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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의 변용 원문보기 글쓴이: 원미산 김길주
금강산 기행
원제:金剛錄 < 기 행 문 >
정 엽 지음
조 면 희 번역
*.<역자주>금강산의 노정과 거기에 얽힌 전설을 자세하고 실감 있게 그리어 이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몰래 그 경치 속에 흡수되어 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요즈음 비로소 조금 열려있는 금강산을 3백 5십여 년 전의 기행문을 보면서 현재와 비교해 봄 직하기에 여기 실었습니다.
나는 지난해 부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하였더니 주상전하께서는 나의 청을 윤허하여 주시는 대신 고향인 무산(巫山, 강원도 양양지방) 군의 군수로 제수하여 주었다.
이것은 나에게 3 가지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첫째는 80 세 나는 노모를 한 지방의 군수로서 봉양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는 당시 조정의 관료들이 모두 화액(禍厄, 인목대비 폐비 사건)을 면치 못하였는데 나만이 산수가 아름다운 이곳에 와서 여유 있게 노닐면서 시끄러운 세상과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셋째는 그 동안 금강산을 한 번 가보려고 미루었지마는 한 번도 기회를 못 얻었는데 지금 느지막한 나이에
정엽(鄭曄):1563년(명종18)-1625년(인조3).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본관은 초계. 이이 성혼의 문인. 1583년(선조1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3년 황주 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 부사 서천 군수 역임. 광해군 즉위 초에 예조 참의 대사성 등 역임. 광해 4년 도승지로 경연에 자주 나감. 공조 참판 역임. 1617년(광해9) 폐모론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로 전출되었다가 1년 뒤에 사직함. 1623년 인조 반정후 대사성 동지 경연 원자 사부가 됨.
숙원을 이룰 수 있을 듯하여서이다. 그러나 이곳에 부임한 이후 공무에 얽매이고 집안의 우환에 시달리다 보니, 좀처럼 몸을 빼어 먼길을 떠날 여가가 없었다.
그럭저럭 1 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나만갑(羅萬甲)과 이상질(李尙質), 두 사위가 서울에서 나를 보러 왔다. 그리고 그들은 금강산을 가겠다고 여행 장비를 준비하였다. 내 비록 쇠약하고 늙은 나이지마는 역시 용기를 내어 참가하기로 작정하였다.
무오년(1617년) 윤4월 초1일(기미), 나는 서둘러 말안장에 올라타고 일행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낮에 낙산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대포 만호(大浦萬戶) 이준(李濬)이 나를 보러 왔다. 그와 이야기를 끝내고 저녁 무렵에 청초호(靑草湖)와 영랑호(永郞湖), 두 호수를 지나 청간정(淸澗亭)에 들러 잠을 잤다. 그 지방 군수 조헌(趙碹)이 좌수 최덕립(崔德立)을 보내어 우리 일행을 대접하여 주었다. 우리 일행은 나군.이군, 두 사위와 손자 원(援)과 낙산사 주지승인 원우(元祐)이었으며 그 나머지는 천한 종들이었므로 다 기록하지 않는다.
초2일, 아침 식사를 하고 10 리쯤 가니 산 자락 하나가 호수 속에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이름하여 능허대(凌虛臺)라고 하였다. 능허대 앞에 여러 개의 바윗돌이 쌓여 작은 섬을 이룬 곳이 있는데 나 ․ 이(羅李) 두 사위는 서둘러 그곳에 올라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 호수의 둘레는 10 리 가량 되는 데 우리는 5 리쯤을 걸어서 돌아가 보았다. 푸른 산이 이 호수의 3 면에 둘러 있고, 동쪽에는 모래 언덕으로서 바다와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 모래 언덕에는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그 숲 속으로 나있었다. 나는 가마에서 내려 나 ․ 이 두 사람과 함께 숲 속을 수십 보쯤 들어가니, 산기슭이 누대처럼 평평하게 생긴 곳이 있다. 사람 십여 명쯤 앉을 만한 공간이었다. 흰모래와 서늘한 소나무 그림자에 속세의 티끌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을 듯하였다. 그리고 이 산 기슭에서 내려다보이는 암석들도 기기괴괴하여 한참 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 드디어 걸음을 옮겨 그곳을 빠져 나오니 마치 아름다운 미인이라도 이별하고 떠나가는 듯한 심정이었다.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일컫는 선유담(仙遊潭)이라는 곳이다. 과연 이름만 헛되게 전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그곳 군청에 들르니 군수가 매우 정성스럽게 대접하여 주었다. 점심을 먹고 조그마한 누대에 올랐다. 누대 앞에는 두어 길쯤 되는 오동나무가 짙은 그늘을 지우고 서 있다. 이 나무가 옛날 이 고을의 군수로 있던 최립(崔岦)이 심었다고 그곳 사람들이 일러주었다. 최립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인데 이곳에 있는 동안 어찌하여 한편의 문장도 이 고을 청사의 벽에 걸어 두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군청의 서쪽 문을 빠져 나오자 바람이 몹시 불었다. 모래와 먼지가 보얗게 일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거륜천(巨淪川)에 이르러 사잇길로 화진(花津)을 찾아 들어갔다. 호수가 언덕과 골짜기에 가득 차서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일대에는 소나무 숲이 바다 어귀를 가로막았는데 그 소나무는 몇천 그루나 되는지 모르겠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곳에 읍(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용이 나타나서 읍을 물바다로 만들어 민가가 다 물속에 파묻혀 버렸단다. 그리하여 지금도 하늘이 맑
최립:선조 때의 문장가 그의 문명은 중국에 널리 알려짐. 호는 간이(簡易). 또는 동고(東皐). 오산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석봉 한호(韓濩)의 글씨와 최립의 문장을 일컬어 송도 3절이라고 하였음.
고 물결이 잔잔하여지면 물속에 사람들의 집과 담장들이 보인다고 하였다. 해괴한 이야기이다.
저 호수 가에 두서너 채의 집이 마을을 이루고 서있다. 왠지 외로워 보였다. 그 마을로부터 야윈 얼굴에 머리가 흰 늙은이 한 사람이 나왔다. 이전(李筌)이라고 자기의 성명을 소개하였다. 나이는 79 살인데 총명한 재주와 정력은 조금도 노쇠하여지지 않았다. 이 역시 사는 환경에 따라 이루어진 기질 때문인가? 저녁 햇볕이 구름 사이에 들락날락 하며 띄음띄음 오는 비가 옷을 적신다. 술잔을 들고 시를 읊조리다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무렵에 비를 맞으며 열산(烈山)에 들어가니 오래된 관사(館舍)는 을씨년스러웠다. 벽 위에는 신점(申點)이 남겨놓은 시가 한 수 걸려 있을 뿐이다. 이곳은 바다와 조금 떨어져 있고 산과 시내가 어울어져 있어서 민가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나는 두 사위에게 일렀다.
