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한 사람의 사병으로 참전을 했지만 다큐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과 생전에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었고 2 대 사령관인 이세호 장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비서실장이었던 H 장군(당시 대령)의 자서전을 싸주느라고 장기간 정보교류를 할 수 있어서 보통 병사가 접할 수 없는 고급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내용의 대부분이 월남전에 대하여 이제까지 아무 곳에도 공개가 되지 않았던 내용들이다. 공개해야 할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지금 현충원에서 잠들고 계시지만 덕분에 나는 월남전에 대한 치장, 위장, 날조, 오염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기록할 수 있었다. 즉 전쟁의 신화나 참상, 영웅담 등이 아니라 오히려 치사함 유치함 등 적나라한 현실들의 이야기들이다.
***
남들은 군대를 이미 다녀올 25살의 늦은 나이에 입대를 했지만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전쟁터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사귀고 있던 정희의 친척이 되는 미8군 연락장교단장으로 있던 박희도 대령에게 부탁을 했지만 박 대령은 비교적 안전한 사이공에 있는 주월 사령부에 자리가 있나 알아볼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실질적으로는 51년 3월에 끝났으나 53년 7월까지 2년 이상을 줄다리기 싸움을 했던 것처럼 이미 파리에서 평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어서 언제 전쟁에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서 마침 월남 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때는 이 때다.’ 하고 지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지원을 하자 사병계는 이상하게 생각해서 인사과장에게 보고를 하고 인사과장은 부연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장군 진급 심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는 시범을 앞두고 연대장이 전체 군단 지휘관들 앞에서 멋있는 시범을 펼치기 위해서 사단 안에서 낭독을 잘 할 수 있는 사병을 찾아 달라고 정훈 참모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서 방송의 경험이 있다고 뽑아서 데려다 놓은 필수요원이었기 때문에 비록 시범은 끝났지만 연대장의 허락이 없이는 부대를 빠져나갈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마침 연대장이 자리를 비우려면 2 단계 지휘관 즉 군단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연대장이 임기 동안 단 한 번뿐인 사흘 동안의 휴가를 얻어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인사과장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연대장실로 데리고 가서 부연대장에게 "연대장님이 이 녀석 월남 간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부연대장은 “그렇다면 허락하셨겠지. 뭐?”하며 눈을 껌벅이던 모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대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의 군대의 통신 시스템은 교환대를 거쳐서 상급 부대와 하급 부대만 통할 수 있었지 소속이 다른 옆 부대와는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단 범위를 벋어나기 전까지는 마음이 조마조마하다가 동두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사단 범위를 벋어나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흘 후에 연대장이 돌아와서 내가 없어진 것을 알더라도 연대장의 힘으로는 이미 사단 밖을 벋어나서 있는 나를 도로 불러올 수는 없다는 군대의 명령체계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제 7 보충단에서의 월남전에 대비한 6 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떠날 날이 다가왔다. 흰 색깔로 선명하게 백마가 그려진 부대마크가 달린 얇은 흑록색 정글복을 갈아입고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해지고 막연하기만 했던 월남이란 나라가 비로소 조금씩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우리들을 태운 트럭들은 끝없이 노란 흙먼지를 피우며 지금도 터널로 10 분이면 통과하지만 구비 구비 꼬부라진 배후령 고개(일명 빼찌 고개)를 넘어서 춘천역에 도착했다.
춘천역에는 푸르죽죽하고 시커먼 군용열차가 색종이를 칭칭 감고 큼직한 태극기와 함께 머리와 꼬리에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걸린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군용열차의 모습이 내게는 꼭 거대한 영구차 같아 보였다.
춘천역 광장에는 3군단 군악대가 쿵작거렸고, 평소에 사병들을 보면 승냥이처럼 뜯어 먹을 것 없나하고 눈을 부라리던 헌병 녀석들도 그날만큼은 모처럼 상냥한 눈빛-사실은 불쌍하게 보는 눈빛이었겠지만-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광경들이 정작 나에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오직 나의 관심은 과연 마지막으로 정희를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훈련병 신분인 나로서는 막연히 오늘 출발하는 것만 알았지 부대가 몇 시에 출발 할지 정확하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정확하지도 않은 시간에 맞추어서 서울의 북쪽 끝인 구파발에서 춘천까지 오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맞은편에서 오던 경춘선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이 당시 경춘선은 단선이어서 반대편의 기차가 와야 출발할 수가 있었다.) 간단한 환송식을 마친 군용열차가 드디어 출발할 시각이 왔다.
