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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니저와 영화의 만남 원문보기 글쓴이: 히로스에로쿄
“영화판 사람들 만나면 편해져, 좀 숨쉴 만해”
소설가 조선희가 만난 장관에서 감독으로 돌아온 이창동
이창동 감독을 12월1일 오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잘 빗지도 감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장발, 우중충한 배색의 후줄근한 옷차림, 느릿느릿한 말투, 농담까지, 모든 게 예전 그대로였다. 늘 자기 내부를 향하는 감시의 안테나도 여전히 성능 좋게 작동하고 있었고, 자학에 가깝게 자신을 엄격하게 다루는 결벽증 증세도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작가의 정체성도 그대로인데, 그것은 작가주의 감독의 태도로 또 다른 현장을 지휘하다 돌아왔다는 뜻일 수도 있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의 관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로, 그에게서, 권력의 맛을 보았거나 신분적으로 수직상승한 흔적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특유의 여독 같은 게 짙게 느껴졌다. 그 여독을 푸는 게 당분간 그의 숙제처럼 보였다.
그는 장관 취임 초기 인터뷰에 응한 뒤 1년 반 만에 <씨네21>과 재회한 셈이다. 그는 2003년 3월부터 2004년 7월까지 1년5개월 동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장관이라는 단어는 애써 피하고 싶은 듯 ‘공무원’, ‘공직’이라는 표현을 주로 쓰는 그가 ‘공익근무’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 만 4개월 만에 갖는 첫 인터뷰다. 인터뷰를 기피하는 데는 대중에게서 빨리 얼굴이 잊혀지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TV < 9시뉴스 >를 통해 시골 구석구석 알려진 얼굴이 잊혀지는 속도만큼 그가 한국사회에서 작가의 편안한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때문에 밀양에 한번 가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써봤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더 알아봐. 얼굴이 넓어서 잘 안 가려지니까.”
고등학교 교사-소설가-영화감독이라는 구불구불한 이력에 장관이라는 특이한 경력 하나가 추가되면서 그의 라이프스토리는 점점 복잡해진다. 인터뷰에서는, 점점 드라마적 구성을 취해가는 그의 삶 전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영화계로 돌아온 기분이 어떠냐”는 첫 질문에 그가 “아직 복귀 안 했다”고 대답했을 때 그저 직답을 피하려는 허사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진짜 이유를 그는 인터뷰의 맨 마지막에 가서야 밝혔다. 그는 조금은 뜻밖의 작업에 몰두해 있는 중이었다.
글 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
이창동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 게 목표였는데 쓸데없는 일들이 많아요. 뭐, 사람 만나고, 외국에 갔다오고,
조선희 그만두고 나서 바로 파리로 가셨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왜 가셨었어요?
이창동 그냥… 가고 싶어서. (웃음). 아무것도 안 하려고 갔죠. 젊은 여자 화가가 살던 집인데, 아주 조그만 집이에요. 다락방 수준의. 근데 그 친구가 미국에 휴가를 떠나면서 세를 놓고 갔어요. 거기서 보름 지냈죠.
조선희 혼자?
이창동 친구하고. 만날 햇반, 김치하고 라면 끓여먹었어요. 몽파르나스, 그 근방에 묘지가 있어요. 거기서 좀 시간을 보내다가, 한 30분 걸어 다운타운까지 가서 조그마한 극장에서 영화 보고. 테라스에 앉아서 지나가는 여자들 보고. 여자들만! 둘이 약간의 심사평도 하면서. 그러고 보냈죠.
조선희 모레 인도네시아 가신다고요? 그건 어떤 거예요?
이창동 자카르타에서 하는 영화제가 있어요. 한국 영화산업이 어떻게 발전하게 됐나를 이야기 좀 하라고 해서. 그런 거 안 하려고 했는데 영진위에서 하도 하라 그래서…. 애프터서비스로 생각하고 하는 거지요.
조선희 일본도 갔다오셨죠?
이창동 도쿄영화제 갔죠. 심사하러. 도쿄영화제가 올해 들어 리노베이션이라고, 새로 시작하려는 분위기가 있어요. 아마 한국 영화산업에 자극을 좀 받았나봐.
조선희 도쿄영화제가 옛날엔 꽤 괜찮았는데. 92년이었던가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이 그랑프리를 받았을 때만 해도 도쿄영화제에서 상받았다 그러면 엄청난 거였잖아요. 근데 영화제도 영화산업하고 같이 가는 거 같아요. 영화산업이 기울면 영화제도 시들해지고.
이창동 도쿄영화제는, 공은 많이 들인 것 같던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글쎄요.
조선희 여행 다닌 것 말고 보통 뭐 하세요?
이창동 이것저것 많아요.
조선희 일단은 영상원 강의가 있으시겠고. 세 학기 쉬고 복직하신 거예요?
이창동 예. 그거 말고는 보통 백수의 일과라고 생각하세요.
조선희 뭐, 백수도 다양한 종류의 백수가 존재하죠. 최근 어느 자리에서 백수 얘기가 나왔는데 김정환 시인이 말하기를 백수도 자기 경지쯤 되면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동쪽으로 가면 잘 먹을 수 있겠다’ 그런 감이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잘못 걸리면 소주 한병 얻어먹으면서 두시간 설교 듣는 수도 있대요. 근데 이창동 감독이야 자립 능력도 있을 테고, 좀 다르지 않겠어요?
이창동 백수 초보자들이 쓸데없이 바쁜 거거든. 남의 일에 신경쓰고, 일들이 늘 이리저리 연결돼 있고 그렇지. 김정환 같은 경우는 뭔가 공기의 냄새를 맡잖아. 그러면서 시국을 점치고…. (웃음)
조선희 영화감독이라는 직업 자체가 백수 하다가 2년에 한번씩 계절노동자 하다가 어차피 또 백수 되고 그런 것 아닌가요.
