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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실체
성경에 등장하는 고대 역대제국들은 최초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데바사(페르샤),
헬라, 로마, 이렇게 6개 제국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흔히 이 같은
고대제국들을 문자 그대로 고대제국들의 이야기로만 받아드림으로 인하여
성경은 예언이 되지 못하고 우리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그저 예수 믿고 급히 천당만 가겠다고 오발탄을 쏘아대는 아우성들이지만,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고대제국들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먼저 알아야 구원이 있다.
하나님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했듯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그의 탈출장소는 “갈대아 우르” 였으며 갈대아 우르가 곧 출애굽의
“애굽” 과 같다.
즉 갈대아 우르는 우상조각들의 상품을 팔아 먹고사는 우상제조 도시였음을
알려 주고 있는데, 애굽이 그와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애굽은 신이 아니요 육체라고 했다. 신은 빛이라면 신과 상반되는 육체란
곧 흑암을 먹고 사는 우상신을 뜻하며 아브라함도, 이스라엘도
이 같은 흑암으로부터 탈출한 출애굽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도 지으신 분이며, 다만 차례가 있을 뿐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요, 이차적으로는 애굽도 구원하신다고 했다(사19:24,25).
일차는 통치반열이요, 이차는 그 통치를 받는 허다한 백성으로서 구원이므로
만민구원의 하나님이 되신다.
일차적 구원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임에도 불구하고 큰 나라를
이루기까지 세력을 키워가는 동안 머물러 있다가 때가 되어 그 애굽에서
출애굽한다는 것은, 놀랍겠지만 하나님 자신의 존재성이 본디 애굽과 같은 것이며
하나님 자신의 출애굽과 같음을 내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인류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창조와 같고 인류의 모습은 하나님자신의
모습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자이며 우리는 창조대상으로서 함께 가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본디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하셨으며
하나님이 애굽과 같은 곳에서 출발하셨음을 보여 주신 것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의 창조란 흑암에서 빛으로의 창조임을 보여주신 것이 출애굽인 것이다.
출애굽의 10대 재앙을 통한 애굽의 바로와의 대결은 곧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본 고향을 떠나 빛의 나라를 향해 창조의 완성인 가나안까지
나아가야 하는
피나는 창조의 노력이 시작되는 최초의 지점이 되고 있다.
애굽의 바로왕이 하나님의 창조가 있기 전 원초적 지점인 흑암상태 그대로라면,
그 승리자(대결자)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자로서, 즉 빛의 하나님으로 자처하고
나선 분으로서 애굽의 흑암 상태에서 탈출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때 이스라엘백성을 동반하고 진두지휘하신다는 것은
그 만큼 창조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인간에게 빛의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서
빛의 자녀로 출발시키신다는 의미가 되고 있다.
처음 창조의 시점에서 하나님은 바로와의 대결에서 승리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팡이를 던져서 뱀으로 표징을 보일 때
바로의 술객들도 뱀으로 맞섰으나 전자의 뱀은 후자의 뱀을 삼켜버렸다.
그 외에 열가지 재앙 중에 아홉가지 까지는 바로의 강팍한 마음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가로막았던 대결상태를 유지하다가 열번째 재앙에서는 마침내
하나님은 승리자로, 바로는 패망자로 승패가 갈라지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성경 기록대로라면 이스라엘은 물론 구약 유대당의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상이 아니고 모형제단이다.
실상은 예수님의 초림 때와 재림 때이며 구약이 그같이 예수님의 초,재림 때를
보여 주는 모형제단이므로 성경은 비유라고 한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상은 초림때의 기성교단 백성이며 나아가 재림 때의
144000 택한자 반열이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곧 우리시대의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오늘의 기성교단백성이 되며, 다시 오늘의
택한자 반열 144000 까지 되는데, 왜 그들은 모두 열가지 재앙에서
애굽을 탈출하게 되는가 이다.
우선 재앙의 뜻을 살핀다면 재앙은 죽음을 뜻한다.
