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지리서는 주로 중앙의 통치와 국방을 위하여 국토의 자연환경과 인문 지리에 관한 정보를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는 각 지방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성씨, 고적, 산물, 교통 등이 수록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택리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동국여지승람>과 차이점을 갖고 있다.
첫째, <동국여지승람>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편찬 지리지였던 반면 <택리지>는 개인 자격으로 편찬되었다.
둘째, <동국여지승람>은 각 지방의 지리적 사실을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했는데 <택리지>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과 설명에 중점을 두었다.
셋째, <동국여지승람>은 주로 국왕의 통치를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택리지>는 생산성이 높은 토지 및 물자의 유통과 교통 조건을 거주지의 입지 조건으로 들어 개인이 살만한 곳의 탐구에 역점을 두었다. 이외에도 <택리지>의 특징은 전국을 실제로 답사하고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논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적 인문 지리서라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지도 역시 대동여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맥과 하천, 포구, 도로망 등이 정밀하게 표시되었다. 이는 이 시기 상공업의 발달과 서민 문화의 성장에 힘입어 각 지방의 산업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행정적·군사적 목적이 주가 되었던 조선전기의 지도와 비교된다. 또한 이 시기의 지도는 실측과 축척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전기의 지도보다 한단계 발전된 것이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축척을 사용하여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이며 김정호는 전국을 답사하여 실측도인 <청구도>와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세계 지도 역시 후기에 들어와 크게 변화되었다. 조선전기에 제작된 혼일강리도를 보면 중국의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그 크기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중화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참고로 중세 유럽인들이 만든 세계지도에는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는 물론 기독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서양인이 실측에 의해 만든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가 청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이를 본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닐 뿐 아니라 세계는 무척 넓다는 것을 깨닫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중화사상도 크게 동요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