이창동 그렇죠. 백수 하기 딱 좋은 직업이지. 그래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어요. 아웃되는 데 대한 공포가 있고, 남의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고. 사기꾼들인데, 늘 바쁜 이유는 그런 공포 때문 아니겠어요.
조선희 나라를 훔치면 왕이 되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도둑이 되는 것처럼 사기를 잘 치면 위대한 작가가 되고 잘못 치면 얼치기, 정신병자가 되는 거고.
이창동 영화판이 그런 점에선 심하죠. 판결이 빨리 나잖아. 그리고 되게 중형이야. 세헤라자데의 운명이긴 마찬가지지만 소설가는 자기 혼자 버티잖아. 근데 감독은 그렇지 않죠.
조선희 돈 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그 날로 작가 생명도 끝이니까.
이창동 난 안 당해봤지만 상상할 수 있거든. 아마 눈길이 다를 거야. 그걸 피부로 느낄 거야. 아웃됐는데 들어와서 어슬렁거리는 느낌 있잖아.
조선희 설마 지금 그렇다는 건 아니죠?
이창동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앞으로 두어편 더 사기를 칠 수 있지 않을까. 두편은 봐줄 거 같아.
조선희 차기작에 대해서 얘기들이 벌써 나오던데요. 강우석 감독이 돈 대기로 했다는 얘기도 있고 벌써 시나리오가 나왔다고도 하고. 어떤 기사 보니까 제목이 <선샤인 스트리트>인데 40대 여자 이야기다, 어쩌고 하는 기사들이 난무하던데….
이창동 (웃음) 내가 공무원 되기 전에 좀 생각하던 게 있었어요. 제목이 <밀양>, 경남 밀양. 영어로 하면 ‘secret sunshine’이에요. 실제론 빽빽하다는 밀(密)자인데, 햇볕이 좋단 말이지. 거기 강가에 서 있으면 햇볕이 좋다는 느낌이 들거든. 제목이 <밀양>이 뭐냐고 해서 ‘시크릿 선샤인’ 하면 영어제목은 괜찮다고 농담처럼 했는데 그걸 누군가 기억하고 있다가 얘기를 한 거예요. 근데 그걸 ‘선샤인 스트리트’로 잘못 들은 거고, 누구는 ‘선샤인 불리바드’라고도 그러고.
조선희 그럼 그걸 영화할 생각은 없는 거예요?
이창동 아직 윤곽만 있죠. 근데,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게 있는데, 너무 대중성이 없다고 그럴까. 뭐 언제는 대중성이 있었나 그러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언제나 장사에 신경썼어요. 장사에 신경썼다는 말뜻 그대로이기도 하고, 대중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이번엔 좀 위험해. 그래서 그냥 한구석에 놓아두고 있죠.
조선희 새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 그게 될 가능성이 많은 거네요.
이창동 그럴지도 모르죠.
조선희 근데 왜 밀양이에요?
이창동 뭐, 특별한 이유는 없고, 한국사회의 아주 전형적인 소도시가 거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어디가 돼도 상관은 없죠. 그냥, 밀양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거죠. 그럼 전형적인 소도시란 어떤 거냐. 일단, 환경이 그렇게 아름답지 못해요. 과거에는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이미 사라졌어요. 품위도 없어졌고. 굉장히 속물화돼 있어요. 대도시보다 살기만 불편할 뿐 시골이 주는 편안함이라든가 여유라든가 그런 건 없죠. 그래서 왜 이런 곳에 사는지 모르는 그런 도시, 그런 소도시가 필요했던 거예요. 영어 이름도 좋고. (웃음)
조선희 한문 이름도 좋고. 밀양에 사신 적 있어요?
이창동 옛날에 몇번의 추억이 있죠.
조선희 너무 흥행성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 최소한의 멜로도 안 나온다는 거예요?
이창동 멜로 아니에요. (웃음) <오아시스> 멜로, <초록물고기> 멜로, <박하사탕>도 멜로예요. 멜로 감독이잖아. 이번엔 멜로가 아니에요. 멜로의 구조가 아니에요. ‘nothing happen’이 문제죠.
조선희 근데 제가 <박하사탕> 시놉을 보고는 ‘야, 이걸 어떻게 영화로 만들겠다 그러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오아시스>도 모든 사람들이 장애인하고 전과자 얘길 누가 보려고 하겠어, 그랬거든요. 하지만 결국 소재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한 거잖아요. 관객 수준이 높아져서 그런 이창동 방식의 이야기를 원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창동 일단 대중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말은 접수하기가 어렵고, 대중과 수준은 연결이 안 되는 말이에요. 어쨌든 세 영화가 다 대중적 이야기구조가 있어요. 그건 의도적이었고, 아주 쉽게 소통할 생각은 없었지만, 까다로운 방식으로 소통을 해보자, 마치 장애물 경기를 하는 것같이. 장애물을 많이 만들지만 넘어올 걸 예상하고 만들죠. 장애물 넘는 희열을 생각하면서. 근데 이번 경우는 그런 구조가 없는 거 같아. 그래서 해보고 싶어요, 사실은. 영화에 대한 질문을 내 나름대로 해온 편인데, 좀 다른 방식의 질문을 하고 싶은 거죠.
조선희 주인공이 여럿인가요?
이창동 으응, 한 사람 이야기예요. 여자인데. 윤곽밖에 없기 때문에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한 개인이 아주 심하게 고통받아요. 정신적 고통. 그럴 때 그의 삶을 무엇이 구원해주느냐, 하는 질문이죠. 영화가 그것을, 그 질문을 드러낼 수 있나? 뭐 그런 거예요. 우리 삶이 그렇듯이, 특별할 것도, 어디 하나 내세울 것도 없는 공간, 그런 삶의 조건에서,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해답은 있나? 뭐 그런 이야기죠. (웃음)
조선희 그 얘기는 진짜 소설적이란 생각이 드는데, 누구 얘기론 그걸 소설로 먼저 쓴다는 말도 있대요.
이창동 그런 소설이 있어요. 원작이.
조선희 원작이 뭐죠?
