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그 죄의 진정한 본질
우리는 누구나 세상 법률이나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긋난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죄의 본질은 다르다. 물론 성경도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처럼
성경문자적으로는 세상사람들의 죄의 관점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겠다.
하지만 성경문자는 하나님을 아는 진리에 대해 빗댄 말이므로 성경을
비유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분의 피조물이다.
하나님 형상으로서 피조물 인간은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공정들을
낱낱이 알아야만 하는 절대적 의무가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공정들을 알면 죄가 아니고 알지 못하면 그 무지가 죄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란 하나님의 창조공정들이 된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계 창조의 창조공정들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복잡다잡한 인간심령창조의 창조공정들은 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진리를 알고 있는가?
창1장 6일창조에서 창조의 하루하루 마다 무엇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그 창조의 공정들을 아는가? 문자적으로 읽고 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면 그것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창2장과 3장의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하나님의 창조공정들을 아는가?
문자를 읽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역시 그것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의 공정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진리이며
그같은 진리를 모르는 게 하나님이 물으시는 인간의 본질적 죄이다.
즉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 창조와 인간심령 창조의 창조공정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 공정들을 알지 못하는 게 하나님이 물으시는 인간의 본질적 죄이다.
이 본질적 죄의 대속을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초림)은 창세기 한줄 풀어주신 일이 없으며, 창조공정들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해주신 일이 없으며, 오히려 비유로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다시 오신다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다시 오시면 그분이 창세기를 풀어주실
것이며 창조공정들을 낱낱이 풀어주심으로써 우리로 진리를 알게 하실 것이다.
자, 여기까지는 다행스럽게도 아주 일부 사람들이나마 어느 정도 수긍을 한다고
믿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게(창조의 공정을 모르는 게)
죄의 본질임을 간혹 몇몇 사람들은 알고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지금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죄의 본질은 이 보다 더 깊숙이 틀어박혀
꿈쩍도 않는 요지부동의 죄이다. 밀실의 잠을쇄를 깨부수고 들어가
죄의 근본 정체를 끌어내어 밝혀야 한다는 뜻인데, 사람들은 경악할 것이고
따라서 나는 유쾌할 리 없으나 (나는 늘 얻어터질 것을 각오하고 있음)
밝히지 않기에는 내가 비겁하게 느껴져서 어쩔 도리는 없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미천인데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라는 노래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어쩌면 인간은 너무 약하고 착하고? 아부성이 농후하다.
구원에 급급해서 무조건 아멘만 연발할 게 아니라 더욱이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왜 인간은 저 강한자 하나님을 마음껏 의심해 보지 않는가 말이다.
새파랗게 젊은 한 미천을 가지고 가슴을 쫙 펴서 왜 하나님을 의심해
보는 뱃짱이 없는가 이다.
하나님은 성경전체를 통해 인간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죄가 있다고
벽력 같은 호통을 치셨다. 그러나 천착증을 가지고 성경을 깊이 파고
들어가보면 피조물 인간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그 죄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면 하나님이 본디 빛만의 하나님이었다면 우리도 빛으로만 지어졌을
터이므로 하나님을 모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디
빛의 하나님이자 동시에 흑암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에(창1:2),
그로부터 지음받은 우리가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뒤범벅이
음녀인 것이다.
음녀란 이 파트너(빛의 하나님)와 저 파트너(흑암의 하나님)를 넘나드는
섞인 자, 즉 바벨론을 뜻한다. 그러므로 계17장에서
우리를 일컬어 음녀요, 바벨론이라고 하면서 또한 “비밀” 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비밀” 이란 우리의 그 음녀성과 바벨성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에서 비밀이라고 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죄의 본질인 음녀성과 바벨성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멍청하게 하나님께 두들겨 맞고만 있다는 안스런 뜻에서
“비밀” 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 안스러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사야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52: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기성교단)이 죄를 범하므로써 (선악과를 범하므로써)
오늘날 자칭 메시야들인 적그리스도들에게 사로잡혀갔다고 지금까지 불 같은
호통을 치셨던 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왠일로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다” 고 안타까워 하시며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라고도 하시며 연민의 눈시울을 적시고 계신다.
인간은 무로부터 생겨난 피조물이므로 피조물의 본래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선도, 악도, 빛도, 흑암도, 대속도, 죄도, 모든 상대적인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아래와 같이 알려 주고 있다.
[사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렇게 모든 것은 창조주로부터 온 것이다. 인간은 티끌하나 검게 하거나
희게 할 수 없다. 인간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피조물 인간에게 있는 흑암이나 사망이나 병듦이나 죄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만이 그 같은 불행한 난제들을
해결하실 영광의 분이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아래와 같이 대화를 이끄셨다.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떤 병자를 데려와서
“이 사람의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라고 물었다.
이 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하시고
즉석에서 그 병자를 고쳐 주셨다.
이는 인간창조란 처음부터 완벽함이 아니고, 창조의 시작은 아주 미미하며
그 과정 또한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에 있으나 창조완성에서는 완전히
고침을 받게 됨을 뜻하여 병자를 고쳐주신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임을 보여주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죄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게 됨으로 말미암아 들어오게 된 것인데,
즉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오게 된것인데,
그 죄라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창조미완임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창조미완 중에는 생노병사가 불가피하고, 그 생노병사의 해법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완성에서만 있다는 뜻에서 그 병자는 하나님의 창조영광을
위하여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병자를 고쳐주시는 능력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신빙성이 없으나, 병자를 즉석에서 고쳐주신 그 상징성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은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면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본질적 죄란 결국 하나님의 본질적 죄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적 죄란 하나님이 아직 창조완성에 이르지 못한
창조미완임을 의미한다. 항상 평가란 상대적이므로 창조미완에서는
죄와 고난이라면
창조완성에서는 하나님(예수님)의 대속과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죄인이라고 몰아붙이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신 것은
그동안 말씀을 비유로만 주셨으나, 오늘날 하나님을 신령하게 알려주시는
진리의 성령이 올 때에 반드시 의무적으로 경청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의 뜻에서다.
오늘날 하나님을 비유가 아니고 신령하게 알려주실 때에, 경청의 의무를
준수하여 하나님의 창조공정들을 알게 되면 내 양심이 자유하게 되고
영생의 상급인 면류관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하나님을 비유가 아니고 신령하게 알려주시는 절호의 기회에
경청의 의무를 저버려서 하나님의 창조공정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소경으로 남아 있다면
그는 양심이 꺼끄러운 죄인이요, 영생의 상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