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아련한 추억이 있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시를 만들기도 하고 사고하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재경 향우회에서 주형이가 우연한 말끝에 수십 년이나 지난 그 일이 속임수였을 거라고 했다. 성구조차도 그럴 수도 있다고 맞장구를 쳤을 때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보루였다. 그 일이 진짜로 꾸며진 것이었다면 지금까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온 유년기의 기억들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내 유년의 공간이 훼손되는 것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뒤로는 어래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청보리가 일렁거리는 넓은 들판의 한복판에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흩어진 초가집들이 옹기종기한 마을이 존당마을이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정부에서 통일벼를 도입하던 첫 해였으니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정확히 기억한다. 백양목숲 건너편의 작은 오두막으로 서울에서 어떤 할머니가 젊은 딸과 함께 이사를 왔다.
그전까지는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월성 손씨 집성촌이라 외지에서 들어온 타성바지들에게는 약간 배타적인 마을이었는데도 모녀는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특유의 붙임성도 있었지만, 여자들만 사는 집이어서 아낙들이 쉽게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젊은 딸의 상냥하고 멋진 서울말이 신비로웠다. 사람들은 그 집을 서울 할매 집이라고 불렀다.
이 집은 우물가나 빨래터처럼 누구 집의 소가 새끼를 낳았다거나 다음 장날에 읍내 콩쿨대회(노래자랑)가 있다든가 하는 시시콜콜한 마을의 소식보다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소문들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다. 빨간 옷을 입고 첫인사를 왔다는 이유로 못골댁 둘째 며느리를 어디에서 굴러먹었을 거라는 의심을 진짜처럼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들이 이사 오고 가을걷이가 끝난 그해 겨울에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서울 할머니가 열병으로 몇날 며칠을 혼수상태로 몸져누웠다가 깨어난 후에 갑자기 신기(神氣)가 생겨 무슨 일이든지 족집게처럼 맞히는 영험함이 생겼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의 발단은 곰보 조평달씨로부터 시작되었다.
조평달씨는 사람됨이 나빠서가 아니라 문중산을 관리하는 산지기란 직업도 있지만 노름판을 기웃거리고 술이 거나하면 질러대는 고함 때문에 ‘초삐’ 또는 ‘좆팽다리’로 쉽게 불리던 위인이었다.
그가 마을 사람들과 같이 서울 할매의 병문안을 갔는데 사립문을 들어서자마자 송장처럼 누워 있던 할매가 벌떡 일어나서 ‘부정 타는 저지레를 지른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오느냐’고 득달같은 호통을 쳤다.
그러자 같이 갔던 사람 중에 유독 조평달씨만 발이 땅에 딱 달라붙어 오도 가도 못 하였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떼어 내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겁에 질린 그가 며칠 전에 노루를 잡아 마을 사람들 모르게 혼자 먹었다고 실토를 하고 살려 달라고 빌면서 애원을 했다.
그제야 발이 떨어진 조평달씨가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쳤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쫙 퍼졌다.
그러나 듣기만 했지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영험하다는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은밀히 할매를 찾아가 타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의 신수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윗대 조상의 악상까지도 훤하게 알아맞힌다는 소문은 꼬리를 물고 풀모단, 황새말, 노당리 등 근동의 큰 마을로 퍼져 나갔다. 몸이 아픈 사람들도 할매의 눈빛만 보아도 병이 나아 버린다는 것까지도 합세하여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점괘를 시험해 보기 위해 거짓 신상을 말했던 대밭골 당골네는 입이 돌아가 버렸다는 소문도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을 가득 태운 대절버스 한 대가 동네 어귀에 들어왔다. 좁은 신작로를 따라 곡예 하듯 나타난 버스는 아이들에게는 처음 보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비로드 치마저고리를 입은 귀부인들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도회지 사람들이었다.
대절버스가 들어온 것이 도화선이 되어 서울 할매는 더 유명해졌고 아픈 사람에게 손만 가져다 대도 병이 낫는다는 신의 손도 되었다.
조만간 방송국에서도 찾아올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은 숙식을 마을의 집집마다 묵었다. 사랑채가 있는 집은 사랑채를 빌려주고 그렇지 못한 집들은 식구들을 한방으로 몰아붙이고 안방까지 내어 주고 방세를 받기도 했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자 질서를 위해서 번호표를 나눠 주면서까지 점을 쳐야 했다.
표를 나눠 주거나 순서를 정하는 것은 할매의 딸이 하였고 질서를 유지는 조평달씨를 포함하는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맡았다. 방만 빌려주던 사람들은 돈맛이 들어 밥까지 해서 팔기 시작했다. 무싯날에도 십리길 안강 읍내에서 동태와 두부 등을 사다 날랐다.
돌담에 나팔꽃 넝쿨이 우거진 집에 살던 점례 아버지는 도회지 사람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하여 검은 돗바늘이 듬성듬성 달린 돼지고기까지 끊어다 날랐다.
밥상머리에서 할아버지는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국회의원도 있고 대학교수도 있다고 했다. 보리 매상 때나 봄나물이 나올 때가 아니면 동전 한 푼 나오지 않던 가난한 마을에 돈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까만 고무신만 신던 내가 난생처음으로 끈이 있는 운동화를 신어 보았으니 나도 그 혜택의 영향권에 있었던 셈이다. 꾀가 많은 기출이 아재는 방을 두고도 없다고 버티다가 돈은 더 받아 낸다고 마을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서울 할매 집은 집대로 점괘가 나쁘게 나오면 복채를 내는 것만큼 액운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으므로 존당마을은 강아지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도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그 이듬해 한여름에도 마을안의 황톳길에는 풀썩풀썩 날아다니던 땅 메뚜기 대신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여기까지가 향수 속에 있는 내 유년기의 떠들썩했던 축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이 이야기의 서두에 말한 꾸며진 것이라는 주형이의 말은 나를 허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왜 그 일이 속임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는지 조심스레 말했다.
마을의 사당 앞을 지나는데 조평달씨가 사당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서너 명의 낯이 익을 듯 말 듯 한 사람들이 따라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거기에는 서울 할매의 딸도 있었으므로 사당 안으로 들어갔던 그 사람들은 버스를 끌고 왔던 보이지 않는 큰손에 의해서 포섭된 정보를 가져오는 끄나풀 일거라고 했다. 번호표를 사고도 순서가 따로 없었던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신상이 도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임으로 틀림이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았다.
흑백텔레비전에서 보던 멋진 박치기 프로 레슬링이 미리 짜 놓은 각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졌을 때 추억의 한쪽이 뚝 떨어져 나가는 허무를 경험했던 그때보다도 더 지독한 허무가 몰려왔다.
어찌 되었든 그 친구도 나처럼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났으므로 어떻게 그 축제가 마무리되었는지 서울 할매가 돈을 얼마는 벌었는지 그 뒤의 일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조평달씨도 서울 모녀도 나의 새 운동화도 향수 속의 소중한 기억들이다. 만약에 그것이 대절버스를 몰고 온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꾸며진 진짜 속임수였다면 내 유년의 소중한 서정이 너무 공허하여 더 깊은 허무 속으로 빠져 버릴까 두려웠다.
추억은 순간만 머물러 있는 기억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생각하는 모든 것의 시발지이며 끊임없이 시적인 감성을 만들어 내는 발전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