창조의 시작과 진행과정에서의 재앙은 아직 영생을 받지 못한 창조미완성을
뜻하고, 창조의 마침에서의 재앙은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이제 이스라엘민족의 탈출기에서
애굽에 내린 재앙은 창조의 시작점에서 내린 재앙이므로 영원한 멸망을
뜻하지 않고 단계별 구원을 보여준 것이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은 첫 단계의
구원이요, 나머지 애굽은 다음 단계의 구원이기 때문에 재앙에 노출되어 있다.
출애굽을 위해 애굽에게 내린 열가지 재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 아홉째 까지도 바로의 강팍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나 결정적 열번째
재앙에서는 백기를 들게 했는가 이다. 뿐만 아니라 열번째는 애굽의 장자를
치는 재앙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하며 10수의 의미를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서 10수는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으로서 “정한 수가 찬 滿數” 를 의미한다.
그리고 만수는 “많은 떼” 를 의미한다. 즉 10은 많은 떼를 의미한다.
그리고 애굽이라는 단위는 아직 애굽에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구원할 전체 인류의 수가 아주 많다는 의미의 “많은 떼” 가 된다.
이같이 많은 떼 중에 승리한 처음 하나는 알곡으로 부름받을 이스라엘이라면,
나머지 무승의 아홉은 애굽으로서
둘째 열매로 밀려나 있기 때문에 아직 구원의 대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애굽은 신이 아니요, 육체라고 했듯이 육체이므로 구원의 대상인 전체 인류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같이 전체 인류를 뜻하는 인간육체 애굽이라는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기 시작해서 우리에게 최초로
받으시는 십일조 헌물을 요구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애굽이라고 하는 많은 떼 중에 하나인 “사람십일조” 였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십일조반열이요, 천년통치반열이므로 가장 먼저 추수되는
장자의 총회가 되기 때문에 열번째 장자의 치심에서 벗어나게 된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총회가 아닌 차자들(둘째 열매)인 나머지 애굽은 둘째 열매로
밀려나 있기 때문에 장자의 치심에서 사람이든 생축이든 애굽전역의 장자들이
살아남지 못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10대재앙에서 아무런 해를 받지 아니하고 결정적으로’
맨 끝에서는 장자들의 총회로서 부름받게 되었으나,
애굽은 10대재앙 모두에서 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맨 끝 장자들의 치심에서
결정적으로 다 죽었던 것이니, 이는 그들에게 아직 구원이 없음을 뜻했다.
말씀의 참 뜻이 풀리기 전의 율법아래의 십일조란, 정확히 열에 하나를
지키게 하였으며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물질십일조가 중심이 되었었다.
하지만 말씀의 참 뜻이 풀린 구원의 때에 십일조의 참 뜻은 물질이 아닌
사람십일조였다.
그 사람십일조는 정확히 열에 하나를 말하지 아니하고
많은 떼 중에 하나를 의미하므로, 10 대재앙을 통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이스라엘은 많은 떼 중에 하나인 거룩한 사람십일조를 의미했다.
즉 열에 하나인 마지막 장자의 재앙에서 빠져나왔다.
하나님은 이 동네(이교단)에서 하나, 저 성읍(저교단)에서 하나
데려오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많은 떼 중에 하나씩을 데려오는
사람십일조 헌물을 뜻했던 것이다.
기성교단에게 애굽이란 초림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무속신앙 세상을 말한다.
무속신앙세상에서 예수님의 복음백성(기성교단)으로 탈출한자들은
모두 얼마인가? 그 수가 곧 이 세상 많은 떼 중에 하나인 사람십일조였다.
그리고 다시 오늘날 재림 때를 맞이하여 택한자 144000으로 탈출한 자들은
몇이나 되는가? 그 수가 곧 기성교단이라고 하는 많은 떼 중에
하나씩인 사람십일조였다.
사람십일조는 계시록 7장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인 맞은자요, 많은 떼 중에 하나씩 데려온
장자들의 총회가 되기 때문에 애굽의 장자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예수님의 유월절 피로서 무사통과 할 수
있었으며, 그 이전 9가지 재앙에서도 전혀 해를 받지 아니했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초림의 기성교단에게 애굽이란 무속신앙인 이 세상이요,
마지막 날 재림 때 택한자 144000 반열에게 애굽이란 기성교단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시든가 우상을 멀리하라고
하시든가 했을 때, 그 애굽이나 우상의 실체도 모두 다르다.