맞은편 철로에 서울서 방금 도착한 경춘선 열차에서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사이로 이 쪽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오는 하늘색 투피스를 입은 정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정희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정희는 똑 같은 제복을 입고 창가에 매달려 있는 수백 명의 병사들 가운데 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통로에 서 있는 녀석들을 제치고 승강구로 달려가서 정희를 향하여 “여기야! 여기!”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희가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나를 발견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승강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승강구마다 헌병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승강구를 내려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 군용열차가 그 거대한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서로 황망한 시선으로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우리의 상황을 보고 감을 잡은 다른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태워! 태워!”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정희의 손을 붙잡아 승강구로 끌어 올렸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놀란 한 헌병이 제제를 하려고 열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러자 승강구에 있던 파월 병사들이 "어딜 올라와? 개새끼야!" 발로 헌병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순식간에 주변의 헌병들이 달려오자 승강구로 몰려든 병사들과 기차에 울려 타려는 헌병들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평소 같으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헌병 앞에 주눅이 들어 눈도 올려 뜰 수없는 병사들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죽으러 가는 마당에 더 이상 헌병이 무서울 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훈련을 끝내고 전장으로 가는 마당에 “어디 걸리는 놈 없나?” 하는 심정이었는데 오히려 잘된 셈이었다.
주변에서 높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판이라 헌병들은 평소처럼 거칠게 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떠나는 병사들은 개판을 쳐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상황은 헌병들에게는 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군용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헌병들은 닭 쫒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베트콩보다 헌병을 먼저 물리친 전공(?)을 세운 병사들은 기세등등해졌다. 우리가 객실에 들어서자 병사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야! 거기 자리 비켜줘!”, “모포로 가려 줘!”하고 술과 과자를 가져다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지나가던 여자들만 보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박한 군바리 기질은 순식간에 어디로 가버리고 그 순간에는 모두 중세기 기사가 되어 버린 심정이었다. 어떤 병사들은 먹을 것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면서 ‘야! 너 부산까지 가야 돼. 절대로 중간에 내리면 안 돼! “하고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리 둘의 기분은 전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빠져서 말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일은 이미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제대 전체의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열차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병력을 부산까지 수송하는 책임을 맡은 호송 장교 대위가 나타났다. 그는 물론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 군용열차를 관리하는 수송부대 장교였다. 대위는 나에게 통사정을 했다.
“나도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규정상 군용열차에 민간인이 탈 수가 없다. 그리고 서빙고역에서 육군본부에서 고위 장성들이 나와서 환송식을 하는데 이대로 타고 가면 나는 영창에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수송 장교 대위가 통사정을 해도 병사들은 한 마디로 "좆까지 마라! 영창을 가면 네가 가지 내가 가냐?“는 식이었다. 오히려 장교의 호소에 생깔 수도 있는 기회를 병사들은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칸에서 심심한데 재미있는 일 생겼다고 관광(?)을 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한 번 상상을 해 보시라! 1,000 명의 젊은 병사들이 탄 군용열차에 젊은 처녀가 한 명 타고 있다는 것만 해도 관심거리일 터인데 전쟁터로 가는 군용열차이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한 참 있다가 스피커에서 무게를 잡은 목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장병 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같이 월남으로 가는 제대장 김OO 중령이다. 여러분과 나는 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냐? 우리는 군인 아닌가? 지금 보안대(기무사)가 모두 보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월남으로 간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보안대는 월남에도 있다. 여러분을 월남까지 인솔하는 것은 본관의 책임이다. 여러분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제 열차가 역이 아닌 곳에서 설 것이다. 그 때 전우의 애인이 내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간곡하게 협조를 부탁한다.”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파병되는 장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중령이 공갈 반 호소 반으로 하는 소리였다. 같은 말도 시어머니가 하는 말 다르고 친정어머니가 하는 말 다른 법이다. 김 중령의 합리적이고 간절한 부탁이 있은 다음 분위기가 갑자기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방송이 끝나고 잠시 후 기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더니 드디어 섰다. 호송장교 김 대위가 다시 우리 칸으로 와서 정희 보고 난처한 표정으로 내려 달라고 했다. 다른 병사들이 “그런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 역도 아닌데 여자를 혼자 내려놓는다는 말이냐?”고 또 시비를 걸었다. 호송장교는 “군용열차는 운행 계획에 없는 역에 세울 수가 없다. 양해해 달라.”고 설명을 하고 정희에게 논두렁으로 조금만 가면 경춘 국도가 나오니 안심하고 내려 달라고 울상으로 설명을 했다.
열차가 선 곳이 마침 오른 쪽으로 활처럼 휘어진 곳이라서 정희가 내리는 모습을 모든 열차 칸에서 볼 수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창문마다 승강구마다 매달려서 정희에게 미친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영자야! 말자야! 순자야!” 제멋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제 애인에게 작별이라도 하는 듯이 “잘 가라! 잘 있어라!”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놈은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마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당황한 정희는 뒤도 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논두렁을 따라서 걸어가고 기차는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서울이 가까워지자 열차안은 점점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버렸다.
