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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1. 명마산 글쓴바위 해독에 앞서서
옛 석각본 해독에 있어서 너무들 안이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간 우리나라에도 널려있던 귀중한 석각본들이 방치 되어 신비로만 남아 있었다.
옛 석각본을 해독하려면 우선 그 부근의 지리적 요건과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우리 상식이 아닌 그들 생각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명마산 글쓴 바위 글자 해독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글쓴이가 그간 해독했던 남해 낭하리 석각본 예 부터 든다.
낭하리 석각본의 설명은 이번 명마산 예와 상관없는것 같지만 그 글자 새김이 거의 같고 또 해독 방법도 같은 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혹 앞으로 많은 분들이 이 명마산 석각본을 찾아 연구 하고 또 다른 석각본도 찾아 연구 할때 도움이 될까해서 낭하리 석각본 이야기 부터 한다.
2. 남해 양아리 석각본 해독
낭하리 석각본은 이조때 부터 학자들이 탁본을 해 연구 했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고 심지어 임승국 박사의 한단고기 에도 그 그림이 올라 있으나 아무런 해독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글쓴이는 현지 답사를 하지 않고서도 그 석각본을 간단히 짐작 했고 현지 답사후에는 보강 증거 까지 얻어 이제는 반논을 걸 사람이 없다.
따라서 이 역사적으로 신비에 싸였던 낭하리 석각본는 예전과 달리 지금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모두 글쓴이 글이니 이제 신비에 싸였던 낭하리 석각본의 신비는 풀렸다고 자부 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상 무슨 사물이건 판단 하려면 단순히 그 물건만 보지말고 전후 좌우 의 상황을 살펴 봐야 실 체를 파악 할 수 있다.
즉 이 낭하리 석각본을 고고학 전문가도 아니고 어떤 학위도 없는 글쓴이는 어떻게 해독 했는가? 이는 단순히 사물을 판단하려면 고정된 과념으로 보지 말고 상하좌우등 전체적 모습으로 판단하면 된다.
이 석각본은 그간 서불과차(徐市過此)라 해서 진시황의 신하 서불이 동남 동녀 5 백씩을 데리고 지나간 흔적, 또는 환웅이 사냥 나왔던 기록이라는등 역사적으로 의견이 분분했었다.
그러나 글쓴이가 이를 해독해 본 결과 이것은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 했으며 이는 밝달임금 (단군)의 도를 바뜨는 삼시랑(三侍郞), 아니면 당시 그 지방의 당골레 들이 천제를 지낸 흔적으로 보는데 이 석각이 중요한것은 그림이 신지녹도문, 금문, 가림토가 혼용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는 그림이 문자로 발달하는 과정이 되므로 우리 국보뿐 아니라 세계 인류문화 유산으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승국번역 주해 한단고기 48 쪽. 남해도 낭하리 고각)
( 임승국 말. 남해군 이동명 낭하리에 있는 '서불제명'각자. 이를 한글 이전의 고자라고 추즉하는데 확실지 확실는 않다.P235 참조)
이것은 그대로 보면 그림인지 글씨인지 어떤 미친놈의 낙서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아직 고정된 관념으로는 해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나 위 사진을 한번 꺼꾸로 뒤집어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 글쓴이가 바로잡아본 그림 (그림, 글자의 제세한 해독은 글쓴이 카페에...)
이렇게 보면 우선 수레를 탄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天 자 같은 사람이 그 수레를 밀고 있으며 그 주변은 잡다한 그림이있다. 이는 잡다한 그림이 어떤 글자로 만들어 진다는 사실만 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왜 오래전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어렵게 바위에 새겼을까? 이는 현지 탐방을 해보고 그 지형과 부근 지형지물을 살펴 봐야한다.
아니나 다를까 현지 답사 해 보니 이 석각본 바로 앞에는 다음 사진과 같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는 그 위 지금 단군성전 쪽을 향해 올라간다.