기성교단에게 애굽과 우상이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세상 신을 말하고
오늘의 144000에게 애굽과 우상이란 기성교단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창조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창조의 발목을 잡는 마귀의 등급도
업그레이드 되어 올가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문맥을 통해 애굽이든 우상이든 풀어져야 하거늘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문자 그대로 저 옛적 애굽이요, 저 말못하는 우상으로 보고 있으니
매사 무지한 그들 앞에 서면 기가 질리고 말문이 막힌다).
이 세상 무속신앙(애굽)도 하나님이 최초로 지으신 자연계 세상이다.
그리고 애굽에서 탈출한 기성교단도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신앙세상이다.
다시 그 신앙세상(기성교단)에서 탈출한 택한자 반열은 창조의 마침이 된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이 광야를 통해 가나안까지 들어가는 것이
창조행군의 목적지라고 했을 때,
처음 가나안입성은 기성교단의 마침이 되고, 처음 가나안에서 이스라엘백성이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새 가나안은
택한자반열의 몫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성교단과 택한자 반열에겐 애굽의 의미도 각각이며 가나안의
의미도 각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한 후에 광야의 의미도 각각이다.
기성교단에게 애굽이란 무속신앙세계이기 때문에 가나안에 당도하기까지
광야란 초림주의 복음이 땅끝까지 뿌려지는 과정이 광야였다.
약속의 땅 가나안도 복음이 전세계화된 첫 시공세계가 된다.
즉 처음 입성한 가나안이다(실체적 입성이 아니라 시각적 입성임).
그러나 택한자 반열에게 애굽이란 기성교단이 되기 때문에
택한자 반열에게 광야란, 기성교단을 사로잡아가고 있는 자칭재림주라고 하는
오늘의 바벨론과 앗수르(이방, 적그리스도)이다.
택한자반열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도 자칭 재림주들로부터 도망나와서
참 메시야의 음성을 듣게 됨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새로운 시공세계이다.
즉 회복된 새 가나안이 된다.
따라서 모세를 영도자로 하여 출애굽 해서 광야행군을 마친 후
멀리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그 시점까지가 기성교단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기성교단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실적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던 그림의 떡이었다는 것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꿈이다.
아직 현실은 아니다. 현실화가 아닌 꿈으로서
바라만 보았다는 점에서 처음 입성한 가나안이라고 고평가했던 것이다.
실체적 몸의 입성이 아니라 시각적 입성이었다.
초림주의 기성교단은 구원을 꿈꾸었지만 구원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멀리서 약속의 땅을 바라만 본 것이 된다.
애굽을 탈출해서 바라만 본 처음 세대(기성교단)는 아직 구원이 없다.
약속의 땅 가나안복지(구원의 땅)는
재림주를 예표하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그 다음 세대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세계 복음화가 반드시 끝나야만 예수님은 다시 오시고 가나안복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기성교단의 현실을 잘 생각해보라. 기성교단은 입으로는
복음화세계를 이룬다고 주장하지만, 그 작업을 끝이 없이 영원히 지속시키면서
개별적으로 하시라도 죽어서 영혼천당행을 부르짖는 신앙시스템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겐 세계복음화 완수란 없다. 인간은 낳고 죽고 다시
새롭게 낳고 죽고 하는데 어떻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확히 복음화세계를
이룬단 말인가.
복음화 세계를 이룬다는 것은 내가 복음의 씨뿌리기를 한 다음
다시 진리의 새말씀을 찾고 있는 그 시점이 이룸이요, 마침이 된다.
즉 마침이란 다시 새로운 시작을 전제한 말이다.
그러나 기성교단은 새로운 시작의 개념도 없고 마침의 개념도 없이
막연히 구원의 꿈만 꾸고있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만 본것이 된다.
가나안은 말씀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므로 복음화세계의 종착지이다.
