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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녕 하 _ (시인, 문화평론가)
살다 살다 힘들면 전화해!
처음 정한 제목은 〈먹다 먹다 힘들면 전화해!〉였다. 그런데 편집진이 단체(?)로 COVID-19에 걸리는 바람에, 격리된 상황에서 제 때 일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28호 봄호를 여름호와 합병호로 내야 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그새 세월까지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제목을 〈살다 살다 힘들면 전화해!〉로 바꾸기로 했다.
한동안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가 났었다. 밀폐된 공간, 특히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는 물골 따라 쿨럭쿨럭 이동하는 유속의 흐름까지 느껴지고 들려서 민망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장腸에 칸막이 장치가 있는지, 때때로 막혔다 뚫렸다 하고 있었다. 수십 년 다닌 내과 의사는 대장내시경 검사를 하자고 했다. 진작! 그래야 했겠다. 그러나 병원 가는 일도, 격리가 해제되고, 체력이 돌아와야 가능했기에, 차일피일 끝에 그만 세월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 후 병원 갈 일, 원인이 어느 순간! 쓰윽 사라지고 말았다. 장腸도 생각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학교에 기간제 교사 제도가 있었다. 이는 바로 선생님 신분이 임시직도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턴가 참교육을 표방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교권을 굳건하게 틀어쥐고 있다. 바라건대, 이제는 이런 비슷한 일도 없겠거니와 명칭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편법 시행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겠다.
최근, 살던 동네가 재개발에 걸려서 부득불 이사를 하게 됐다. 그래서 세 놨던 집으로 옮겨 가기로 했다. 그래서 세입자에게 요건을 충족시키고 퇴거를 요청했다. 그랬더니 퇴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세입자가 하는 말이, 입주 중 겪었던 애로사항들을 나열하면서, 새로 입주할 사람에게 마치 ‘집 사용법’이라도 알려줘야만 한다는 것처럼 미주알고주알 주문을 내고 있었다. 망가뜨린 부분 있으면 원상복구 해놓고, 때 맞춰서 이사 나가면 될 사람이, 마치 부동산 소유주처럼 행세를 떤다. 그래서 한 마디 해줬다. 새로 입주할 세입자 걱정? 그냥 곱게 비우기만 해라!
설렁탕집에서의 경험이다. 빈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넣고, 음식이 나오자 후추, 소금, 파 등 양념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다 넣었어요” 그런다. 그냥 준대로 먹고 나가라는 뜻인가? 생각을 해봤다. 네가, 내 입맛을 어캐 알아서? 네가 간까지 맞추어 줬다는 말이가? “그래도 달라!” 했다. 그랬더니, 목과 허리를 비틀며 이상한 사람 보듯 한다. 그래서 “그럼, 너나 잡수세요” 하고 일어났다. 그랬더니 등 뒤에다 대고 “블랙 컨슈머!”란다. 그래서 대답해 줬다. “잘 봤다!”고 했다. 손님이 왕? 바라지도 않는 세상이 됐다.
젖지 마세요! 그냥 주세요! 여보세요? 달라는 대로 주세요! 커피를 티스픈으로 ‘젖지 말고 그냥 달라’는 소박한 요청이다. 아주 간단한 요청이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이 요청이 곧 잘 묵살되곤 한다. 이 소박한 요청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면, 1.종이컵에, 2.일회용 커피봉지를 찢은 다음, 3.커피 가루를 종이컵에 쏟아 담고, 4. 온수를 적당히 담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왜 젖느냔 말이다! 그냥 달라는데. 소박한 요청, 그대로 하면, 종이컵 안에서 물과 커피가루 그리고 프림가루가 제 멋대로 뿌옇게 뒤엉키다가 온수의 대류작용에 따라 ‘천지창조 때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난, 진정! 이걸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커피 맛은, 주니까 먹지, 평생 커피를 하루에 몇 잔씩 마셔왔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모든 음식 맛의 기본은 물[水]맛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기에, 그리하여, ‘물 온도에 녹은 만큼만’ 먹으면, ‘그 물에 녹은 커피만’ 마시면, ‘커피도 보약으로 변신’하리라! 생각된다.
