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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근본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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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기설(緣起說)
2. 3법인설(三法印說)
3. 4성제설(四聖諦說)
4. 제법개공설(諸法皆空設)
5. 심의식설(心意識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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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입재식을 마치고 첫 번째 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불교(佛敎)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므로 불자는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수련대회 일정표에 따라 앞으로 3시간에 걸쳐서(매 시간마다 10분 휴식)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매주 열리는 각 사찰 학생회 법회에서 스님 또는 지도교사로 부터 불교의 근본가르침을 배워서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불교의 근본가르침을 확실히 배워서 불자로서 흔들림 없는 신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 연기설(緣起說)
(1) 연기의 의의(意義)
부처님께서는 6년 수행 끝에 12월 8일 새벽 명성을 보고 정각(正覺)을 이루셨는데, 그 깨달음의 내용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연기를 설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법은 여래가 출세(出世)하거나 출세치 않거나 항상 법계(法界)에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하여 분별 연설한다."(잡아함경 권12), “연기를 보는 자는 법[진리]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중아함경 권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처님은 다만 연기의 법을 발견하고 터득한 사람이란 뜻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가 연기법이라면 연기란 무슨 뜻일까요? 연기(緣起)를 파리어로 파티카 삼무파다(Paticca samuppada, 범어로는 Pratitya samutpada)라고 하는데, 이 말은 파티카(Patica)와 삼무파다(Samuppada)의 합성어입니다. 파티카는 말미암아, 삼무파다는 일어나는 것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역에서는 파티카를 인연(여기서 因은 직접적인 원인, 緣은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키며, 因을 原因, 緣을 條件이라고도 합니다. 因緣을 줄여서 緣이라고도 합니다), 삼무파다를 생기(生起, 이를 줄여서 起라고도 함)라고 의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란 말미암아(緣) 일어나는 것(起),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예컨데 여기 코스모스가 한 송이 피어있다면 먼저 씨앗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적당한 온도(태양열)ㆍ습도ㆍ흙 등이 있어야 싹이 트고 자라서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씨앗은 인에 해당되고, 온도ㆍ습도ㆍ흙은 연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이 어떤 결과가 발생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인과연이 결합하여야 결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因)만 있고 연(緣)이 없으면 과(果)가 일어나지 않고, 연만 있고 인이 없어도 과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인과 연이 만나야 과가 일어나며, 과가 일어났다면 반드시 인과 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전(잡아함경 제12권)에서는 연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②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③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④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이 가운데 ①과 ③이 한 쌍을 이루고 ②와 ④이 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①과 ③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것은, 이것이 있으려면 저것이 있어야 하고 또 동시에 저것이 있으려면 이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것과 저것은 서로가 있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됩니다. 이 구절은 있음과 없음의 관계를 공간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②와 ④는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것은, 인연(원인과 조건)이 있을 때 과(果)가 발생하고 인연이 사라지면 그 과가 소멸한다는 것으로,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시간적 상호 관련성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연기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현상이 종횡으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개체는 일체 세계와, 일체 세계는 개별적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간적(空間的)으로 고립하여 있지 않고 더불어 있으며, 시간적으로 계기적(繼起的)인 관계에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관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모든 존재는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이며 그럴만한 조건이 없어지면 그 존재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설을 자신의 문제와 결부시켜 보면 현재의 내(我)가 있는 것은 현재의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그 과거는 또 그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또 그 과거는 그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서 이 인연이라는 것은 과거를 따져 보아도 그 과거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는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그 미래는 또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 내서 미래를 따져 보아도 연기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연기를 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일체 사물은 그 본성에 있어서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며, 그러므로 공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공성의 도리를 용수(龍樹)는 “소멸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으며, 단일하지도 않고 여럿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존재론적으로 공은 모든 존재의 무자성성(無自性性)과 연기성(緣起性)을 의미합니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공은 얻을 것도 없고 얻어야 할 진리[법]라는 관념도 없는 세계입니다. 인식의 주관인 몸과 마음의 요소, 즉 감각ㆍ지각ㆍ사고 등뿐만 아니라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적 객관도 모두 공합니다. 모든 이원적 사유에서 벗어나 평등일미(平等一味)한 제법의 진실상이 공성(空性)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진리는 불교사상의 핵심입니다. 모든 존재가 고립ㆍ독존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알 때-나와 남이 본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더불어 있다는 사실에 확연히 눈뜰 때-우리의 삶은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한 삶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자비의 실천이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실로 불교가 깨침을 이상으로 하는 것도, 연기의 진리를 가르치는 까닭도, 그것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도 이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실천적 삶인 자비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2) 12연기설
존재의 법칙인 연기설을 늙고 병들고 죽고 괴로움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에 적용하여 그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과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 12연기설입니다.
