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어느 날
팔봉이와 윤정이를 만났다.
윤정이는 짧은 머리를 더욱 짧게 해서 더 보이시해 보인다.
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남자로 통한단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에서 윤은혜가 남장여자로 히트하더니 꼭 그 이미지가 연상된다.
팔봉이는 검게 그을러서 그런지 더 건강해보인다.
저녁을 먹고 2차로 동산호프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정의 그간의 이야기들과,
팔봉의 암장운영이야기...
새벽 1시 까지 맥주를 마시다가 헤어졌다.
지갑을 열어보니 3만 5천원 뿐이다.
팔봉과 윤정에게 돈이 없어 더 못 줘 미안해하며, 택시비에 보태쓰라고 하며 만원씩 집어주고 택시를 탔다.
기사가 깨워 일어나 눈을 비비고 바라 본 택시요금은 1만 3천원.
다행이다.
팔봉이는 변함없이 착하고 생활에 열심이고...
윤정도 변함없다.
두 달 전부터 암장에 나와 운동을 한단다.
나만 변하는가보다.
...
8월 어느 날.
윤정과 팔봉을 만났다.
작년 이 맘때 만났으니 일 년은 된 듯.
윤정은 늘 변함없는 외모와 옷차림으로 나타났고, 팔봉은 많이 그을린 모습이다.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교육 때문에 설악산에 일주일 정도 머물렀고, 암장회원들과의 암벽캠프도 이어졌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올 여름은 오죽 더웠는가 말이다.
나와 윤정에게 준다고 선물용 시계를 꺼낸다.
비싼 것은 아니라며 부담갖지 말라는 녀석의 수줍은 미소가 귀엽다.
다짜고짜 물어 본다.
"시험(검정고시) 어떻게 됐니?"
"아, 붙었지요. 넉넉하게...히히히"
"휴~ ... 축하한다. 인석아 ^^ "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곱창집으로 옮겼다.
윤정은 맥주를 마시고 팔봉은 사이다를
나는 그냥 물만 마신다.
이야기가 하드프리 등반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팔봉이가 윤정이가 등반했던 선운산의 루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누구는 '샌드월'을 완등하기 까지 3년이 걸렸고, 누구는 '업버젼'을 등반하기 까지 1년이 걸렸다.
팔봉은 매주 주말을 선운산에 가서 투자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좀 더 다양한 등반도 하고 싶고,
암장회원들에게 그런 등반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윤정은 업버젼(5.13d) 루트를 열 한 번의 시도끝에 끝냈단다.
몇 개월씩 한 루트에 매달려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마 자신은 벌써 포기했을 거란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는 답이 없다.
3년만에 끝냈던 세 판만에 끝냈던, 그건 자신의 등반관이고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다.
윤정은 하드프리 뿐 아니라 인수, 선인의 루트들을 좋아하고 승철.형진과 함께 한 '97년 그레이트 트랑고 원정에서 한국최초의 신루트를 개척했으며 매킨리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요세미티 엘캡에서도 거벽등반을 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국내외 여성 스포츠클라이밍의 최강자이기도 했다.
팔봉은 내가 있던 산악회에 들어와 암벽등반을 처음 배운 녀석이며 등반을 하는 행태가 윤정과 비슷하다.
나와 처음으로 알프스로 원정을 가서 몽블랑과 마터호른을 올랐고,
배핀 아일랜드 원정에서 한국 최초로 신루트 두 개를 개척 했으며 매킨리를 등정했고, 트랑고 네임리스타워에서 역시 신루트를 개척했다.
선운산 '4월의 혁명'(5.13c) 루트를 프로젝트 중이다.
두 녀석 다 걸어가는 뒷 모습이 비슷하다.
윤정은 아직도 사람들이 20대 말의 나이로 본단다.
그럴 법도 하다.
짧은 머리에 곱상한 외모 그리고 마른 몸에 화장을 전혀 하지않는 얼굴.
