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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0m에서 박무택 대장 죽음을 확인한 오은선씨 “두려움에 정상 가는 외국대를 뒤쫓았다” 글 박성용 기자·사진 남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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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선 |
신의 영역으로 불리는 8000m급 고소에서 인간의 잣대로 만든 등산윤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풀리지 않는 산악계의 화두가 한 산악인 앞에 던져졌다. 감당하기 버거운 이 공안(公案)을 가슴에 안은 채 속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난 5월 20일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한 오은선(38세·영원무역·수원대OB)씨. 그에게 쏠린 산악인들의 관심은 그가 1993년 고 지현옥씨 이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두 번째 한국여성대라든가, 한국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험난한 북동릉 루트를 통해 마지막 캠프에서 셰르파 없이 단독으로 세계 최고봉에 올랐다는 것보다는 5월 18일 오후부터 20일 오전 동안 캠프5와 정상 구간에서 일어났던 계명대 원정대의 긴박했던 조난 현장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산악 웹진 히말라야즈나 산악단체들의 인터넷에는 그의 정상 등정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또 비난에 가까운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들의 글을 정리하면 ‘오은선씨는 왜 백준호 부대장과 함께 구조하러 가지 않았나’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보고도 수습할 노력은 않고 왜 정상을 올라갔느냐’로 요약된다. “이런 글들이 올라온 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후배가 귀띔해줘서 알게 됐다”는 오씨는 무척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건지고 싶은 절박한 심정과 사망한 대원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로 이해하고 싶다”는 그는 당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설명했다. 먼저 ‘백준호 부대장과 함께 왜 구조하러 가지 않았나’는 의문에 대해 그는 자신의 산소장비를 백준호에게 줘서 같이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5월 18일 캠프5에 도착해 텐트 안에 들어가자 ‘설맹에 걸려서 앞을 잘 볼 수 없고 손발이 시리다’는 박무택의 무전을 백준호가 받고 먼저 계명대 셰르파 누리와 제 셰르파 니마를 함께 보냈는데, 2시간 정도 지난 오후 6시 넘어 ‘우리 둘만으로는 힘들어서 구조를 못 하겠다’며 내려왔습니다. 이때 백준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 선배, 이번 등반을 포기해야겠다. 내가 올라가야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제 산소 한 통과 쓰던 레귤레이터를 주면서 ‘무리하지 마라. 2차 사고가 날 수 있으니까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내려오라’고 당부했습니다. ” 당시 캠프5에는 레귤레이터가 하나밖에 없는 상태였다. 계명대 2차 등정조는 1차 등정조의 장비를 쓰기로 돼 있어 백씨는 오씨의 장비를 갖고 니마와 함께 올라갔고, 나중에 알았지만 몇 시간 후에 누리도 따라나섰다. 그리고 다음날인 19일 현지 시각으로 오전 6시께 박씨를 만났다는 백씨와 배해동 원정대장의 교신이 있었고, 9시께 니마가 혼자 캠프로 내려왔다고 했다. 이때 니마가 산소장비(마스크와 레귤레이터)가 없어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다. 한편 캠프5에서 대기 상태에 들어간 오씨는 오전에 셰르파 4명을 구해서 보내달라는 백씨의 무전을 받았지만 캠프에는 니마와 오씨밖에 없었다. 다른 팀은 전날 밤에 정상을 향해 출발해 등반중이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팀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백씨는 이어 니마를 통해 산소와 따뜻한 물을 올려달라고 했지만 산소장비가 없어 둘 다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니마는 혼자서 갈 수 없다고 했다. 