이창동 이야기 안 할래요. 아직 작가한테 판권 얘길 안 한 상태라.
조선희 국내 소설이에요, 외국 소설이에요?
이창동 국내 소설인데, 소설은 좀 달라요. 이야기의 아주 기본적 얼개만 그 소설에 있다는 거죠.
조선희 이스트필름에서 만들게 되나요?
이창동 아마도.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조선희 거기에 강우석 감독이 돈을 댄다, 그런 거로군요.
이창동 계약금 받았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근데, 걱정이 돼서 돈을 못 쓰겠더라고. 돌려줄 때가 되면 돌려줘야 하니까.
조선희 이 영화는 좀 부담스럽다 그러시는데, 제일 걱정되는 게 뭐예요? 관객이 안 봐주는 것, 투자자들한테 손해 끼치는 것, 이스트필름이 망하는 것. 어떤 거예요?
이창동 이스트필름은 안 망해요. 이미 망했기 때문에. (웃음) 한국 영화제작 시스템이 영화가 손해 봐도 제작자는 안 망하잖아요.
조선희 투자자들이 떠안죠. 근데, 제작사는 능력에 대한 평가에 있어 손상을 입겠죠.
이창동 영화가 망하면 날 욕하지 제작자를 욕하겠어요? 그러니까 대중과의 교감이라는 것과 투자자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게 별개가 아니에요. 한 덩어리로 얽혀 있어요.
조선희 이 영화 말고 의중에 두고 있는 다른 하나는 뭐예요?
이창동 뭐가 하나 있긴 있는데 얘기 안 할래. 아웃되기 전에 사고 한번 치려고.
조선희 저는 여행을 좀 다녀와도 처음엔 집이 낯설거든요? 집안 분위기도 낯설고 아침밥 준비해서 애들 학교 보내야 하는 것도 내 일이 아닌 거 같거든요. 근데 1년 반 만에 영화계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건데, 고향은 고향인데, 좀 낯선 느낌은 없으세요?
이창동 전혀.
조선희 아무런 이물감이 없으세요?
이창동 그럼요.
조선희 자신은 예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해도 사람들 태도가 예전과 달라진 것, 어려워하는 건 없어요? 저도 예전엔 좀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장관 하시고 나선 아주 어려워 죽겠는데요. (웃음)
이창동 영화계 사람들은 괜찮아요. 나를 다르게 보지 않아요. 근데 일상적으론 많이 느끼거든요. 이건 심각해요, 나한테. 물론 예상은 했었어요. 그런 문제가 심각하게 걱정돼서 가능하면 안 하려 그랬죠. 공직을 하기 전에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별로 신경 안 썼어요. 그만큼 자유로웠던 거죠, 책임감도 없고. 이번엔 좀 달라요. 사람들 시선에서 느낀다고. 굉장히 예민하게 찔러요. 아파요. 차라리 영화판 사람들 만나면 편해져요. 좀 숨쉴 만해.
조선희 가령 어떤 식으로요? 백화점 가면 알아본다, 대중목욕탕 못 간다, 그런 종류예요?
이창동 사실 그런 데 간들 어쩌겠어요? 하지만 그냥 얼굴 팔리는 사람하고는 좀 달라요. 신경쓰이는 거야, 내 행동이. 그러니까 이제 가기 싫어지는 거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기가 싫어지는 거지. 조금 시간이 더 걸려야 할 거라고 봐요.
조선희 감독 일을 하는 데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가요? 가령 김운경 작가 같은 경우는 사진을 절대 안 찍히려 하더군요. 만날 서민 드라마를 쓰니까, 어디 시장 가서 난전에 끼어들어 얘기도 하고 이런 식인데 얼굴이 알려지면 점점 누비고 다닐 공간이 없어진다는 거죠. 그런 식의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창동 그건 옛날부터 그랬지만, 공직을 맡은 뒤엔 그것과는 성격이 달라졌다는 거죠. 이미 사람들이 관찰, 비판할 준비가 돼 있어요. 눈길이 그래요. 그걸 내가 부담으로 느껴요.
조선희 어디서 어벙하게 있는 시간이 허용이 안 되겠죠.
이창동 그렇죠. 그리고 때때로 신경을 써줘요. 안 써줬으면 좋겠는데. 최근 뉴욕에 갈 때 이코노미를 타고 갔거든요. 전에도 이코노미 타고 다녔잖아. 근데 이젠 좀 불편하드라고요. 자꾸 신경을 쓰잖아요. 그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되는 사람 대하듯이. 그럼 점점 불편해지는 거죠. 또 아마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특권의식이라고 그럴까? 사람 몸이 간사하거든요. 자기 분에 맞지 않는 사치와 허영, 이런 걸 한번 맛보면 얼마나 치명적인가. 가능하면 경험 안 하는 게 좋지.
조선희 예전에 <키노> 폐간호에 박광수 감독하고 대담하셨잖아요. 장관 되고 불과 얼마 안 될 때였는데 박광수 감독이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나?’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날 뭘로 보나. 9시 뉴스에 5분만 나와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알아봐’ 하고 대답한 게 기억나요.
이창동 내가 장관할 때, 특히 초기엔, 100명 중에 99명이 알아봐. 신경 안 쓰는 사람 하나 빼고. 요즘에 좀 덜해요. 노출빈도를 줄였거든요. 이거 그만두고 처음 하는 인터뷰거든요. 사실 부담 많이 돼. 어떻게 다른 인터뷰들을 다 거절하나….
관료로서의 성과와 아쉬움
조선희 감독이란 게 거의 반백수의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데 공무원은 ‘nine to five’잖아요. 그거 쉽게 적응이 되셨어요?
이창동 ‘nine to twelve’, 아니 ‘six to twelve’였죠. 적응이 안 되지. 끝날 때까지 안 되지. 그런데 그만두고 그 다음날 되니까, 바로 옛날 리듬이 돌아오더만. 그러니까 신체 리듬은 원래대로 머물러 있었던 거 같아. 새벽에 눈이 딱 떠질 줄 알았아요. 그런데 안 떠지데.