연기의 가르침은 초기경전에서 이미 6지(支) 연기, 8지 연기, 9지 연기, 10지 연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완성된 형태로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이 바로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6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 有)-생(生)-노사(老死)의 12지 연기입니다.
왜 노사가 있게 되었는가? 이것을 연기설에 의하여 풀이하여 보면, "이것(生)이 있음으로 저것(老死)이 있고, 이것(生)이 없으므로 저것(老死)이 없다. 이것(生)이 일어남으로 저것(老死)이 일어나고, 이것(生)이 멸하므로 저것(老死)이 멸한다."가 됩니다.
노사가 있게 된 것은 생(生)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이 없다면 노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노사가 있게 된 것은 생 때문이며, 생은 유, 유는 취, 취는 애, 애는 수, 수는 촉, 촉은 육입, 육입은 명색, 명색은 식, 식은 행, 행은 무명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문제는 무명입니다. 이 무명만 없다면 우리는 생사윤회 고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락{열반, 해탈}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12연기를 무명부터 순차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① 무명(無明) : 무지 또는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무명이라고 합니다. 무명을 소승에서는 '과거의 업력에 의해서 나타나는 힘'이라고 보고 있고, 대승에서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근본불각(根本不覺)'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근본불각이라는 말은 우리 중생들이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므로 중생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불성이 번뇌에 가려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명의 반대말은 명(明)입니다. 명이란 밝다는 뜻으로, 바로 진여자성 곧 불성(佛性)을 가리킵니다. 무명은 밝음이 없다는 뜻이므로 무명과 명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거울에 티끌이 끼어있지 않은 밝은 상태를 명이라고 한다면, 무명은 티끌이 끼어 밝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명이란 바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인 진여본성에 때가 끼어 가리워진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이 때만 벗기면 바로 진여본성이 드러나서 다음 단계인 어리석은 행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명을 학자들에 따라서는 생명의 의지 또는 생활의 의지라 하기도하고, 근본무지라고도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무명을 ‘생활의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굳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조건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명을 또 달리 말하면 ‘생명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바로 이 무명이기 때문입니다.
② 행(行) : 행위ㆍ동작 또는 업(業)이라는 뜻인데, 생명의 원동력인 무명의 끊임없는 활동상태, 곧 무명이라는 생명의지가 몸과 입과 뜻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③ 식(識) :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識}, 즉 마음입니다. 6근(六根)이 각각 그 대상을 접촉하는데 있어서 식이 없다면 송장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④ 명색(名色) :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심식(心識)을 명이라 하고, 물질적인 존재인 육체를 색이라 합니다. 이는 사람의 몸과 마음, 곧 정신과 육체를 말합니다.
⑤ 6입(六入) : 6근(六根) 혹은 6처(六處)라고도 하는데, 감각기관, 즉 눈ㆍ귀ㆍ코ㆍ혀ㆍ입ㆍ몸ㆍ뜻을 말합니다. 6입이 없으면 촉이란 불가능합니다.
⑥ 촉(觸) : 앞의 6가지 감각기관{六入}이 밖의 경계에 대하여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은 모양을, 귀는 소리를 대상으로 하듯, 6근이 경계를 대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⑦ 수(受) : 감각기관 즉 눈 귀 등이 외계를 접촉하여 좋고 싫고 즐겁고 불쾌함을 느끼는 감각작용입니다. 자세히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6가지 감각기관(六根)이 각각 그 대상경계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6경(六境)과 접촉함에 일어나는 ⓐ괴로운 감각(苦受) ⓑ즐거운 감각(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는 흔히 6수(六受)와 3수(三受)로 나뉘기도 하는데, 6수라 함은 6근(六根)과 6경(六境)이 접촉면에서 각기 따로 따로 나누어 본 것으로, 안촉수(眼觸受)ㆍ이촉수(耳觸受)ㆍ비촉수(鼻觸受)ㆍ설촉수(舌觸受)ㆍ신촉수(身觸受)ㆍ의촉수(意觸受)의 6가지를 말하고, 3수라함은 이렇게 생긴 수를 그 성질 면에서 크게 나누어 본 것으로,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사수(捨受)의 3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수란 좋다, 나쁘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각자 나름의 감각작용이 수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⑧ 애(愛) : 애는 욕망의 만족을 희구하는 치열한 갈애를 말합니다. 중생이란 누구나 다 그 나름의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른 것일 수는 없으나 중생이면 누구나 이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동분서주하며 괴로움의 나날을 보냅니다(물론 성불을 향한 원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중생이면 다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심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⑨ 취(取) : 앞의 애에 따라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집착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이 일어나는데, 이를 취라고 합니다. 취는 흔히 넷으로 나누는데, 이를 4취(四取)라고 합니다.