“만일 물결만 너무 험하지 않다면 이곳이 살 만하겠다.”
나군이 말하였다.
“인간 세상과 너무 단절되어 나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알 수가 없을 터이니, 그야말로 숨어서 사는 사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잡담을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중 원우는 청원향(淸遠香)을 피워놓고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내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하였다.
초3일,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모래 언덕길을 걸어갔다. 곳곳이 맑은 물이 갇혀 있는 호수가 있고 모래 언덕에 기대어 마을이 있다. 모두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들이다. 푸른 산기슭이 바다로 달려 가다가 우뚝 서 있고 울창한 소나무들이 우거진 곳으로는 무송대(茂松臺)와 송도(松島) 등이 있는데 그밖에도 이런 곳이 하도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나군과 이군 같이 좋은 경치를 빼어놓지 않고 다 보고 싶어하는 사람도 그 많은 곳을 다 들러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오전에 명파역(明波驛)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는 풀로 엮어 만든 정자 한 간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말을 쉬게 한 뒤에 대강역(大康驛)으로 달려갔다. 골짜기가 깊고 고요한데, 역말 먹이는 사람들의 집 10여 호가 서로 울타리를 맞댄 채 살고 있었다.
양양(襄陽)에 사는 무인(武人) 강효선(姜孝先)이 북도(北道,함경북도)에서 돌아왔는데 오성(鰲城)의 회답 편지를 가져왔다. 편지 봉투를 열자 그 늙은이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 그 동안 이별한 회포가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이 늙은이가 정승의 지위에 나아갔다가 물러났다가 한 지 수십 년인데, 지난 계축년(1613년, 광해5)에 영창 대군 폐위 사건 당시 탄핵을 받아 교외에 쫓겨나 있더니, 또 지난겨울에 자전(慈殿,인목대비)의 폐위 사건이 일어나자 옛날 순(舜)임금의 예를 들어 반대하였다가 또 3 사(三司,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탄핵에 의하여, 역적을 변호한 혐의를 받고 북청으로 귀양가 있었던 것이다.
식사를 끝낸 뒤에 말을 타고 큰 고개를 넘어가니, 돌로 난 길이 험하고 울퉁불퉁하여 걷기에 힘이 들었다. 고개 아래에는, 쇠붙이를 달구어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을 업으로 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곳에는 땅도 비옥하여 보였다. 또 한 고개를 넘어 큰 시내를 건너니 여기가 백천교(百川橋) 하
오성:본명은 이항복(李恒福).호는 백사(白沙). 선조때 문신. 임난 당시 도원수. 도체찰사. 좌우의정. 영의정 등 역임. 오성부원군에 봉하여짐.
류이었다. 흰 조약돌과 맑은 물이 이미 금강산의 기운임을 느끼게 하였다. 산들은 빙 둘러서 사방으로 막혔고 나무들은 빽빽이 들어서서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이 숙고촌(禾+京庫村, 양식을 저장하는 곳)이었다. 금강산에서 사는 중들이 마을에 내려와서 양식을 얻어다가 이 마을에 와서 저장하여 둔다고 하였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씩 여기서 방아에 찧어 가지고 절로 지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곧 이 곳은 금강산에 있는 모든 절의 밥줄이 되는 지점이었다. 두서너 명의 중이 이 곳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시냇물을 끌어 들여 방아를 찧게 하니 이곳의 방아는 밤낮없이 찧어졌으며 사람의 힘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들이지 않았다. 이 물방아를 만든 자는 과연 교묘한 지혜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저녁에 두 사위와 함께 시냇가를 거닐면서 산과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곳이 열 산이나 대강 역에 비교하여 볼 때에 더 훌륭하구나. 서울 근처에 만일 이러한 곳이 있다면 거기에 가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걸.”
두 사위가 대답하였다.
“저희가 그 동안 기문(記文) 같은 것을 많이 보았으나, 서울 주변에는 이와 같이 좋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봉두(鳳頭, 여주강에 있는 수몽의 정자 이름)는 강산이 매우 아름다우니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빙부님의 연세로 보아 이제는 물러나 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시기를 잃지 마십시오.”
나는 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것을 느끼었다. 저녁에는 절 방을 빌려 잤다.
초4일, 산골짜기를 향하여 점점 깊이 들어가니 나무숲이 빽빽이 우거져서 햇볕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소리만 요란스럽게 골짜기에 울려 퍼지었다. 이렇게 10 리쯤 더 가자니 산뜻한 누각 하나가 개울을 가로 건너 서 있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거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그 누각에 올라 누각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시냇물은 솔숲 속에서 급하게 흘러 내려와서 여기에 모여 못을 이루었다. 그 깊이가 아마 두 길 정도는 될 듯싶었다. 그러나 그 물이 하도 깨끗하여 물밑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거기에는 떠돌아다니는 물고기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다. 시내 좌우로는 흰 돌들이 삐죽삐죽 솟아나 있으며 산봉우리가 물에 비치어 나의 몸은 마치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중, 수십 명이 나를 맞이하러 내려 왔다. 모두 푸른 눈에 여윈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이미 속된 모습들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말을 몰고 갈 수가 없어서 옷과 양식들을 나누어 아랫사람들에게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군․이군 그리고 손자 원과 함께 가마에 올라탔다. 물과 바위, 나무와 숲들이 곳곳마다 아름다웠다. 언덕을 끼고 돌아서 이대(尼臺)와 중대(中臺) 그리고 상대(上臺)를 지나, 오던 길을 돌아본즉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바다가 끝이 없이 넓어서, 주위에 산들은 모두들 조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저 바다의 동쪽 끝은 아득하고 희미하게 보여서 그것이 하늘인가 물인가 아니면 구름인가 별세계인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낮쯤에 가랑비가 갑자기 먼지를 씻고 지나갔다. 그런 다음에는 계속하여 비가 내리다가 개었다가 하였다. 어쩌면 산신령이 우리들의 옷깃에 가득히 묻은 더러운 티끌을 씻어주려고 그러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가마를 멘 중이 땀을 비오듯 흘렸다. 필시 내 몸이 비대하여, 너무 무거워서 그런 모양이다. 내가 편하자고 남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고개를 넘어 내려 가는데 바위들과 골짜기는 가면 갈수록 기이하게 생겼다. 동청(冬靑, 사철나무)․회백(檜栢)․측백(側栢)․단풍나무 등이 가지를 흔들며 서 있고 목련(木蓮)과 철쭉들은 꽃을 활짝 피워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개울물은 모였다가 꺾였다가 하면서 뱀처럼 꾸불꾸불 흘러 내려 오는데, 그것이 바위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쇠나 돌로 만든 타악기나 줄을 타는 현악기에서 나는 소리 같다. 이 산에 가득한 소리와 색깔이 어쩌면 사람을 이렇게도 즐겁게 하는지, 나의 눈과 귀는 다른 것을 보고들을 겨를이 없다.