이때 캠프3에서 대기하며 ABC와 무전교신을 중계하던 이정면 대원한테 “배해동 대장이 각국 원정대의 셰르파들을 모아놓고 도움을 요청해 다른 팀의 셰르파 3명이 노스콜에서 출발할 것이고, 오늘 등정한 셰르파 중 2명이 내려가다가 도와줄 것”이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그리고 오후 2~3시께 캠프에 도착한 일본팀의 셰르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원들이 오기 전에 캠프 사이트를 설치해야 하고 오늘밤 정상을 향해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한편 박무택 대장이 먼저 내려 보낸 장민 대원의 행방이 묘연했다. 백준호 부대장도 올라가는 도중에 못 봤다고 해 장씨를 찾으려고 수소문했다. 캠프4에 한국대원이 있다는 말에 장민인 줄 알았는데 계명대 대원들의 얼굴을 아는 셰르파에게 확인한 결과 2차 등정조인 배두찬 대원이라는 걸 알고 장씨의 행방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 것.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도와주기로 한 셰르파들은 저녁이 되도록 노스콜에서 출발도 안 했고, 백씨하고는 이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백준호가 무전을 통해 누리가 사고현장에서 먼저 달아났다는데 저녁 7시가 넘어서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누리가 와야 산소장비를 받아서 올라갈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등반을 계속 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배해동 대장한테 상황이 이런데 등반을 계속 할지, 내려가야 할지 판단이 잘 안 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무슨 소리냐고. 은선씨는 은선씨 등반을 해야지 우리 때문에 그만 둬서는 안 된다’고 해 누리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누리가 도착하자 레귤레이터를 받고 20일 자정 무렵에 출발했습니다. 정상에 가겠다는 생각보다는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서 올라갔던 것입니다. 산소장비가 없는 니마에게는 여기서 기다리든지 무산소로 따라 오든지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배낭에 산소 두 통을 넣고 발걸음을 떼려고 하니까 너무 무거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소 한 통을 빼고 니마한테 나중에 올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갈 때까지 가야지, 올라가다보면 대원들을 만나겠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올라가다가 혼자 하산하는 셰르파을 만나 한국팀을 봤냐고 물었더니 저 뒤에 2명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말의 기대를 갖고 계속 올라가면서 헤드랜턴을 여기저기 비춰보며 대원들을 찾았지만 안 보였습니다. 퍼스트 스텝에서도 안 보였고, 세컨드 스텝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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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동릉 루트의 최대 난관으로 불리는 세컨드 스텝. 오씨는 이곳에서 하마터면 추락할 뻔했다. |
세컨드 스텝을 올라 능선길을 지나 커다란 바위에 올라섰을 때 누군가 고정 로프에 매달려 누워있더라고요. 무전으로 이정면 대원한테 옷 색깔과 배낭을 확인한 결과 박무택이라는 걸 알고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지 아세요? 그 상황에서도 눈물 때문에 동상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보고도 수습할 노력은 않고 왜 정상을 올라갔느냐’는 두 번째 의문에 대해 그는 살기 위해서 올라갔다고 말했다. “박무택이 매달려 있는 곳이 경사가 심한데다가 두렵고 무서워서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시신 사진을 찍는 것이 옳은 일인지조차 분간이 잘 안돼 나중에 욕을 얻어먹더라도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어 딱 세 컷을 눌렀습니다. 외국대들은 계속 저를 지나쳐 올라가는 중이고 혼자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본능적으로 외국대들의 행렬에 섞여 올라갔습니다. 한 시간 정도 오르니까 스카이라인이 보이더라고요. 그게 정상인 줄 알았는데 30분 정도 더 가야 되더라고요. 정상 직전에는 3~4m에 달하는 설벽을 올라야 하는데 고정 로프가 없어 다른 팀이 올라갈 때가지 기다렸습니다. 정상에 도착해서는 일본팀 셰르파들에게 사진촬영을 부탁하고는 바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 한국인의 정서상 유품이 될 만한 고인의 머리카락 같은 것이라도 가져올 생각은 없었냐고 묻자 그는 당시 충격과 공포 때문에 시신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오씨의 하산길은 말 그대로 사투였다. 