4취란 욕취(欲取, 5欲境에 대한 집착),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나 사상ㆍ학설 등에 고집함),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행에 대해 진실ㆍ청정하다고 고집함), 아어취(我語取, 아견ㆍ아만 등에 사로잡힌 자기의 주장을 바른 것이라고 고집함)입니다.
⑩ 유(有) : 존재(存在)라는 뜻으로, 앞의 애ㆍ취의 인연으로 갖가지 업인(業因)을 지어서, 장차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초래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⑪ 생(生) : 생이란 앞의 유(有)로 말미암아 생을 받아서 생존을 보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르게는 위의 업인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생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합니다.
⑫ 노사(老死) : 생을 받은 모든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늙고 죽음을 말합니다. 노사는 중생의 늙음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나, 여기에서 말하는 노사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닌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로서 중생의 모든 고통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모든 중생의 무상하고 변천하는 진실의 모습을 대표한 말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12연기의 하나하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12지(支)는 어느 것도 독립됨이 없이 서로 서로가 연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끊으면 나머지 11지도 자동적으로 끊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12연기에 대한‘공간적 관찰’이라고 합니다.
12연기의 '공간적인 관찰'은 연기의 정의 중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 는 공간적 상의성 관계에 의해 현실 그대로에서의 해탈의 길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12연기설은 시간적인 면으로도 관찰되는데, 시간적인 면에서의 관찰은 연기의 정의 중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시간적 상의성 관계에 의해 윤회의 과정에서 이를 해탈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시간적 관찰’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무명(無名): 과거 세상의 번뇌의 근본인 무지.
② 행(行): 무지로 인하여 과거 세상에 지은 모든 선악의 업.
③ 식(識): 과거 세상의 무명과 행으로 인하여 심식이 모태 중에 탁생(托生)함.
④ 명색(名色): 모태 중에 탁생은 하였으나 아직 6근이 완전히 구비되지 못함.
⑤ 육입(六入): 태내에서 6근이 완전히 구비됨.
⑥ 촉(觸): 아직 심식이 발달하지 못하여 3수(三受, 苦樂捨)의 원인은 알지 못하고 다만 단순히 감각만이 움직임.
⑦ 수(受): 심식이 발달하여 3수를 느끼는 중생의 괴로운 현실상.
⑧ 애(愛): 순간적인 욕락에의 만족을 찾아 탐애심이 점차 성하여 의복이나 기구 등에는 물론 색애(色愛)까지도 일으킴.
⑨ 취(取): 탐애심(貪愛心)을 일으키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이들을 강구(强求)함.
⑩ 유(有): 애와 취로 인하여 여러 가지 번뇌를 일으키고 다시 업을 지어 나아감.
⑪ 생(生): 위의 업으로 인하여 미래의 생을 받음.
⑫ 노사(老死): 미래의 생을 받아 고통 속에 살다가 또 다시 사멸(死滅)함.
이 시간적인 관찰로서의 12연기설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三世)에 걸친 인과 관계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3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도 하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명-행은 전생의 인(因)이 되고, 이 2인(因)으로 인하여 금생의 식-명색-6입-촉-수의 과(果)를 받고, 현재의 애-취-유의 3인으로 미래에 생-노사의 2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설명하자면 과거세의 무명-행이 씨앗이 되어 어머니의 태속에 의탁하여 식-명색이 되는데, 식-명색은 심식과 정혈(精血)이 화합하여 포태되는 것을 말합니다. 식-명색이, 눈ㆍ귀ㆍ코 등 6근이 갖추어지는 데는 40주일이 걸리는데, 이 기간은 6입이 되고, 촉은 출생 후 2~3세까지 마음의 작용이 완전하지 못하여 단지 감촉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시기가 되고, 수는 4~5세 이후 심식작용을 하는 때를 말합니다. 애는 12ㆍ13세 이후 17ㆍ18세까지 의복ㆍ음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남녀의 성적 충동을 느끼는 때이며, 취는 명예ㆍ재산ㆍ이익에 탐을 내는 시기인데, 이 인연으로 선ㆍ악업을 지어 미래의 과(果)를 부르는 것이 유이고, 이 업의 인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생을 받아 남으로 노사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3) 유전연기와 환멸연기
① 유전연기(流轉緣起)
연기설이 문제로 하고 있는 현상은 선악업(善惡業)과 그 과보(果報)로서의 고락과 같은 종교적 · 윤리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입니다. 이 그 경우 현상이 가치적으로 악화하는, 즉 고(苦)가 생기(生起)하는 연기관계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연기의 순관(緣起의 順觀) 혹은 순연기(順緣起)라고 합니다.