끊어진 언덕길에는 나무 막대기들을 걸쳐놓아 사람이 겨우 지나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나는 도롱이를 입고 가마에서 내린 채 어렵게 걸어갔다. 만일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한 용면(龍眠)을 시키어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그림이 될 것 같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골짜기에 들어가서 바라보니 붉은 서까래 끝이 온 골짜기에 휘황하게 비친다. 여기가 유점사(楡岾寺)였다. 개울을 건너 산영루(山影樓)에 올라가니 누 아래 물소리가 요란하다. 산들이 사방을 둘러쌌는데 구름이 걷혔다가 끼었다가 한다. 이러한 경치를 바라보며 나도 몰래 진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운취당(雲翠堂)에 숙소를 정하였다. 앉아 있는 구둘 목이 매우 따뜻하다. 창문을 여니 바깥 공기가 서늘하였다. 늙은 잣나무 수십 그루가 뜰 아래에 버티고 서 있고 절
용면(龍眠):송(宋)나라 이공린(李公麟)의 호. 그림에 능하고, 시에 능함.
마당은 널찍하게 터져 있다. 주지승(住持僧)이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하였다. 소찬(素饌,고기가 없는 음식)이지만 모두 진기한 음식들이었다. 목탁소리 가 안 들려도 속세의 육미(肉味)를 잊어버리겠다.
나는 잠시 쉰 뒤에 법당을 돌아보았다. 앉아 있는 금불탑(金佛榻) 위에 붉고 푸른색이 사방의 벽을 밝게 비추고 있으며, 천축산(天竺山) 모양의 향나무 조각은 부처님 뒤에 배경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마루 위에는 비단 자리를 깔아서 찬란한 빛이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전후 좌우로 겹겹이 지은 집들의 구조와 웅장함이 우리 나라의 여러 절 가운데서 제일 훌륭해 보였다. 다가오는 초7일, 이절에서 무차회(無遮會)를 거행하기 위하여 완공한 건물들이란다. 중들의 풍속에는 이날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불당에 모여든다고 한다.
이 절은 신라 시대에 창건하여 지금까지 천여 년을 지나는 동안, 우리 세조 때에 불이 나서 다시 세웠고, 또 만역 을미년(1594년, 선조28)에 불이 났으며, 갑인년(1614년, 광해6)에 불이 났으니, 하늘에서 이렇게 여러 번 재앙을 내리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징조를 보이려는 것일 터인데, 이것을 숭배하는 신앙은 어찌하여 이리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이렇게 다시 건축한 비용도 모두 나라의 내탕금으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여기에 부도(浮屠,돌탑)를 세우기 위하여 숙고촌에서 돌을 채취하여 구령(狗嶺) 같은 험한 고개를 넘어 40여 리를 옮겨왔다고 하니 도대체 귀신의 힘을 빌려 운반한 것인가? 거기에 드는 비용은 또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나라에서 국운이 오래 번창하도록 비는 방법
무차회:신분의 귀천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한 입장에서 법회를 열어 부처님의 자비를 베푸는 모임.
이 과연 이것뿐인가? 저녁을 먹고 명적암(明寂菴)에 올라갔다. 암자에 있는 중 응상(應祥)이라는 사람은 휴정 사(休靜師, 휴정대사)에게 공부를 배웠다고 하는데 경문(經文)의 뜻을 그런대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석가모니 이후에 전하여 내려온 불법을 매우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나는 그와 함께 심성(心性)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보았는데 그의 이야기에는 무엇인가 나를 깨우치게 하는 바가 있었다. 어둠이 들 무렵에 운취당으로 돌아오니 노승인 법견(法堅)이 운수암(雲水菴)에서 나를 보러 왔다. 응상도 역시 내려 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불교의 윤회설에 대한 이론과 거기에 대한 반론을 폈다. 곧 유교와 불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논란하는 것은 그래도 속인들이 사랑방에 앉아서 쓸 데 없는 잡담이나 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였다.
유점사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내려온다.
옛날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고 난 뒤에 그를 추종하는 문도가 석가모니의 상(像)을 주조(鑄造)하여 가지고 종(鐘) 안에 넣은 뒤에 바다에 띄워 보내었더니, 그 종은 배처럼 떠서 여러 나라를 경유하여 마침내 이곳 고성군의 나룻가에 도착하였다. 이 때가 신라 남해왕 원년(기원후 3년)의 일이었다. 군수 노춘(盧椿)이 그 소식을 듣고 그곳에 달려오니 종이 정박한 자취가 뚜렷이 나타났을 뿐아니라 그 종은 무엇에 끌려간 것처럼 땅바닥에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자취를 밟아 고개를 넘어 골짜기로 들어가니 그 종은 느릅나무「楡樹」가지에 걸려 있었다. 노춘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그 신기스러운 사실을 놀랍게 생각하여 어가를 몰고 직접 현장에 와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그 종이 걸려 있던 나무의 이름을 따서 유점사(楡岾寺)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본래 물이 없었는데 어느 날 까마귀 떼가 모여들어 땅을 파내더니, 그곳에 갑자기 샘물이 펑펑 솟아올랐다. 이곳 샘물의 이름을 오탁정(烏啄井)이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게방(憩房)․문수촌(文殊村)․ 이유암(尼遊巖)․구령(狗嶺)․노춘정(盧椿井)․장항(獐項)․환희령(歡喜嶺) 등의 이름 등이 있는데, 모두 노춘이 종을 찾아오던 설화와 관계되는 것들이었다. 법희거사(法喜居士)가 그 명칭에 대한 유래를 자못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으나 대부분 허망한 것들이어서 전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초5일, 절에서 나와 약 수 리(數里)쯤 가니 돌을 다듬어 세운 탑이 있었다. 여기에는 휴정(休靜)과 그의 제자 자휴(自休)의 사리(舍利)가 갈무려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면, 저 휴정은 한 사람의 중인데 능히 그 도(道)를 가지고 한 시대를 감동시켜 그의 문하에서 훌륭한 종사(宗師)나 법사(法師)들이 많이 나왔고 또 그들로 하여금 법통을 잇도록 하였으니, 한평생 동안 성취한 것도 없이 풀이나 나무나 마찬가지로 썩어 없어지는 우리 유자(儒者)들과 비교하여 볼 때에 과연 어떠한가?