하산을 시작한 지 몇 십분 만에 산소가 떨어져 보통 6~7시간 정도 걸리는 캠프5에 11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그는 생사를 넘나들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주 눈물을 훔쳤다. “능선길에서 이미 산소가 떨어져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대들은 힘들어하는 저를 격려해주며 추월했습니다. 세컨드 스텝에서는 중간이 끊어진 고정 로프인 줄 모르고 하강하다가 다른 팀의 셰르파가 소리치는 바람에 겨우 트래버스해서 내려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로프가 1m 정도 남은 상태였더라고요. 산소통 교환 장소에 도착하자 셰르파 하나가 2시간 정도 남은(약 50bar·1시간 30분~2시간 사용 분량) 산소통으로 갈아주더라고요. 상태는 조금 나아졌지만 외국대들을 놓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정신없이 쫓아내려갔습니다. 눈보라는 치고 외국대들에게 계속 추월당하고 길 찾기도 힘들어 그저 발자국만 따라갔습니다. 능선길 끝나는 지점에 오자 저 아래 캠프5가 운무 속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했습니다. 이미 저를 추월할 사람들은 다 했고 제 뒤에는 몇 사람밖에 안 남았습니다. 앞서 내려가는 다른 팀들에게 니마를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외국대들은 제가 걱정되는지 가끔 뒤돌아서 불을 비춰주며 내려갔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라고요. 캠프5를 불과 몇 십 미터 앞에 두고 더 이상 갈 수 없어 주저앉은 채 니마를 외쳤습니다. 나중에는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 누웠는데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더라고요. 박무택의 마지막 표정이 왜 그렇게 평온해 보였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이런 생각을 하며 깜빡 잠이 들었다가 어느 순간 눈이 떠져서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앉았는데 불빛 하나가 올라오더라고요. 얼마 안 되는 거리이지만 너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우습게도 여기가 8000m가 넘는 고소인 줄도 모르고 좀 뛰어오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 불빛은 니마가 아닌 스위스팀의 사다(셰르파 대장)인 가르마라는 셰르파였습니다. 니마는 이미 ABC로 하산했다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제 배낭을 메고 저를 부축하며 내려간 가르마는 텐트 안에서도 저를 돌봐주었습니다. 아이젠을 벗긴 다음 침낭을 덮어주고 나서 산소장비를 설치하고는 꼭 산소를 마시며 자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가르마가 아니었으면 저는 아마 내려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 오씨의 생명을 구해준 가르마는 다음날인 21일 아침에도 뜨거운 밀크티를 한 그릇 갖고 왔다. 오씨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버너에 불을 붙여 무전기 배터리부터 녹였으나 교신이 잘 안 됐다. 하산중에는 3~4m 정도 가다가 주저앉고 기어가고 해서 저녁 6시께 ABC에 도착했다. “혼자 살아내려 온 것이 죄인 같아 대원들과 유가족들을 어떻게 보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특히 대원 부인들은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라며 저를 잘 대해주었습니다. ” 에베레스트 등반경험이 있는 산악인들은 “오씨가 8300m에 위치한 캠프5에서 레귤레이터를 다른 사람에게 줬다는 것은 등반을 포기한 거나 다름없으며, 그 고소에서 산소 없이 30시간 넘게 머물렀다는 자체가 이미 구조대기에 들어간 상태로 봐야 한다”면서 “박무택씨의 시신이 있는 8750m는 자기 몸 하나도 추스르기도 힘든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현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오씨의 행동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몸과 마음 모두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겪고 있다. 온몸이 뒤틀리고, 허리부터 무릎 사이가 너무 아파 밤에 잠도 못 자고 울 때가 많다는 그는 “어두컴컴한 지하도를 내려가면 쇼크 같은 증세가 오고, 인터뷰를 하는 날에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호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아무리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유족들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세 사람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어서 슬픔을 딛고 기운을 차리시길 빕니다.” |