연기의 순관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名)에 연(緣)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이 있으며, 식에 연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해서 6입(六入)이 있으며, 6입에 연해서 촉(觸)이 있으며 촉에 연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연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연해서 취(取)가 있으며, 취에 연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연해서 생(生)이 있으며 생에 연해서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갖가지 고(苦)가 생긴다"라는 정형적(定型的)인 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편, 연기의 순관은 현실의 노사(老死) 등의 고(苦)에서 소급해서 고의 근본으로서의 무명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그것이 본래의 모습이라고도 하는 견해가 있지만, 불교 경전에 설명된 정형적인 글로는 무명에서 고가 생겨나는 연기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② 환멸연기(還滅緣起)
현상(現象)이 가치적으로 악화되는 과정인 순관에 대응해서 현상이 순화)되고 정화하는, 즉 고뇌의 유전이 멸해지고 이상의 열반계(涅槃界)로 돌아가는 연기의 관계는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말해지며 또 이것을 연기의 역관(緣起의 逆觀) 혹은 역연기(逆緣起)라고 합니다.
연기의 역관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明)이 멸하기 때문에 행(行)이 멸한다.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識)이 멸한다. 식이 멸하기 때문에 명색(名色)이 멸한다.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6입(六入)이 멸한다. 6입이 멸하기 때문에 촉(觸)이 멸한다. 촉이 멸하기 때문에 수(受)가 멸한다. 수가 멸하기 때문에 애(愛)가 멸한다. 애가 멸하기 때문에 취(取)가 멸한다. 취가 멸하기 때문에 유(有)가 멸한다. 유가 멸하기 때문에 생(生)이 멸한다.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갖가지 고(苦)가 멸한다"와 같이 설명됩니다.
2. 3법인설(三法印說)
연기법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이라면, 3법인설은 이 연기법을 기본으로 하여 우주 인생에 내린 여실한 단안인 동시에 대외적으로 표방한 불교 사상의 3대요강이라 하겠습니다.
3법인의 법(法)이란 범어 다르마(Dharma)를 의역(意譯)한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인(印)이란 도장을 찍는다는 뜻으로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설이라 하여도 이 3법인에 배치되는 사상은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3법인은 일반적으로 제행무상ㆍ제법무아ㆍ열반적정의 셋을 말하는데, 열반적정 대신 일체개고를 넣기도 하고, 모두 포함하여 4법인이라고도 합니다.
①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 행(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의 깊은 뜻이 있는데, 여기서의 행은 일체 생멸변화하는 모든 현상 즉 유위법(有爲法)을 가리킵니다. 모든 법은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누는데, 유위법이란 인연으로 생겨서 생멸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진실체를 말합니다. 무상이란 항상 그대로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행무상은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네 가지 모습으로 잠시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의 육신은 생노병사(生老病死)하며, 정신 또한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찰나 간에도 변화하는 존재의 법칙이 바로 제행무상인입니다.
②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 여기서 제법(諸法)이란 일체 모든 법(존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제법무아란 일체법에는 내(我)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 일체법에 내가 없는가하면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이른바 연기의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아를 범어로 아나뜨만(Anatman)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뜨만이라는 단어에 이를 부정하는 안(an)이 붙어서 된 말입니다. ‘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주인공으로서의 영혼 또는 실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무아는 이런 아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란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단지 인연 따라서 어느 한 시점에서 다른 시간으로 변해가는 ‘변화하는 과정의 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근본교의(根本敎義)인 제법무아는 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도 고래의 사상인 실체로서의 아(我,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한 말입니다.
③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 열반적정이란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無常), 나라고 집착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하기만 한 것(無我)이 아니라 또 참으로 이상적인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깨달음의 세계요,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이를 열반적정이라고 합니다.
