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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제35군의 후터우 요새 공략(전)
후터우는 고립된 지대지만 일본군의 만주 동부 방어선에 전략적으로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후터우의 고지대에서는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단선 철도를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터우 요새는 밀산과의 단선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고지 주변은 늪으로 뒤덮혀 있었고 동쪽에는 국경인 우수리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남쪽, 북서쪽, 서쪽에서 본 후터우
일본군은 후터우 고지대에 1933년부터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요새에 7,000 병력으로 이루어지며 대대 당 3개 중대로 구성된 4개 대대, 1개 포병연대 1개 공병중대로 구성된 제4 국경수비대를 배치했습니다. 관동군은 후터우 요새를 난공불략이라 여기며 후터우 특별요새란 명칭을 붙여줬습니다. 후터우 요새 방벽은 현지 노동자들을 징집해 만들은 철근 콘크리트 방벽으로 두께가 3미터에 웬만한 포격은 거뜬히 막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함락된 세바스토폴도 난공불략이라 칭송받은적이 있었습니다.
막심고리키가 죽었슴다.. --;
일본군은 후터우에 전방 300미터를 전부 뒤덮을 수 있는 촘촘한 교차 화망을 구축했습니다. 특별한 경우 1개 중대병력이 이 화망 전체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자동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후터우 요새는 완성됐을 때 관측소들, 요새 포들과 기관총 화점들, 반격을 위한 출구들, 기상 관측소 등을 전부 갖추었습니다. 지하에는 통신 시설, 숙소, 보급품 저장소, 발전기가 설치되었습니다. 후터우 요새는 8000 미터의 정면과 6000 미터의 종심을 갖추었습니다. 제4 국경수비대는 요새 지대에 완전히 배치되었습니다. 일본군은 후터우에 총 59문의 야포를 배치했으며 8문의 중박격포, 80문의 대공포, 10문의 대공 기관포를 설치했습니다. 그것들은 요새의 세 방향을 담당했습니다.
후터우에 설치된 400밀리 요새포와 300밀리 곡사포의 화력투사 범위
후터우 요새는 군사적으로 무적처럼 보이는 철옹성이었지만, 주둔병들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늪지대로 완전히 고립된 지대라 외부와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했고 가장 가까운 도시도 몇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기후도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고지에서의 식사는 항상 만들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고 방음시설은 없어서 항상 작업만 하면 소음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환기구도 부족했습니다. 후터우 주둔병들의 고충을 안 관동군 사령부는 1941년에 후터우 요새에환풍구 설치 작업을 명령했고 후터우 요새 주변에 군사 도시를 만드는 것을 허가했습니다.
일본군은 항상 후터우 요새를 우선시했고 주요 신형 장비나 보급 우선순위를 후터우 요새의 제4 국경수비대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계속되자 후터우 요새의 대부분의 대공 장비는 신형 편제된 제122 사단에게 넘어갔습니다. 관동군은 1945년 7월에 제4 국경수비대를 제15 국경수비대로 개편하고 600명의 병력을 충원해 주었습니다.
후터우 요새는 자흐바타예프 중장의 제35군에게 맞겨졌습니다. 제35군의 임무는 후터우 요새로부터 튀어나오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철도를 차단하는 걸 막는 것이었고 후터우 요새를 점령하면서 제1 극동 전선군의 남쪽 공세에서의 좌측방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35군의 공세 개요도.
후터우 요새 공략은 제35군의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소련군은 후터우를 공략하기 힘든 요새라고 여기고 있는 한편 만주 중부로 치고들어갈 수 있는 열쇠로 생각했습니다. 소련군은 후터우를 처음부터 공략하지 않고 우회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흐바타에프는 파블로-페도로브카 서쪽의 늪지대에서 일본군의 저항이 약할 만할 곳을 찾았습니다. 제35군의 주력은 후린을 공격해 후린과 밀산을 잇는 철도를 차단하고 제264 소총병사단과 제109 국경수비대에게 후터우 요새 공략을 맞겼습니다. 두 부대는 후터우 남쪽에서부터 요새로 쳐들어가 밀산의 일본군을 축출한 제1 적기군 병력의 지원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후터우 시에서 남동쪽으로 7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소련의 이만 시에는 제57 국경 수비대가 있었으며 2,300명의 인원과 6척의 고속정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독소전쟁 기간 동안 이만에 머물러서 참전 경험은 없었지만 후터우와 그 주변 지대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습니다. 제57 국경수비대 뿐만 아니라 제109 요새주둔군이 공세를 위해 이만에 도착했습니다.
공세 직전의 상황도.