책을 만들면 그 책은 최신판이다. 이후에 처음 그대로 다시 찍으면 재판이다. 그러나 내용의 일부를 고치거나 수정해서 다시 만들게 되면 개정판이 된다. 그 사이에 상황이 변해서 내용을 추가하거나 원고 분량을 늘려 찍으면 개정증보판이 된다. 그런 다음에도 또 부족했을 때는 추록을 덧붙이게 된다. 그렇게 까지 하여, 배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주장과 논쟁이 등장하여 추가해야 할 지경이 돼버리면, 이미 배포를 마친 개정증보판에 별책부록까지 만들어 합철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잘 만들고 나면, 어느새 원판의 내용은 실종되고 원본의 의미마저 탈색되기도 한다. 세상일을 이렇게 하다보면, 정반합? 통섭? 다 좋은 말 같지만, 결국에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게 되어버린 결과물에 탄식하게 된다. 그래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꼭 고집한다면, 음식점의 경우, 메뉴판에 ‘섞어찌개’ 하나만 있으면 되겠다. 그리하여 그 세상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시달리다 못해 결국 희나리가 되고 만다.
한 세대 전, 말 좀 한다하는 사람들이 말만 시작하면 ‘잠수함의 토끼’를 세상에 끌고 나왔었다. 게오르규는 언제나, 언어조탁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던 시대가 슬그머니 지나가더니 ‘탄광 속의 카나리아’가 회자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경제공동체’가 나타났다. 이어서 ‘형상기억종이’가 출현하고 말았다. 방송언어도 박자 맞추듯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고물가 저성장으로 인한 경기후퇴 또는 경기침체를 ‘역성장’이라고 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전략적 후퇴’는 한 물 간 용어가 돼버렸다. 시대가 바뀐 요즘, 방송용어가 어떻게 진화할지, 두 눈 뜨고 지켜볼 것이다.
또한 그 많던 논객들은 보고도 못 본 척 청맹과니 행세를 하거나, 눈치껏 밥그릇을 챙기거나, 단 꿀 한입 떠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마도 ‘민주평화인권평등환경’ 등에서 고정배역을 받아 맡은바 열심히 연기를 하다보니, 스스로 자가검열이라도 하는지 일사불란한 전체주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참! 기가 막힌 것은, 시대가 아무리 요동쳐도 자신의 이익을 바라지도 않고, 옳은 소리를 토해내던 ‘자생적 반골’들이, 어느 순간! 언어왜곡조작세력에 의해 설 자리가 없어지더니, 어느날 아침 일어나보니 ‘보수’, ‘꼴통’으로 분류되어 있지 아니한가. 그것 참! 지구 자전축이 흔들렸나? 날짜변경선이 이동을 해버렸나? 구구단이 바뀌었나? 원주율이 변했나? 바뀔 게 바뀌어야 승복을 하지! 내 정신과 내 철학이 외부 여건에 따라 우로 갔다 좌로 갔다 흔들린단 말인가? 기존의 상식과 철학으로는 고른 숨 쉬고 살기에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막상 사람은 제 설자리를 지키고 의연하게 있었을 뿐인데, 시대적 가치가 흔들리더니, 세월은 수상한 냄새를 풍기며 자꾸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뒷방 노인네는 입 다물고 조용히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매일 아침, 살아 깨어나 두 눈 뜨고 일어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입 속까지 잘 닦아내고, 귀 속까지 씻어내고, 눈에 쌍심지 돋우고, 누가 까마귀고 누가 백로인지 다 보인다! 하고 결기를 다질 것이다.