열반이란 니르바나(nirvana)라는 범어를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한 말로, 한자로는 멸(滅)ㆍ적멸(寂滅)ㆍ멸도(滅度)ㆍ적(寂)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해탈이라는 말과도 같은 것으로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니르바나는 ‘불어서 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사의 바다를 괴롭게 오가는 것은 모두가 번뇌의 불길 때문인데 이 번뇌의 불을 꺼버리고 생사 없는 절대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열반이다 열반은 곧 해탈이요 깨달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3법인을 종합하여 보면 모든 현상계 제법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무상하고 공간적으로는 무아입니다. 그러나 이 이치를 여실히 보지 못하고 온갖 망심에 사로잡히면 이 세계는 모두 고해로 나타나는 것이요, 반대로 이를 여실히 보고 망심을 떠나 이를 바르게 살아가면 곧 열반에 이른다는 것으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현상계의 미혹으로부터 열반적정의 세계에 이르도록 하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3. 4성제설(四聖諦說)
연기설이 부처님의 정각의 내용이라면 4성제는 실제문제, 즉 인간 고(苦)의 문제해결에 응용한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4성제의 성(聖)은 ‘거룩하다’는 뜻이며, 제(諦)는 진실ㆍ진상ㆍ진리를 뜻하는 동시에 엄숙한 단언(斷言)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4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입니다.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는 고성제ㆍ집성제ㆍ멸성제ㆍ도성제인데, 간단히 고제ㆍ집제ㆍ멸제ㆍ도제라고도 하고, 합하여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합니다.
(1) 고성제(苦聖諦)
고성제(苦聖諦)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세상의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괴로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苦)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것도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산모의 고통에 못지않게 태어나는 아기도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면서 시작한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젖먹이 때도 울음을 그칠 날이 드물고, 조금 철이 들면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건강한 삶을 바라지만 병마는 예고 없이 찾아들고 항상 이팔청춘이기를 바라지만 무상살귀(無常殺鬼)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와 저승으로 끌고 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괴로움으로 태어나는 괴로움(生), 늙어 가는 괴로움(老), 병듦의 괴로움(病), 죽음의 괴로움(死)을 드셨는데, 이 4가지 괴로움(生老病死)을 '근본 4고'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구하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5음(五陰)이 치성하여 일어나는 괴로움(五陰盛苦)을 합하여 '8고(八苦)’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생들의 괴로움이 어찌 이 4가지, 8가지만 되겠습니까? 중생의 번뇌(煩惱)가 8만4천이라면 괴로움도 8만4천 가지이며, 8만4천이라는 숫자도 상징적인 의미로써 한량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괴로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입니다.
(2) 집성제(集聖諦)
그러면 고(苦)는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그 원인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 집성제입니다. 집성제의 집(集)이란 집기(集起)의 약어로서‘발생’의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갈애란 팔리어로 타나하(Tanha)이다. 원래 목마름의 뜻이어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사납게 타오르는 욕망의 작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집성제란 ‘고통이 일어나는(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흔히 불교는 일체의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종교인 줄 아는 경향이 있지만 부처님께서 배격한 것은‘그릇되고 지나친 욕망’이었습니다. 욕망일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죽음 이외의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욕망은 우리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먹고 싶다는 욕망,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이런 것이 과도히 흐르는 데 병폐가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불교 본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욕망이란 ‘선악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배고플 때 먹고자 하는 생각, 추울 때 옷을 입고자 하는 생각은 도덕이 용훼할 영역이 아닙니다. 갈애에는 욕애ㆍ유애ㆍ무유애가 있습니다.
욕애(欲愛)란 성욕입니다. 가장 강렬한 본능이어서 인간 생활의 전반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 성욕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생활의 기록이라는 문학작품을 보아도 수긍이 가고도 남을 것입니다. 유애(有愛)란 개체 존속의 욕망이니 자기가 언제까지나 살았으면 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죽음이 불가피 함을 알자 영혼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어서 그것을 사후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이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욕망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인지도 모르며 대부분의 종교는 이 욕망을 부채질하여 내세의 영생을 약속해 줌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유애(無有愛)란 권세ㆍ명예에 대한 욕망입니다. 명예와 권세를 위하여 부모형제까지 무참히 죽인 사건이 부지기수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권세나 명예에 대한 욕망은 어지간히 수양이 된 사람으로서도 좀처럼 끊기 어려운 것으로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희비의 양상도 흔히 목격하는 바입니다.
(3) 멸성제(滅聖諦)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렇게 괴로움을 달게 받고 살아야만 하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 멸성제입니다. 갈애로 인하여 괴로움이 생겼으니 이 갈애를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 멸성제입니다. 멸성제는 ‘고통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는 바, 괴로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즐겁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밝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온갖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리고 증득한 경지를 우리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 열반이란 번뇌ㆍ망상이 마치 타오르던 불꽃이 완전히 꺼진 것처럼 된 상태를 말하는데, 한자로는 멸도(滅度)라고도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멸도, 즉 열반을 성취하여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것, 이것이 멸성제입니다.