공세가 시작되기 전, 일본 제15 국경수비대는 일상적인 정찰 활동을 하고 있엇습니다. 15 국경수비대장 니시와키 다케시 대좌는 예흐호의 제5군 사령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던 차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15 국경수비대의 정찰대는 소련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지만 제5군 사령부는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관동군 사령부는 소련군이 9월쯤은 되서야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8월 5일과 6일 사이에 소련군이 우수리 강에 부교 가설 작업을 하는 것을 관측해도, 그것은 소련군의 하계 훈련으로 판단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8월 9일 밤부터 소련군의 준비 포격이 쏟아질 때도 관동군 사령부는 이것을소련군 훈련의 일환으로 여겼습니다. 천둥 번개 속에서 소련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우수리 강 너머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대적인 포격은 후터우 주변의 도로, 철로, 유선 통신망을 박살내 버렸습니다. 우수리 강의 일본군 초소들은 소련군이 0100시에 우수리 강 도하를 시도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짧은 준비 포격 이후 제57 국경수비대 소속 병력이 중대, 소대별로 우수리 강을 건너왔습니다. 같은 국경수비대 소속 다른 중대들이 우수리 강 북안에서 도하를 시도해 강 너머의 일본군 80여명을 0200시까지 전멸시켰습니다. 포격 지원 아래서 제1058 연대도 우수리 강을 도하해 후터우 시 남쪽으로 가서 일본군 초소들을 박살내고 밀산으로 가는 철도를 장악했습니다.
0500시에 포격이 끝나자 겨우 정신을 차린 후터우 요새 간부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요새 밖에 있던 모든 병력들을 요새 안으로 불러모았습니다. 1시간 후 소련군의 포격이 재개되었습니다. 이 1시간 동안의 공백은 소련군의 포격이 그저 무력도발에불과하지 침공의 의도는 아니라는 것이라고 일본군을 착각하기 위한 책략이었습니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며 요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진 못했지만 소련군의 포격 정밀도가 좋지 않아서 별다른 피해는 주지 못했습니다.
0800시에 제1056 연대의 거의 2개 대대 병력이 후터우 시 남쪽에 도달해 도시 남과 북을 잇는 다리를 공격했습니다. 1100시에 소련군은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으면서도 다리 확보에 성공했습니다. 아직까지는 소련군이 후터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일본군의 포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소련군 또한 포격을 중지하고 있었습니다. 후터우 요새에는 일본군이 자랑하는 400밀리 구경이 넘는 거대한 요새포가 있었지만 숙련 운용 인력이 부족해 소련군을 향해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새의 포병 지휘관인 오키 마사오 대위는 사령관 부재 상황이라 요새 사령관 역할까지 다 해야 하는 지라 포병 관리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_- 게다가 동원할 수 있는 거대 열차포들은 밀산 요새지대로 잠깐 옮긴 상황이었습니다.
오키 대위는 이게 소련군의 공세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습니다. 사령관 니시와키 대좌가 자기 없을 때 소련군이 쳐들어오면 이리이리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세워놓지 않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소련군의 포격이 유선 통신선을 끊어놓는 바람에 예흐호에 있는 사령관과 연락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키 대위만 혼란에 빠진 게 아니었습니다. 관동군 사령부는 8월 9일 0600시에야 소련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했다고 결정했습니다 침공이 시작된지 5시간 후에 말입니다.
1100시에 드디어 예흐호에서 상황을 보고받은 제15 국경수비대 사령관은 현지 상황을 모른 체 부하들에게 요새에서 튀어나와 우수리 강 서안으로 도하한 소련군에게 포격을 가하고 역습을 시작하라 명령했습니다. 포격 목표도 세세하게 결정해 줬는데 400밀리 요새포는 우수리 강 철교를, 150밀리 야포들은 소련군 포병을 향해 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시적인 컴퓨터를 사용해 계산한 일본군의 포격은 정확하여 우수리 강 철교는 삽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상보다 강력한 일본군의 포격을 받자 열 받은 소련군은 일본군 포대들의 좌표를 갱신하고 대포병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한편 하늘에서는 IL-14 폭격기 50대가 달려들어 2시간 동안 요새 지대에 폭탄을 떨어트렸습니다. 소련 포병들은 콘크리트 속에서 포신을 삐죽 내민 일본군의 400밀리 요새포를 제1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럼에도 요새 속에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소련군을 괴롭히던 400밀리 포는 74번이나 위용을 과시하다 8월 12일에야 직사를 얻어맞고 무력화되었습니다.
소련군을 괴롭히던 400밀리 요새포.
전후에 노획된 사진입니다.
포병과 공군 지원 하에 소련군은 다시 다시 우수리 강을 건넜습니다. 제1056 소총병연대가 후터우 남쪽과 동쪽을 돌파하여 후터우 남쪽의 일본군 초소 2개를 박살냈습니다. 제109 요새 주둔군 소속의 2개 중대와 제1058 소총병연대의 1개 중대, 제8 야전 요새 주둔군의 1개 중대가 강을 건너 왔습니다. 제1056 소총병연대는 후터우 시 북쪽과 일본군의 관측소가 있는 린코다이로 진격했습니다. 제1058 소총병연대와 제109 요새 주둔군은 라든 부대들이 후터우 시 서쪽으로 진입할 동안 도시 남서쪽의 유해하 철도역으로 진격 했습니다.그리고 제1058, 1056 소총병연대는 후터우 남쪽으로 가서 후터우와 밀산을 잇는 철도를 제거했습니다. 2개 연대가 도시를 확보하자 제1060 소총병연대가 후린을 향한 진격을 준비했습니다. 이 연대들의 상위 제대인 제264 소총병사단은 사단 우익 지대를 온전히 확보함으로서 후터우 요새를 종합적으로 고립시킬 것을 하달했습니다.