강연(舡淵)은 바위가 마치 배처럼 생겼다. 흰무지게 모양으로 흘러 내려오던 시냇물은 이 우묵한 바위에 담기는데 너무나 맑고 깊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 물은 조금 더 내려가다가 평평하여지고 또 더 내려가서는 평평하여져서 층을 이루며 흘렀다. 그 개울을 건너 오솔길로 들어가니 조계암(曺溪菴)이 있었다. 절방은 깨끗하고 뜰은 넓었다. 거기에는 노승 두서넛이 거주하고 있었다. 암자 오른 편에 있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다시 험한 언덕을 올라 하견성암(下見性菴)에 들어갔다. 역시 작은 암자였다. 여기서 잠깐 쉬고 큰 재를 넘으니 지대가 높은 탓으로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산허리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길이 험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매우 어려웠다. 불정대(佛頂臺)에 이르니 천길 절벽이 앞을 막았다. 큰 바윗덩어리가 앞에 높이 솟아 있는데 나무를 가로 걸쳐놓아 거기로 건너가도록 하여 놓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낭떠러지가 몇천 길인지 모르겠다. 이 바윗돌은 마치 손바닥을 펴놓은 것 같아 그 위에 사람이 수십 명쯤 앉을 만하였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늘에 올라가서 땅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북쪽으로 구정봉(九井峯)이 하늘에 맞닿을 듯이 서 있다. 산봉우리를 따라 내려가니 만길 절벽에 비단을 걸어 놓은 듯한 것이 십이폭(十二瀑)이다. 그 곁에 백전암(栢田菴)과 적멸암이 있고 그 아래 송림굴(松林窟)이 있다. 또 그 아래에는 원통암(圓通菴)이 있다. 사위인 나군과 이군은 위험한 산길을 평지처럼 잘도 오르내린다. 그들은 어느새 저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손자 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기 몸을 중히 여기는 자는 마루 끝에도 걸터앉지 않는단다. 그런데 그까짓 경치를 보려고 위험한 낭떠러지에 함부로 올라가는 것은 효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다. 너는 절대로 저 두 사람의 고모부를 따라가지 말아라.”
나는 그 바위를 쳐다보기만 하여도 눈이 어지러웠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여, 가마도 타고 걷기도 하며 습속을 헤쳐 나왔다. 영은암(靈隱菴)을 향하여 가는데 산길이 험하고 수목이 우거져 있어서 걸음 걷기가 매우 어려웠다. 견성암(見性菴)을 올라가는 것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견여(肩輿, 가마)에 앉아 가는 데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견여를 멘 자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상영대(上靈臺)에서 잠깐 쉬고 영은암에 이르러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웠다. 어느새 나군․이군 두 사위는 만경대(萬景臺)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기력이 딸려 한발자국도 더 옮겨 놓을 수 없을 지경이다. 젊을 때 같으면 나도 저런 봉우리쯤 마음대로 올라 다녔었는데 말이다.
유점사에서 불정대까지 15 리이고 불정대에서 영은암까지 20 리인데 영은암에서 유점사까지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하기야 빤히 보이는 거리이지마는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함부로 오르내릴 수는 없을 듯하다. 여기서 산영루가 바로 내려다보인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중 원우가 나를 이끌고 서대(西臺)에 올라갔다. 바윗돌이 펑퍼짐하여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나는 여기에 앉아서 만경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뾰족하게 솟은 것이 마치 쇠를 깎아 세운 듯하다. 그밖에 백마봉과 향로봉 등은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마치 개미집 같고 벌레 구멍 같은 여러 산들은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색깔을 하고 있으며, 또한 올록볼록하게 들어가고 튀어나오고 한 것이 일목요연하게 눈 안에 들어온다. 큰 시냇물이 상완동(上浣洞)에서 갈라져서 흘러 내려가는데 이것이 강연(舡淵)과 산영루로 흐르는 물의 연원이 된다. 그리고 벼랑의 바위굴을 이용하여 암자를 만든 곳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운수암(雲水菴)이 가장 크고 널찍하였으며 거기에 법견(法堅)이 거처하고 있었다.
영은암의 구조는 매우 정교하고 또 사치스러워서 붉고 푸르게 칠한 단청이 기둥과 서까래에 빛났다. 유점사의 주지승이 우리 일행을 뒤따라 와서 나와 함께 잤다. 그에게 풍기는 인정은 자못 은근하고 두터웠다. 그의 법명은 민행(敏行)이었다.
초6일, 견여를 멜 중들이 아침에 유점사로부터 올라 와서 우리는 길을 떠났다. 오늘 내려갈 산길은 바로 어제 올라오던 곳이었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올 때보다는 좀 쉽지마는 두렵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산(內山)을 향하여 들어가는데 숲속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비탈진 골짜기를 들어가서 내수점(內水岾)에 이르니 지세가 조금 평탄하였다. 사신(使臣)들이 휴식하던 곳이란다. 승상(繩床,휴대용 걸상)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돌산이 사방으로 둘러쌌는데 길은 북쪽 고개로 나있었다. 그 고개는 세 겹으로 되어 있고 그 고개들의 이름은 모두 물수「水」자로 되어 있다. 세 번째 고개에 올라가니 장안사의 중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가 적어서 유점사의 중들로 하여금 그대로 견여를 메게 하였더니 그들은 매우 불만스러워하였다. 지난 을사년(1605년, 선조38?)에 일어난 수재(水災) 때문에 산등성이와 골짜기가 모두 바뀌었고 바윗돌들은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서 산밑으로 난 옛길을 막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 돌들이 산행을 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막으니 견여를 멘 자들의 괴로움은 더구나 심하였다. 그들은 오랜 산행으로 발이 부릅트고 다리가 아파서 절름거리었지마는 나는 끝내 위험을 무릅쓰고 앉아 있었다. 중들은 앞뒤 좌우에서 밀고 당기고 하면서 간신히 어려운 길을 빠져나갔다.
생각하여 보면 이 경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그저 눈을 한번 즐겁게 하는 것뿐인데,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내 몸을 이렇게 위태로운 지경에 끌고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견여를 메고 가는 자들에게 너무나 괴로움을 준 것이 또한 미안한 일이었다. 쇠약한 이 늙은 몸으로 이러한 산행을 감행한 것을 나는 은근히 후회하였다. 골짜기를 반쯤 내려와서 그 동안 지나온 곳을 쳐다보니 내 몸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것 같다. 작은 폭포가 개울에 고여 있다. 이곳이 성담(成潭)이란다. 흰 돌들이 물밑에 쫙 깔려 있어서, 물가에 앉아 보니 더욱 마음에 끌린다. 위험을 무릅쓰고 구경만을 좋아하게 된 것을 후회하였지마는, 이곳을 보며 나도 몰래 즐거운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산과 물도 사람을 홀리게 하는 소리와 색을 가져 있기 때문에 한번 빠져들면 헤어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어진 자나 지혜로운 자만이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른 것인가?