그런데 신기 한것은 보리암 뒤에도 같은 형태의 바위가 단군성전 쪽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위들이 만날 꼭지점엔 옛날서 부터 이 수례탄 바위의 인물들이 반듯이 찾아 가야할 어떤 상징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위에 올라가 단군 성전 뒤에가 보니 다음과 같은 돌이 있는데 이 돌은 옛 부터 곰네(웅녀) 바위 라는 것이고 이 곰네는 우리 민족의 성모 이기 때문에 이 금산(錦山) 조차도 이성계가 이 산에서 기도 할때 왕이 되면 이 산을 모두 비단으로 덮는다고 산신령께 서원 했으나 막상 왕이 되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 없으니 그 대신 산 이름이나 錦山 이라고 사기 치기 전에는 성모산 이라 했단다.
그렇다면 위 바위들 즉 수례를 타고 가는 바위상 인물은 분명 환숫(환웅)일것이다.
곰네 할머니(웅녀)는 원래 삶신할미다. 따라서 당시 인근 아들이 없는 집에서 아들을 기원하려면 곰네 상 바위로 가야 하는데 그 아래 길목에서 곰네를 찾아 가는 바위가 있으니 이는 분명 환숫 바위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려면 곰네 할머니 한테만 빌 것이 아니라 당연히 환숫상 한테도 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숫상 바로 앞에 가기는 험한 낭떠러지 골짜기라 지형상 불가능 하고 그 앞 어디에서 빌어야 하는데 마침 그 앞에는 마치 병풍을 쳐 놓은것 같은 바위가 있었을 것이니 그 앞에서 제물을 차려 놓고 병풍에 써 붙일 지방대신 그 병풍 머리 위에 그 환숫 상과 그 부근 풍경을 그리고 당시 그들이 쓰던 원시 가림토와 금문등을 혼용해서 글자를 새겨 놓았을 것인데 그 잡다한 그림이나 글씨를 해독해 보면 이는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이기도 하다. ( 자세한 설명은 글쓴이 카페 한겨레 산하에)
그러나 그 병풍바위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각 변동으로 뒤로 넘어 졌고. 따라서 병풍 바위의 석각본은 뒤로 보이게 됬으며 그 석각본을 탁본 하려는 학자들은 이런 계산도 않고 쉬운대로 입구에서 탁본했으니 꺼꾸로 나올 수 밖에 없고 이 꺼꾸로 된 탁본으로는 무슨 글자인지 해독이 불가능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판단은 이렇게 단순한 사고로는 되지 않는다.
여기 나오는 두 아가씨는 당시 글쓴이가 하도 석각본을 찾지 못해 금산을 헤매다가 곰네님 한테 핸드폰ㅎㅎ을 쳐서 보내준 등산객 들이다. 즉 자기 운을 창조하는 단전호흡 법의 일종인 해오름 관법으로 곰네 할머니가 보내준 천사 들이다.ㅎㅎ.(재미난 이야기는 필자 카페에 있으니 생략)
이 낭하리 석각본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분은 글쓴이 카페 한겨레 산하 957~960 번을 보시면 무척 재미 있을 것이다.
3.명마산 글쓰는 바위 지형지물
글쓴이 카페 독자님 이신 좋아님 안내로 명마산에 갔다. 앞으로 가실 분들을 위해 찾아 가는 길 까지 말한다면 동대구 에서 갓 바위 가는 길로 쭉 18 k를 더 가면 대경 LPG 충전소가 나오고 조금 가면 U 턴 할 수가 있다.
이 사진에서 대경충전소 뒤 산세가 바로 명마산 앞 산세 이다.
아래가 명마산인데 인터넷에서 취한 것이다.
대경충전소 에서 좀 조금 더 가 U 턴 을 하면 다시 대경 LPG 충전소 반대편 길.
여기서 보면 무슨 연수원인지 들어 가는 길 이 있는데 진입 금지가 되 있고 그 옆 아래 사진과 같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한 3 백 메터 콩크리트 길로 올라 가면 어느 묘가 있는데 그 묘 때문에 콩크리트 길이 되어 있고 그곳은 세갈래 길인데 좌측 비 포장 좀 험한 길을 좀더 올라 가면 바로 산 계곡에 마당 바위가 있으나 이는 글쓴 바위가 아니고 조금만 더 아래 첨부하는 사진을 보며 조금만 더 올라 가면 바로 그 바위가 보이는데 나뭇가지등 덤불이 발길을 막는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거지 삼시랭이 같은 사람은 글쓴이 이고 그 뒤에 쓰레기가 보이는 석벽위에 글쓴 바위가 있다.
그 석벽위에는 10~ 30 명 가량이 산신제를 지낼 장소가 있다.
