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총소리다. 피하라!]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우씨는 건물뒤편으로 몸을 달린다. 신역을 에워쌀듯 대열을 지어 공격해가던 시위대는 총소리와 함께 급격히 대열이 허물어진다. 곧이어 픽픽 대열앞쪽에서 시민들이 [억]소리 한마디 지르고 못한채 쓰러지기 시작한다.
계엄군의 첫 집단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광주항쟁의 여성영웅중 하나인 전춘심씨 (당시 32·본명 전옥주). 전씨는 21일 새벽2시께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소총사격에 쓰러져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가두방송을 하며 광주역 앞으로 달려온다.
[계엄군이 우리 형제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의 방송이 양동 복개상가를 거쳐 광주천변을 따라 내려가다 일신·전남방직쪽으로 다가온다. 무등경기장을 거쳐 광주역에 도착하자 시민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듯하다.
광주역 분수대 (광주역앞 분수대는 80년대 중반 철거됨) 주변은 불태워진 버스와 택시에서 솟아나오는 검붉은 연기와 불꼿이 어우러져 화광을 가득드리우고 있다. 전씨를 따라온 3천여명의 응원군에 시민들은 더욱 사기가 충전, 광주역을 경비중인 제3공수대대를 향해 공격해 나간다.
따라닥! 갑자기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소리가 연이어 터진다. 또다시 시민들이 쓰러진다. 전씨는 이날 새벽 최소한 10여구이상 시민들의 시신이 분수대 주변에 쌓여있는 것을 목격한다.
무자비한 소총사격
광주항쟁기간중 최초로 집단발포에 의한 총상 사상자를 낸 광주역 전투. 시민들은 이날 밤 10시께 향토사단인 31사단 병력이 3공수로 교체되고 뒤이어 무자비한 소총사격이 개시된 것을 기억한다.
지난 89년 1월29일 역사적인 광주청문회 현장. 민주당 김영진의원은 80년당시 3공수여단 본부대원이었던 이상래씨와의 면담결과를 증거자료로 제출한다. 3공수여단장은 최세창준장이다.
3여단은 80년 5월19일 밤 밤 용산역을 출발, 광주로 향한다. 5월20일 새벽, 광주역에 도착한 이들은 군용트럭으로 전남대로 이동가면을 취한뒤 밤9시 출동명령을 받는다. 군수과 요원에게서 실탄1백20발씩을 지급받는다.
전남대에서 신역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아스팔트와 건물을 향해 사격을 실시한다. 트럭위에서는 M60이 엄호사격을 하면서 한발한발 신역을 향해 다가간다. 사병들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한다. [후퇴는 없다. 후퇴하면 모두 쏴죽인다.] 공포속에 도착한 광주역 광장.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군인들은 역 건물을 뒤로 한채 사격을 계속하고 분수대쪽에서는 시민들이 탄버스와 트럭들이 불붙은 채 연방 돌진해오다 분수대에 부딪혀 폭발한다. 3공수여단장 운전병이었던 중사 한명이 트럭에치여 사망했고 20명정도의 시민이 피가 흥건한채 분수대 주위에 방치돼 있다.
광주역 앞 전투 계엄군들의 첫 집단발포가 시작되고 이어 [광주의 그날]이 선혈낭자한 참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대한민국에서 최정예로 육성된 공수특전단이 민간인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는 사실. 그것은 자국민을 보호해야하는 [국민의 군대]이기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울러 자국민을 향해 그토록 유혈 낭자하게 총을 겨눌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들이 혹 고용주만을 위해 일하는 [용병]혹은 [사병]으로 길들여진게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80년 당시 군에서 막제대한 정현택씨 (24). 정씨는 이날 밤 불타는 MBC근처에 있다 시민들이 왜곡보도를 일삼는 KBS (80년 5월 당시사동소재 광주KBS는 신축공사중인지라, 임시 방송국을 신안동, 현종근당건물 옆으로 옮겨 방송했음)도 불태워야 한다며 시위대를 형성하자 따라나선다.
그 순간이다. 뭔가 망치로 몸을 한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스쳐지나간다. 등에 손을 대자 피가 솟구친다. 아! 나도 총에 맞았구나 하는 순간 그대로 쓰러진다.
무장필요성느껴
20일밤 시민들은 광주역을 향해 난 모든 거리로 대열을 형성하며 나아간다. 광주역 부근만 3만여정도의 인파가 형성된다. 시청쪽과 무등경기장쪽, 원협 청과물시장 쪽, 임시로 옮긴 KBS건물쪽 등지에서 시민들은 광주역을 되찾기위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계엄군들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계속모여들기만 한다. 당시 광주역 부근은 시내 목재상들의 집결소이기도 하다. 이날밤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 시민들은 우선 손쉽게 눈에 띄는 각목을 집어든다. 목재상들에서는 군말없이 각목을 나누어준다.
이날 새벽4시까지 싸움으로 이 부근 목재상의 각목이란 각목은 모두 동이난다. 그러나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는다. 광주역 부근은 또 중앙고속과 택시회사들이 밀집, 기름을 공급하기위한 주유소가 많다.
이날 밤 시민들은 계엄군들을 향해 그 옛날 동학농민전쟁때 동학군들이 일본군의 총탄을 피하기 위해 닭장테를 굴리듯 주유소 드럼통을 구해굴린다. 화염 드럼통이 등장한 것이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화염드럼통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밤10시30분께.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 주유소에서 한 청년이 트럭에다 드럼통 2개를 싣고 휘발유를 가득 채운뒤 불을 붙여 계엄군들을 향해 질주한다.
청년은 계엄군 전방 20여m 앞에서 뛰어내리고 트럭과 드럼통은 불덩어리가 되어 돌진한다.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분수대를 들이받는다. 휘발유 드럼통이 주위를 진통하는 폭발음과 함께 폭발하고 불기둥이 솟는다.
21일 새벽4시 퇴각
광주역을 지키는 계엄군의 방어는 필사적이다. 광주역은 도청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행정적기능을 유지시키는 상징적 장소였던 것. 전략적으로도 고속도로가 차단될 경우 광주로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유일한 통로다. 21일 새벽4시, 드디어 광주역은 함락된다. 시민들의 총탄을 묿쓴 파상공격에 더이상 버티지 못한 계엄군은 새벽4시 광주역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날이 밝아오자 광주역 광장은 그야말로 유혈이 낭차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시커멓게 불타 나뒹구는 차량들. 그리고 분수대 주변에 버려진 처참한 시케 2구. 2구의 시체는 계엄군들이 퇴각하면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시민의 사체임이 분명하다.
육군본부가 발행한 전교사작전상황일지에는 광주역전투로 군인 3명과 시민 2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일지에 따르면 20일 밤10시45분에 군2명이 시민들의 공격으로 사망했고 21일 새벽군 1명과 시민 2명이 사망했다는게 최종집계다. 사망자 김재화의 검시내용을 보면 좌측흉부에서 우측흉부로 총알이 관통한 것으로 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