절벽 사이에 있는 얼음과 눈은 아직까지 덜 녹았는데 두견화가 이제 막 피어나고 있었다. 적목(赤木, 이깔나무)과 만향(蔓香)이 산과 돌들을 덮어서 무성하게 자랐다. 그 푸른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따라 흩날리며 이리저리 쏠리어 산길에 깔렸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밟고 가는 것들은 모두 산아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꽃이오 풀들이었다. 옥으로 깎아 만든 듯한 저 산봉우리들은 마치 여러 신선들이 늘어 서 있는 것 같다. 그 중에 높고 우뚝하게 서 있는 봉우리들은 비로봉(毘盧峯)이고, 일출봉이며, 월출봉이었다. 만일 저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본다면 골짜기로 흐르는 물이나 우뚝우뚝 솟은 산들과 함께 만가지 형태들이 거의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터이니, 우리 부자「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천하가 적다고 한 의도를 천년이 지난 오늘날 와서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나의 쇠약한 힘은 끝내 그곳을 올라가 보지 못하겠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래! 결국 저기 있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못 가보고 만다는 말인가?
개울 가까이에 암자가 하나 있다. 붉은 문에 여러 가지 채색을 한집이지마는, 여기에는 중이 없고 다만 불상(佛像)만 방안에 덩그렇게 안치되어 있었다. 여기가 묘길상(妙吉祥)이었다. 이 암자에 들러서 점심을 먹은 뒤에 출발하였다. 돌들은 더욱 희게 보이고 물은 점점 더 맑아 보였다. 약사봉(若獅峯)밑에 있는 바위에는 큰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고려말의 중 나옹(懶翁)이 새긴 것이라고 하였다. 수 리쯤 더 가서 조그마한 개울을 따라 들어가니 불지암(佛智菴)이 있다. 백운봉 밑이었다. 그 앞에 폭포가 있다. 혈동봉(穴洞峯)에서 날아 내리는 것이었다. 봉우리 위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서 안팎으로 터져 있었다. 불지암에서 수리쯤 더 가니 마가연(摩訶衍)이었다. 지면이 딴 암자에 비하여 조금 평평하였다. 중향성이 그 뒤에 우뚝 솟았고, 도솔담무갈(兜率曇無竭)이 그 앞에 늘어서 있다. 오른 쪽의 동구를 막고 우뚝 선 것은 대․소 향로봉이고, 뜰 가에서 가지를 서로 부딪히며 무성하게 자란 것은 잣나무와 회나무였다. 그 나무들 중에 이상하게 생긴 나무 하나가 있다. 등걸은 소나무 같고 잎은 측백잎과 비슷한데 그보다 좀 가늘었다. 중에게 물으니 계수(桂樹)나무란다. 잎과 나무 껍질을 베껴서 씹어보니 계수 나무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이 어찌 이 나무뿐이겠는가? 그 잎사귀는 봄에 피었다가 가을에 시들어 떨어진다고 하니 이는 소나무나 잣나무의 지조만도 못한 것이다.
뜰 안에 조그마한 단(壇)이 무너져 있다. 광묘(光廟, 세조)께서 오셨을 때에 세웠다고 한다. 나는 그 유적(遺跡)을 어루만지며 경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그 당시 이렇게 위험한 곳에 행차를 하시는 임금님을 간쟁으로 막지 못한 신하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그 행차를 끝까지 막을 수 있는 올바른 신하는 이미 국록을 먹지 못하고 다 물러났기 때문일까? 섬돌 밑에는 작약 두어 무더기와 건련(乾蓮, 옥잠화) 네댓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건련의 잎은 소반만큼씩 크게 자랐다. 이것은 7월경에 흰 꽃이 핀다고 하는데 역시 신선세계의 꽃이었다.
회양태수(淮陽太守) 이숙명(李叔命) 공이 수의(繡衣, 어사)를 마중하기 위하여 표훈사에 머무르다가, 나를 찾아 이곳에 와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여 주었다. 그런데 중 상현(尙玄)은 솔잎만 먹고 이곳에서 4년 동안을 혼자 살면서 독경하고 예불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니, 나 같은 게으른 늙은이에게 무언가 깨우침을 준다. 오늘날 우리 사대부 가운데 이 중과 같이 성심껏 도를 닦는 자가 있을까? 나는 여기에 그 사람의 사실을 기록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교훈을 삼게 하려고 한다.
초7일, 중들이 모이기를 기다려 가마를 타고 골짜기 길로 향하였다. 골짜기는 모두 반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침상처럼 생긴 것, 널찍한 마루같이 생긴 것, 방과 마루를 경계 지운 문지방같이 생긴 것, 이 모든 것들이 옥이나 눈의 빛깔처럼 희고 깨끗하였다. 흐르는 개울물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폭포이고, 고이면 못을 이루는데, 이렇게 된 것이 10층이나 되며, 그것들은 층층이 모두 딴 이름으로 불려져 내려온다. 곧 화룡(火龍)․선(船, 배)․응벽(凝碧)․벽하(碧霞)․귀(龜, 거북)․청유리(靑琉璃)․황유리(黃琉璃)․진주(眞珠, 구슬)․청룡․흑룡 등이 그 이름이었다. 용이니 유리니 한 것은 그 빛깔을 따서 붙인 것이고, 배니 거북이니 구슬이니 한 것은 그 모양을 본떠 지은 이름들이다. 이 폭포들 중에 높은 것은 두어 길쯤 되고, 낮은 것은 예닐곱 자쯤 되었는데, 그 중에 진주 폭포가 가장 높았다. 그리하여 거기서 덜어지며 흩날리는 물방울이 마치 만 섬이나 되는 진주 구슬을 쏟아 붓는 것 같았다.
개울을 따라 내려오다가 개울가에 앉아 쉬었다. 산봉우리의 허리에 암자가 보이고 그 암자는 바위를 의지하여 지어 놓았는데 바위 밖으로 나온 기둥과 도리들은 수십 길[丈]쯤 되는 구리 기둥으로 아래에서부터 받쳐 놓았다. 그 암자의 선명한 채색이 멀리 보니 마치 신기루(蜃氣樓)와 같다. 돌길이 층계를 이루며 암자 쪽을 향하여 나 있는데 나는 그 길을 따라 반쯤 올라가다가 힘이 딸리어 포기하고 말았다. 나․이 두 사위는 거기로 올라갔다. 나는 쳐다보기만 하여도 눈앞이 어지러웠다.
