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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년 한 해. TV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덕분에 전 국민이 한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한글사랑 서울사랑>에서는 <우리말 바로 알기>와 <우리말 문제풀이>에서 한글창제의 배경부터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우리말은 존재해 왔으나, 문자표기는 한자와 한문으로 해왔지요.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민족을 초월한 공통 문어 구실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한자와 한문은 공통의 문어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여 문자 생활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말을 한자를 가지고서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한문 속에서 우리 고유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한자를 빌려서 표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부터 ‘차자 표기법’의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차자 표기법’은 고유 명사 표기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전 등의 중인층은 한문 구사 능력이 지배층만큼 능숙하지 못하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등을 동원하여 글의 뜻을 분명히 밝혀 둘 필요가 있는 예도 있었기 때문에, 하급 관리들의 공문서에서는 어순을 한문의 어순이 아닌 우리말의 어순으로 바꾸고 조사나 어미 등을 보충해서 표기한 변형된 한문이 사용되었고요, 이것을 이두(吏讀)라고 합니다. 또한, 불교나 유교의 경전을 읽을 때 적당한 곳에서 끊어 읽기를 하게 되고 그 앞뒤 표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국어의 조사나 어미를 붙여서 명시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는데 이것을 구결(口訣)이라고 합니다. 한편, 우리말로 자기 감정을 진솔하게 노래로 읊은 노래를 한자를 빌려서 표기하게 되었는데, 이런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하고 이때 사용한 표기 방식을 향찰(鄕札)이라고 합니다. 한자와 한문은 중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자로 우리말을 표기하기에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문자였습니다. 우선 우리말에는 한자의 어떤 음(音)이나 훈(訓)을 빌려서도 나타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었고(예를 들어 의성의태어), 하나의 한자에 훈이 여럿 있는 것이 보통이어서, '차자 표기법'에 사용된 한자를 어떤 訓으로 읽어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차자 표기법'의 이러한 한계 때문에, 지배층이 한문에 익숙해질수록 '차자 표기법'의 사용은 축소되어 갔으며, 구체적인 표기 방식도 단순화되어 갔습니다. |
(2)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에서 당시의 지배층은 불편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반이 되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지배층만이 한문을 배워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은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치적 권력과 각종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자기들만이 어려운 한문을 배워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 각종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들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의 출현은 별로 반갑지도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세종께서 일반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한글이라는 쉬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세종은, 기득권 계층이 한글 같은 문자를 만드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고 반발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글 창제를 매우 은밀하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세종은 한글 창제 사업을 매우 은밀하게 추진해야 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힘을 빌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종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힘을 합쳐서 한글을 만들었다거나, 혹은 세종이 학자들을 시켜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별로 근거가 없는 생각입니다.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 등 당시의 기록들은 한결 같이 세종이 친히 한글을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당시에는 신하들이 한 일이라도 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역사에 이러한 기록이 남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종실록≫을 다 뒤져 보아도 세종대에 이루어진 많은 일들 가운데 ‘친제(親制)’라는 표현을 쓴 것은 훈민정음이 유일합니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분명히 신하를 시켜서 했다고 하지 세종이 직접 했다고 한 경우가 없습니다. 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친제했다고 몇 번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지요. 세종을 도운 사람을 굳이 찾자면 신하들이 아니라 세자(뒤의 문종)와 수양대군(뒤의 세조)을 들 수 있는데요. ≪보한재집(保閒齋集)≫에 실려 있는 신숙주의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서문,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에 실려 있는 성삼문의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서문에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 데 문종이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글을 만든 뒤 세종이 한글과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추진한 첫 번째 일인 ≪운회(韻會)≫의 번역 사업에 집현전의 하급 관리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때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에게 이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맡길 수 있었을 것이겠죠. 그런데 집현전의 하급 관리들이 한글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자 곧바로 2월 20일에 집현전의 사실상 책임자(副提學)라고 할 수 있는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문을 올려서 세종의 한글 관련 사업에 제동을 걸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한글 창제 사업이 1443년 12월 이전부터 집현전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버젓이 드러내 놓고 진행되었다면 최만리 등이 1444년 2월에 와서야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을 올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집현전의 학자들이 한글 관련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한글이 이미 만들어진 뒤인 1444년 2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임금께서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한글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언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4성(四聲)과 7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대단한 학문적 자부심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세종은 중국의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말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우리말을 표기하기에 적합한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뛰어난 학자였다는 것, 그리고 요양을 가서까지 한글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한글을 만들 만한 학문적 능력을 지닌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면 단연 세종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
(3) 우리는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만드신 글자이름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 글자를 설명한 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한문으로 쓰인 훈민정음 해설서는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을 다시 한글로 풀이한 책은 <<훈민정음 언해본>>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 및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글의 창제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중세 한국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한자와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백성들도 문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대왕의 취지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이었습니다. 한글 창제 후 여전히 지배층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인 특권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점차 한글을 사용할 줄 이의 숫자도 늘어갔습니다. 일반백성들을 중심으로 한글이 보급되어 자리 잡아가고 있을 무렵, 한글의 수난시대가 찾아왔습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한글 괴문서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대로한 연산군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하고, 한글로 된 책을 불사르는 등의 수난을 겪다가 1527년 중종22년 한글사용이 부활되었습니다. 한자 3,360자에 뜻과 음을 훈민정음으로 달은 어린이용 한자학습서인 최세진의 <<훈몽자회>>가 이때 간행이 되었습니다. 한글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교육을 받기는 하였으나, 여성들끼리,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17~18세기에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하는 한글소설이 등장했습니다. 지배층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소설을 탐독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중에서 통속소설, 연애소설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습니다. 한글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점차 방각본(상업적 출판물)로 간행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한국어 창작 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이 광해군 재위시절에 나왔지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 앙리 쥐베르가 쓴 <<쥐베르의 조선 원정기>>라는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답니다. 17~18세기에 전 국민 중 몇퍼센트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서양에 비해 우리나라의 문화수준이 결코 뒤처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출처: 한글사랑 서울사랑>
첫댓글 이러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학습자들이 더욱 열의를 보이지 않을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