군용열차가 서빙고역에 멈추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었다. 샛노란 전등이 환희 켜진 플랫폼에는 춘천역의 3군단 군악대보다 훨씬 세련된 육본 군악대가 뿡빵거렸고 허우대 좋은 육군본부 의장대와 옷깃에 별들이 반짝이는 고위 장성들이 도열해 있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파월 장병 가족들이나 민간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헌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공식 환송행사가 서빙고역에서 잠시 벌어졌다. 이미 파월 장병을 30만 명이나 보냈기 때문에 별 새로운 것이 없는 기계적인 환송행사였다.
간략한 행사가 끝나고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한 차례의 기적이 울릴 때였다. 갑자기 아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또다시 벌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삼엄한 헌병들의 경비를 뚫고 들어왔는지 어디선가 뚱뚱한 처녀 아이 하나가 갑자기 철로로 뛰어들더니 사색이 되어 “오빠! 오빠!” 하고 울부짖으면서 열차 창문에서 제 오빠를 찾았다. 열차 창문마다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 사이에서 제 오빠를 찾을 수가 없는 처녀애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이었다. 아마 두 시간 전의 춘천역에서 정희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그런데 헌병들이 미처 그 여자애에게 다가가기 전에 기차에서 한 병사가 총알같이 뛰어내렸다. 필경 그 병사는 나보다도 훨씬 더 절박한 놈이었을 것이다. 두 남매가 철석같이 달라붙은 채 철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절절한 사연이 있는지 두 남매가 처절하게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매는 오빠가 군에 오기 직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고아가 된 처지였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은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이라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열차에 탄 파월장병의 눈에는 모두 이슬이 맺히고 마음 여린 병사는 새로 입은 정글복 소매로 연실 눈물을 닦아냈다. 환송행사에 나왔던 높은 장교들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하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높은 사람들은 말은 못하고 헌병들에게 손으로 빨리 떼어 놓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차 안의 1,000 여명 장병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두 남매를 떼어놓아야 하는 헌병들의 입장은 아주 난처했다. 결국 친절한 유치원 선생처럼 태도를 바꾼 헌병 장교의 간곡한 설득 탓에 드디어 남매는 떨어지고 오빠는 헌병들에게 마지못해 등을 떠밀려 승강구에 올랐다. 그런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는 듯 기차도 느릿느릿 출발하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여동생이 철로의 자갈 위에 주저앉아서 넋을 놓고 발을 구르며 몸부림을 치며 울고 있었다.
“오빠! 오빠!” 부르며 울부짖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하나 둘 눈물을 짓기 시작하더니 금방 돌림병이 번지듯이 열차 안은 너나 할 것 없이 오열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울다가 코가 메여 코를 풀어대는 놈,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자기감정에서 벋어나기 위해서 대상이 없이 욕을 하는 놈, 있는 대로 소주건 맹물이건 닥치는 대로 들이키는 놈 등등 열차 안은 통제 불능의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 때 어느 열차 칸에선가 군가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훈련기간에 이가 갈리도록 불러서 듣기도 싫던 군가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갈수록 격렬해졌다.
마치 소리가 작으면 누가 때려죽인다고나 한 것처럼 모든 병사들은 모두들 악을 악을 쓰며 군가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1,000여 명의 병사들이 두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 것이나 두드리면서 바락바락 악을 써대면서 군가를 불렀다. 병사들이 모두 미쳐서 아는 군가라는 군가는 모조리 메들리로 부르면서 달려가는 군용열차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입구로 항하여 달려가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오는 허전함을 물리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군가를 불렀다. 아니 악을 썼다. 아니 발악을 했다.
우리를 태운 군용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점점 캄캄한 어둠 속으로 달리는 동안 악을 쓰며 군가를 부르던 병사들은 더 이상 목이 쉬어 군가를 부르지도 못하고 하나씩 지쳐서 잠에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이른 새벽 부산항의 제 3 부두에 도착해 있었다.
또 다시 간략하고 형식적인 환송식이 벌어졌다. 부산에 있는 여고생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파월장병의 환송식에 순번제로 동원되어서 나눠진 태극기 몇 번 흔들다 가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다.
한국군은 이미 1971년 12월 09일 부산항 제 3부두에 최초로 해병대 청룡부대가 월남에서 철수한 귀국선이 제 3 부두에 도착했었다. 사실은 우리가 오음리에서 파병훈련을 받을 때는 파월역사에서 가장 졸전인 안캐패스 전투가 벌어져 아군의 희생자를 밝힐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큰 때였으나 정보가 통제되어 우리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72년 5월에 전쟁터로 향하는 미군수송선을 탄 것이다.
드디어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 가고 육지가 점점 작아지자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는 나라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시원했지만 “드디어 떠나는구나! “ 하는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