(4) 도성제(道聖諦) : 고통이 없는 수행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 마지막의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뜻하며,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중도(中道)이며, 중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8정도(八正道)입니다.
① 중도(中道)
중도를 양극단을 배제한 중간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중도란 가운데의 도리가 아니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바른 삶의 방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상의성 관계에 있으므로,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거나 항상됨이 없이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따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제법은 무아이고 무상입니다. 그러나 또한 제법은 무아이고 무상이기에 인연생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법은 있다든지 항상 한다던지 할 아무런 것도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제법은 완전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아이며 무상이기에 엄연히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인연생기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ㆍ비상비단(非常非斷)이라고 표현하는데, 비유비무란 제법은 실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유무의 상대적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뜻에서 일컬어지는 말이요, 비상비단이란 제법은 항상(恒常)한다고도 단멸(斷滅)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상단(常斷)의 상대적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뜻에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유무를 떠나서 비유비무를 따로 세우고 상단을 떠나서 비상비단을 따로 세워서도 안 됩니다. 유와 무, 상과 단은 어디까지나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비무ㆍ비상비단의 도리를 중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연기로부터 얻어진 결론으로 우주 인생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연기 즉 중도(緣起卽中道)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인 우리는 이러한 실상 속에 살면서도 가끔은 실상도리에 위배된 오류를 범하는 수가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첫째로는 이 세계는 실로 있는 것이다, 내 영혼은 불멸이다, 이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저 어디엔가는 영원불멸의 세계가 있다는 등의 유아(有我)와 유상(有常)에 치우친 유견(有見, 참으로 있다는 생각)ㆍ상견(常見, 항상하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이 세계는 실로 없다는 것이다, 죽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나고 사후의 세계도 없는 것이며 현세만 있을 뿐이다 등의 무아ㆍ무상 그 자체에 빠져, 무견(無見, 참으로 없다는 생각)ㆍ단견(斷見, 단멸하고 만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중생의 미혹과 집착에서 나온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있어 영원한 것도 없고 참으로 없어 단멸되어 버리는 것도 없습니다. 제법은 비유비무이고 비상비단이기에 유인 동시에 무이고 무인 동시에 유이며, 상인 동시에 단이고 단인 동시에 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유상의 일변에 치우쳐 그런 것이 있다 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종래 그런 것이 없고, 그렇게 될 수 없기에 욕망과 불만만이 늘어가 모든 것은 괴로움이 될 뿐이요, 반대로 무․단의 일변에 치우쳐 그 자체에 빠진다면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지 않기에 스스로 허무와 포기만이 늘어가 이 또한 괴로움이 될 뿐인 것입니다[一切皆苦].
그러므로 어느 일변에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계와의 상의성 관계 속에서 나를 찾되 나로서의 개성을 잃지 않고, 나의 개성을 잃지 않는다고 하여 세계와의 상의성관계를 저버리지 않아, 나를 온전히 살리고 그리하여 이 모든 우주 인생을 청정하게 장엄해 나가야 합니다[涅槃寂靜]. 이런 실천의 행동을 중도행이라 하는데, 원시경전에서 이 중도행이 8정도(八正道)로서 나타나 있습니다.
② 8정도(八正道)
부처님께서는 도를 깨달으신 후 맨 먼저 같이 수행하던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찾아가 중도 즉 8정도의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은 비구는 피할 바이니라. 무엇을 두 가지 극단이라 하는가? 첫째는 모든 욕망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니 이는 저속하고 야비하여 범부적인 것이요,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스스로의 고행에 열중하는 것이니 이것은 고통으로서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두 가지의 극단에 의하지 아니하고 중도를 증지(證知)하였다. 이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여 적정(寂靜)ㆍ요지(了知)ㆍ정각(正覺)ㆍ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을 돕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저 여래가 증지하고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여 적정․요지․정각․열반에 이르는 것을 돕는 중도라고 하는가? 이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라 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으로 열반에 이름을 돕는 중도라 하느니라.”(상응부경 6. 남전율 대품 수계편 1).
8정도란 위에서도 나온 바와 같이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의 8가지 실천 수행의 덕목을 이르는 것으로, 8정도지(八正道支)ㆍ8정도분(八正道分)ㆍ8성도지(八聖道支)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정도란 말을 쓴 것은 중정(中正)ㆍ진정(眞正)ㆍ중도의 완전한 수행법이라는 뜻에서이고, 성도(聖道)란 성인의 도라는 뜻에서 쓴 것입니다.