조선희 그러니까 해외여행 가면 일주일이건 열흘이건 시차적응이 안 돼서 시달리다가 돌아와서 하룻밤만 자면 원래대로 돌아오잖아요. 그거랑 똑같은 거 같아요. 이창동 선배는 처음엔 장관직을 거절도 했고 취임 뒤에도 계속 미스캐스팅이다 그랬지만 1년 반 동안 영화 만들 때의 완벽주의로 일중독에 빠졌던 것 아닌가요?
이창동 의무감, 책임감이 있으니까. 농땡이 부릴 수 없죠. 책임…. 사람이 살면서 경험하는 책임감 중에 그 정도 무게의 책임감이란 드물죠.
조선희 그런 면에서는 해볼 만한 일 아니에요? 생각이 있으면서도 전혀 시스템을 바꿀 수 없는 게 대부분의 사람인데, 자기 생각으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간 거잖아요. 그게 권력인 거잖아요. 해볼 만한 거 아니에요?
이창동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죠. 뭐, 공익근무다, 라고 생각을 했고, 받아들일 때 온갖 상념이 왜 없었겠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괜히 양복 입고 왔다갔다하고, 오래하지도 못할 텐데.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죠. 솔직히 말하면 확신없이 시작했어요. 근데, 우리 문화예술정책이 제대로 방향을 잡고 거기 따르는 여러 가지 정책적 수단이랄까, 구체적 플랜을 정리해본 적 없다는 것. 내가 있는 동안에 그 틀은 잡아보자, 라고 생각했죠. 그것만 하더라도 최소한의 역할은 한 것 아닌가, 판단이 든 거죠.
조선희 그걸 뭉뚱그려서 개혁정책, 이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대표적으로 어떤 게 있죠?
이창동 전반적으로 문화예술정책의 어떤 틀, 이것을 문화관광부 직원들에게도 주문하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도 같이 이야기해서 만들고 싶었어요. 방향도 방향이지만, 구체적인 정책적 수단과 일정, 일정표, 말하자면 지도가 필요한 거죠. 그걸 책자로 만들면, 굉장히 디테일한 것까지 담아야 하니까, 서울시 전화번호부, 적어도 그보다 더 두꺼워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한번은 다 정리를 한 거 같아요. 전화번호부 두께의 책 두권을. 모르긴 해도, 앞으로는 그 방향으로 나갈 거예요.
조선희 두권의 책 제목은 뭐죠?
이창동 하나는 <창의한국>이고, 하나는 <예술의 힘>. 하나는 문화전반에 걸친 건데, 여러 가지 중에 가장 높은 가치를 창의라고 생각한 거고, 또 하나는 기초예술이 힘을 가져야 우리 삶의 질이 총체적으로 높아진다는 거죠.
조선희 문화부의 터줏대감, 오랫동안 거기서 뼈가 굵어온 관료들로서는 지금까지 해온 관행을 고치는 것일 수 있잖아요. 근데 그걸 관료집단이 잘 받아들이던가요?
이창동 처음엔, 제가 생각하기엔 상당한 저항, 이라기보다는 불편함이랄까, 좀 이질적인 것이 있었죠. 인터넷에 올린 취임사도 한동안 시비가 많았잖아요. ‘조폭문화’ 그런 표현도 전혀 모멸적으로 쓰려고 한 말이 아니고요, 공무원사회의 문화가 일반 국민들 문화와 격리돼 있는 걸 비유적으로 한 말이에요. 근데 차츰, 상당히 많이 받아들였고, 내부로부터 변화를 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정부 부처 중에서 문화관광부가 가장 변화를, 자발적으로, 주동적으로, 하고 있을 거라고 난 자부해요. 최근에 정부에서 혁신평가를 했는데 문광부가 유일하게 통과했대.
조선희 그럴 수 있겠네요. 어디나, 진짜, 핵심부서거나 핵심부처거나 하는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너무 강해서 자기네 관행을 죽어도 안 고치려고 들잖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문화부쪽의 공무원 집단이 더 유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변방에서 혁명이 싹튼다고.
이창동 그런 측면도 있고. 아무래도 문광부가 좀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조선희 어떤 일들은 마무리하고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으세요?
이창동 많죠. 근데, 문화에 관한 건 답이 금방 안 나오거든요. 어쨌든 일단락짓자고 생각했던 것들이 몇개 있었죠. 일단 지방문화들을 지금 상태에서 묶어두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방문화를 획기적으로 증진시키려면 일단 돈이 필요하거든요. 연간 1천억원 정도는 있어야 기반을 만들어갈 수 있겠는데, 지역에선 주로 건물 짓고 길 닦고 이런 데 돈을 써요. 막판에 그 재원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썼죠.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이 있어요. 한국사회의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교육의 문제인데 그중에서도 문화예술교육이 중요해요. 한국의 학교교육엔 예술교육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예술을 안 배우고는 창의성은 고사하고 대체, 무슨, 사회성이랄까, 인간으로서 능력을 못 갖춘다고. 하지만 교육부가 있기 때문에 문광부에서 하기 참 어렵거든요. 그래서 어쨌든 예술교육을 할 수 있는 틀은 만들어야겠다, 뭐 그런 거죠. 그런 것들에 일단 열쇠는 꽂았다고 생각해요.
조선희 새 장관이 이어서 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창동 다 나와 있어요, 전화번호부에. (웃음)
조선희 후임자가 불쏘시개 하지 않을까요?
이창동 지금 정동채 장관께서도 그 틀 위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수행해가느냐의 인식이 굉장히 강한 분이에요. 그 틀을 제가 만든 게 아니고, 문광부 직원들과 현장사람들까지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조선희 지난해에 <오아시스>가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서 칸에 가셨죠? 그 기사 보면서 ‘딴지일보’식으로 ‘아, 쓰바, 저거 너무 폼나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관이 다른 나라 방문할 수도 있고 감독이 초청받을 수도 있는데, 장관이 감독 자격으로 칸영화제에 간다는 건, 진짜 폼나 보이더라고요.