대부분의 여성 스포츠클라이머나 하드프리 등반가들이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전완근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몸무게 45kg 의 가냘픈 몸에, 힘주어 잡으면
부러질 것같은 팔목을 가지고 있다.
윤정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
자신보다 나이어린 교수들도 몇 명 있다는데...
한 번은 전공과목 시간에 스포츠클라이밍 체험이라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윤길수선배가 운영하는 애스트로맨 암장에 모였고,
강사의 시범등반도 보고, 한 번씩 따라해라고 시키면서 느낀 생각을 정리해서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교수님의 지시에 잠시 당황스러워하면서 어떡하면 좋겠냐는 질문을 내게 했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몸이 좋지 않은 나 때문에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지 못한 일행은 이른 시각인 11시경에 헤어졌다.
좀 더 자주 보자는 말과 함께...
아, 이번에는 두 녀석에게 택시비를 못 줬다.
2월 어느 날.
빙벽의 폭이 작게 얼었다고 팔봉이 소승폭을 바라보며 걷다가 중얼거렸다.
그런 팔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느닷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 팔봉아
- 네, 형
- 오래 살아라…그리고 우리 오래 살자…
내가 회갑연의 덕담같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 갑자기 형 무슨…
- 네 뒷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
형일이랑 준영이가 오버랩되서 말야.
스팬틱 원정대원 중에 너만 남았잖니,
안전하게 산행해서 오래 살자구.
벽에 똥칠할 때 까지 살자.
- 네, 형 그럴께요. 형도 같이 오래 살아요
하며 팔봉이가 어이없다는 듯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러게 말하며 낄낄거리며 우리는 천천히 소승폭 아래에 도착했다.
팔봉을 만나면 함께 순수해지고 함께 어려진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원색적인 표현을 자주 하고, 욕도 쉽게 한다. 그만큼 편하다.
부부가 오래 살면 나이차가 의미가 없어지듯이, 등반하는 사람은 자일을 묶을 때, 자일 파트너 간에 나이차는 의미가 없어진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양복을 입을 때와 등반복을 입을 때 많은 차이를 느낀다.
옷이 내 행동양식을 규정짓듯이, 등반복은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하고, 날 흥분시키고 젊게 만든다.
그로 인해 새로 만들어진 젊음은 파트너와 자일로 연결되어 교감, 소통된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NAVI)족이 ‘사헤일루’라고 하는, 촉수 끝을 서로 연결하여 모든 생명체와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고 교감하고 소통한다.
등반자와 등반자의 ‘사헤일루’는 바로 자일을 연결했을 때 이루어진다.
자일을 통해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교감하는 것이다.
팔봉이 선등으로 등반을 했던 한 시간 동안, 그리고 내가 등반을 한 한 시간.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서로에게 한 말이라고는 '완료'와 '출발' 단 두 마디였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등반을 했고, 깨지는 얼음파편과 내리는 눈만이 우리 곁에 함께 할 뿐이었다.
그와 난 이어진 자일을 통해 '사헤일루'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것도 10년의 시공을 돌아서 말이다.
소승폭에서 내려서 눈밭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틀즈가 노래한 Let It Be 는 직역하면 ‘그냥 내버려두라’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동사원형 ‘BE’가 뜻하는 것이 바로 '순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순리란 일종의 어울림 즉 하모니이니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양복입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내 모습보다, 설악산 언저리 어디쯤에 자리잡고 살면서 벗들과 어울리거나 산 속에 얹혀 사는
내 모습이 과연 순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리속에서 내 속의 영감과 열정을 끄집어 낸다면, 영화 '버닝'속 주인공 유아인과 달리 내가 쓰고자 하는 소설과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의 진정한 롤 모델은 장관이 아닌, 장관이 되기 전의 도종환 시인이고, 그가 썼던 '오두막 이야기' 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나비족이 '사헤일루'를 통해 모든 생명체와 교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Ngoc Lan - La Playa
안개낀밤의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