㈀ 정견(正見):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며,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지만 노력에 의해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견이란 ‘사물의 진실을 바로 보는 마음의 눈’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을 말합니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 정사유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인가를 정견에 의해서(편견을 떠나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 정어(正語): 바른 말, 곧은 말, 옳은 말입니다. 먼저 바로 보고, 다음에 바로 생각한 후에는 바른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른 말이란 진실하고 부드러워서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말입니다. 거짓말, 욕설, 이간시키는 말,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이 아닌 참다운 말을 말합니다.
㈃ 정업(正業): 바른 신체적 행위를 말합니다.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업입니다. 살생ㆍ도둑질ㆍ사음을 떠나서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정업입니다. 보시하고 방생하며 자비희사의 실천행이 정업이 되는 것입니다.
㈄ 정명(正命): 바른 생계를 말합니다. 올바른 직업을 가지고 그 직업에 충실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도둑질을 업으로 한다든가, 살생을 업으로 하는 것은 정명이 아닙니다.
㈅ 정정진(正精進): 정정진이란 바른 노력을 말합니다. 어떤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이룩하기 위하여 꾸준히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하는바 이상이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 올바른 이상을 향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 정념(正念): 항상 바른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정념입니다. 앞의 정사유는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을 말하는데, 정념은 올바른 생각을 항상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생이란 무상하다. 모든 것은 괴롭다. 나란 것은 따로 없다고 하는, 무상ㆍ고ㆍ무아 사상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생활함으로써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 정정(正定): 바른 선정(禪定, 三昧)을 말합니다. 선정이란 마음에 아무런 번뇌, 망상도 없이 마치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무념무상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상 8정도를 하나하나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8가지의 성스러운 길은 그것들이 각기 하나 하나 따로 떨어져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정견이 있음으로써 정사유 즉 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바른 행동이나 바른 말이 나오는 것이며, 바른 생활을 하게 되고 게으름 없이 정진할 수 있고, 바른 생각을 유지하여 마침내 정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성제의 교설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불교는 현실의 괴로움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하여 해답을 얻으려는 현실 중심의 종교입니다. 오직 인간 내부의 마음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고뇌의 소멸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살펴보면, 시종일관 현실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부처님은 침묵으로 일관한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아 스스로 해탈하도록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고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여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법구경에 “너희는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여래는 다만 그 길을 보여 줄 뿐이다. 이 길을 따라 명상하는 이는 생사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종교적 입장은 이와 같이 철저한 현실중심주의와 자신의 구원은 각자의 노력에 달렸다는 주체적 책임의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 제법개공설(諸法皆空設)
불교에서는 모든 만법의 본성은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이란 결코 어떤 물건이 있다가 없어진 상태나, 텅 빈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범어 슈냐(Sunya)의 음역으로 실체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니, 연기법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기에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무아(無我)여서 결코 변치않는 영원의 고정된 실체나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공인 동시에 현상계의 유(有)이며 이것이 또한 중도(中道)이기도 한 것입니다. 후세에 이 공을 설명함에 주관적인 면에서의 아공(我空)과 객관적인 면에서의 법공(法空)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였 는데, 편의상 이 방법에 따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아공(我空)
아공을 인공(人空) 또는 생공(生空)이라고도 하는데, 중생들이 보통 고집하고 있는 나라는 것이 무아임을 말하여 공(空)함을 밝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중생이 있다고 하면 이는 곧 악마의 소견이니 오직 공이라 5음(五陰)이 모인 것일 뿐 중생이란 없는 것이다. 마치 여러 가지 재료를 합해서 수레라고 부르듯이 5음(五陰 : 五蘊)이 인연으로 모인 것을 이름하여 중생이라고 한다."(잡아함경 권 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생이란 모두가 다 5온의 가합(假合)일 뿐, 그 실체가 없어 무아이므로 곧 공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갖 미망에 사로 잡혀있는 중생, 그것은 본래 중생이란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5온이 연기의 작용으로 그렇게 가합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치를 모를 뿐만 아니라 중생인 그것에 대해 영원한 것인 양 애착을 갖고 그것을 그대로 붙잡아 두려고 애를 씁니다. 중생은 본래 공한 것이기에 공한 것을 아는 데에서 우리는 중생에 대한 모든 무지의 사견(邪見), 애착의 악업을 버리고 결국은 중생 그 자체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2) 법공(法空)