그들은 급기야는 역사 재해석이라는 금단의 영역(?)을 거침없이 넘나들기 시작했다. 역사가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기성 학계에서 이미 정리해놓은 것을 정설로 삼아, 달달 외우도록 해놓은, 그래서 지루한(?) 학문, 그 정도였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미래지향적이지 않는, 그리하여 현실에서 취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으로 대접(?)을 받았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가! 정치희롱, 희롱철학의 키워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세대 전, ‘과거를 묻지 말라’는 노래가 있었다. ‘장벽은 무너지고’ 세월은 흘러갔다지만, 마치 ‘13인의 아해’ 같이 용감하게 살았던 그를, 대한민국 원호당국이 재조명하겠다고 나섰다. 일제 저항기, 그의 독립 의지와 행동은 분명했고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해방정국 하에서 민족배반의 행적은 그의 과거 선행을 아무리 앞세운다 해도 그 악행을 결코 가릴수 없게 됐다. 원호행정? 오지랖이 넓어도 정도껏 해야지!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유공자? 역사를 뒤집으면, 뒤집은 자가 결국 되잡히고 만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장기판 묘수풀이에 ‘박보장기’가 있다. 그 끝은 늘 외통수다. 덤빌 걸 덤벼야지! 기가 막히게, 겁도 없이, 거침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중앙선 기차를 타고 죽령 고개를 넘다보면 또아리 굴을 자나가게 된다. 바로 그 직전, 창밖을 내다보면, 계곡 아래 산장? 호텔? 건물이 보인다. 그렇게 객석에 앉아서 시야를 벋어났던 그 산장? 그 호텔?이 돌연! 또 다시 나타난다. 두 눈을 비비고 좀 전 보았던 건물이 어째서 또 나타난 것이지? 데쟈뷰 현상? 이란 말인가.
우리나라가 꼭 그렇다. 100여 년 전 대륙의 서쪽 끝에서, 짧게는 70여
년 전 극동에서 일어났던 현상이 21세기 근역강산에서 데자뷰처럼 반복되고 있다. 꼴값하지 말고, ‘사람답게’ 살라는 말이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도 있다. 정 싫다면, 좋아하는 곳으로 이민가면 된다. 전별금이라도 챙겨주고 싶다.
어용학자는 시대가 바뀌면 스스로가 명함과 색깔을 바꾸거나 국민의 시선에서 사라지거나 한다. 그런데 역사학계는 스스로 자반뒤집기도 못하는 배냇병신들인지, 학문을 정치세력화 하려들거나 정권을 회유하려 해왔다. 요소수를 못 주겠다면, 개발하려 해야지, 특별대우 해달라고 로비(?)하는 격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국가예산 7십여 억 원을 받고 한일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한 것이 전부이다. 지지리도 한심한 것은, 일제하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여지껏 식민사학을 두둔하는 자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이웃 나라라는 것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증거를 날조, 역사를 왜곡 못해 발광을 하는 판인데도 말이다. 21세기 글로벌 경쟁시대 한 복판에서 저것들의 거짓 역사관에 동조하는 우리나라 학자가 있다면, 양아치만도 못하다고 해야 마땅하다. 양아치라도 최소한 ‘제 집 털어먹는 짓’은 하지 않는다.
비틀린 지성은 학문이 아니다. 배배꼬인 학문은 청산가리보다 해롭다. 학문을 도구 삼는 권력욕은 단순 사익 추구를 넘어, 이미 매국의 수준에도달해 있다. 일신의 안위를 챙기려고, 나라는 망하거나 말거나, 민족은 글로벌 망신을 당하거나 말거나, 역모에 버금가는 해괴한 논리를 조직화 하고 세력화 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겠다. 조선이 망하자, 매국노 세력은 청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노서아도아닌, 미국으로 도피했듯이 그 전철前轍을 다시 밟을 것인지, 눈여겨봐야 한다. 역사는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하여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인데, 정치적 목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집단의 사익을 위하여, 추종자 집단을 중심으로 생산해낸 우스꽝스런 스토리를 역사적 진실인양, 교과서 편수, 제작, 출판, 보급에 적극 개입한 매국, 망국의 앞잡이들에게는 꼭 해줘야할 말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은 패망 월남이 아니다. 호치민의 승리에 감동의 전율을 느낄 국민이 근역강산에는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바닷물이 아직 넉넉할 때, 보트피플 수단이 아직 남아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리더의 교만은 조직을 썩게 만든다. 교만은 조직을 집단적 사고에 함몰되게 만들어, 다양성과 합의체 정신을 와해시킨다. 조직원 각 개인이 리더의 판단에 휘둘리고 이끌리는 현상을 리더와 조직원이 함께 충성도 또는 지시수행능력으로 착각하게 된다. 리더의 생각에 영합하려는 조직은 최선이었다고 변명하겠지만 사후에는 십상시로 심판 받게 된다.