우리 일행은 거기에서 나와 쉬며 가며 경치를 구경하였다. 보는 것마다 새롭고 듣는 것마다 기이하여,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주변의 경치에 도취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 팔도에서 지체 높고 호걸스러운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고 하지 않고 양식을 싸고 신발을 준비하여, 수없이 이곳을 찾아왔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경치들을 하나라도 빼어 놓고 못 볼까봐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오죽하면 저 중국 사람들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이 금강산을 한번 구경하기를 소원으로 여겼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광묘께서는 한 나라 임금의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신 것을 보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만폭동을 내려오니 돌 위에 ‘봉래 풍악 원화 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자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듯이 힘찬 모양을 하였는데, 자획은 조금도 일그러진 데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양사언(楊士彦, 선조때 학자)의 필적이었다. 이분의 풍류와 문장은 한 시대를 풍미하였는데 일찍이 회양 태수가 되기를 자청하여 늘 이곳을 왕래하였단다. 남녀(藍輿, 가마)를 타고 경치를 구경하게 된 것이 실로 이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란다.
푸른 절벽 위에 학소(鶴巢, 학의 둥지)가 있다. 여기가 금강대이었다. 붉은 볏에 흰 깃을 가진 그 학은 어디로 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옛날의 어느 신선과 같이 그 학의 등에 올라앉아 저 창공을 훨훨 날아 보고 싶다.
우리는 돌산에 오래도록 앉아서 각각 한 수씩의 절구를 지어 읊고 그 글을 바위 사이에 새기게 한 뒤에 끝에 성명을 새기고, 그 새긴 틈에 붉은 색을 칠하도록 하였다. 어쩌면 천년 뒤에도 삼일포의 유적같이 없어지지 않아서, 이곳을 지나는 자들이 그것을 보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한탄하기를, 오늘날 우리가 여기서 하듯이 할지 모를 일이다.
은계 독우(銀溪督郵) 김경직(金敬直)이 청년 선비 5,6 명을 데리고 장안사로부터 우리의 행로를 탐문하여 찾아왔다. 아무도 없는 골짜기에 우리를 찾아주는 지팡이 소리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도록 반가웠다.
오후에 김공은 마가연으로 떠나고 나는 표훈사로 내려가니, 회양 태수가 맞이하여 주었다. 우리가 법당에 앉자, 절에서 연포탕(軟泡湯, 두부와 무를 넣은 된장국)을 끓여와서 줄인 배를 채웠다. 이 절은 거찰(巨刹)인데, 지난 을사년(1605년, 선조38?)의 홍수에 반쯤은 떠내려 간 것을 새로 수축한 것이었다. 모든 절의 법당에는 부처가 문 쪽을 향하여 안치되어 있는 것이 상례인데, 이 절은 특이하게도 동쪽을 향하여 안치하여 놓았다.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중이 하는 대답이 너무나 황당하고 괴이하여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저녁 무렵에 정양사(正陽寺)로 올라가는데 길은 꾸부러지며 산을 감돌아 나 있었다. 단풍나무 숲이 하도 우거져서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배꽃이 눈처럼 희게 피었는데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꽃향기가 콧속에 스며들었다. 비로소 꽃들도 지대의 높낮이에 따라 늦게 피고 일찍 피는 것을 깨닫겠다.
천일대(天一臺)에 오르니 만이천봉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체 눈앞에 늘어섰다. 그야말로 기기괴괴한 형상들이 남김없이 내려다보인다. 층층이 쌓여 있고 첩첩이 겹쳐 있는 저 산봉우리들은, 먼 것과 가까운 것. 큰 것과 작은 것. 놓은 것과 낮은 것. 뾰쪽한 것과 둥근 것. 달리는 듯한 것과 머뭇거리는 듯한 것. 푸른 것과 흰 것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킬 만한 거리에서 교묘하게 어울려 있었다. 이게 바로 여러 개의 아름다움이 조화된 것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바 아름다움의 집대성이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선문(禪門, 불교)에서 말하는 바, 하루아침에 깨달으니 모든 것이 활연대퐁(豁然大通)하였다고 하는 경지가 바로 이것일까? 그러나 직접 구석구석 있는 경치를 두루 돌아보지 않고 갑자기 여기에 와서 바라본다면 그 안팎에 숨어 있는 자세한 내용을 어찌 다 감상할 수 있겠는가?
헐성루(歇星樓)에 올라가니 바라보이는 경치가 천일대에서 보다 더 나았다. 밤에는 찬 기운이 스며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절 뒤에는 나옹화상의 탑이 서 있고 육면각(六面閣)이 법당 앞에 있다. 이렇게 큰 명찰(名刹)을 늙은 중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근년에 나라에서 시키는 부역이 너무 많아서, 중들도 한군데 편안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산속의 암자들은 거의 비어있었다. 이와같이 우리 백성들 중에도 집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떠나는 이가 많으니, 열 집에 아홉집은 비어 있는 실정임을 어찌 참아 말하겠는가? 나도 이 늙은 나이에 몇 말의 곡식을 국록으로 타 먹는 관리가 되어, 물러날 줄 모르고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아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초8일, 등나무 덩굴을 붙잡고 개심대(開心臺)에 오르니 여기가 이 산봉우리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정양사에서 금강산을 내려다보는 것만큼 전망이 좋지는 않았다. 헐성루로 돌아오니 매우 피로하였다. 노승이 나옹화상의 유물인 옷과 띠 그리고 옥주(玉麈,지휘봉같이 생긴 막대기)를 끌어내어 보여주었다. 마치 어제까지 사용하던 물건과 같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또한 나옹화상의 사리(舍利)는 작은 구슬같이 생겼는데 푸른 빛깔이 돌았다. 그는 그 사리를 금은으로 된 그릇에 담아 비단으로 몇백 겹 싸서 간직하고 있었다. 나옹은 우리 나라의 고승(高僧)이었다. 그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죽었는데, 이 절에도 그가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 사리와 의발(衣鉢)를 나누어 갈무리어 둔 것이라고 하였다.
점심 식사 후 장안사로 향하는데 깊은 골짜기로 난 길이 매우 험하고 길가에는 천 길 잣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골짜기를 벗어나니 명운담(鳴韻潭)이었다. 그곳의 아름다움도 만폭동에 뒤지지 않을 듯싶었다. 그 못의 오른 편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절벽이고, 왼 편에는 바윗돌 사이로 작은 길이 있는데 한 발자국만 아차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것 같았다. 거기를 벗어나니 비로소 조금 평탄하였다. 청백색의 돌이 깔려 있는 곳이 면곡(綿谷)인데, 여기서 개울을 따라 내려가다가 좌측으로 등나무 숲이 빽빽이 우거진 곳을 들어가니 갈 길이 막혔다. 나뭇가지를 베어 길을 만들며 나가서 개울을 세 번 건너자 또 큰 바위가 서 있고 그 아래 물이 고여 있다. 산기슭으로 솟아 있는 바위 성첩(城堞) 가운데로 사람이 통과할 만한 문이 있다. 그곳으로 빠져나가서 위로 올라가니 거기에 영원암(靈元菴)이 있다. 이곳을 어떤 이는 백천동(百川洞)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시왕동(十王洞)이라고 한단다. 여러 산봉우리들이 둘러싸 있고 간간이 기이한 봉우리들이 삐쭉삐쭉하게 솟아난 곳도 있다.