이창동 그렇게 폼나진 않아요, 실제로 그 폼을 취하고 있으면. 근데 실은 일이 있어서 갔던 거예요. 해외문화원장회의라는 게 있어요. 그게 파리에서 있었고, 또 프랑스 문화부 장관하고 만나게 돼 있었어요. 문화분야에서는 프랑스와의 국제적 유대가 굉장히 중요하죠. 미국은 문화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나라예요. 근데 어쨌든 우연인지 그쪽에서 기획을 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오아시스>는 베니스에 나갔던 작품이라 칸에선 안 받아야 하는 거였거든.
조선희 전에 한길사 사옥 오픈하면서 단재상 시상식 할 때 정도상이 상받는다고 오라고 해서 갔죠. 근데 거기 이창동 선배가 온 거야. 헐렁한 옷 입고 앞자리에 앉아서, 출판단지 대표, 심사위원장, 그렇게 장황하게 연설들을 하는데 끝까지 그냥 앉았다 가는 거야. 그래서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장관한테 인사를 시켜야지 싶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누구한테 물어봤더니, 본인이 그거 안 하는 조건으로 갔다고 그래요. 그런데 식이 끝나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창동 감독한테 사인받으러 몰려드는 거야. 한도 끝도 없이 사인하시대. 왜 장관 초기에,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엄청 퍼부어댔는데, 끝나니까 한나라당 의원이 와가지고 우리 애가 당신 팬인데 사인해달라 그랬다 했잖아요. ‘너무 폼나는 인생이네’ 싶더라고요. 작품성과 흥행성을 다 갖춘 인생이라고 할까. 사회적 냉대를 받으며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가야 정상인데 이 사람은 예술의 길을 가면서 현실세계에서의 보상, 권력까지 갖다 떠안기니까.
이창동 예술가가 아닌 거지. 가짜지.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불편한 거예요. 자격지심도 있는 거고. 이를테면 대중의 관심, 일부 호의 또는 애정이더라도 그게 일시적인 거고, 나 스스로도 가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폼이지. 폼을 끊임없이 취해야 하니까 피곤하지. 밀착되는 감정은 아니에요. 내가 밖에 있을 때 고위 공무원들이 문화행사에 와서 재미없는 연설할 때 되게 싫었거든. 그래서 일부러 문화예술쪽 행사에는 그런 조건을 얘기하죠. 부천영화제, 전주영화제 갔을 때도 그랬어요. 가긴 가는데, 소개도 하지 마라, 시상도 안 하는 조건으로.
조선희 권력으로 간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조건을 내걸잖아요. 축사 순서를 제일 첫 번째 줄 것, 맨 앞자리를 줄 것. 가령, 사람들에게 권력에의 의지라는 게 있는데, 물론 정치권력은 그 권력의 일부죠. 집안에서 가부장도 하나의 권력이라서 여성문제가 진도가 잘 안 나가는데. 여하튼 정치권력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걸 씹는 재미에 살잖아요.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맛에 취하고 길들여지는 거, 그걸 경멸하고 형편없이 생각하는 재미에 살잖아요. 가령 문화계쪽 사람 중에도 민족시인 민중시인이란 사람이 국회의원 됐을 때 그런 의전적인 걸 주장하다가, 흔히 말해서 거들먹거리다가 사람 우스워지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이창동 선배는 그런 의전을 거부하고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지 않겠다고 버티니까 우리 입장에서 좀 짜증이 나고, 질투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망가지면 좀 욕도 하고 그러겠는데.
이창동 그럴 틈을 안 줘야지. 농담이고. 의전에 신경쓸 때도 많아요. 내가 의전을 제대로 못 취하면, 정부 전체의 위상이 문제가 될 땐. 근데 문화판 같은 데서 정치권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안 되죠. 문화부 장관이 가장 존중해줘야지. 단재상에 모인 분들 보면 하나하나 문화권력을 갖고 계신 분들이에요. 근데 장관이 나가서, 문단에서도 후배고, 문화예술계에선 미미한 존재가 대중적 인기 좀 누린다고 폼잡는 건 더 이상한 거죠.
조선희 가령 우린 운전기사 딸린 차 타보는 게 소원이거든요. 그런 차 타고 다니는 거 좋지 않아요? 편하고 효율적이기도 하고.
이창동 근데 나는 내가 차 모는 게 더 편해요. 우선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불편해. 조는 거 외에는 할 게 없어. 차에서 움직이면서 서류를 볼 때가 굉장히 많거든요. 행사장 갈 때, 원고 같은 거 대개 차 안에서 보는데, 사실 머리에 잘 안 들어와. 차 모는 게 제일 편하지. 음악 틀어놓고 따라부르고 욕도 하면서. 근데 내가 차 몰고 출퇴근하기가 쉽지 않아요. 아침부터 회의, 행사, 그런 게 죽 있다보면 대책이 안 서거든. 지하주차장에서 주차시키느라 헤매고. 그럴 땐 관용차를 탔지. 그런데 그거 말이야, 별 거 아닌 거 같아….
경험의 폭만큼 작품세계도 달라지지 않을까
조선희 이창동 감독의 삶은 드라마틱해요. 워낙 전쟁도 없고 평화시대인데다 더구나 지식인 사회에서 대충대충 노는 사람들 중에선. 근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건 재밌는데, 본인은 좀 어지럽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창동 별로 안 어지러워요. 드라마는 아닐 거야. 드라마는 추락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지금 이야기하는, 바깥에서 보는 내 인생엔 추락이 없잖아요. 그냥 운이 좋아가지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이지. 근데 내 내면으로 보면 나는 이미 예전에 추락해 있기 때문에 그냥 그 상태에 있는 거 같아요. 올라가야 어지럽지.