조직은 이성이 없을수록 효율이 높아져 단결이 잘되는 특징이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 딱 그러하기에 든든하면서도 한편 걱정이 된다. 일사불란한 힘은 군대에 버금간다. 따라서 전쟁이 일어나 조국이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절실하게 유용한 조직으로 쓰임 받기를 기원한다. 예비군에 비할쏘냐. 건설현장마다 찾아다니며, 확성기 틀어놓고, 그러다가 ‘자영업자 노조’나 촉발시키지 않으면 본전이다.
걱정스런 것은, 모든 조직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특히 심한 곳이 정치권과 학계 그리고 대한민국의 문단이다. 문단이 정치권과 비교되는 까닭은, 이질적 세상에서 따로 사는 것 같지만, 하는 짓과 구조는 초록이 동색이다.
남북 갈등의 뿌리는 언제 시작되었나? 일본유학파 즉 구한말 세도가의 자식들과 자본축적으로 새롭게 부를 거머쥔 중인 계급 중에서 신분세탁에 능동적이었던 신흥 부자들의 자식들로부터 시작됐다고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출신 바탕이 부정협잡착취 세력과 동색임을 은연중 깨닫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했기에 자신의 과거와 뿌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신분을 획득하여 새 시대의 지도자층으로 살 수 있기를 희망했던 그러한 신세대였겠다. 즉 지금부터 ‘과거를 묻지 마세요’와 ‘새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싶어’였겠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향의 농토? 농경사회가 아닌, 산업사회에서 나의 과거와 뿌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신분을 획득하고 지배자 또는 권력자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맑시즘’ 같은 정치적 용어와 ‘낭만’, ‘아방가르드’ 류의 서구적 문화용어는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만루홈런을 칠 수도 있다는 희망! 절망적 시대상황 하에서 절호의 기회를 열어주는 기적과 같은 사상과 언어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좌익사상은 상큼한 비상구였고, 시원한 배설구였던 것이다. 한국의 문단? 적극적이고 당연하게,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했다는 증거가 도처에 넘쳐난다.
21세기에 인류의 역사를 통제하고 고대사를 독과점하려는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무지막지한 춘천 중도 레고랜드의 서구 자본유입과 개발로 조상의 상고사를 갈아엎은 어리석음과 홍천 차이나타운의 중국 자본 유입을 보고 있노라면, 코리아 강원도는 바보 천치에다 눈 뜬 장님만도 못한, 반푼이 칠삭둥이 수준이다. 이건 그들의 하수인이 한 짓이지, 우리나라 정치인이 한 짓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벌건 대낮에 후안무치하게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저지른 것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침략적 근성은 자본주의나 공산당이나 둘 다 똑같다. 웃으며 이권 나눠주고 깔고 앉았는지, 뇌물주고 협박하며 힘으로 눌렀는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역사와 유물과 땅과 우리나라 국민의 권리를 빼앗아 가는 것은 똑같다. 임진왜란 때 도망질 친 관리들이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길안내 해준 역적들과 똑같은 것들이 한민족의 뿌리, 한강문명의 근원지인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 쇠머리[우두동] 앞, 상고대문명 발상지를 파헤쳐 부수고 있다. 단군 할아버지가 부들부들 떨고 있을 터인데, 이 짓 저지른 정치인들! 소양강 처녀 옆에 철비鐵碑 세워놓고 이름 석자 수만년이 가도 읽을 수 있도록 훈민정음으로, 굵고 깊게 새겨놓아야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한 참 교육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 족보 책에 기록하는 문제는 그 집안에서 알아서 하도록 허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