가마를 돌려 장안사로 들어가니 이 절 역시 거찰(巨刹)이었다. 처마 끝에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금색의 큰 글씨가 쓰여 있다. 한석봉(韓石峯)의 글씨이었다. 법당 안에는 3 구의 부처가 안치되어 있고 동쪽에는 나한전이 있으며 문에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나는 밤에 선방(禪房)에 누워 어제 노닌 곳을 생각하여 보니, 모두가 이미 지난 자취가 되고 말았다.
초9일, 아침에 일어나자 첨지 이담(李憺)이 찾아 왔다. 그는 말하기를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가족을 거느리고 영남의 집으로 돌아 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두어 사람의 친구와 함께 아름다운 산수를 구경하려고 길을 나서 춘성군의 청평사(淸平寺)에 들렀다가 양구를 거쳐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이 사람은 무신년(1608년) 유영경(柳永慶)의 옥사 사건 당시 권력을 잡은 무리들에 아부하여 정운공신(定運功臣)에 참여하였었는데, 뒤미처 정신을 차리고 산수간에 노닐게 되었으니 비로소 깊은 골짜기에서 빠져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정청 : 세자나 또는 의정부의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아가 국사를 계청啓請하고 그 윤허를 기다리는 것.
에 이첨지와 이별하고, 말을 탄 뒤에 한 개의 물줄기를 9 번이나 건너 내려가니 산은 점점 멀어지고 속세는 점점 가까워졌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나온 자취를 돌아보니 그 동안의 일이 마치 꿈만 같다.
금강원(金剛院)에서 점심을 먹고 30 리를 가는 동안에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앞에 세랑(笹郞)이라는 큰 고개가 하나 가로 놓여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내려가니 만길 골짜기에 떨어진 듯한 느낌이다. 양쪽에 절벽을 끼고 동구에 이르니 높고 큰 바위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흐르는 물은 폭포도 되고 못도 되어 있었다. 어떤 곳에는 큰 소나무를 개울 언덕에 걸쳐놓아 판교(板橋)를 만들었고, 또 어떤 곳에는 기울어진 바윗길에 나무를 걸쳐놓아 잔도(棧道)를 만들었다. 이러한 길이 40 리를 뻗어 바다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세랑동의 경치가 만폭동만 못지 않을 듯하였다. 이곳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 동안 탐승을 하는 자들이 다른 길을 경유하였고 이 길은 주로 중들이나 다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조진역(朝珍驛)에 이르자 역사(驛舍)는 없고 초막(草幕)만 하나 있다. 여기서 잠시 쉰 뒤에 마교(馬轎)를 타고 두백촌(頭白村)에 이르니 날이 저물었다. 세랑의 북쪽은 통천(通川) 지방이었다. 군수 김극건(金克鍵)공이 바닷가에 새 객관(客館)을 지어 놓고 손님들이 묵어 가도록 하였는데 매우 조용하였다. 밤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소리가 요란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초10일, 비가 개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으며 파도도 잔잔하였다. 바다 가운데 있는 섬과 주위의 경치가 한 눈 안에 다 들어온다. 나는 두 사위와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바닷가를 걸어갔다. 마침 해당화가 활짝 피어 백사장을 덮었다. 말은 그 꽃을 밟으며 걸어갔다. 그렇게 수리쯤 가자니 바위가 마치 문처럼 마주 우뚝 서 있다. 이놈이 만일 금강산 안에 있었다면 매바위든지 아니면 사자바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군(郡)안에 있는 청허당(淸虛堂)에 들르니 전망이 자못 훌륭하였다. 이곳 군수는 우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총석정에 나갔다고 하였다. 우리는 말을 달려 그곳을 찾아갔다. 돌들이 쌓여 산을 이루었다. 백 길이나 될 만큼 높이 솟은 돌기둥들은 6면으로 되어 있든지 혹은 4면으로 되어 있으며, 어떤 돌기둥은 부러져서 물 속에 누워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길에 쓰러져 있기도 하였다. 귀신이 깎고 다듬은 것인지 참으로 신기스럽기도 하였다. 금란굴(金蘭窟)과 천도(穿島)는 총석정의 좌우에 있는데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어서 가볼 수가 없었다.
점심이 끝난 뒤에 군수는 먼저 돌아가고 나도 곧 객사로 돌아왔다. 군수는 또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나는 너무 피곤하여 두어 잔을 마시고 난 뒤에 술자리를 끝내었다. 군수는 바로 김효원(金孝元)의 아들인데, 이 사람의 아들 세렴(世濂)이 간관(諫官)으로 있다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곽산(郭山)으로 가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매우 상심하고 있었다.
11일, 신계(新溪)를 향하여 출발할 예정이었다. 길이 너무 멀어서 일찍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새벽 일찍 길을 나서려고 하니 군수가 만류하였다. 부득이 조금 머물다가 두백촌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하였다. 우리는 세랑 개울을 다시 건너 조진역을 지나고 조그마한 고개를 하나 넘어 다시 바닷가로 나왔다. 어느 시골집에 들러 조금 쉬었는데, 남아어점(南阿漁店)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오른 쪽에 바다를 끼고 왼 편으로는 금강산을 바라보며 길을 갔다. 간간이 물이 고인 호수들이 있는데 그 이름은 장전(長箭)이니 장기(長岓)니 하였다. 바다로 바싹 다가선 산기슭에는 잔도를 만들어 인마가 통행하도록 하였는데 여기가 운암현(雲岩峴)으로 여기에는 돌을 쌓아 성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 사람은 이것을 만리성이라고 하였다. 신계에 가까워지니 길은 더욱 험하고 사람이나 짐승이나 귀신 같이 생긴 바위들이 곳곳이 벌여서 있다. 이 골짜기의 북쪽에 온천 샘「溫井」이 있는데 돌을 쌓아 우물을 만들었고 그 물은 넘치어서 석천(石川)으로 흘러 들어갔다. 석천은 구룡연(九龍淵)에서 발원하는 물로써 비로봉 구정(九井)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개를 따라 거의 5 리쯤 들어가니 절이 있다. 그 절은 새로 세운 것으로 중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중 원우는 장안사에서부터 유점사를 지나 이곳에 먼저 도착하여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 매우 반가웠다. 여기서 통천군까지 일백 십 리쯤 되었다. 온종일 거센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얼굴을 때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밤이 되자 더욱 바람이 세차서 집이 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12일, 아침해가 겨우 뜨는가 하였더니,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비가 내릴 듯하였다. 억지로 길을 나서 골짜기로 들어서니 바위틈과 푸른 소나무 사이에는 흰 눈이 쌓여 마치 삼동과 같았다. 안개가 끼었다가 걷혔다가 하면서 산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니 이 역시 기이한 경치이었다. 돌산의 골짜기로 맑은 시내가 흘러내리었다. 그것은 마치 거문고를 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저 백천동․만폭동만이 어찌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옛날 양사원 공이 이곳의 자연에 도취되어 여기에다가 두어 간의 초가를 짓고 가끔씩 이곳에 와서 노닐곤 하였었단다. 그러나 선옹(仙翁)인 그분이 가고 나서는 아무도 이곳에 오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황근중(黃謹中) 공이 이 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비용을 대고 중들을 시켜 여기에다가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양사원이 지었던 옛 초가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오르자면 돌계단을 한참 동안 밟고 올라가야 하였다. 나는 거기에 올라 가 보니 마치 정양사에 올라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수석(水石)이 앞에 가까이 있어서 동남쪽이 탁 터인 정양사에는 미치지 못할 듯하였다. 이 정사에도 집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진 지가 여러 해 되어 아직 비바람에 쓰러지지는 않았지마는 초목이 우거져서 황양해 보였다.