조선희 사람들이 내심 다 이창동은 이 시대 최고의 러키가이다,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면, 그걸 내면으로 안 받아들이겠다는 걸 알겠어요. 자기를 러키가이로 생각 안 하는 태도, 자의식이 들어 있는 거 같거든요. 하지만 전업을 할 때마다 신인에서 다시 시작하고, 그런 게 다 드라마죠. 꼭 마지막에 추락이 있어야 하나요?
이창동 아니 내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잘 나가는 것같이 보이는데, 올라가본 적이 없어요. 그걸 못 믿는 거죠? 장관 맡기 전에 그런 고민은 했었어요. 장관이란 말, 벌써 하고 그만뒀는데도 아직도 어색해요. (웃음) 이게 내가 앞으로 뭘 하건, 글을 쓰건 영화를 만들건, 내 발언을 하는 데 있어선 상당한 장애가 되겠다. 그게 나한테 제일 큰 공포였어. 지금까지는 무슨 소리든 다 했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내가 다른 것을 비판하기 힘들어지는 거죠. 그 고민은 정말 심각한 것이었고 그게 가능한 한 안 받고 싶었던 제일 큰 이유였어요. 그런 점에서 나한테, 내 내면에 깊은 변질이 가해졌죠. 그 정도예요. 비행기 탔냐 안 탔냐는 아닌 거 같아. 비행기 얘기 해볼까요? 내가 나이 마흔에 비행기를 처음 타봤거든요?
조선희 그게 언제인데요?
이창동 박광수 감독이 <이재수의 난> 헌팅 갈 때 제주도에 따라갔죠. ‘비행기 처음 탄다’ 그랬더니, 박광수가 ‘앞으로 많이 타게 될 거야’ 그랬어요. 농담처럼. 그 친구는 직관력이 있거든. 그래서 속으로 은근히 그 직관력이 맞기를 바랐지. 그래서 비행기 많이 타게 됐어요. 별거 아니에요. 문제는 내면의 풍경인데, 오히려 상처입거나 변질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죠. 우리, 전에 북한산에 올라가면서 그런 얘길 했잖아요. 산에 오르기 전엔 산 정상에 있으면 대단한 게 있을 거 같지. 올라가봐, 대단한 거 없어. 올라가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 대단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
조선희 그래도 좀 뭐 있지 않아요? 예전에 안 봤던 거.
이창동 있죠. 장관 정도 되면 상당한 고급정보 접하고 관리하고 그러죠. 또는 어떤, 굉장히 책임의 하중이 무거운 일을 한다든지. 그런 정도지. 그게 책상에 앉아서 글 쓰는 거나 큰 차이가 없어요.
조선희 장관 하고나서는 경험의 폭도 달라지고 하니까 작품세계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들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게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닌 거 같아요. 약간의 우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약간의 기대도 있는 거거든요? 이 사람이 지금까진 철저히 비주류, 박탈당한 사람들 편에 서서, 주류에서 비껴난 시선을 갖고 있었는데, 앞으로 뭔가 세계가 달라져도 재밌지 않을까, 하고.
이창동 그런데 그 세계는 전혀 재미없더라고. 크게 영향을 주는 거 같지 않아요.
조선희 그런 경험에 일년을 투자할 정도는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요? 선배는 술 마셔도 취하지 않죠? 권력에 못 취하는 거 보면. 자기가 취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으니까.
이창동 술에는 안 취하지. 하지만 딴 것에 취하지. 감정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담배에 취하고.
조선희 감정에 취한 순간, 판타스틱한 경험, 근래에 그런 기억 있어요?
이창동 별로 없었던 거 같은데? … 얼마 전에, 모 여배우하고 모 남자배우하고 술을 먹었는데, 근데 노래방에서, 두 사람은 막 울고 있고, 나는 노래하고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잘 안 취하는 스타일인 거지.
조선희 무엇이 이창동 감독을 작가로 만들었을까요.
이창동 아, 이건 어려운 단답형 질문이다. 외로움 같아. 외로움. 십대 초반에 이미, 나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했거든. 그때 소설도 썼어요. <삼국지>도 썼고. 촉나라 오나라 위나라 그림도 그려가면서 내 나름대로 쓴 거예요. 누구한테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가 그 무엇과 통신하는 방법이야. 외로우니까, 현실하고 소통이 안 되니까 그랬던 거 같아요. 지금도 그 정서나 심리상태가 거의 변하지 않은 거 같아요.
조선희 소설 쓰다가, 아 이거 못해먹겠다 해서 딴 데로 간 게 또 다른 작가의 길이었잖아요.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설로, 영화로 끌고 온 힘이 뭘까요.
이창동 글쎄요, 힘이 있었나? 그냥 흘러오다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조선희씨가 잘 알겠지만 그건 있었어요. 이른바 80년대에 내가 글을 썼잖아. 우린 20대 때엔 인문학적 감수성이었거든. 그런데 80년대는 인문학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어요. 과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예요. 나 개인으로는 글 쓰는 쾌감이랄까, 즐거움이랄까, 글에 대한 도취, 그런 게 문창 초기엔 굉장히 강했거든요. 근데 정작 작가가 되고부터는 그게 완전히 휘발돼버렸어요. 의무감만 남은 거예요.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부터 글쓰기가 힘들어진 거죠. 벽에 머리를 찧으면서 고민은 하는데 정작 글은 쓰지 못하는. 그런데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고. 포스트모던이니 신세대, 이런 것들이 화두가 되었잖아요. 굉장히 허탈했지요. 우리가 고민했던 가치들이 유효기간을 지난 것도 아니고 한국사회가 그런 문제를 해결한 것도 아니야. 근데 갑자기 유통기한 지난 의제들처럼 되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글쓰기가 싫어졌던 거야. 나 자신에 대한 것도 많았어요. 내가 지겨워졌다고 할까. 그러면서 핑계를 찾은 거죠. 글쓰지 않을 핑계를. 그러다 우연찮게 영화판까지 오게 됐죠. 그때 <그 섬에 가고 싶다> 촬영장에서 만났잖아. 그때 어떤 기자가 그렇게 썼는데, 꼭 수행자 같았다고. 실제로 그냥, 혼자 고생을 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영화를 하게 된 건 주변에서 떠밀어서 한 측면도 있어요. 나 혼자, 다른 영화감독 지망생처럼 시나리오 들고 왔다갔다하라 그랬으면 못했을 거예요.