제상 같이 누어 있는 바위가 글쓴 바위 이고 그 뒤 서 잇는 바위는 북향이니 제사 지낼때 병풍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병풍바위 위에서 내려 찍은 사진
희미하게 글자들이 보인다.
글쓴바위 밑 부분. 아래 그림 큰 새와 그 뱃속에서 새끼 새를 찾지 못하면 더이상 명마산 글자 그림 해독을 기대 하지 말고 그만 읽을것
이 암반에 새겨진 글자, 그림들은 먼저 말했듯이 시각장애인이 사진을 더듬어 봐도 자연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글씨를 새긴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글쓴이의 어설픈 추리 보다는 좀더 근거를 찾아 올라가 보자.
인근 등산가 들의 말에 의하면 이 글쓴 바위 뒤로 더 올라가면 다음 사진과 같은 장군바위가 있다 하는데 장군바위란 근대 우리 생식기를 천시 하는 불교 유교에 의해 생긴 말일것이고 그 모형으로 봐서 환숫 바위 즉 솟대(남근) 바위였을 것이다.
( 역시 야후에서 취한 사진인데 남근상 밑에는 해를 상징하는 ㅇ 의 돌이 있고 그 아래도 역시 ㅇ 과 알을 상징하는 돌이 있으며 각도에 따라 달리 본다면 남근상 뒤 바위는 고환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아래에도 사진과 같이 천제를 지낼 장소는 있을것 같으나 이는 자연석이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 놓은 인공 콩크리트 일것이고 천연석 이라 해도 감히 이 신성한 바위 아래는 낙서장 같은 글자는 새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그 위로 더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갓바위가 나온다 하는데 이 갓 바위 부처님상은 삼국초기 불교가 들어 왔으니 당시 갓 바위 부처상은 없었을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무시 한다.
( 역시 야후에서 취한 사진)
이런 전후 좌우 관찰법으로 명마산 글쓰는 바위 암각을 검토한 결과는 이 암각은 가림토뿐 아니라 금문과 심지어 금문이전의 그림 까지 그려져 있는데 이 석각을 새긴 분들은 앗선( 첫조선) 이 망하고 진한 이었던 밝달임금의 후예들이 마한( 나중 고구려)에서 남쪽땅 한쪽을 얻어 신라 를 세운 이들이 새긴것 일것이다. 이렇게 추리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4.옛 기록으로 본 증거
<삼국유사>
‘최치원이 이르되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崔致遠云馬韓麗也辰韓羅也.)
<후한서>에 이런 말이 있다.
' 진한의 원로들은 스스로 말하길 진(秦)에서 망명한 이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의 땅을 베어주어 그들에게 주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하며 진나라 말에 가까운 까닭으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했다고 한다.'
(後漢書云秦韓耆老自言秦之亡人內適韓國而馬韓割東界地以與地 相呼爲徒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삼국유사 秦韓)
여기서 밝달임금(檀君)의 첫 도읍지는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잘 안다. 그러나 이것이 한자로 써 있다하여 한자의 뜻으로는 말이 않되고 우리말 처음 이라는 아시 김매기,아시 빨래 하는 아시 > 앗 과 같은 뜻인 앗 > 아사 (朝日신문 아사히 신문) 의 아사 > 앗 에 음달 양달 하는 달이 붙었으니 아사달은 처음땅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 땅에 처음 세운 나라는 당연히 '아사선 > 앗선이 되고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는 삼국초에나 정착되니 밝달임금은 檀君이 어떤놈인지, 朝鮮이 어떤놈이 세운 나라인지 모른다.
즉 우리 말을 한자로는 적을 수 없으니 삼국 이후에나 밝달임금, 앗선을 이두로 쓴것이 바로 檀君이고 朝鮮이다.
밝달임금은 이 앗선을 혼자 다스리지 않고 서쪽에 붉=밝한(卞韓)과 동쪽에 땅을 뜻하는 마한= 말한(馬韓)을 제후국으로 두고 자신은 사람을 뜻하는 선한(辰漢) = 진한(辰韓)의 천제가 되는데 이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진본 천부경의 핵심 인본주의로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것이 바로 사람이고 그래서 天一 地一 太一(人中 생식기가 붙은 男)중 太一이 最上貴 라는 것이며 이 증표가 바로 우리 말과 글자의 모태가 되는 천부인 天地人 원방각(ㅇ ㅁ △) 중에 사람을 상징하는 ㅅ 의 모태 △ 이다.