8월 8일에서 8월 11일까지의 후터우 공략도.
후터우에 모두 집결한 제264 소총병사단은 포격, 전차,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도심으로 진격, 요새를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일본군은 초소와 토치카에서 뛰쳐나와 요새로 퇴각했습니다. 일본 제2 포병중대는 강 너머에서 쏟아지는 소련군의 포화 속에서 운 좋게도 포와 보급품을 죄다 챙겨 후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른 부대들은 이와 같은 운이 별로 따라주지 못한 편이었습니다.
8월 10일에 날은 갰지만 포연과 타는 연기가 후터우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0630시에 소련군과 일본군은 다시 포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포격전은 소련군 경폭격기들이 날아와 일본군 포대에 폭탄을 던짐으로서 끝났습니다. 대부분의 일본군 대공포가 밀산으로 옮겨진 덕택에 소련군 폭격기들은 마음 높고 폭격을 해 댈수 있었습니다.
소련군은 후터우 시 남쪽과 북쪽에서 요새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제1056 소총병연대와 제109 요새 주둔군 소속의 기관총 대대는 후터우 동쪽 마을을 확보하느라 힘든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제1058 소총병연대는 남부 거주지를 공격하며 일본군을 몰아냈습니다. 소련군은 일본군 제1 중대를 상대로 백병전을 벌이면서 잠깐 남쪽으로 물러났습니다. 밤이 되어도 후터우 시가전은 계속 되었습니다. 소련군은 들인 노력에 비해서 적은 성공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백병전 끝에 포로로 잡혔다가 후터우가 함락되면서 풀려난 소련군 중위는 일본군이 지난 3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격전이 벌어졌던 우수리 강 선착장
한편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 소련군은 돌격 집단을 편성했습니다. 요새로 돌입할 돌격 집단은 1개 전투공병 대대와 기타 소총병중대들로 편성되었습니다. 요새를 밖에서 공략할 돌격 집단은 1개 소총병 소대와 1개 전투공병 분대, 1개 대전차 분대, 화염방사기병 2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소련군이 후터우 시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 다시 한번 대대적인 포격이 후터우 요새지대에 쏟아졌습니다. 화망 아래서 제1056, 1058 소총병연대와 제109 요새 주둔군은 선봉 대대들을 요새로 진격시켰습니다. 밤의 어둠이 소련군의 공격을 가려주어서 소련군은 기습에 성공했고 주 요새 주변의 자잘한 토치카와 벙커들은 대부분 소련군 손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주 요새에 대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요새 공략이 실패하자 소련군은 더 신중해질 필요를 느꼈습니다. 제35군 사령부는 제1056 소총병연대와 제109 요새주둔군에 더 조직적으로 요새를 공략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제1058 소총병연대는 밀산과 후훈으로 향하던 제1060 소총병연대와 합류했습니다. 소련 포병과 폭격기들이 다시 후터우 요새에 포격을 가했고 소련군 선두 대대들은 전차와 돌격포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일본군 방어선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돌격 집단들은 도시 중앙에 포위되어 있던 잔존 일본군을 섬멸하고 요새지대 북서쪽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낮에 소련군 2개 소총병중대가 도시 남쪽과 북쪽의 경게선인 119 고지를 공격해 소대 규모의 일본군을 상대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8명의 일본군이 지키고 있던 남쪽의 90 고지도 포위당했습니다. 소련군은 90 고지의 일본군을 위협적이지 않다 판단하고 포위만 해둔 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날 오후 일본군 제2 포병 중대는 300밀리 거포를 가지고 나와 103 고지에서 소련군을
향해 포화를 날렸습니다. 그러자 소련군 3개 소총병중대가 103 고지를 공격하기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결국 후퇴하며 아까운 거포를 파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소련군이 119 고지를 점령하면서 제2 포병 중대는 포위된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제2 포병 중대는 8월 26일까지 포위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소련군은 8월 12일까지 대대적인 포화를 고지들에 퍼부었습니다. 90 고지와 119 고지는 소련군의 포격에 노출되었고 일본군은 제대로 대포병사격을 가하지 못했습니다. 포격이 끝나갈 무렵에 소련군은 요새에 대한 재공격 준비를 끝냈습니다.
8월 13일 다시 요새로 포격이 쏟아지면서 소련 보병들이 전차 지원 하에 후터우 요새로 진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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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의 교훈 : 역시 별 기동공간이 없는 산간지역에서의 잘 준비된 요새는 공자에게 상당한 피곤함을 안긴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