조선희 처음에 시나리오만 쓸 생각이었어요?
이창동 시나리오도 아주 우연히 하게 됐죠. 박광수 감독이 전화해서 임철우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영화화하고 싶은데 원작자를 만나게 해달라기에 만나게 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시나리오 한번 써볼래? 그래서 그러면, 나를 조감독으로 받아줄래? (웃음) 거래가 이루어진 거죠.
조선희 그런 우연이 없었다면 뭘 하고 있었을 거 같아요?
이창동 별 의지가 없었어요. 조감독 하면서도 연재소설 쓰고 있었거든. 밥벌이로. 가족들 데리고 파리로 가려고 했어요. 농담처럼. 장정일이 그렇게 떠났는데 실은 내가 먼저예요. 근데 농담을 계속하면 진짜가 되거든. 아파트 전세 놓고 전세금으로 1∼2년 파리에 가려 한 거예요. 왜 파리냐. 이유도 없어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의 파리, 그런 파리 있잖아. 그래서 박광수한테 상의를 했죠. 파리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 백수로 지내면 생활비도 많이 들고, 학생 신분이 좋은데 뭐 공부할래? 영화공부가 좋겠다. 그럼 그러자. 그랬더니 박광수가 무작정 영화공부하러 가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영화에 대해서 뭘 알아야지 뭐가 공부가 되는지 알 거 아니냐. 충무로 경험을 해라, 그래서 이야기가 얽힌 거예요.
조선희 자신의 내부에는 어떤 실마리도 없었어요? 영화에 대한.
이창동 그렇지는 않죠. 한국사회의 변화하고 관련있는 이야기인데,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변화 중에 탈근대의 화두가 있잖아요? 그중 하나가 영화에 대한 거지. 실제로 근대의 중심은 활자거든. 활자의 의미, 관념 이게 근대를 지배했잖아. 근대를 끌고 왔지. 그런데 탈근대는 영상이 또 다른 어떤 세계를 구성하는 거야. 조선희씨가 <씨네21> 편집장을 한 것도 그렇지. 작가들도 모이면 영화얘기를 했어. 영화감독 하겠다는 친구들도 꽤 있었고. 난 상상도 못했어요. 그저 농담이었지. 근데 농담이 진담이 되어버린 거지. 소설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건너뛰기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그런 배경이 있었던 거예요. 돌이켜보면 그게 내 운명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릴 때 형 때문에 비록 지방도시였지만 연극을 늘 봐왔고 연극이란 장르는 나한테 굉장히 친숙하거든. 그리고 또 열몇살 때 이미 화가였고, 물감 살 돈이 없어서 포기했지만. (웃음) 그러그러한 씨앗들을 내가 품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흘러간 것처럼 느껴지지만 따지고보면 예정돼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조선희 93년에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나왔잖아요. 그리고 97년 <초록물고기>인데, 그때까지가 말하자면 영화감독으로서의 수업기라 볼 수 있는 거네요. 93년부터 4년 정도. 그 기간이 좀 지루하지 않으셨어요?
이창동 일단 수업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목표를 갖고 있어야 지루할 텐데 나한테는 목표의식이 없었어요. 꼭 해야지 하는 건 없었어요.
조선희 어쨌든 그러다가 <초록물고기>를 찍게 된 계기는 뭐죠? 낭트영화제를 보고 영화하기로 결심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창동 결심은 아니고, 베낭여행을 가다가 낭트에 들렀어요. 근데 굉장히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나한테는 놀라움이었어요. 보편성이라는 것에 대해 실감한 계기가 됐죠. 국경을 넘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는 문학보다 영화가 훨씬 쉬운 매체라는 걸 느꼈다는 뜻이에요. 문학은 오래 걸리잖아요. 번역의 문제도 있고, 또 세월의 무게, 시간의 무게를 이겨야 돼요. 영화처럼 금방금방 평가받지 않잖아요. 그게 조금은 영향을 줬을 거예요.
작가로서의 분열과 싸움
이창동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용해. (웃음)
조선희 어떤 기업인 전기를 써주다가 노트북 파일이 날아간 적 있었잖아요. 그게 언제였죠?
이창동 95년이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나리오 쓰는 동안이었죠. 그건 거의 사고를 당한 충격이었어요. 왜 잃어버린 게 더 아깝잖아. 더 훌륭하고. 어떤 기업인 전기소설은 이미 다 썼던 거고 고료도 받았었고. 노트북에 있다 날아간 건 그때 작업하던 장편소설, 중편 등등이었죠.
조선희 제가 지금 신인작가잖아요. 근데 정말 신인작가라는 건 정신분열의 다른 이름인 거 같아요. 사회적 냉대, 시스템의 냉대에 시달리다보면, 끊임없이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 그걸 사회에 납득시키기 전에 내 자신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책무가 있잖아요. 그 내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거 같아요. 또 내가 소설 쓸 재능은 없을지라도 이유는 있다는 걸 자신한테 납득시켜야 하는데, 가장 절망적일 때는 그 이유가 생각이 안 날 때예요. 선배는 그런 신인작가 시절을, 소설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무려 두번이나 했잖아요. 이 신인작가에게 뭔가 용기를 주는 얘기 해주실 거 없어요?
이창동 전혀 도움이 안 되지. 어떤 누구의 경험도 도움이 안 돼요. 혼자서 해결해야지. 절망을 좀더해야 해. 가혹하게 이야기하면, 절망을 아직 덜 했구먼.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설득한다고 했잖아. 무가치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 돼.
조선희 그것까지 받아들이고 나면 쓸 기력이 없잖아요.