그런데 기성교단은 처음 자리에서 영원토록 복음의 씨뿌리는 일만 고집하는
완고함 때문에 엄밀히는 복음화세계의 종착지인 가나안복지에 실체적
몸으로는 입성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저 먼 애굽에서부터 40년 광야길을 돌아돌아 가나안복지를 멀리서
바라보았다는 지점에서 그동안 복음의 씨를 뿌려온 그 비중이 큼으로
대략으로 일컬어 가나안 입성이라고 고평가 해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멀리서나마 바라보았기 때문에 시각적 입성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시각적 입성은 꿈일 뿐임을 명심하자)
가나안을 바라만 본 모세는 초림주를 예표했다.
그 모세의 바통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를 통해 다음 세대가 들어갔다는 것은
여호수아는 바라만 보았던 그 첫 세대에서 이긴자 재림주를 뜻하여
그가 다음 세대, 즉 기성교단에서부터 도망나온 자들을 이끌어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성교단에서 도망나온 다음 세대라고 해서 반드시 재림주의 캠프에
모두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 앞에는 후 셋때반에 속하는 적그리스도가
먼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는
가나안 입성 후 앗수르와 바벨론(이방,적그리스도)에 사로잡혀 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전 셋때반이 지나면, 즉 마침이 되면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으므로 구세대를 접고 다음 세대를 이끌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계시록의 두 증인으로서
재림주를 예표했다(전 셋때반만에 증거를 마친 때 계11:7 ).
그러나 그 역시 짐승(적그리스도)의 유린기간 “후 셋때반” 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후 셋때반동안 질밟힘 당한 때 계11:7-10)
실질적으로 보좌에 아직 앉지는 못하고, 전후 셋때반씩 합 일곱 때만에
사실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계11:11; 단4:16,17).
다시 말하지만
가나안을 멀리 바라본 것은 기성교단을 대표하는 모세이므로 기성교단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했다고 하지만 사실적인 완료라고는 할 수 없다.
다음세대와 더불어 가나안에 입성한 여호수아가 사실적인 복음전파의
완료이며 복음화 전 셋때반의 완수자이며, 그는 그로부터 짐승의 유린기간
후 셋때반을 더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일곱 때만에 이루는 그 날의 성취를 다니엘 9장에서는 70년 만에
맞이하는 해방의 날로 표현하기도 하고,
70 이레로 마치는 창조완성의 날로 표현하기도 했다.
70년에서는 이스라엘이 이방 바벨론에서의 해방의 날이다.
바벨론은 옛뱀의 후손인 적그리스도를 뜻하고, 적그리스도는 또한 옛뱀을
능가하고 있는 힘 있는 사단이므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후 셋때반에서의
해방은 곧 옛뱀의 전 셋때반에서의 해방도 포함되기 때문에
합하여 7수를 넣어 70년만의 해방으로 표현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70 이레에서는 저 모형제단이었던 구약 때에 진정한 해방자
재림주를 예표했던 고레스대왕 때부터 오늘의 실상인 재림주까지 날짜를
계산해서 70 이레로 정한다고 했던 것이다.
모형에서는 아무리 재림주 후의 재림주 후일지라도 실상까지는 모두
짓밟히는 형국이다. 따라서 모형의 재림주에서 실상의 재림주까지는 모두
마귀에게, 즉 적그리스도에게 짓밟히는 형세이며 논리가 되기 때문에
그 같은 계산법이 나오게 된것이다.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다음 세대는 가나안입성 후 적그리스도에 사로잡혀가서
70년 만에 돌아왔을 때, 스룹바벨이 성전지대를 다시 쌓아 성전을
중건했으므로 스룹바벨이 또한 곧 오늘의 재림주를 예표했다.
여호수아는 복음을 전세계화 시켜낸 전 셋때반의 자리 끝에서
재림주를 예표했다면
스룹바벨은 적그리스도의 후 셋때반을 마친 자리에서 재림주를 예표했다.
합이 일곱 때요, 70 년이요, 70 이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형 이스라엘은 창조의 장도에 올라
저 애굽에서부터 출발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 입성 후에 적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갔다가 70년(일곱 때)만에 돌아와 가나안에 재입성하여
성전을 중건하기까지 파란만장한 기나긴 창조의 대서사시 앞에 서게 된다.
그 감회에 한번 젖어볼 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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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애굽이라고 하는 많은 떼 중에 하나인 “인간십일조”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