우리는 동쪽으로 20 리를 가서 깊은 골짜기를 들어가니 물이 산꼭대기로부터 층층이 내리는데 아래쪽에는 반석이 깔려 있었다. 그 반석은 마치 바리때같이 가운데가 파이어 물이 가득 고이니, 그것은 그대로 연못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짙푸른 물빛으로 보아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신비스러운 짐승이 그 가운데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써 걸음을 재촉하여 반산령(半山嶺)에 올라가니, 방석 같이 생긴 넓적한 돌. 계단처럼 생긴 돌. 도랑처럼 골이 진 돌들에 물이 퍼지며 떨어져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고성(高城)에 산다는 피리꾼이 옷갓을 벗어버리고, 물이 쏟아지는 폭포 위에 앉아서 물을 따라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 왔다. 그는 거꾸러질 듯 자빠질 듯하면서 순식간에 저 바위 골짜기 밑까지 밀려 내려갔으나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 역시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여기서 또 수십 보를 더 올라가니 양사원이 쓴 ‘봉래도(蓬萊島)’라는 큰글씨 3 자가 뚜렷이 보인다. 그 곁에 쓰여있는 두어 줄의 글은 이끼에 침식당하여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골짜기를 나와 30 리를 가니 삼일포(三日浦)이었다. 높다란 단청의 누각이 기이한 바위와 푸른 소나무 사이에 숨어 있다. 말에서 내려 배를 타고 가서 그 정자에 오르니 여기가 옛날 사선(四仙, 영랑․남랑․안상․술랑)이 3일 동안 노닐던 곳이란다. 그리고 주위에 나열하여 서 있는 36 개의 봉우리들이 각각 다른 자태로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있는데 동해바다의 만경창파가 그 바깥을 둘러 싸 있었다. 물결 속에 흰 돌은 숲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숨었다가 하며 호수는 안쪽에 펼쳐져 있고 정자는 그 중앙에 있었다. 푸른 솔 흰 돌들은 썩 잘 어우러져 있어서 곳곳이 다 앉아 노닐 만하였다. 참으로, 사선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있었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는가?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열 걸음을 걷는 동안 아홉 번은 돌아보았다. 배로 남안(南岸)에 내리니 언덕 위에 매향비(埋香碑)가 서 있다. 대개 박달나무를 천년 동안 물에 넣어 두면 침향(沈香)이 된다고 하여 옛사람이 이 호수에 그 박달나무를 묻어 놓고 그 것을 묻은 자의 이름을 돌에 새겨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한 개의 전설로 전하여 올 뿐이다. 이곳에 그것이 묻힌 지 과연 몇 백 년이나 되었을까? 지금이라도 그 나무를 찾아내어 이 세상에 퍼져 있는 온갖 악취들을 그 향기로 쓸어버릴 수는 없을까? 암석들 사이에는 이른바 단서(丹書)라고 일컫는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반은 색이 바래어서 구별할 수가 없다. 오직 ‘술(述).남석(南石)’자만이 겨우 구별할 것 같았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영랑(永郞)․술랑․안상(安常)․남석행 4선이 관동지방에 두루 노닐었는데 총석정과 이 정자에 아직까지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배를 타고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사자석을 어루만지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군에 이르니 새로 임명된 군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관아가 비어 있었다. 나군과 이군, 두 사위와 함께 앉아 있자니 매우 심심하였다. 나는 그들을 이끌고 해산정(海山亭)을 찾아갔다. 가까이는 남강이 보이고 멀리는 바다가 보인다. 바다 가운데 흰 바윗돌 두서너 개가 우뚝 솟아 있었다.
13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20 리쯤 가니 남강이다. 거기에 현종암(懸鐘巖)이 있는데 중 법희(法喜)가 기록한 기문 중에 ‘종이 바다를 건너와서 안창(安昌)에 도착하여 바위에 걸렸다’고 한 곳이 바로 이 바위이었다. 그 아래에 큰 바위가 모래톱에 엎어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가 종을 실어온 배라는 것이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다.
길 오른 편에 초정(草亭)이 하나 있다. 대강역(大康驛)의 동구이였다. 이곳에 잠시 쉬어서 아침 식사를 하고 20 리를 달려가니 명파(明波)였다. 또 20 리를 더 가니 열산(烈山)이었다. 관사(館舍)에 들러 쉬다가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기에 잠을 깨어서 보니 뱀이 기와 지붕 사이에서 새의 새끼를 잡아먹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시키어 그 뱀을 막대기로 떨어뜨리게 하였다. 두어 자쯤 되는 늙은 뱀이었다. 나는 다시 그 뱀을 저 멀리 떠밀어버리게 하였다.
저녁에 간성(杆城)에 도착하여 달빛 아래 영월루(詠月樓)에 오르니 늙은 은행나무는 뜰에 그늘을 지우고, 새로 올라오는 연잎은 돈처럼 둥글었다.
14일, 청간(淸澗)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달려 저물 무렵에 낙산사(洛山寺)에 도착하였다. 만호(萬戶) 이준(李濬) 공과 상사(上舍) 최기금(崔基顉) 공과 우태승(禹泰承) 군과 박종문(朴宗文) 생도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낙산사 주지 원우는 청간정에서 우리보다 앞질러 와서 연포(軟泡, 두부찌게)를 끓여 놓고 우리를 대접하였다.
나는 저물어 관아에 돌아왔다.
*이 기행문에서 기술한 내용 중에 작자의 소감과 배경에 얽힌 이야기들을 지면 관계를 고려하여 여러 군데 생략하였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