그렇다면 위 후한서" 진한의 원로들은 스스로 말하길 진(秦)에서 망명한 이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의 땅을 베어주어..." 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서 한자로 진한(秦韓)이라 했다 해서 진시황(秦始皇)의 秦나라가 아니다.
우리나라 아래아점 발음 일어 선다는 선= 신 이고 辰(설신)과 辰(지지 진)은 같은 글자이며 이는 秦 과 같은 음이다.
또 진(秦)과 주(奏) 는 아래에 禾 가 붙느냐? 天 이 붙느냐만 다르니 사실상 혼동이 쉬워 어떤 학자들은 원 우리 삼한중의 천제국 이었던 선한 =신한(辰韓)을 진한( 秦韓), 또는 주한(奏韓) 이라고 하다가 혼동되니 아예 주신한(奏辰韓),>주신(奏辰) 이라 하여 우리 민족의 원 이름은 '주신'이고 이는 하느님이 주신나라 라고 웃지도 못할 학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마한이 떼 주었다는 한자표기 진한(秦韓)은 바로 밝달임금의 천제국 이었던 선한 이고 그들은 앗선(첫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하자 버틸때로 버텨 보가가 결국 보따리를 싸 들고 육로나 해로로 한반도로 내려와 당시 마한 땅이었던 한반도에서 같은 종족이었기 때문에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한것이지 중국 후한서 내용대로 그들 쓰는 말이 " 진나라 말에 가까운 까닭으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는 말은 잘못이다.
이 글을 근거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성립을 보면 다음과 같다.
1)고구려(高句麗) - 원래 마한 이었으나 우리 원 종족 이름이 사람이란 굴 구멍(여음)에서 태어나 굴속에서 살다가 굴구멍에 길게 잠들었을 것이니 굴이 > 구리, 골이 > 고리, 였을 것이고 그래서 고구려, 고려 일것이며 그 고구려는 마한 자리이니 중국대륙 동쪽과 한반도 전체 이었을 것이다.
2)백제(百濟) - 百의 우리말은 온 누리 하는'온' 이고 온은 바로 해 이기 때문에 숫자 百이 물을 건너온것(濟)이 아니라 중국 서남부, 즉 산동반도에 있던 해= 붉= 밝= 卞韓 의 유민들이 마한 땅으로 건거온 것이 白濟이다. 따라서 백제의 원 이름은 白濟이다.
이 白濟 유민들이 아직 나라도 없이 살던 땅에 주몽의 후처 솟은네(召西奴)의 아들 온조는 전처 소생인 유리 태자가 다음 왕자리가 되니 솟은네는 목숨의 위험성과 또 나라를 세우려는 욕심으로 白濟 유민 땅으로 남하 하여 그 땅에 이름을 붙인것이 현재 百濟다. 하여간 솟은네는 나라를 셋 씩이나 세운 여걸이니 솟는네 인데 이를 한자로 쓸 수 없으니 서쪽에서 온 계집종 이라는 뜻의 召西奴라 쓰니 말이 않된다
3)신라(新羅) - 밝달 천제국인 선한= 신한이 지나족 한나라에게 망하자 그 유민들이 마한으로 부터 한반도 남동쪽 땅을 얻어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 이름을 역시 선한의 우리말 섯벌 > 서라벌 > 한자로 新羅라 했지 선한= 진한(辰韓), 진한(辰韓, > 진한(秦韓)이 아니다.
따라서 앗선의 삼한이 망하기 전 까지 한반도 전체는 마한 땅으로 본다.
여기서 명마산 글쓴 바위 해독을 위해서는 이 글자를 새긴이들은 앗선(첫조선)유민중 선한(秦韓) 유민으로 보기 때문 신라의 역대 시조 부터 제세히 알아 본다.
1) 박혁거(朴赫居世)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첫 조선인 앗선이 한나라에게 망하고 그 유민들은 마한에게서 동남쪽 땅 한조각을 얻어 살았다. 여기서 삼국유사, 삼국 사기에도 기록되 있는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를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인터넷 그대로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암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탁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4는 취산(자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빙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타;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前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