법공이라 함은 중생을 구성하는 5온을 비롯한 객관적 현상계의 모든 법이 공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색(色)은 생멸법이요, 수ㆍ상ㆍ행ㆍ식도 생멸법이니 색을 생멸법이라 아는 것이 색을 아는 것이요 수ㆍ상ㆍ행ㆍ식도 생멸법이라 아는 것이 색을 아는 것이요 수․상․행․식도 생멸법이라 아는 것이 각기 그를 아는 것이다.”(잡아함경 권 2) "색이란 무상한 것이요 그 무상한 것은 곧 고(苦)이다. 고란 것은 무아요 무아란 것은 공이며 공이 무아이므로 저것도 공이니, 이와 같은 것은 지자(智者)의 관하는 바다. 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무상하고 고이며 공이요 무아이다. 그 실지로 공이란 것도 무아요 공이니 이와 같은 것은 지자의 배울 바이다.”(잡아함경 권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법이 공한 이유도 결국은 중생이 공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즉 그것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멸하는 것이기에, 시간적으로 항상됨이 없고(無常), 공간적으로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無我), 결국은 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공이란 것이 생멸법인 무상ㆍ무아를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니, 생멸하는 무상 무아의 것이 그대로 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상한 것에 대하여 느끼는 주관적인 괴로움이란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법칙이어서 어느 누구에 의해 변경될 수도, 새로 생길 수도 또 없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5온이 공이라면 12처ㆍ18계도 나아가서는 일체제법도 세간도 모두 공입니다. 만약 이것이 어느 일부분에는 들어맞고 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맞지 않는다면 제법은 모두 공하다 는 말은 이미 보편적인 진리로서는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멸하는 법이라면 그것은 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심의식설(心意識說)
실로 이 세상엔 괴로운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으며, 지옥도 있고 천상(天上)도 있습니다. 이러한 제법이 전개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불교에서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마음(心)은 모든 법(法)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주(主)가 되어 모든 일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악을 생각하면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다. 그 때문에 괴로움은 그를 따르리. 마치 수레가 소 발자국을 따르는 것처럼. 마음속에 선을 생각하면 말과 행동도 그러하다. 그 때문에 즐거움은 그를 따르리. 형태를 따르는 그림자처럼."(법구경 쌍서품). "세간은 마음에 의하여 인도되고, 마음에 의하여 번뇌하니 마음의 일법(一法)은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상응부경 1)",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하여 세워진다."(경집 1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보면, 우리는 모든 법을 내는 주인은 마음으로서 선한 생각에 선한 언행으로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것도, 악한 생각에 악한 언행으로 괴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도 결국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지옥이나 축생이나 또 천상이나 그것은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 모든 것은 괴로운 세계든 즐거운 세계든 그 어떠한 세계든-그것은 오로지 우리 각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전개되는 세계일 뿐 어디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괴로움의 세계 즉 고해(苦海)를 못 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와 같은 이치로 보면 우리의 마음이 깨끗지가 못한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 마음은 원래 더러운 것인가, 아니면 원래는 깨끗한데 어떤 다른 것에 의해 더러워졌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비구들아, 이 마음은 극히 빛나고 깨끗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갖 번뇌에 물드는 것이다. 비구들아, 이 마음은 극히 빛나고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되는 것이다. 비구들아, 이 마음은 극히 빛나고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온갖 번뇌에 물들었다. 법을 듣지 못한 이생(異生)은 여실히 이를 알지 못하므로 그러한 이생은 마음을 닦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아, 이 마음은 극히 빛나고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된다. 법을 들은 성제자(聖弟子)들은 여실히 이를 알므로 그러한 성제자들은 마음을 닦는다고 나는 말한다."(증지부경).
본래 빛나고 본래 깨끗한 마음, 그것이 번뇌로 물들어 더러워진 마음, 본래 빛나고 본래 깨끗한 마음 그대로 간직하였다면 중생의 괴로움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나 이미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번뇌에 물들어 있기에 중생은 괴로움의 바다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해를 떠나려면 무엇보다도 번뇌를 제거해야지 번뇌를 제거하지 않는 한, 아무리 바라고 또 바라도 괴로움이 사라진 해탈의 청정한 세계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고해에 처해 있는 우리 중생이 고해를 떠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번뇌를 제거하는 일 밖엔 없습니다. 이것이 곧 수행이요 그것이 완성된 것이 곧 해탈입니다.
이러한 심의식설은 후대 유식종(唯識宗)에서, 심(心)은 제8식을, 의(意)는 제7식을, 식(識)은 제6식을 나타내는 말로 구분하여 사용하였으나, 원시경전 상에는 그런 구별이 아직 없고 일심(一心)을 표현함에 혹은 의로, 혹은 식으로, 혹은 심의식(心意識)등으로 표현하여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불기 l2539.8. 16. 경주지역불교중 고등학생연합 수련대회/ 감산수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