗아갔는데 단군상이 가는 곳마다 재앙이 일어나고 많은 일본인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면, 조신시대 사람들 뿐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인들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법궤가 이스라엘 경내로 들어와서도 문제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법궤를 들여다보았다는 이유로, 오만칠십명은 아닐 것이고 칠십명의 주민을 죽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 이게 하나님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문제일까요?
본문의 기록자는 아마도 그 이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내려왔을 설화의 내용을 그냥 그대로 사무엘서에 담았을 것입니다. 블레셋에 내린 재앙을 기록할 때는 아무 고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내린 이 재앙에 대한 기록을 최종적으로 사무엘서에 담을 때, 어쩌면 그때는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제 추측일 뿐이고, 그와 반대로 오히려 이 부분을 더 힘주어 강조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는 죽는 게 당연하다는 이스라엘의 전통 신앙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간일 수도 있겠지요. 이 설화가 마음에 안 들고, 설마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렇게 하셨을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오랜 세월 내려오는 기록을 자기 마음대로 고치거나 뺄 수 없어서 그대로 담았을 가능성 말입니다.
제가 왜 이런 설명을 장황하게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성서는 이런 책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에 의해 쓰여진 책도 아닙니다. 옛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삶 전체로 써낸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삶과 신앙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그들의 욕망과 소망이, 고통과 기쁨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이웃 종족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저 원수들을 잔혹하게 죽여서 씨를 말려버려야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멸망당할 수도 있는 두려운 현실을 안고 살아가야 했으니까요.
고대인들은, 전투는 자신들이 벌이지만 그 전쟁을 주관하는 것은 신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신 야훼와 블레셋의 신 다곤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남는 길은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지는 것은 그런 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민족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는 사악한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뿐 아니라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인까지도 쓸어버리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의로운 분이요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었습니다.
구약성서는 그렇게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삶과 신앙을, 욕망과 희망을, 또한 고통과 기쁨을 담아낸 채,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지고 기록되고 모아져서 마침내 하나의 두루마리 원본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24권의 두루마리 원본이 서기 90년에 유대 랍비들에 의해서 구약성서로 채택된 것입니다. 지금 그 원본들 중에 남아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그 원본을 베낀 사본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내용이 바뀌기도 하고 서로 모순된 기록들도 있고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 손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지식, 저자의 의도 등을 충분히 공부하고 나서, 옛 히브리인들의 처절한 심정, 그러니까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때로는 억지스런 욕망과 소망까지 읽어내야 합니다. 전문적인 신학자들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이해를 위해 그동안 발전해온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설명하는 현대신학자들에게 이단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그런 책은 위험하니 절대로 읽으면 안 되고 오직 성서 자체만 읽으라는 목사들이 한국 교회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기록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성서 도처에 깔려 있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기록은 원래 진리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는 황당한 논리가 되어 기독교인들을 성서 문자의 노예, 교회조직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성서를 읽으니까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성서를 읽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내용들을 들이대면서, 너희들이 믿는 신은 사막 잡신이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악신일 뿐이라고 조롱합니다.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기는커녕 박멸의 대상이라는 안티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초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