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간 세번째 해 아버지께선 온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서울 종로5가 흥농종묘사에서 각종 원예 재배 씨앗을 사다 심으셨고 하루라도 빨리 소득이 돼 돈을 만들어 낼수 있는 사업구상을 하셨다. 땅이 풀릴 새 없이 각종 과일 나무가 심어졌고 봄 보리, 고추, 감자가 심어졌다.
아직 늦은 꽃샘추위가 못다 지나가 바람이 찬 일기인데, 작은 오빠가 휴가 받아 얼굴 본지 2년만에 조계골에 올라왔다.
오빠는 집을 짓고 개간된 조계골 농장을 처음 보는데 군복차림에 멋이 잔뜩 들은 검은 안경을 쓰고 심기가 되게 꼬인 상태로 앉지도 않고 오자마자 아버지 어디 가셨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손으로 개간지를 가르키며 너 이거 얼마나 되며, 일년 수확은 몇푼어치나 계산하느냐고 따저 물었다. 어안이 벙벙해하는 나를 보고 다시 열을 올리며 우리집은 억세빠진 너 때문에 문제라면서 대가리가 돌이라고 쏴 붙이고 가 버렸다. 나는 순간 너무 분해서 엉엉 울었다. 용담 여관 잔치에 우리집 앞을 지나가던 순자와 순옥이가 깜짝놀라서 방문을 열었다.
"선녀야 왜 울어" 했지만 나는 내 집안일이라 이 분통터져 우는 마음을 털어 놓을수가 없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작은 오빠가 왔다 갔어..."
일은 아무리 해도 힘들지 않았고 군인놈들이 홀아비 딸, 암소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집안 식구들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이 된 내가 나이는 어려도 작은 오빠의 처신이나 언행에 대해서 늘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조계골에 올라오기 전, 용문집 생활 속에서 습관적인 엄마의 바가지에 합세하였고,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방자가 넘쳐서 말도 안되는 생각으로 가세를 좌지우지하는 형편으로 몰아갔다.
또 아버지와 큰 오빠를 묶어서 돌대가리라고 엄마와 맞장구 치었을때 동네 사람 앞에 웃음거리 문제가 된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난 작은 오빠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고등학교때 이미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다. 연애도 많이 하고 내가 볼때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이 용문산을 들어온것도 엄마의 칭찬을 배경으로 하여 달력에 찍혀진 낭만적인 외국 목장의 그림을 보고 환상적인 충동의 발언으로 목장과 양어장을 하겠다고 한 오빠의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엄마 역시 장날이면 외가집 식구들에게 입이 마르고 닳토록 우리 둘째가 용문산에 들어가 목장하고 양어장을 한댄다고 고등학생인 아들을 자랑하며 예뻐했다. 외가집 식구들은 말에 책임감도 없이 한술 더 뜨고 부추겼다.
주변 환경에서 떠드는 산골 농촌 생활...
보이지 않는 남편의 심기를 바꾸게 한 내조의 영역...
선산과 묶은 땅은 있었고 수구초심 참 많은 생각속에 조계골을 결정하신걸로 알고 있는데...
본인은 철 없이 나대고 한 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늘의 어려움이 지금에 와서 너 때문이라는 말은 하늘이 억울해 해야 할 일이었다.
힘든 아버지 앞에 두 오빠 다 철 없는 아들로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