이창동 절망을 하고 나면 할 일이 쓰는 거밖에 없게 돼요. 베스트셀러를 쓰려고 하니까 그렇지. 무인도에서 구원의 글귀 한 구절을 써가지고 병에 집어넣어서 코르크 마개를 닫고 바다에 던지는 심정이 돼야 해. 누구 하나라도 이걸 주워서 봐줬으면 좋겠다, 에서 시작하는 거 아닌가? 무인도에서 베스트셀러작가가 되는 걸, 이 체험을 수기로 써서 베스트셀러가 돼서 비단옷 입고 진주목걸이 하고 그런 거 상상하면 미치지.
조선희 신인작가가 자기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려다보면 조급해지잖아요. 그런데 <초록물고기>는 데뷔작으로서 그렇게 조급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건 뭘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이창동 무슨 이야긴지 정확히 이해하겠는데, 한 가지 납득이 안 되는 건, 지금 조선희씨 이야기 중에, 뭐라 그럴까, 세속적 잣대의 용어가 섞여 있어. 작가는 작가지, 신인작가라는 말은 없어. 그건 저널리즘 용어라고. 난 열두살에 이미 작가였다고. 그전엔 화가였고. 내가 글을 쓰면 이미 작가예요. 신인작가, 추천작가, 무슨 수상작가. 이건 그야말로 세속적인 거라고. 또 시스템으로부터의 냉대, 인정 이런 것들도 세속적 가치라고. 요즘 예술가를 찾기가 어렵다는 말들 하잖아요.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자기 내적 충동, 내적 가치로 창작을 하는 예술가를 만나는 게 어렵다는 얘기 같아. 보면 알거든. 예술가의 폼을 내는지. 진짜 예술가인지. <초록물고기> 때? 말할 나위가 없죠. 그때 경험했던 냉대와 쪽팔림이라는 거. 나이도 사십이 넘어서. 그런 외로움은 내가 열두살 때 이면지에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쓸 때나 큰 차이가 없거든. 그게 힘 아닌가. 영화 촬영할 때 어떤 장면 찍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와 이 장면 하나 몇만이다, 이런 얘길 덕담처럼 하는 경우 있어요. 그럼 난 즉각적으로 의심을 해요. 이거,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보여지는 것엔 뭔가 위험한 요소가 있다는 거지.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건 아니에요. 교감하는 게 좋지. 그런데 그 방식이 중요한 거지.
조선희 자기 재능에 절망한 적은 없어요?
이창동 그걸 나에게 물어선 안 되지. 조선희씨 왜 절망하는데? 뭐 땜에 절망해? 스팀이 잘 안 들어와서 절망해, 볼펜이 잘 안 들어와서 절망해,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어서 절망해? (웃음) 결국은 자기 욕망과 그 욕망으로부터 동떨어진 재능과의 싸움이지. 피흘리는 싸움. 그게 운명이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군.
조선희 그런데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절망과 싸움이 늘 반복되나요?
이창동 그렇지. 그럼 술술 나오나? 안나오지.
조선희 이창동 선배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고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애정있고 낙관적인 데가 있어요. 김영호가 고통받고 망가지는 것도 그 사람에게 어떤 맑은 심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홍종두도 그렇고. 지금까지는 굉장히 비극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즐겨왔지만 결국은 밝고 낙관적인 영화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창동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낙관하지. 인간에 대해. 한국사회도 긍정적으로 나아갈 거라고 봐요. 사람들 하나하나의 내면은 뭔가 이해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어떤 어두운 걸 통과해야 해요. 어둠을 통해서 빛을 본다고 할까. 그게 예술체험의 과정이랄까. 아까 분열을 말했는데 작가는 기본적으로 속에 분열을 갖고 있다고 봐요. 영화감독도 굉장히 많은 다중인격적인 게 있어야 돼. 그러니 분열을 받아들이세요. (웃음) 나는 장관도 내 역할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속에 그런 것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실제 경험해보니까 약간 심하더라.
조선희 이창동 감독처럼 결벽증적인 작가를 문광부 장관으로 끌어갈 수 있는 게 우리 시대가 재밌는 점이에요. 삼대에 덕이 쌓여야 집안에 뭐가 된다고, 김영삼부터 진보정권의 시작으로 본다면 김대중하고 노무현까지 삼대가 쌓여서 이렇게 권력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다 캐스팅된 것 아니겠어요?
이창동 내가 안에 들어가보니까 이 정부의 구성원들이, 정권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성향이 많더라고. 권력을 싫어하는 것. 근데 바깥에서는 그렇게 안 보지. 자기들 눈으로 보니까. 어쨌든 우리 사회가 변화해가는 중요한 징표랄까. 권력에 대한 생각까지도 바뀐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조선희 장관 한번 하면 평생 연금 나오나요?
이창동 안 나와요. 연금이 없어졌어.
조선희 정말? 나는 이제 이창동 감독이 노났는 줄 알았는데. 언제 없어졌어요?
이창동 글쎄. 국민의 정부 땐가. 품위 유지비조차 안 나와요.
조선희 하지만 영상원 교수 월급이 있잖아요. 공무원 월급이지만.
이창동 그걸로 적자 면하고 살기는 어렵지.
조선희 그러면 작품이라도 빨리 찍어야 할 텐데 다음 작품은 언제 나올까요. 내년쯤?
이창동 모르겠어요. 사실은 소설을 쓰고 있거든. 몰라, 끝냈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절반도 안 됐는데.
조선희 영화로 만들 걸 소설로 쓰는 거예요?
이창동 그건 아니고. 공무원 생활하면서 갑자기 글을 써보고 싶더라고. 언어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은 언어가 가진 환기력을 수단으로 삼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걸 다시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근데 너무 오랫동안 안 해서 다 까먹었어요.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과거에도 잘 못썼지만. 거의 실어증 환자가 말 배우는 수준이야. 시네마서비스에서 알면 화낼 텐데. 계약금 받아먹고 말이야.
조선희 어쩔 수 없이 이창동 감독이 문자세대라는 게 아닐까요.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또 영화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고.
진행·정리 이성욱, 박혜명·사진 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